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창영동 11번지에서 '정은서점' 이라는 간판을 달고 서점을 할 때 이웃에는 신창수 할아버님이 운영하는 '글천지서점'이 있었다. 여름이면 '글천지서점' 앞에는 어른들이 막걸리 한 병씩 들고 와서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아 할아버지 중국 추억담을 청해 들으면서 즐겁게 한나절을 보내던 일이 눈에 선하다. 중국에는 황사가 심하고 추워서 차를 마시고 몸에 열을 내는 기름진 음식과 40도가 넘는 술을 먹는다고 했다. 말을 타고 다닌 무용담을 얘기할 땐 듣는 이들을 중국대륙으로 몰고 갔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중국에서 고향인 목포로 갔다가 전쟁 무렵 인천으로 오셨다고 했다. 막상 인천에 왔지만 취직하기가 어렵고 물자가 귀한 터라, 있던 책을 종이로라도 팔려고 장터 한 모퉁이에 펴놓았더니 지나던 이가 "이 책 얼마요?"하고 묻는 말에 힌트를 얻어 책장사를 하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개항 이후 서서히 인천으로 모여들던 사람들은 해방 후부터 부쩍 늘어난다.
예를 들어 오래된 상호를 가진 상점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북,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화 출신이었다. 이렇듯 각 도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농경사회에서 상공업 도시로 변해간 인천의 생태를 여실히 본다.
우리는 해방 전후라든지 전쟁 전후라는 말을 떠나 역사를 말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아침 소설가 박태원 선생 아들 박재영 선생이 메일로 보내 온 글속에는 "전쟁을 지나면서 3~4개월 사이에 아버지는 북으로 어머니는 감옥으로. 큰집 식구 따라 피난길에 짚 새끼로 만든 망태를 메고 눈 비탈 산길에 솔방울을 땔감으로 주우려고 갔던 혹독한 고통이 하얀 눈을 보면 떠오른다."라고 쓰여 있다. 박재영 선생은 칠십세다.
칠팔십대 어른들 증언을 들으면, 일제말엽 곡식은 가져가고 콩깻묵( 콩기름을 짜고 걸러진 무거리. 일본사람이 쓴 전쟁 고발적 소설 '인간의 조건'에서도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식량에서 콩깻묵이 나온다.)으로 식량을 배급받아 먹었다고 한다. 적의 전쟁에 착취당하는 공포의 시간을 지나 해방된 나라 경제사정의 어려움은 해방의 기쁨으로만 이겨 갔을 뿐이었다.
출판사정도 그랬다. 1945년 이후 1950년 사이에 나온 책 중에는 거칠거칠한 마분지에 인쇄한 책들을 볼 수 있다. 책 출판이 어려웠음을 책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개항과 함께 인천은 대부분 외국인 거주지였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해방 후 일본인이 1946년까지 물러갔고, 적산가옥(나라에 적이 갖고 있던 집)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은 시장과 고물상으로 들어왔다.
전쟁 전 서울 책방의 역사를 보더라도 고서점이 새 책방보다 많았다.
박경리 선생께서 배다리 시장에 들어선 1948년도 사정 또한 다르지 않다. 선생 소설 속에는 '가난해진 어른이 고물상에서 사 입은 작은 듯한 신사복'이 등장한다.
책을 보기 위해 수업도 빠져 가면서 읽었다는 선생께서 종이로 취급되어 고물상에 쌓여 있는 책을 보고 얼마나 흥분하셨을까? 사고 또 사도 계속 들어오는 책값을 다 감당할 수 없어 작은 가게를 물색해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 나누는 일이 시작됐을 책방을 상상해 본다.
20대 중반의 지성인이며 그 시대에 월급을 받는 관료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열정으로 쌓여가는 책을 다시 고물상에 파는 게 아니라 책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팔아서 순환하는 방법으로 책장사를 선택하셨다고 본다.
장사는 서로 가치를 교환하는 소중한 행위이다. 많은 사람을 조금은 가깝게 스쳐 보는 일이며 자신의 내성을 들추어 보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박경리 선생께서 20대에 책방을 하셨다는 것은 여러 면으로 자산을 축적한 시간라고 생각한다. 헌책방의 경우 그 시대 책뿐 아니라 당시대에 볼 수 없던 책들도 넘나든다. 책을 좋아하는 책방지기라면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쁨에 책방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토지문화관에 갔을 때 김영주 이사장이 전해준 박경리 선생 말씀 속에도 들어가 있다
"책을 분류하다가 희귀한 책을 만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책을 읽고, 집에 가져와서도 밤새 읽었다." 여기서 희귀한 책이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나, 책으로 만들어졌으나 그 시대에 통용되지 않아서, 혹은 당대 금서여서 일반인은 구하기 힘든 책을 말함이다. 독서 열정을 몸으로 실현한 독서력과 책방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고서점 경영에서 책을 다루는 노동과 많은 사람을 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일의 소득은 경제보다 더 큰 이익에 있다. 작은 공간에서 세계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익이 있으며, 책을 자유롭게 순환시키는 역사의 광장이다. 수없이 버려지는 책들. 그래도 헌책방을 통해서 자료들이 보존되며 국익을 담당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 일은 책장사가 그 의미를 알든 모르든 놓여진 사실이다.
아벨서점에 한 두 달에 한 번씩 들르는 능허대와 인천신문 참성단 주필이셨던 오광철 주필한테 박경리 선생이 책방을 하셨던 시기 책방 모습을 듣는다.
내동 쪽에 새 책 서점과 경동 고개 넘어서 새 책방 '소피아서점'이 있었고, 경동 목욕탕 근처에 인천고 서명원 선생이 하던 '문범서점'에는 일본책이 많이 있었다. 새 책도 함께한 고서점이었다고 한다. 중앙시장 쪽에도 서너 집 있었는데 고서점으로 주로 일본책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상상도 안 가지만 그때는 일본어권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글보다 일본글에 익숙한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경리 선생께서도 한글을 확실하게 배우기 위해 남편이 세종대 전신인 사범대를 보내셨다고 했다.
젊은 날, 책에 대한 박경리 선생 열정과 헌책방 경영은 삶과 독서를 하나로 꿰어낸 멋진 예술작품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몸의 수고를 맘껏 부려 성실을 끌어낸 젊은 아낙의 용기, 책과 삶이 하나라고 손에서 호미를 끝까지 놓지 않으며 능동적 생명의 희망을 본으로 보여준 어른이었다.
어느 날 호미를 들고 밭을 매는 박경리 선생 등 뒤에 인사하려고 서 있는 사위 김지하 선생에게 "자네 손에 호미 들어 본 적 있나?"라고 묻는 소리에 당혹스러워 "아니요" 라고 대답하면서 진땀을 흘렸다고, 김지하 선생께서 말씀하셨다고 문학관 해설사가 사담 중에 말했다.
오늘도 박경리 문학공원 문학관 해설에서는 인천 동구 금곡동에서 헌책방을 하셨다고 해설한다. 일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 배다리에서 살던 시간이었다고 선생께서 말씀한 회고담을 문학관에 갔을 때와 배다리에 답사를 왔을 때도 밝힌다. 배다리에 사셨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남편 김행도씨와 따님 김영주, 그리고 배다리에서 낳은 아드님 김철수, 따듯한 가족과 어머님의 든든한 보호 아래 책을 맘껏 만져보고 읽을 수 있었던 행복을 말씀하셨음을 읽어 본다.
박경리 선생 작품 시장과 전장에 나오는 시장모습을 상기하면서 "혹시 책방이 중앙시장 쪽에 있지 않았을까?" 추리해 본다. 사셨던 자택 주소는 금곡동 59번지였다는데, 금곡동에서 헌책방을 하셨다는 해설사 말 그대로라면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