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김예슬 선언 '

바다에 내리는 비 2010. 3. 24. 18:48

김예슬씨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다리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우리들의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나는 25년간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큰 배움없는 '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대학을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겐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생각한대로 말하고 말한대로 행동하고 행동한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탐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두고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

 

 

 

더하기>

지난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가 대자보를 통해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자발적 퇴교 선언, 아니 '인간 선언'이었다. 경향신문(3월11일자 1면) 보도로 이 사실이 알려졌고, 인터넷 공간이 들끓었다. 보수신문들은 짐짓 외면했지만 그렇다고 김씨의 '작은 혁명'을 가릴 수는 없었다. 20대들이 대학과 자본의 탑에 균열을 내는 '돌멩이'가 되겠다며 앞다퉈 나서기 시작했다. 인터넷포털 다음에 생긴 카페 '김예슬 선언'(cafe.daum.net/kimyeseuls)은 이들이 구축한 대표적 진지(陣地)다. 지난 15일 개설된 이 카페는 갓 1주일을 넘겼지만 벌써 회원 수가 600명을 넘어섰다. 카페지기 '꿈꾸는 린'은 "이제 우리가 김예슬이 될 차례다. 우리 이대로 돌아서지 말자. 작은 돌멩이인 우리들이 함께 바위가 되자"고 밝히고 있다.

 

20대들은 카페에서 대학을 고발하고, 자본을 고발하고, 사회를 고발한다.

 

닉네임 '모두의 리그'는 1학년 1학기 경제학개론 교수의 첫 오리엔테이션 때를 기억해낸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Capitalist(자본가계급)와 Labor Class(노동계급)다. 차이점이 뭔지 아나? 이런 거다. 내가 은행에 간다. 사람들이 1층에서 줄서가며 번호표 뽑고 찌질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2층 VIP실로 올라가 여유롭게 커피 마시면서 일 본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Capitalist가 되어라."

 

'열정의사람'도 비슷한 사례를 든다. - "한 교수님이 이렇게 강의하시더군요. 여러분은 상품입니다. 스스로의 상품가치를 높여야 하죠. 각 기업마다 원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기업이 원하는 상품으로 만들어가십시오."

 

'로빈'은 자신이 과외를 '때려친' 이유를 털어놨다. - 고3 학생을 과외할 때였는데, 학생의 공부시간과 잠자는 시간,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자유시간)을 함께 계산해봤다. 1주일 가운데 8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 애들 죽이는 짓을 하고 있다는 충격에 모든 과외를 다 접었다고 했다. 물론 그만뒀다고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과외 말고 다른 방법으로 밥벌이 하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으니까.

20대는 김예슬씨가 언급했던 '대학과 기업, 국가의 큰 탓'을 묻는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자신들의 작은 탓'도 묻는다. "대자보 읽는 내내 마음이 숙연했습니다. 저도 대학교 3학년생이지만 이만큼 깊은 성찰을 해보지 않았기에…. 그저 세상과 타협하려고만 했기에…. 더욱 부끄럽고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명 아주 오래 전에는 어른이 되면 옳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릴 적 꿈은 물거품이 되어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르마조)

"제 꿈은 잃어버린 채 학점에 매달리고 스펙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있네요. 저는 예슬씨만큼 용기있지는 못해서 자퇴까지는 못할 거 같아요. 그러나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도전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purplerain)

"가슴 깊이 김예슬을 지지하고 그와 이념을 같이하면서도, 나의 현상으로 돌아오면 이리저리 판단을 잰다."(mann)

 

지난 10일 김예슬씨가 자발적 퇴교를 선언하며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 붙인 대자보를 한 학생이 읽고 있다. 김정근 기자카페는 20대의 고통을 몰랐거나, 혹은 알면서도 외면했던 기성세대들의 자성의 장이 되기도 한다.  지천명의 나이라는 최흥집씨는 "나에게 날카로운 돌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내 자식들보다도 작은 아이가 사회를 향해 일성포효를 하고 있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용서를 빈다"는 글을 올렸다.  내년에 대학 갈 딸을 뒀다는 '열공줌마'는 "sky에 어떻게든 밀어넣어보고 싶어 아이를 다그치는데 정작 무엇을 위한 건지요. 내몰리는 내 아이가 안쓰럽고 대학에서 버거운 젊음이 가슴 아프네요"라고 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김예슬씨의 자발적 퇴교에 대해 "줄 세우기에 대한 20대의 분노가 임계치에 도달했다는 의미"라며 "비등점에 이르러 물이 끓어오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최근 무상급식 문제가 지방선거 핵심 이슈로 부상한 것과도 연결지어 설명했다.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 '다른 질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김예슬씨를 응원하기 위해 16일 열린 문화제에서 록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김창길 기자김예슬 선언 이전의 20대는, 김예슬씨가 대자보에 쓴 대로 '빛나는 G세대'이거나 '빚내는 88만원세대'였다. 물론 전자에 속하는 건 선택받은 극소수이며 대부분은 후자에 속한다는 걸 20대도, 기성세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현실이 남루하기에 모두들 모른 척했을 뿐이다.

그러나 김예슬씨의 자발적 퇴교 선언으로 현실은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예슬씨의 말처럼 "작지만 균열은 시작된" 것이다. 물론 당장은 김예슬씨가 탑에 낸 균열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대자보는 벌써 사라졌고, 세상은 예전과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원래 균열이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다. 균열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엔, 이미 탑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니까. 그땐 손을 써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김예슬씨의 대자보는 이렇게 끝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 경향신문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예슬 선언’은 어떤 의미인가.“

듣는 순간 심장이 찔렸다. 고통스러웠다. 며칠 동안 잠도 오지 않았다. 뜨거움을 느낀 이유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대학 문제는 우리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자리 문제와 교육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많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희망도 느꼈다. 그 선언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았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과 (선언의 의미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낀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텐데… 일상으로 돌아오면 속도와 압박, 경쟁에 묻힐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대로 묻혀서는 안된다는 간절함에 카페를 만들었다. 카페에서 말하는 것도 저항이고, 듣고 생각하는 것도 저항이다. 무언가 상상하는 것도 저항이다.”

- 주변의 20대는 김예슬씨의 자발적 퇴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나.

“우리는 한번도 자기 힘으로 구조를 바꿔보겠다는 상상을 못한 세대다. 길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시장과 국가와 대학 안에서…. 우리에겐 자신이 ‘잉여인간’이라는 무력감이 있다. 내 손으로 밥을 벌어먹을 수 없고, 언제까지 계속 달려야 되는지 불안하고, ‘나만의 이야기’가 없다는 억울함도 있다. 그런데 김예슬씨의 선언이 있은 뒤, 가슴이 뜨거워졌다, 용기가 생겼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으로 뭔가를 이야기한다는 게 깊은 울림을 줬다. 기득권을 버린다는 데 대해 ‘사회적 자살’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마음이 아팠던 건, 일부이긴 했지만, 꿈을 찾아 노력하는 이들을 욕되게 하느냐, 그래서 어쩌란 얘기냐…는 반응이었다.”

- ‘88만원 세대론’이 20대를 일정 부분 규정한 측면이 있다.

“20대에게 ‘짱돌을 들라’고 하는데, 손발 다 묶어놓고 짱돌 들란 말인가. 우리는 ‘88만원 말고 188만원 달라’는 게 아니다. 등록금 깎아달라는 것만도 아니고, 국가 복지로 맘 편히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대학과 기업과 국가 구조 속에서 한 줄로 세워지는 게 싫다는 거다. 어른들이 하는 말에 나를 내맡기는 게 아니라, 억압의 핵심을 스스로 알고,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찾고, 내 손으로 내 밥을 정직하게 벌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거다.”

- 본인은 어떤 20대인가.

“21년간은 별다른 회의 없이 살았다. 나름대로 착한 딸이라 부모님이 만족하실 만한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입학한 뒤엔 학점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내가 (부모님에 의존하는) 인큐베이터 인간인가? 내 삶을 헤쳐나갈 능력이 내 안에 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부모님도 나 때문에 희생하고, 나한테 매달리시고…. 그렇다고 내가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동아리 활동 하고, 책도 읽으면서 길을 찾았다.”

- 대학 교수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대자보를 썼다.

“문제의 핵심이 교수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은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스승이다. 우리가 인생을 걸고 큰 물음을 던진다면, 그분들도 우리를 이끌어줘야 한다.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는 사정은 이해하지만, 최소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2008년 촛불집회 때가 생각난다. 집회 나가느라 수업을 빠졌더니 담당 교수님이 ‘그런 데 왜 가니’라고 했다. 대학생인데 진리를 추구할 자유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대학 총장은 ‘대학의 1차 고객은 학생이고, 궁극적인 고객은 기업’이라고 했는데, 대학이 취업고시 학원이라고 치자. 그러면 직장 못 구한 졸업생들은 리콜해야 하지 않나. 책임지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건 비겁하다.”

- 김예슬 선언 이후의 개인적 변화가 있다면

.“자기 삶을 던져 무엇인가 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예슬 언니가 잘 되길 바란다. ‘고졸 성공신화’가 아니라 더 높은 배움을 얻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같은 고민을 했던 대학생으로서,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하고 있다. 대학을 떠나는 길을 택한다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못했던 일들을 하고 싶다. 존경받는 삶을 사는 분들을 만나 가르침을 구하고, 젊은이답게 신나게 놀아도 보고, 내 손으로 먹을 것도 길러보고 싶다.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 만날 땐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드리고 싶다.”

ⓒ 경향신문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열 여덟 모 - 대학과 20대이것 참 쪽팔리게 되었다. 어쩌다 '명문대 종신직'을 가지게 되어 제일 우수하다는 고교생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게 된 'SKY' 세 학교 중, 대통령 덕분에 '최신 유행'의 중심이 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3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씨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대자보를 학교에 붙였다. 취업 학원이 되어버린 대학 현실에 대한 비판과 환멸이 적힌, 자신의 행동이 구조를 바꾸기엔 무력하더라도 다른 길을 가보겠다는 당찬 선언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20대 당사자들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지지론, 비판론, 자격론이었다. 그리고 그 관점은 현재의 20대 담론과 그들을 지배하는 프레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비판론부터 보자. 이 학생은 자퇴를 하기 전 이미 재입학 여부를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운동권'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퇴 선언 대자보는 운동권으로서의 이름값을 높이는 경력 관리의 일환이며, 이미 재입학 여부까지 확인함으로써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사기성 선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퇴를 할 거면 조용히 할 것이지, 꿈을 향해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학생들을 모독하는 내용이라는 견해가 덧붙여졌다. 학교 게시판에 학생들이 스스로 올린 비판들이었다. 이 비판의 중심엔 이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견고한 개념이 있다. '스펙'이다. 비판자들에게 이 개념 하나면 20대의 모든 것이 해석 가능하다. 거의 물리학 법칙이나 다름없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듯, 모든 행동의 동기에는 '스펙'이 있다. 명문대라는 우수한 스펙을 포기하는 이유는 그것을 상회하는 스펙이 갖춰지기 때문인 것이다. 이 학생의 경우, 대자보가 공론화 되면서 운동권 내에 스타가 될 것이며 그 지명도로 인해 향후 정치 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스펙'을 갖추게 된 것이라는 해석. 여기에 만약 여의치 않을 경우, 다시 명문대 '스펙'을 재장착할 수 있을 가능성도 타진했기 때문에 이건 쇼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스펙 쌓는데 다른 학생들이 나름대로 스펙 쌓고 있는 걸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의 논리는 원래 보통 잃을 게 많고 인생을 돌이키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어른들의 전유물이다. 너희가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가 쌓아올린 것들을 함부로 무시하느냐. 너희도 나이 들면 우리와 다를 게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논리. 네가 자퇴라는 강수 하나 놓는다고 우리가 스펙 쌓는 걸 무시하는가. 너도 결국 스펙 쌓는 것 아닌가. 학생들 스스로 30년 후에나 생각하게 될 비판의 논리를 미리 당겨쓰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이 논리를 쓰는 이유는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이미 살아버린' 인생에 대해서 '그러지 말아야 했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방어의 차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이러저러한 이유에 의해 그렇게 살아 버렸는걸. 너도 알게 될 거야. 20대 역시 심리적으로는 이미 기성세대와 비슷하게 되어버렸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유예하고 있다. 대학에만 가면, 졸업만 하면, 시험에만 붙으면, 취업만 성공하면....... 그들에게 삶이란 향후 주어질 대가를 위해 스펙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이제 와서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유예해 버렸는데. 사실 자퇴 학생의 선언은 스펙 쌓기의 대열에서 나가겠다는 말이었다. 비판론은 그 선언마저도 다시 스펙의 프레임으로 환원시키는 슬프고도 무서운 피해의식을 보여준다. 각성 대신 부정을 선택해야 마음이 놓일 만큼, '스펙'을 대체할 세상을 보는 틀을 못 찾은 것이다. 게다가 각성이 아니라 부정이야 말로 현실을 보는 냉정하고 '쿨'한 태도인 것처럼 포장되기조차 한다.

 

다음은 자격론. 비판론이 '스펙'으로 수렴된다면 자격론은 조금 다양하다. 먼저 경영학과 자격론. 자퇴 학생이 인문학도였으면 대학의 배움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지만, 애초 취업의 좋은 발판인 경영학을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대학의 본질 타령이냐는 것이다. 또, 운동권 자격론. 너는 어차피 우리처럼 공부 열심히 한 애가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권 활동 다 해놓고 졸업할 때 되니까 딴 소리 하는 거 아니냐. 그리고 명문대 자격론. 어차피 넌 자퇴해도 명문대 출신 아니냐. 취업에 대한 불안과 생존의 위협은 대다수의 다른 20대가 더 크게 느끼는데 명문대 출신이 그렇게 설레발 칠 일인가. 마지막으로 지지자들의 자격론.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서 스펙을 쌓아 자수성가하는 동안, 노력 안하고 무조건 대학 탓, 사회 탓으로 돌리는 놈들이나 자퇴 학생을 지지하는 것 아닌가. 개미와 배짱이.

 

자격론의 가장 큰 문제는 '편견'이다. 경영학은 취업 전문 수업이라는 편견, 운동권은 자기 활동 욕심 채우는 사람들이며 나름대로 먹고 살만한 직업의 일종으로 취직이나 동아리와 비슷한 범주의 개념이라는 편견. 명문대 생이 배부른 소리한다는 편견, 그리고 사회와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개인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라는 편견. 경영학과 운동권에 대한 이해 문제는 무지로 인한 오해라고 해도 그 다음 두 가지 편견은 논의의 앞뒤를 혼동하고 있다. 명문대 생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명문대 생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며 20대 담론에 대해 대표적으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맞다. 그 학생은 자신의 세대가 직면한 문제점을 고발한 세대의 대표가 된 것이다.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같은 세대가 겪는 구조적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일은 오히려 동 세대 사람들이 고마워해야할 정치적 행동이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시기하기 전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구조적 문제를 대의하고 있는 사람을 지지하는 일에는 별다른 자격이 필요 없다. 물론, 갖은 냉소와 피해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자퇴 학생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결국 이 사건이 이렇게 공론화 될 수 있었던 것도 지지 여론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지지 여론은 이 학생의 현상 분석과 자퇴라는 행동의 용기에 대해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분석과 용기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사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에겐 '내가 내 살 길 찾겠다.'는 간결하고 명확한 행동 지침이 있는 반면 지지파들은 이 학생에게 공감과 응원을 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한다.

펙 프레임 외에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취업과 시험 성공 외에 어떤 목표를 설정해야 할지 정답을 내놓기 힘들다. 저항의 연대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이유다. 이 자퇴 선언에 대한 날선 비난이나 자조적 공감을 보다보면 이 시대 20대들의 상처가 읽힌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괜찮다고, 잘 살고 있다고, 사회도 말해주지 않고 스스로도 위로하기 힘들다. 20대가 꿈을 정하고 제도권 안에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아무도 그걸 탓하진 않는다. 그러나 남의 꿈을 비웃고 하나의 틀로 상대방을 낙인찍는 행위는 언제나 추하다.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무엇을 위해 살아남는가는 20대에만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니라 평생을 곱씹으며 가야할 질문이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이 대안적 삶의 길도 생긴다. 이 자퇴 선언은 결국 기성세대와 사회 구조를 향한 20대의 권리 선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의를 통해 성찰과 변화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기성세대가 가진 비난의 언어와 우려의 논리는 그들에게 남겨두자. 20대의 입에서 나온 권리 선언은 20대를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이지 위협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세상 모든 청춘의 목표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살아남되 무엇을 위해 살아남는지, 그 초심을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모두들, 힘내기를.

/모 피디

김예슬과 구한말의 '대학거부자'들

'사회적 개인' 사라지고 '인간상품'만 남아…새로운 패러다임을 지난 주 <경향신문>에서 고려대 경영학과 김예슬 학생의 '자퇴 선언'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에 거의 눈물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 죽은 이들의 유령만이 돌아다니는 황천에서 우연히 산 자를 봤을 때의, 그런 류의 기쁨이었습니다. 고대 등 서울의 '명문대'들이 이미 죽은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의 폐허에서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어찌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8년 전인가 9년 전인가, 제가 오태양씨가 여호와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거의 최초로 병역거부를 선언했을 때에 바로 이와 같은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황천에서 산 자를 만난 기쁨

사실, '병역 거부'와 '대학 거부'는 많은 면에서 -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 동질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기관이 갖고 있는 기능, 그리고 이 두 기관의 각종의 문화적 특징이 상호 흡사한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군대란 상사 명령이라면 잔업이든 특근이든 회식이든 경제범죄든 무엇이라도 대꾸 없이 다 할 수 있는 유순한 심신, 즉 한국형 자본주의에 필요한 인간기계를 대량생산하는 학교 다음의 남성 전용 사회화 기관이고, 대학이란 이미 학교, 군대에 의해서 심신이 유순해지고 충분히 '길들여진' 인간기계들 중에서 고가로 판매될 수 있는 고급 기계들을 추가적으로 생산해내는 '공장'입니다.

길들여진, 즉 영혼이 영원히 거세된 인간들을 만들어내야 하기에, 대학도 - 물론 군대만큼은 아니지만 - 개인에 대한 상당한 압박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이 군림하는, 그러한 공간이 아니라면 유순한 인간기계가 어찌 생산되겠습니까? 사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한국에서 근대식 전문학교 및 대학이 생긴 이후로는 늘 '중급 사회' 내지 '고급 사회'로의 관문의 역할을 해온 것입니다. 즉, 무한한 거래의 장소인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잘 팔릴' 인간들을 애당초부터 생산해온 것이죠.

구한말에는 외국어학교 중에서도 유독 일어학교가 대접을 잘 받고 법관양성소(오늘날 서울대 법대의 전신으로 봐도 큰 무리 없음)에 유독 인재들이 많이 몰렸던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 하지 않았습니까? 잘되면 통감부에서의 통역, 아니면 지방 법원의 법관부터 시작해 출세의 가도에 오르고, 못돼도 변호사나 교사 정도 해먹을 수 있게끔 하는 건 그 당시로서 '대학'으로 칠 수 있는 교육기관의 역할이었습니다.

대학거부자 명단은 위인전 목차

물론 법관양성소에 다녔던 사람 중에서도 '조선의 장병린'이라고 할 변영만 선생이 있었다는 점, 즉 초기 근대의 '출세' 체제에 개인적으로 반기를 든 위인들이 전혀 없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지만, '상등 사회'로의 관문에서 친구를 짓밟아 들어가려는 풍경은 그 때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다르지도 않았지요. 다른 점이 있었다면 '사회 분위기'가 오늘날과 질적으로 달랐지요. 굶주린 농민 위에 군림하는 일제라는 '남의 국가' 하에서 출세한다는 것부터 자생적 국가전통이 수천 년이나 되는 나라에서 좀 꺼림칙한데다가, 아직은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식의 유교적 이상주의를 어릴 때부터 익힌 사람들은 배운 층의 다수이었어요.

그러니까 이태준 선생처럼 일본 상지대를 중간에 그만두고 출세고 뭐고 다 팽개치고 작품들을 통해서 '조선'과 '인간'을 본격적으로 탐구해보려는 사람들이 그 때에 많았던 것입니다. 그 시대의 '대학거부자' 명단을 보면 꼭 '위인전' 목차를 읽는 기분이지요.

염상섭(경응대 중퇴), 현진건(상대 호강대학 중퇴), 이찬(와세다대 노문과 중퇴), 강경애(평양 숭의여학교 동맹파업 건으로 강제 퇴학)... 그러니까 김예슬씨가 일제시절의 '대학거부자'들의 명단을 한 번 보면 용기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시대의 황혼이었던 그 때만 해도, '졸업장'보다 '문장'이나 '박식'이 더 잘 통했던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양심이 가장 강한 조선지식인들의 경우에는 유교적 이상주의는 바로 혁명적인 정열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제 과학적으로, '사회주의'라는 근대 개념어로 정의된 대동세상을 얻기 위해서 물 한 표주박, 밥 한 먹음의 지사적 삶을 택한 이들은, 대학을 나왔다 해도 '출세'에 아주 무관심했습니다. 김철수(1893-1986) 선생처럼 와세다대 정치과에 다니면서 김성수 등 유산 계급의 젊은 거두들과 말을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에 있었던 사람은, 마음만 먹었으면 무슨 출세 못했겠어요? 그래도 와세다를 다 팽개치고 결국 감옥들을 전전하는 공산주의자의 길을 택한 것이지요. 지금의 서울 '명문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벌써 다른 나라, 아니 다른 행성의 이야기만 같지요? 해방 이후에 적어도 80년대 말~90년대 초까지 이와 같은, 이상주의가 강하게 섞인 캠퍼스 분위기가 당분간 지속된 데에는 또 여러 가지 역사적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승만부터 노태우까지의 '비정상적인 국가'가 근대적 이성을 교과서적으로 배운 젊은 지식인들의 정의감을 크게 자극한데다, 식민지 말기와 해방 전후 시대를 거쳐 온 윗세대 지식인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큰 학생들에게 '사회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일차적이었습니다.

강만길 선생의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조동걸 선생의 <일제하 농민운동사>와 같은 책을 읽고 자란 세대에게는 비록 나 한 몸이 고대를 나와 상섬이나 현대의 잘 나가나는 머슴이 될 수 있다 해도 옆에서 가난뱅이들이 빈곤과 압제 무게 밑에 짓눌린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사고방식을 갖기가 쉬웠습니다.

근대 초기의 - 아직도 대단히 유교적인 - 희생적 지사 정도 아니더라도, 근대 중기(해방 이후 1990년대 초까지)의 지성인은 여전히 사회적이고 연대적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현실적으로 - 이윤율이 아직 높고 국가 기구와 시장이 아직 확장돼가는 사회에서는 - 마음만 먹으면 출판사에서 번역하든 학원 강사를 하든 '운동'에 매진하는 몸을 먹인다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식민지하의 '지사들의 시대'를 방불케 하는 1980년대를 한국이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저야 그 때를 보지 못했지만, 1991년에 본 고대만 해도, 아직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같이 하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사람부터 도스토예프스키에 매달려 공부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까지 말이지요.

사회적 개인 사라지고 인간 상품만 남아그런데 고성장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 때에 '군바리 깡패' 집합이었던 국가가 이제 좀 얌전한 모습을 -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 취하면서 천하제후의 회의라고 할 G20 회동을 주도하겠다는 기염을 아주 국제적으로 토하고, 국내의 계급 분화가 고도화돼 계급간의 구분선이 아예 세습화돼가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에 근대 후기(1990년대 초부터)에 접어들어 '사회적' 개인이 점차 그 자취를 감추고 대학가를 휩쓸기 시작한 것은 각종 '인간 상품'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시장'과 '거래' 이외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보는 세상이란, 개인이 그 노동력을 고가로 팔고 그 여가 시간에 해외여행부터 똑같이 소외된 개인들과의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까운 '친구 관계'까지, 각종의 거래들을 누리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공부도 (당연히!) 거래, 대인관계도 (당연히!) 서로 당겨주고 밀어주고 아픈 구석을 만져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상호 거래, 직장/직업도 거래, 종교도 (하나님에게 천당 입장료를 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래, 사랑도 (듀오에서 서로의 레벨을 맞추어주는) 거래...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 되는" 도는 이미 원시시대 토템 이야기나 된 것이고, 사회도 그들에게 아주 무의미한 말입니다. 서로에게 서비스를 사고 팔고 세금을 내는 경제 주체들의 집합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요. 이들의 세계에서는 '꿈'이라는 타워팰리스에서 집 한 채 사고픈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진실 탐구'는 재테크 익히기의 딴 이름입니다. 이 '죽은 영혼' 사이를 산 사람이 벗어나고 싶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한 발짝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근대 후기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서로 연대를 해, 대학에서 '인간'과 '사회'를 다 같이 복원해보는 것은 보다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닐까요?

자신만을 위해서는 아니고 나와 남, 모두를 위해서 하는 등록금 인하 투쟁부터 시작해서 무상 교육을 위한 투쟁, 대학의 민주화(학생들의 대학운영 참여)를 위한 투쟁, 고등교육의 공공화를 위한 투쟁... 이 연대적 과정에서 우리가 포스트모던의 지옥적인 원자화를 좀 극복할 수 없을까 해서 기대를 걸어봅니다.

2010년 03월 15일 (월) 07:32:44

박노자 / 오슬로

명문대생 13만명 취업 위해 300만명이 들러리 서는 세상

고려대 김예슬 학생의 자퇴를 보며...왜 대학 학비 문제로 학부모와 자식이 싸워야 하나?

10.03.15 13:59 ㅣ최종 업데이트 10.03.16 11:51

대학 등록금, 취업난이번 3월의 포럼 산행모임에 젊은 대학생 2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들 대학생은 이른바 일류대 출신이 아닙니다. 한 학생은 대구에서 올라와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며 다른 학생은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지방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이들 두 학생은 비교적 현실문제에 관심이 높은 편이며 활발하게 현실참여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저희 연구소 포럼의 공부방에도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산행에도 참여한 것이 이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산행 중간중간에 젊은 대학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대학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며 두 대학생 간에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들 두 대학생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대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부모님들께 매학기마다 엄청난 등록금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남학생들의 경우에는 대개 1, 2학년 마치고 군대부터 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학생들마다 사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3, 4학년 때에 군대를 가게 되면 취업준비에 지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 두 학생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매월 자신의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도 벅찰 지경이라고 합니다. 특히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의 경우에는 등록금 외에도 하숙비든 자취방이든 대책 없이 오르는 방값과 생활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방학이나 학기 중에도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대략 방값과 식사비 및 교통비 등을 감안하면 한 달에 10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부모의 경제적 사정을 뻔히 아는 자식으로서는 엄청난 등록금을 부담해주시는 것도 얼굴을 못들 지경인데 매달 적지 않은 생활비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외든 편의점이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괴외 2개에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면 한 달에 100만원 정도는 벌 수 있다고 하는데 말이 과외이지 사실상 하늘에 별 따기라고 합니다.

 

이미 좋은 대학 나오고도 일자리가 없어 취업을 못한 사람들이나 아예 처음부터 사교육시장에 뛰어든 전문강사들이 과외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으며 대학생의 경우 겨우 SKY 일부 학생 정도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과외를 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은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다니는 것인지 막노동하러 다니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편의점이든 식당이든 대형마트든 술집 서빙이든 막노동 아르바이트마저도 여의치 않다고 합니다. 중국동포 유학생들이나 중국동포 취업자들이 훨씬 더 싼 아르바이트비나 임금으로 막노동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래저래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인다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막노동을 해도 한 달에 100만원 벌기는 결코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들 젊은 두 대학생이 한 달에 100만원만 벌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서로 주고받는 말에 비록 제 자식은 아니지만 가슴이 매우 언짢고 안타까웠습니다. 대학가서 공부하라고 보낸 자식이 등록금과 생활비 버느라 막노동에 시달린다면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한 달에 100만원이란 이들에게는 마치 꿈 같은 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대학생을 자식으로 둔 부모는 대개가 자식과 갈등을 겪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어떤 고생을 해서라도 가르칠 것이니 딴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대학생인 자식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직접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여유가 없는 부모가 등록금이다 생활비다 해서 빚을 내고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접어두고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을 하려고 애를 쓰겠지만 자신이 놓인 현실은 전혀 딴판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자식들 눈에는 자신이 아무리 몸부림을 치더라도 부모가 바라는 취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방황하며 갈등을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있는 힘 다해서 자신을 대학 보내주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부모와 충돌합니다. 이들 두 대학생들 역시 부모와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공부방을 통해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어본 대다수 대학생들이 다 예외없이 부모와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 심정으로는 힘들고 고생이 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대학만 보내 졸업시켜 놓으면 취업할 수 있고 사람대접 받거나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대학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으면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힘든 부모로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모 자식이 서로 등을 지거나 절연에 가까운 상태까지 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이라는 여학생이 스스로 자퇴를 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이 여학생의 글을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젊은 대학생이 스스로 자퇴를 선언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글을 읽어보니 20대 젊은이로서 자신의 인생과 삶에 대한 처절한 고뇌와 현실의 모순과 불의에 대해 온 몸으로 저항하려는 몸부림을 느꼈습니다.

 

저 역시 젊은 대학시절에 독재정권 하에서 비슷한 고민과 갈등을 했었습니다.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 가져올 제 인생과 가족의 피해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역시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 남의 자식 같지 않았습니다. 제 자식의 아픈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며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폐부를 찔렀습니다.

 

김예슬 학생은 대학에 입학할 때에 20대 젊은이로서 자신의 인생과 장래에 대해 온갖 꿈과 희망을 그릴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 꿈과 희망을 위해 대학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런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여학생에게 현실은 그와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현실은 자신의 꿈과 희망을 그릴 기회조차도 숨을 쉴 수 있는 여유조차도 주지 않는 엄청난 모순과 불의로 가득 찬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불의와 모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한 것입니다.

 

김예슬 학생이 자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며 부모님에 대한 생각에 잠을 못 이루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이 미어지고 아픕니다. 돈이 많든 적든 부모라면 다 자식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못하도록 막아야 할까요? 자기 자식이 험난한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생각이 짧아서 그런 것인가요? 적어도 김예슬 학생의 글이나 지금까지 제가 포럼 공부방에서 접한 대학생들을 볼 때 결코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학생 자식들이 세상물정을 모르거나 생각이 짧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세월의 흐름과 세상변화에 따라가지 못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정도로 현실에 대해 나름대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마저도 구시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젊은 대학생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삶과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라면 이런 자식들의 생각과 고민들을 지켜봐주고 같이 보듬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옳지 않을까요?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부모자식간의 순리이자 자연스러운 세대 변화와 발전이 아닐까요?

 

자식을 둔 부모 여러분들은 대학이라는 곳을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무조건 현실에 순응하고 기존의 불의나 모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런 불의와 모순에 자신의 인생과 삶을 굴종시켜가야 하는 곳으로 생각하시나요? 대학은 일부 이념에 찌든 사학이나 재벌대기업 또는 정치권이 모든 것을 규정하고 생사여탈권을 갖는 그런 곳인가요?

 

그래서 그들이 등록금을 얼마로 올리든 무조건 그에 순응하고 갖다 받쳐야 하는 것인가요? 방값이 얼마로 뛰든 생활비가 얼마로 치솟든 무조건 고분고분 갖다 받쳐야 하는 것인가요? 젊은 청춘의 혈기왕성한 내 자식의 마음고생은 아랑곳 하지 않고 기득권 세력들이 선동하고 사기치고 조작한대로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인가요?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위해 지금껏 대통령 투표를 하고 국회의원 투표를 해온 것인가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사학이나 재벌대기업과 정치권은 대학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책임을 지고 있나요?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 모두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나요? 비싼 등록금을 받았으면 취업을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취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등록금이라도 싸게 해주든지 공짜로 해주어야 하지 않나요? 무엇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대학 때문에 등을 지고 척을 져야 하나요? 고작 몇 만명 정도를 채용하면서 그보다 스물 다섯 배가 넘는 수많은 대학생 아닌 대학생들을 매년 청년 실업자 들러리로 양산해내면서 말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부모 여러분들은 자기 자식과 얼굴 붉히며 싸우고 있는 것인가요?

 

솔직하게 현실을 직시해봅시다. 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져 취업이 어렵다 보니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매년 100만명 이상이 전문대 이상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취업할 수 있는 현실의 일자리는 어떤가요? 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5인 이상 사업장의 채용인원은 많아야 매년 30-40만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경력직을 포함한 중도채용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통계수치는 신뢰성이 매우 낮으며 상당히 부풀려진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적어도 전문대 이상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는 75-85% 가량의 학생들은 대학 아닌 대학 할애비를 나와도 애초부터 취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채용의 대부분이 월 200만원대 이하의 월급을 주는 중소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막연하게 부모들이 바라는 안정적인 대기업 취직이란 일부 일류대 출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비정규직이 이유없이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경제 전체로 평균임금을 억제하고 고용인원을 늘리는 식으로 해왔기 때문입니다.

 

저희 포럼 공부방에 오는 대학생들 가운데에 일류대 출신 대학생들도 있습니다만 이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취업에 어려움을 겪기는 매 한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전문대학 이상 대학원까지 총 학생 수는 320만 명을 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이른바 SKY등 상위 5개 대학은 전체의 4% 가량인 13만 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들 13만명 정도의 취업을 위해서 나머지 300만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대책 없이 들러리를 서고 있는 것입니다. 취업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사기적이고 기만적인 현실에 속아 경쟁 운운하면서 애꿎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갈등하며 척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은 자식이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일자리를 잡아 편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모든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매년 80만 명 이상의 대학졸업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취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자식들을 닥달한다 한들 없는 일자리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날 리 만무합니다. 아무리 공무원이 안정적인 일자리라 한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공부에만 매달린다고 모두다 공무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도 그것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과 상황이 있습니다. 무조건 경쟁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경쟁이 소모적인 경우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경쟁이 원하는 성과를 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크거나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닥달하면 할수록 자식은 스스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모자라고 무능해서 취업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학생 자식이 20대를 넘어 30대가 되고 심지어는 40대가 되어도 취업은커녕 결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마지막에는 부모와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는 백수 아닌 백수로 사는 사람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90년대 민주화 이후 정권들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이를 방치해왔습니다. 오히려 대학을 이념과 정쟁의 도구로 삼아 소모적인 혼란과 부모 자식간의 갈등을 부추겨 왔습니다. 백년대계를 위해 대학교육을 강화하고 학문적 수준을 높이기보다는 대학을 돈벌이의 수단으로써 사업화와 상업화 시키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사학들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취업을 미끼 삼아 부모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으면 취업은 불가능하며 사람대접 받지 못한다는 황당한 불안감을 조성하여 떨게 만들었습니다. 국가는 더 이상 대학교육에서 아무런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지방국립대를 완전히 방치해 버렸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왜 대학 때문에 서로 싸워야 하나요? 오히려 싸워야 한다면 부모 자식간이 아니라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방치해온 정치권과 사학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취업할 수 있는 수가 뻔히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등록금 장사를 위해 마구잡이로 대학생 정원을 늘려온 사학과 정치권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대학을 마치 자신들을 위한 전유물인양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으로 난장질을 친 재벌대기업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부모와 자식이 서로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길래 싸워야 하나요?

 

유감스럽게도 이미 한국사회에서 대학생은 성인이 아니라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사회가 대학생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지만 대학생들 스스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등록금과 생활비 그리고 취업난의 현실 장벽에 부딪혀 스스로 성인이 되기를 주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들이 아무리 스스로 등록금이나 취업 문제로 학내 투쟁에 나선다 한들 일반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생들 스스로도 현실성 없는 취업의 미끼에 낚여 밑도 끝도 없는 소모적인 경쟁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사회의 수준이 대학을 능가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대학생들의 등록금 문제나 취업 문제를 대학생들끼리만의 학내문제로 간주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를 악용하여 보수든 진보든 정치세력들은 대학생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부 대학생들은 시대착오적인 운동권 논리나 친기업 논리로 동아리를 만들어 정치권과 전경련으로 대변되는 재벌대기업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학 등록금이나 취업문제 등 대학의 문제는 대학생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대학은 이미 스스로가 정치화되고 이념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한국의 대표적 사학으로 불리는 연고대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보내든지 아니면 아예 대학에 보내지 마라는 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학이 대학으로서가 아니라 이념의 선봉에 서서 그리고 친기업 '실용'이라는 허울을 내세워 학문의 자유를 구속하고 기득권 세력에 가랑이를 쩍 벌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취업문제는 경제시스템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친기업이니 반기업이니 운운하는 식으로 재벌대기업에 몰아주기 식의 경제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취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결국 대학 등록금 문제와 취업문제는 대학생 스스로가 학내문제로 국한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등록금 문제와 자신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방법은 이런 문제를 합리적이고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도덕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사회세력에 합류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며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세력화를 통해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은 대학생과 부모들이 함께 참여하여 대학 등록금 문제와 취업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책참여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대학등록금을 무료로 할 수 있는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또한 대학을 20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평생교육의 장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대안도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학을 대학 본연의 위치로 되돌릴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이미 보수든 진보든 기존 정치권은 지난 20년 동안 대학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켜왔습니다. 이들에게서 문제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해온 바와 같이 대학생을 포함한 20대부터 40대까지 자식세대로의 전면적인 세대교체 없이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합니다. 20대부터 40대까지 자식세대는 전체 유권자의 7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수 특권 기득권세력을 제외하면 부모세대 역시 자식세대를 위해서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데 대부분 공감하고 계십니다. 자식세대나 부모세대나 자신들의 운명을 더 이상 무능하고 부도덕한 기득권 정치세력에게 맡길 이유가 없습니다.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은 공부방을 통해 도덕적이고 전문적 역량을 지닌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선별하여 키우고 있습니다.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은 정치세력화를 통해 자식세대 중심의 세대교체를 해갈 것입니다. 진보든 보수든 기존의 정치판을 전면 물갈이 해갈 것입니다. 자식세대와 부모세대 모두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공부방에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자신들의 인생과 삶을 더 이상 남에게 맡기지 마시고 스스로 해결해가시기 바랍니다.

 

 ‘고대 자퇴생’ 논쟁 “용기 있다” vs “어쩌라고?”

<앵커 멘트> ‘오늘 나는 대학을 자퇴한다, 아니 거부한다.’ 새학기에 한 대학생이 자퇴하면서 남긴 대자보가 큰 논쟁을 부르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3학년 여학생입니다. 이민우 기자. 이른바 명문대 3학년 학생이 자퇴한 이유가 뭐길래 이렇게 사회적으로 논쟁이 붙는겁니까? <리포트> 대학이란 곳이 학문은 뒷전이고 취업과 자격증 준비에 매달려 있다. 진리를 물을 수도 없고, 삶은 시들어가고 있다며 자퇴 이유를 밝혔는데요. 고려대학교 한 학생이 대학교육의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대학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건데요. 이를 보고 공감한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찬반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퇴 논란은 학내에 그치지 않고 인터넷으로도 확산돼 사회적 논쟁으로 번지고 있는데요. 자세히 취재했습니다. 지난 10일, 고려대학교 후문에 장문의 대자보가 나붙습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충격적인 제목의 대자보 앞에 학생들이 가던 발길을 멈춥니다. 대학을 자퇴한, 아니 거부한 이유를 학생들이 한자 한자 읽어갑니다.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큰 배움 없는, 大學없는 대학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자퇴를 한 구체적 이유도 적혀있습니다."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 해왔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해도 그게 끝이 아닌 현실도 꼬집습니다. 기업은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 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 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특히 경쟁에 짓눌린 환경 속에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게 억울하고, 서글프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이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다‘며 대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이 대자보를 쓴 학생은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 그녀는 인터뷰를 사양했습니다.<녹취> 김예슬(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 "(인터뷰는) 어렵겠다고 말씀을 드릴게요. 거기(대자보)에 제가 할 말을 많이 써놓은 거 같고요."

이 대자보는 학내에 큰 파장을 불렀습니다. 당장 이 대자보를 지지하는 찬성 글이 바로 옆에 빼곡하게 붙어있습니다. <인터뷰> 강승규(고려대학교 국제 대학원) : "20대가 돼서 꿈을 찾는 게 꿈이라는 게 슬프다.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그거 보면서 나도 꿈이 없고 그런데 공감도 많이 되요. 한 대학생으로서..."<인터뷰> 한지영(고려대학교 4학년) :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명문대이고 학벌주의가 심한 곳이니까 오히려 냉정하게 보면 졸업장을 따려고 결국 다니는 게 아닌 가..."

반대로 이 대자보에 반대한다며 달걀이 던져져 있고, 반대하는 글도 붙어있습니다. <인터뷰> 이상록(고려대학교 1학년) : "대학생활 가운데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면이 있는데 그런 면은 보지 못하고 너무 사회가 원한다는 측면만 보는 거 같아서 그런 건 약간 저랑 반대된다고 생각을 했어요."<인터뷰> 나현호(고려대학교 2학년) : "사회 나가면 더 그럴 수도 있잖아요. 더 메마르고 상사 명령에 따라야 되고 그런데 오히려 대학이라는 공간이 인간냄새가 더 많이 나는 공간일 수도 있는데 자기 논지에 맞춰서 너무 일방적으로 쓰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학내 인터넷 게시판에도 찬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용기 있다’ ‘지지한다’는 지지 댓글과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해결되느냐’ 는 비난 댓글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대학 교육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대자보에 대해 대학 측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녹취>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관계자 : "그거 일체 관련해서는 저희가 아무런 답변을 안 드리기로 했기 때문에요. 학생 개인의 사생활 문제이기 때문에 저희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찬반 입장을 떠나 이 대자보가 던진 질문은 고려대에 국한된 일만은 아닙니다.<인터뷰> 전지원(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 "저는 고려대학교만의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서 안타깝고 대한민국에 있는 대학이라면 어느 대학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비싼 등록금, 학문보다는 취업, 취업을 위한 자격증 경쟁...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 속으로 빠져드는 게 불가피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형남(취업 준비생) : "컴퓨터 자격증하고 전공 관련 자격증 취득했고요. 요즘에 워낙 취업하기 힘드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거니까.. ."<인터뷰> 박대선(대학교 4학년) : "저희도 대학을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뭔가 해보겠다. 내 전공을 꼭 하겠다 했는데 대기업만 찾고 변해가고 되게 힘들고 서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20대 비정규직 평균임금인 88만원을 빗대어 ‘88만원 세대’라 불리고 있는 대학생들, 이 문제가 20대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대자보 파장은 더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 김선경(대표/대학생 단체) :" ‘이그나이트’ 많은 20대들이 힘들어하고 취업 준비 때문에 많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알고 있는 현실이거든요. 30대, 40대가 되면 그 힘든 게 풀릴 것인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보거든요. 지금의 어려움들을 어떻게 하면 같이 해결해 볼 수 있을 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걸 김예슬 학생의 사건을 계기로 그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이 논쟁은 인터넷 게시판으로 옮겨붙어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 유명 포털에서는 토론 프로그램이 벌어질 정도로 논쟁이 확산되고 있는데요. 김예슬 학생은 이미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 했습니다. 그러나 자퇴가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닌 만큼 한 대학생이 던진 이 질문에 대학과 사회가 뭔가 답을 해야한다는 말도 나옵니다. <인터뷰> 우석훈(88세대 저자/성공회대 외래교수) : "지금 고용문제라든가 등록금 문제 같은 것들은 개인이 풀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같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결국 개별적으로 자퇴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같이 풀 것인가...라고 하는 우리 문제라고 생각해야 되는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김예슬 학생은 대자보에서 앞으로 부딪치고 상처받겠지만,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겠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라며 스스로 용기를 다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김예슬 학생이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논쟁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학생의 대학 거부는 찬반 입장을 떠나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겠다며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고려대학교 학생이 화제다. 10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앞에 장문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학생은 전지 3장 분량의 대자보에서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대학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김 씨는 현재의 20대를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 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뭔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로 표현했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간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대학 관문을 뚫고 25년 동안 경쟁의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는 고백이었다.

그는 "트랙의 끝에는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만 보일 뿐"이라며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의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결국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은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대자보에는 경쟁과 서열화를 조장하는 대학과 기업, 국가를 향한 20대의 울분도 실렸다. 김 씨는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라며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서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며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 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고 밝혔다.김 씨는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해도 탑은 끄덕 없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덧붙였다.이날 대자보 앞에는 오후 내내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글귀가 쓰인 종이와 장미꽃이 나붙기도 했다. 김예슬 씨가 "고민하고 절망하면서도 경쟁하며 질주하는 20대 친구들에게 '다른 길'에 대한 상상력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프레시안>에 자신의 글을 보내왔다. 김 씨의 글을 전문 소개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선명수 기자

 

승용 칼럼]김예슬 씨의 자퇴서에 대한 변명 

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2010년 03월 17일 (수) 16:18:20

뉴스천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씨가 스스로 대학을 그만두었다. 그의 자퇴서 전문을 읽고 또 읽어보았다. 처음엔 가슴이 답답하더니 두서너 번 찬찬히 더 읽어 보며 가슴이 뜨거워져가는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표창처럼 가슴에 꽂혀 왔다. 바로 그 또래의 대학생 딸을 둔 아빠로서, 또한 30여 년 전 질풍노도처럼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겠다며 대학 캠퍼스를 질주하며 살았으나 어느덧 보수적 기성세대가 돼 버린 나약한 중년으로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 모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김 씨는 자퇴서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그가 서술한 여러 말 중에서 나는 ‘거부한다’는 단 한 구절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을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나는 그의 자퇴서가 한 젊은이의 개인적 자퇴서가 아닌 이 시대를 향한 선전포고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수월성교육이 지고지선이요, 신자유주의가 최고의 이데올로기로 여겨지는 오늘 한국사회에 조목조목 섬뜩한 경고를 날린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고민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하지만 푸른 초원으로 달려가고 싶은 그의 자유의지는 주위를 에워싸는 현실이라는 질곡에서 신음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는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를 설파한다. 그는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과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하는 기업’이 바로 적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진단은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터득한 것이기에 더욱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그는 결국 자퇴라는 극단적 몸짓을 통해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고민하고 있는 제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시계바퀴를 30여 년 전으로 돌려본다. 그 시절 많은 젊은이들은 ‘대학이 곧 양심’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명제를 가슴에 안고 시대를 앓았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독재권력과 최루탄에 맞섰다. 일부는 화염병을 들었고 더 치열한 고민을 못이긴 일부는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바로 그 헌신과 희생이 바

탕이 되어 우리 사회는 민주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의 이면 속에서 대학가는 다시 무한경쟁의 정글로 타락해갔다. 이는 전적으로 기성세대들의 원죄이다. 저 가녀리고 순정어린 젊은 영혼들이 취업사관학교와 고시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신음하도록 몰아붙인 게 바로 우리들이다. 때문에 김예슬 씨의 자퇴서는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마무리에서 이렇게 항변을 정리한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성공만능의 시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순응하기보다는 한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선언한 김 씨에게 내가 해줄 말은 딱히 없다. 이미 그가 세상의 진리를 엿보았으니, 그 해결책도 스스로 찾아낼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