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9/9 우리를 잡아가라
‘만인 선언, 만인 공동회의’ 준비하며…"9일, 우리를 잡아가라" | ||||||||||||||||||||||||||||||
촛불 탄생 실화와 배후 & 우리의 꿈 제2의 촛불은 비정규 철폐 투쟁으로 | ||||||||||||||||||||||||||||||
“한가위 전에 기륭, KTX, 이랜드, 성신여대, 코스콤, GM대우, 도루코, 콜트콜텍, 하이텍알시디코리아, 재능교육, 광주시청비정규직… 그 모든 비정규 노동자들을 일터로 보내줄 수 있다면… 890만 비정규노동자들에게도 눈물바람 없어도 되는 따사로운 한가위가 될 수 있다면.” | ||||||||||||||||||||||||||||||
구로동 후미진 골목과 촛불
며칠 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함부로 생각하고 재단했지만, 하루 나갔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반성했다. 그때부터 구로동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난 저녁 10시 경이면 늦더라도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나도 광화문 네거리를 밤새 떠돌다 먼동이 터오를 때면 다시 돌아왔다. 때로는 해산이 끝나고도 무슨 미련이 남아 프레스센터 앞 노상에 앉아 있다 돌아오기도 했다. 잠시 눈 붙이고 나면 다시 기륭으로 향했다. 그렇게 2008년 봄과 여름이 가고 가을 초입이 되었다. 절반은 기륭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한 몸이 되어 버렸다. 5월 11일 하이 페스티벌 마지막 행사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 조명탑에 그들이 오를 때, 5월 26일 다시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오를 때, 다시 6월 11일 공장 옥상을 점거하고 전원 무기한 끝장단식을 들어갈 때, 그리곤 이제 단식 83일차가 되는 오늘까지 그들, 기륭 동지들과 한 몸이 되어, 편파적으로 움직였다. 기륭 동지들을 닮아 시시때때로 눈물나던 날들이었다.
목숨 건 투쟁은 동지를 불러모으고 고용을 받아줄 공장이 없다는 얘기 앞에 우리 쪽 사람들도 오히려 수긍하는 쪽이었다. 더더욱 지금의 최동렬 회장은 기륭을 인수한 지 6개월이 채 안되는데 왜 자기에게 모두 책임지라고 하냐고 했다.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우리 쪽 사람들도 눈치를 살폈다. 거기다 남은 조합원들도 생계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빼면 10명이 전부였다. 위로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 투쟁이었다. 몇 명이 외롭게 지켜왔던 농성장엔 이제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태반이다. ‘대학생 릴레이단식단’이 들어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 움직인다. 10개 단체나 모임들이 주도해서 스스로 ‘기륭을 사랑하는 네티즌연대’를 만들고 독자적으로 사업들을 만들어 간다. 근자엔 기륭의 주거래사인 미국 시리우스사 공략을 위한 원정투쟁단 보내기 기금 모금 사업을 펼치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1억 짜리 광고를 네티즌 모금을 통해 달성해 보겠다고 한다. 가히 제2의 기륭 공대위가 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 96차와 103차, 그리고 105차 촛불문화제가 기륭 공장 앞에서 열렸다.
광화문 촛불의 수수께끼
하지만 구체적으로 광화문 촛불운동을 처음에 시작했던 사람들을 만나자 의문이 풀렸다. 우연히 4월말 처음 오프라인 집회를 기획했던 네티즌들을 만났다. 촛불이 튀어나온 것은 4월 말이었지만, 나름 지난한 준비가 있었다. 처음 아고라 토론방을 중심으로 광우병 소와 관련된 문제 제기를 꾸준히 올리는 이들이 있었다. 금세 여론이 형성되었다.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문제 제기였다. 오프라인에서 갈 곳을 딱히 찾지 못한 수많은 민주 시민들이 토론과 소통에 참여했다. 자연스레 까페 모임들이 제안됐고, 너댓개의 소통 까페들이 조직되었다. 네티즌들은 이 까페 공간을 통해 다양한 자체 학습과 공동 행동들을 실험했다. 리플 달기부터, 사이버 리본달기 등등. 어느 정도 조직력이 형성되자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동호회 까페들 조직에 들어갔다.
촛불 탄생의 기원 '실화'
목적의식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결집해 있는 생활 관련 까페들에 접근해 갔다. 유명한 패션까페, 음식까페, 유명 연예인 팬까페들이었다. 그곳에서 읽을만한 글들을 꾸준히 올리며, 베스트 만들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과 함께 다시 초보적인 수준부터 사이버 공동행동을 실험, 조직해 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상에서 관계와 생동하는 삶을 느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밥상머리에서조차 죽음을 느껴야 한다는 현실에 분노했다. 수위가 점점 높아져 위력적인 사이버행동들이 진행되었다. 이제 거리로 나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날짜를 정하고, 전체 까페들에 공지를 올렸다. 4월 26일,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조직 확인을 해보니 1만에서 3만이 확인되었다. 누가 주역이 아니었다. 모두가 놀라면서 2008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도 유령이 아닌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모두는 평범하다는 사실. 결핍이 그리움과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존중을 연다는 믿음을 가졌다. 서로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사실. 그런 소외된 현실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 소외되지 않는 만남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광화문에서 갈 곳 없는 사람들 내용적으로도 같다. 둘 다 일부 자본들의 초과 착취를 위해 기획된 일이다. 그래서 촛불이 막 시작되던 5월 11일, 서울 시청 광장 조명탑에 올랐을 때 허공에 내걸은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썼다.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라” 우리가 광화문으로 나선 수많은 연약한 촛불 소녀들, 촛불 시민들을 함께 동지로 삼고 도울 수 있는 길은 촛불들의 배후에는 비정규직 투쟁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이었다. 6월 촛불의 배후에서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물론 주체적 준비는 충분치 않았지만 기륭 동지들과 기륭 공대위는 끊임없이 그런 입장과 의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광화문 투쟁만큼이나 절박하고 끈질기며, 완강하게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언젠가 광화문 촛불들이 정신 머리 없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운동권들 탓에 동력을 잃고 실망하며 갈 곳을 잃을 때 작은 곳이지만 올 곳이 있다는 것을 만드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광화문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론 그런 씁쓸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한켠에 남는 것은 이 시대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촛불을 지키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마음이 강건한 숨은 일꾼들이거나, 정말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기쁘게 기륭에서는 이 두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껏 여러 도움들과 나눔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광화문 촛불의 마지막 지킴이들이었다. 가슴 아픈 건 후자의 분들이었다. 우린 수많은 운동 과정에서 얼굴은 다르지만 성정은 말할 수 없이 착한 그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의식과 생활의 간극 사이에서 안주하는 삶을 잃어버린 수많은 이들. 말하자면 허세욱 열사와 같은 분들이었다. 그보다도 어렵고 외로운 삶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KBS 앞에서의 노숙도 힘들어졌을 때 이 분들이 기륭 농성 천막에서 며칠을 기거하기도 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는 분들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농성장 앞 밥집 아주머니에게 얘기해 두었다. 누구든 식사를 달라고 하면 묻지 마시고 밥을 내주시고 수량만 적어놔 달라고. 그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네티즌 사이버 행동이 언론보다 더 큰 힘 돼 그들은 기륭 문제를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투쟁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륭의 주 거래사인 미국의 시리우스사에 대한 항의 메일 조직, 자발적 릴레이 동조단식 조직 등은 그간 기륭 투쟁이 사측과 사회를 향해 해왔던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타격을 넘어 자본 타격의 실마리를 풀어 주었다. 그 분들은 광화문의 상징들을 기륭으로 불러 주기도 했다. <아프리카 TV>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나흘간에 걸쳐 기륭 농성장에 상주하며 일상을 네티즌들에게 송출해 주었다. 네티즌들을 따라 <칼라TV>가 들어오고, '촛불다방'이 들어오고, '다인이 아빠' 차가 들어왔다. 며칠 전에는 80그릇의 삼계탕을 끊여 주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고, 만남이고, 투쟁일 뿐이다. 투쟁이 이어져 나간다면, 이런 만남은 지속될 것이다. 투쟁이 사그라지면 만남도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그라져도 좋을 것이다.
기억, 만남 그리고 투쟁
필요한 것은 믿음이며, 삶일 뿐이다. 삶이 있다면 만나질 것이고, 삶이 없다면 쓸쓸해질 것이다.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시적으로 말해 버리고 말고 싶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투쟁이라고. 맨날 박터지며 소리지르며 싸우기만 하는 투쟁만이 아니라, 이 부정한 구조와 체재와 제도를 넘어서는 꿈을 꾸는 운동이라고. 제2의 촛불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통해 만들어 보자고 얘길하고 있다. 촛불 시민들에게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다시 노래하자고, 그 선봉에 890만 비정규직들과 이 시대의 양심들이 함께 떨쳐 일어서자고 호소하고 있다. 2008년 촛불로 나섰던 수많은 이들을 유령으로 만들고, 신화화, 우상화 시킬 필요없다. 그들도 890만 비정규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일상이 죽음으로 점철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나왔던 것이다. 견결한 이들을 만나고 싶어 나왔던 것이다. 반성하며 나왔던 것이다. 정말 헌신적이고 살아 있는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에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목청껏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쳤던 것이다.
실망한 촛불에게 말걸기 하지만 새로운 정세,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운동의 계기, 지점을 만들어가는 운동을 안 보이는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 87년 6월 21주년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많은데, 왜 87년 7~9월을 만들자는 목소리들은 소수인가? 왜 6월의 이데올로기에 7~9월이 밀리는가. 왜 소수 정규 세상에 다수 비정규 아픔들이 밀리는가? 차라리 실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조금은 더 양심적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실패는 아니라는 것 쯤이야 모두가 알겠지. 타협하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과 대지가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다.
제발 우리를 쥐잡듯 잡아가다오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탁한다. 제발 9월 9일 서울역 앞에서 890만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나서는 우리를 쥐잡듯 잡아다오. 제발 한번만 더 우리의 동지, 우리의 배후가 되어다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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