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밤에 ..
7월이지만 아침 저녁 그리 덥지는 않지만
원래 열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누구나 다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집까지 15분 여 이상 걸어오면 몸에 땀이 베인다.
게다가 옜날식 2층이라 계단이 높고 가팔라서 늦은 밤 귀가하시는 엄마의 손을 잡아드려야 할 정도다.
계단을 오르며 휘익 화분의 식물들을 보니 죄다 더운 기운에 잎들이 시들어 있었고,
오후에 널어두고 나간 이불 홑청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었다.
점심으로 끓였던 김치찌게 냄새가 약하게 섞인 채 후욱 .. 하고 얼굴을 덮치는 더운 공기가
숨이 살짝 머추고 얼굴도 살짝 찡그러졌다.
후다닥 겉옷을 벗어두고
불도 켜치 않고 안방 창문과 거실 창문을 서둘러 열었다.
이불홑청을 걷고, 모아둔 설거지물을 조심스레 가지고 나왔지만 .. 한그릇쯤 쏟은 듯 ㅡ.ㅡ;;
식물들의 목을 축여줬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오이덩쿨에 꽤 여러개의 작은 오이가 열리고 노오란 꽃도 여러개 피었다.
사랑초와 같이 있던 무슨(?)난을 옮겨심었는데 다행히 죽지 않아서 고맙다.
벌레에 대한 익숙함이 없어서 괴롭다.
전같지 않게 모기에도 잘 물리고 .. 여름이면 빛으로 몰려드는 벌레를 피해 현관을 닫았다.
후다닥 샤워를 하고
되살아난 컴터로 6/30에 있었던 선전전 사진을 올리고 있는데
엄마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났다.
대문을 열어드리고,
가방을 받아들고,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이 계단 때문에 이사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사갈 생각을 했었는데 .. 벌써 4년째다.
현관도 안들어가시고 화분들을 둘러보시더니
전에 비해 열매를 맺지 않는 석류를 보며 걱정하시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어린오이를 보시고 기뻐하시고 ..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우유 500mml 하나와 냉면용 양념을 한 그릇 꺼내셨다. 아주 어렸을때처럼 .. 엄마의 가방에서는 그렇게 간식꺼리, 반찬꺼리며 빨랫거리, 먹꺼리가 나왔다. 식당과 집이 같이 있었던 20년은 빼고 .. 가게를 따로 두게 된 다음부터는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종종 들고 오셨다.
엄마가 샤워를 하시는 동안 PD수첩을 틀어주고 있었는데
올리다가 만 사진이 떠올라 컴터앞에 앉아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후 욕실에서 나오시던 엄마 왈 ..
"PD수첩은 혼자 말하고 있네 ..", "그러게 .." ..
엄마와 말이라도 한 마디 나눌 시간은 거의 한 밤중밖에 없는 탓에
될 수 있으면 엄마가 잠드실때까지 옆에 있는다.
TV를 보든 수다를 떨든 ..
거의 11시가 훨씬 넘어서 오시는 편이라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시사프로그램, 뉴스, 토론 등이다. 후다닥 지나가는 자막을 읽으실 수 없어서 요약을 해서 설명을 해드리기도 하고, 무슨 이야긴지 종 잡을 수 없을 때 정리해서 이야기도 하고 .. 하지만 거기엔 가치판단이 따르는지라 ... 종종 다투기도 한다.
어제는 민변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중인데
'호주제'가 나오길래 ..
" 엄마, 그건 좀 말이 안되지 않아? 어떻게 할아버지 아버지가 없다고 손자가 가족의 주인이야?... " ..
그러나 어머니 생각은 다르셨다.
다들 그렇듯이 .. "남자가 ..." "장손이 ..." ..
나도 나름 화가 나고, 엄마도 화나신듯 하고 .. 부글부글 ..
그래서 예를 바꿨다.
" 요즘 이혼 많이 하잖아 .. 절반이 이혼을 하는데 ..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잖어. 남자든 여자든 .. 그런데 원래 결혼해서 낳은 아이를 한명씩 키우기로 했단말이야, 근데 ..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성이 같은데 .. 여자는 자식 성이 다르단 말이지 .. "
" 당연히 그래야지 .. 나중에 커서 성이 달라지면 형제자매끼리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할라구 ... 망쪼지 .."
" 헐~~ , 왜 그렇게만 생각해 내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했는데 아이를 데리고 가고 다른 아이를 낳았는데 성이 다르면 얼마나 차별을 받겠어 .. "
" 니가 왜~~" ...
이래서 엄마는 다시 열 받으시고 .. 누으시고 ..
나의 설득도 열매를 맺지못했다.
역쉬 .. 엄마를 설득시키기가 젤루 어렵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 결국 많은 문제들에서
오랜시간 한 밤의 논쟁과 토론과 설득 끝에 변화된 부분도
꽤 있다.
하지만 .. 절대 변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속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지 .. 아니면 수십년 넘게 이어온 당신의 생각들이 부정되는 것에 화가 나시는 건지 ..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잘못됐다고 생각되시는지 .. 사실 모르겠다.
꼭 잠이 드실 즈음 .. 엄마는 마른 기침을 하신다. 식당이란 게 .. 주구장창 피우는 담배연기에 엄마의 기관지가 나빠지신 거 같고, 가래도 끓게 되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물을 드리거 .. 물을 드신 후에는 앉아서 조신다. 누으시면 자꾸 기침이 나서 힘드시다고 한다. 당신은 목이 막혀서 죽을 꺼 같다신다...
나도 요즘 길거리를 걸어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가재미 눈을 뜨게 된다. 가만 서서 피우면 피해갈 수 있는데 바른 걸음으로 앞에서 걸어가며 피우다니 .. 매너를 가르쳐야 할까? 쩝 ..
고생하시던 감기는 나은거라 생각했는데 .. 긴 감기 끝에 기관지가 상했는지 자극적인 음식들을 잘 드시지 못한다. 앉아서 졸다가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시기를 몇 번 반복하시다가 잠드셨다.
옆에 앉아 채널을 돌리는데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했다. 흡입력이 뛰어나다. 그 그림에 대한 시 또는 시민군에 적극 가담하며 혁명을 함께했던 여성에 대한 시를 낭송하는데 오~~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와우~~
잠을 자던 어머니가 너는 안자냐 .. 하신다.
졸린데 .. 눈은 자꾸 졸린데 .. 이거 다 보구 자려구 ..
둘 다 잠결에 대화를 나눈다.
엄마 .. 저 프랑스란 나라에서는 여러번 .. 지금 이명박이처럼 독재하며 지 배만 불리는 귀족과 왕을 없앴거든. 대신에 지금의 국회같은 의회를 만들었는데 .. 저 사람들이 저렇게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 투표도 할 수 있게 �고, 자유롭게 살게 �고, 5% 부자들이 아니라 95%서민들의 힘이 그것을 만들었고 ...
그러는 와중에 프로그램은 그 그림의 구체적 의미,
그림의 배경이 되는 화가의 이력과 환경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이후의 민중혁명에서의 자유의 여신에 대한 의미를 다양하게 설명하고, 혁명의 다양한 면을 읽어준다.
우리 촛불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고,
촛불과 함께 진행되어 진 새로운 민중운동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글을 쓰기 전 .. 이런저런 자료를 모으는 중이었다.
가톨릭 사제들, 수녀님들, 스님들, 목회자들의 모습을 모으고 있었다.
어쨌든 19세기 초에 그려진 그림의 의미를 20세기에 이어지는 혁명들 속에서의 의미를 이야기 하고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21세기 초 우리의 자화상과 겹쳐보며 TV전원을 껏다.
엄마, 잘 주무세요 ..
그래, 우리 딸도 잘자라 ..
졸린 눈을 비비고 일기장을 챙겨 침대에 누웠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싶었는데 넘 졸려서 그냥 잤다.
시끄러운 모닝벨 소리에 잠을 깨니 .. 9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