[펌글]“너무나 절박한데, 넌 못 느끼니?”
[색부들, 농사짓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누구를 위한 것일까? | ||||||||||||||||||||||||
“너무나 절박한데, 넌 못 느끼니?” | ||||||||||||||||||||||||
요즘 풀들이 많아 잡초들을 주요 반찬으로 하고 있는 내 평소의 끼니와는 달리 엄마를 간병하는 날은 병원 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 다섯 가지 찬에서 한 가지는 육식이다. 오늘은 불고기가 식단에 올랐다.
채소 농사로는 힘겨운 상황에서 다양한 수입을 고려하면서 생명주기와 약간의 ‘돈’의 순환으로 어쩔 수없이 선택한 소규모 축산. 그 축산에 대하여 평소 원칙에 어긋나지만 타협을 하고 만 나는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육식을 가급적 배제하는 것이 전체 순환체계에서 갈등과 긴장이 작다. 육식을 배제함으로써 사육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식량을 가축에게 먹임으로써 ‘고부가가치’를 생산한다는 ‘비용논리’는 결국 인간과 자연을 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저 농가에서 몇 마리 정도만 키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인간이 먹을 곡식을 생산하는 땅에 사료용 곡식을 심어야 하는 일은 식물 바이오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곡물 생산량의 부족을 초래하는 일에 보탬을 주는 격이다. 바이오 에너지는 목숨을 죽이는 일 200Km 주행을 위해 한 사람이 1년 먹고 살 곡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수많은 목숨을 일거에 죽이는 일이다. 차를 운행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현재의 생산구조에서 불가피하게 차를 사용하는 사람과 편리함에 젖은 사람들, 돈이 많은 사람들일 것이며, 곡물가 상승에 따라 식량을 사먹지 못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일 게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제일 먼저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질 좋은 쇠고기는 돈 많은 사람이 사먹으면 되는 일이고 여전히 육식이 ‘에너지의 필수’라고 생각하는 국민 대다수는 그래도 값싼 쇠고기를 사먹게 될 것이다. 뼈까지 우려먹는 사골국을 좋아하는 국민은 미국산 뼈를 우려먹게 될 것이다. 모든 병균과 항생제 덩어리가 뼈까지 박혀 있는 것을 우려서까지 먹는 사람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일 게다. 돈 없으니 싼 것이라도 영양보충을 해야 한다는 ‘어리석은’행동을 시급히 교정되지 않는 한 그럴 게다. 병원에서조차 그런 고기와 식재를 사용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단백질 보충재로 콩을 먹으면 되는데, 콩조차도 바이오 원료로 사용되기에 대두 가격도 25% 이상 올랐으며 70%까지 육박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럼 유전자 조작 식품들이 본격 수입이 되는 5월부터 보다 값싼 것을 찾는 것은 ‘대량생산 기업’일 것이며,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대다수 국민들이다. 의료체계를 정부가 앞서서 악질적으로 바꾸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음식이 질병을 불러오고 악질적인 의료체계 속에서 ‘생명’을 포기하는 누구인가? 가난한 우리들은 진공의 공간에서 죽임을 당한다.
거절한 대가로 미국의 보복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보복들이 쿠바의 경우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자급체계’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한국은 어떠한가? ‘국민의 생명은 오간 데 없이’ 우유를 어린 세대들에게 확산시켰다. 현재의 나이 42세 이하부터는 우유급식 세대로 ‘키도 훨씬 크고 성장도 빠른’ 세대가 시작되었다. 성장호르몬제로 키운 젖소 소젖의 큰 역할이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알 수 없는 질병들이 만연하는 세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 한 끼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기계를 사용하는 농생물 생산에서 가공, 유통 그리고 가정에서 음식을 만드는 과정, 음식쓰레기 폐기에 이르기까지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을 계산하면 엄청난 일이다. 가히 상상이 되는가? 우리가 먹는 한 끼, 엄청난 이산화탄소 기후온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가? 농사꾼은 농사를 통해 체감한다. 지난해 10월경에 수확하는 단작작물일 경우 평상시 수입에 비해 많아야 3/2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수입대비만 생각한 일이다. 기후온난화로부터 시작하여 급기야 식량전쟁에 이르지 않았는가? 식량전쟁을 체감하는가? 아마도 ‘식품산업’에서는 체감할 게다. 식재비가 벌써 30%를 육박하고 있으니까. 소비자들은 체감하는가? 밀가루, 콩, 옥수수 등을 원료로 하는 소비품목이 올랐다. 그것만 올랐는가? 원유가 상승으로 석유산업에 근간한 모든 제품들이 올랐다. 모든 비용들이 급등을 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하는 짓이야 매번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땅과 숲 자연을 파헤쳐 공장을 만들고 대운하를 만들고 석유를 원료 하는 모든 근간의 ‘산업’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 상황에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우리 몫으로 떨어졌다. 누구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우리의 몸을 팔아서 몇 푼 벌어봐야 우리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화폐’로 되지 않는다. 허리띠를 졸라도 우리의 질병을 막을 수 있는 일은 없는 듯하다. 자급하고 자족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지금부터 고민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변의 농토를 파헤치는 일에 저항하고 주변의 모든 땅은 우리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땅으로 바꿔야 한다. 먹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 육식 중심의 식단에서 곡물과 채식 중심의 식단으로 바꾸고, 마트나 식당에서 먹는 음식이 아닌 집에서 직접 요리해먹는 식단으로 바꾸어야 한다. 가정에서 해먹는 요리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단순식재, 단순요리법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차를 이용하는 시간을 줄이고, 전기사용량도 줄이고 가급적 석유산업에 근간한 불필요한 것들을 줄여야 한다. 아이들 문화도 땅에서 놀 수 있는 문화로 바꾸어야 한다. 기계제품에 빠져봐야 비용만 늘어갈 뿐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다. 돈이 드는 일에 목숨 걸지 말고, 돈을 버는 일에 목숨 걸어 봐야 그 돈으로 메울 수 없는 간극은 더욱 더 커져간다. 생태, 정치, 삶 ‘생태’라는 것은 삶의 연쇄반응이다. ‘정치’란 지금-여기 삶의 방식의 전환을 꾀하는 일을 먼 훗날로 미루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도 ‘진보’스럽지도 못하고, ‘생태’스럽지도 못한데 무슨 정치인가? 정치란 정치가만의 몫이 아니다. 정치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한, 생활정치를 해야 한다. 자신의 생활방식의 변화부터 시작하지 않거나 방기하는 것은 기만이다. 권력이 바뀐다고 사회문화가 한 순간에 변화되지 않는다. 아직도 벼랑에 서있는 절박함을 모르는가?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절박함을 말해야 소용없는 일이다. 오로지, 우리가 기존 도시 방식의 삶을 폐기하고 저비용의 삶의 방식을 도모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일이다. 도시에서 농부로 사는 방법을 배우든가, 농촌농부로 사는 것. 마을 단위에서 약간의 자급이라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가능한 내 손으로 직접 의식주의 알뜰한 생활문화를 만들어라. 자연과 땅을 빼앗으려는 모든 행위에 대해 저항하라.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을 조금이라도 여는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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