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과 근현대사
인천화도진도서관 강의노트 2016.11.01
죽산 조봉암과 근현대사
1.죽산 조봉암은 누구인가
1)한국 근현대사의 풍운아 - 1899년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한미한 농가 출생 - 보통학교 졸업 - 군청 사환, 임시 고원, 대서소 보조원 YMCA 중학부→ 세이소쿠영어학교→ 주오대. 독서와 토론 - 진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 뛰어난 강연술, 그리고 탁월한 사회기(司會技)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
2)독립운동가, 건국공로자 = 강화 3․1만세 옥살이 -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 최선의 길 판단 - 조선공산당 창당주역 - 상하이 망명 투쟁 중 체포당해 7년간 복역 - 8․15 광복 후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입안
3)세계 최고수준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 농민들에 희망 안겨줘 혁명포기 - 나라 전체가 공산화 막는 원인 -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 자녀교육 집중 - 뒷날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
4)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지내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차점 낙선 거물 정치인- 젊은 날 조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 전향 뒤 원죄 -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 국가변란과 간첩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 -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 현대사의 축소판
5)1959년 7월 31 오전 11시 서울형무소 - 아침에 따님과 조카 면회거부 발길 돌려 - 바로 전날 오후 재재심 기각 - 10시 30분 - 마지막 술한잔도 거부당하고 처형 - 청중 한 분이 낭독
2.죽산 조봉암의 생애 요약
1)출생과 소년시절
*강화정신--고려 때 삼별초 저항-조선시대 병자호란 저항-조선말기 병인양요 운요호사건 신미양요-이동휘 진위대장과 잠두교회-1907년 진위대원 봉기-군청 뒤의 견자산 진위대 진지 보창학교
*1889년 강화에서 출생
*총명하나 공부 안 하는 아이였으나 학급회 토론과 주산에 탁월
*유찬식 조광원 조구원 정경창과 죽마고우로 교유(갈홍기는 나이 차가 많음)
*잠두교회에 나감.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군청사환 임시고원으로 일함
2)3․1만세운동과 청년시절
*읍내거리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다가 김이옥을 만남-6천명 모인 3․1만세운동에 참가 구속
*혹독한 고문당하고 서대문감옥에 갇힘--이가순과 민족적 각성
*YMCA 중학부에 다님--이상재 선생--동급생 인천 박남칠을 만남
*대동단사건으로 다시 평양경찰서에 구속--21.7 석방 후 일본 유학길
*4명의 친구와 동숙 엿장수 고학 세이소쿠영어학교 → 주오대학 정경과 → 김찬의 영향으로 →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서적 탐닉 독서와 토론에 → 고학생동우회와 흑도회 → 가명을 朴鐵丸으로
*1922.8 귀국해서 청년논객으로 등장 → 22.11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출국 → 모스크바 담판에 감 →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 폐결핵으로 중퇴 귀국
3)조선공산당(조공) 창당과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
*코민테른이 조공 창당 예비작업으로 김재봉과 김찬 침투시킴--조봉암의 가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상하이 트로이카의 석방 합류 급진전-신흥청년동맹 전국순회강연 선풍적 인기-조선일보 기자-최고의 논객-인천에서의 결산강연 24.4.19 -사회운동 후배 김조이와 결혼
*1925.4.17. 조공 창당(1차공산당/김재봉당) - 승인 얻으려 밀사로 모스크바행
*임무 완수하고 공산대학 실링 21명 받아냄--아우 조용암 아내 김조이 소년시절 친구 정경창
*조공1차당 붕괴 상하이에서 투쟁(여운형이 죽산의 멘토)--25.5 만주 밀행 조공만주총국 조직--6․10만세사건 주도--2차당 붕괴 25.11
*27.1 사랑하면서도 헤어졌던 김이옥이 상하이로 와서 동거 딸 호정을 낳음 28.9--동지들의 비난 경제적 곤경 위상 약화됨--공금 전용 시비--정윤교 사건--이 무렵에 양이섭을 수하에 둠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윤봉길 의거--안창호 여운형 현정건 피체, 양이섭 피체, 반제동맹 주도--32.12 체포되어 압송--7년 징역 선고 신의주형무소 수감--김이옥 귀국 뒤 죽음--딸은 친척에 의해 인천으로
*전향 회유 정책 1년 감형 출옥 39.7
4)출옥 후 인천 정착과 유휴의 세월
*친척 조준묵과 YMCA 시절 동급생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 이승엽 등 미곡상 업계 인물들 인연, 부자가 된 정수근
*박남칠 등이 비강업조합 만들어줌--사무실은 서경정(내동) 건어물 거리에
*김조이와 재결합 부평으 셋집
*처가식구들이 인천으로 옴--처남들이 사업 도와줌--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
*긴 유휴기간을 보냄-조공 조직과 멀어지고
*일제와 묵시적 타협선--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두 가지--흥아신춘 광고와 국방헌금 사건
*45.1 결국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
5)광복 후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영광과 굴레
*45.8.15 여운형이 필동 헌병대 감방문 열어줌--내가 건준 만드니 인천을 장악하라--석방되어 인천으로
*집앞에 기다리는 청년들과 보안대 조직 치안장악 8.16 --건준 조직 8.18
*부활된 조공 동지들의 거부로 소외됨
*인천 민전을 조직, 그러나 박헌영이 비난 반조운동 충고와 자기반성 서신 CIC에 압수당함
*결국 공산당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의 공작으로 연행 전향성명 내고 공산당을 떠남 46.6.23--<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전국을 크게 흔듦
*우파와 결합 단독정부안 받아들임
*48.5 제헌의회 출마 당선--국회로 가서 무소속 그룹 통합 통합 통합 → 무소속 의원 85명의 대표로 떠오름--헌법기초위원이 됨--평등지권 주장 발언 이승만이 주목
*48.7. 초대농림부장관-농지개혁법 주도--신속한 토지 균등성 확보성공--농민들 장악
*국회부의장 탁월한 사회 솜씨--6․25전쟁으로 국회문서 피난 아내 납북
*부산임시수도에서 발췌개헌안 협조--이승만 한계 드러냄
*52.8.5 2대대통령 출마 70만표
*그후 야인이 되어 도정궁 칩거--호헌동지회의 요청으로 재등장
*55.12 진보당 구상하며 떠오름--서상일과 경쟁, 신익희와 단일후보 협상중 신익희 급서 단독후보 216만표 획득 56.5.15
*56.11진보당 창당 -- 여러차례 위기--장택상 벼룩에 굴레를 씌울 사람인데
*58.1 결국 서울시경 TF팀에 의해 함정에 걸려듦--양이섭이준 돈이 북한 공작금이라고--1심 인정하지 않아 5년 → 2심 사형 → 대법원 파기자판 사형선고
*조호정의 탄원서
*죽산의 유언--사형당해도 애국심은 변합없어
*59.7.31 재심기각 17시간만에 처형
*총독부령 120호와 장례식과 비문 없는 비석
*왜 처형당했는가--분단을 정권연장에 이용
*미국의 태도--양다리 걸치기
6)53년만에 무죄선고 햇볕으로
*05.2.5 과거사 정리 진실화해위원회 설치--05.11 위원회 재심권유
*12. 11.1 대법원 무죄선고
*네 자녀들 형극의 길--외아들 규호가 걸어온 길/조호정 여사가 걸어온 길
3.[조봉암평전]에서 넓히려 한 지평
1)출생지 등
*2012년 가을 조사위원회 구성 → 강화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혹은 남산대로 정해진 과정
*김이옥의 호적 찾아냄 김이옥의 야학과 여성 운동
*동생 조용암의 존재 드러냄
2)인천 현대사 확충
*강화독립투쟁을 한국 독립운동사와 연결-조광원 유찬식 조구원 조용암 김이옥 부각시키기
*인천현대사를 한국사회주의운동사 맥락과 연결
*죽산이 일제강점기 어떻게 미곡상업계 인물들과 교유했는가
*광복 후 어떻게 전향을 하고 어떻게 조직해서 떠올랐는가 -- 인천의 명망가 신태범 박사 -- 재정후원자들 →심계택 김수현 함효영 배인철 이필상 등
*어떻게 판세를 역전해 당선되었는가--하상훈, 이성민, 김성국, 임홍제와 겨뤄
3)인간적 풍모
*세 따님과 아드님에게서 들은 인간적 풍모--영화
*그를 사랑한 네 여성 이야기
4.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1)흥아신춘 광고와 휼병금 문제와 국가유공 수훈의 유보
2)4․19당시 김일성 주석의 발언을 기록한 푸자노프의 저널 공개
3)새얼재단의 동상건립운동과 맹목적인 안티조봉암 인사들
4. 실현하지 못한 죽산의 꿈 → 평등과 정의의 사회
1)죽산이 추구한 진보의 개념
<창당대회 개회사>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발기취지문> 우리는 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 강령>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종합적인 연차 경제계획
(3)민주우방과 제휴 민주세력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4)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5)노동자 권리 보장,
→죽산이 처음 사용한 진보의 진정한 의미==책임정치 - 수탈없는 정의로운 경제 - 평화통일 흔히 3가지를 말하지만 강령에는 교육도 있다 →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반세기 동안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금 고스란히 우리 정치의 주요담론이 되어 있다 - 놀라운 선견성 -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5. 죽산이 안았던 원제와 숙명의 고리
1)조공 창당 멤버,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이 인정한 핵심 → 광복 후 전향 → 결국 조공 창당 멤버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 막혀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본인의 인생은 모순 속에 함몰
2)3대대통령 선거 216만표 농지개혁의 결과 농민들의 지지 +무력 북진통일 독재 거부 민심 + 새로운 정치 이념 제시 → 충분한 정당성
3)남한 정권의 실력자이면서 제3세계, 사회민주주의 추구 → 공산당이었다는 과거를 원죄처럼 뒤집어 씌워 → 사사건건 빨갱이로 몰려 → 장택상의 벼룩의 굴레론 → 그러나 결국 서울시경의 정권의 함정에 빠져 쓰러져 → 분단모순의 상황 민중은 속으로만 울어
4)남북의 첨예한 대립 속에 정권은 분단모순을 이용 - 죽산에 대한 사법살인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50년이 걸림
5)올림픽, 월드컵 개최 세계 10위권 경제 - 소련붕괴 동유럽 블록 붕괴 → 국가의 자신감 진실화해위원회 발족 → 대법원 재심 무죄선고 → 국가 양심과 國格 회복
6)그러나 독립유공 서훈은 유보되고 있고 아직도 남은 맹목적인 안티 조봉암 그룹
6. 죽산이 뿌린 씨앗과 오늘
1)죽산의 진보와 현재 한국의 진보
*국가 발전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의 날개가 움직여야 - 그러나 한국 진보는 분단모순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 공산주의는 용납 안 되고 제3의 길이 가능한데 백범 김구와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성숙 박건웅 등 설 자리 잃어 -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나라 갈망 - 분단 모순 속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죽산은 제3의 길 신념대로 밀고가다가 쓰러짐 - 타협과 포용과 관용이 있었다 → 해방 조국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 - 그런데도 간첩으로 몰려 죽어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지켜보기 안타깝다 - 죽산과 함께 했던 늙은 진보당원들 - “죽산과 우리의 진보와 오늘의 진보는 다르다/임정치 경제민주화 평화통일이었다./ 오늘의 진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말로만 하는 입 진보다”
*오늘의 진보 국민의 지지 10%도 안돼. <한겨레> 서평 - ‘넘사벽이다’ - 왜 그런가? - 현실정치를 무조건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고 냉소적이다 - 죽산처럼 온 몸으로 뛰어들어 대안세력으로서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데 입으로만 한다 - 종북 진보를 자처한다 - 변증법에서 말하는 진정성을 갖고 민중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2)죽산이 남긴 씨앗 키우기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잘 사는 나라 - 남북의 대회로써 평화통일을 이루기 - 네덜란드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 국가유공 수훈의 관철 - 진정한 복권은 국가양심의 회복
#낭독텍스트 -죽산의 최후 (이원규, [조봉암평전], 2013, 한길사)
그 날, 죽산은 아침부터 감방에서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독서를 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길은 밀도가 깊은 철학서적에 푹 빠지는 것이 제일이었다. 아침에 창가로 와서 관식에 있는 콩알 몇 개를 얻어먹고 날아갔던 산비둘기가 이내 다시 돌아와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울었다.
오전 10시 30분, 간수부장과 간수 한 사람이 와서 감방 문을 열었다. 그들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죽산은 처형이구나 생각했다. 그 순간 간수부장이 말했다.
“선생님, 가시지요. 집행입니다.”
죽산은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막 태어났을 때의 인간처럼 머릿속이 순수하게 깨끗해지며 ‘내가 착하게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한번도 안 입고 아껴둔 새 모시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산뜻하게 빗어 넘기고 하얀색 새 고무신을 신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내밀어 형무관이 내미는 수갑과 포승을 받았다. 곧바로 옥사를 빠져나와 교수형을 집행하는 사형장을 향해 걸었다. 한여름 땡볕이 내려쬐는데 통행로 옆에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는 꽃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도 꽃이 피는군. 그런데 향기가 없어.”
15평 쯤 되는 목조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곳, 그러나 그곳이 죽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그 곁을 지나는 순간 죽산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60년 평생을 돌아보기에도 부족할 만큼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을 것을 알았는데도 왜 그걸 안 했을까. 국회 본회의 사회를 보던 순간, 대학생 교복을 입은 채 엿보따리를 들고 엿을 팔러 다니던 도쿄 거리, 고향 강화 염하의 칙칙한 바닷물, 농지개혁법을 기초하는 부하직원들을 격려하는 순간들이 마치 환등기 사진이 바뀌듯 바뀌어갔다. 왜 추억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환하게 웃는 큰딸 호정, 그리고 어린 세 자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있어라. 아들딸들아. 형무관들이 가볍게 등을 밀어 그는 목조건물로 들어섰다.
닫아놓은 커튼 사이로 올가미가 보이는데 반대편에는 십여 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고 검사, 형무소장, 보안과장, 목사, 형무관들이 앉아 있었다.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다.
“본적 인천시 도원동 12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충현동 산4의 5번지, 성명 조봉암, 나이 육십일 세,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다음은 인상(人相)조사였다. 신장, 체중, 얼굴빛, 머리숱,쉼표* 전체적 체형 등을 확인하는 절차, 형무관은 가장 분명한 인상인 마디가 잘라져 없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확인했다.
임석검사가 집행을 선언하자 집행관이 다가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
죽산은 곧 숨이 끊어질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골고루 잘 살려고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죄를 짓고 가니 미안한 뿐이오.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느냐 물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곧바로 교수대로 옮겨졌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몸 전체에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죽산은 임석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부탁했다.
목사는 성경을 펴들고 「누가복음」 23장을 읽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집행관 중의 하나였던 고중렬(高重烈) 교도관은 2005년 2월『신동아』인터뷰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윽고 두 손과 무릎, 두 발이 포승줄에 묶인 조봉암 선생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한 교도관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쿵!’ 밧줄에 매달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숨이 끊어졌지만 30분도 넘게 매달아뒀다.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죽산 조봉암은 간첩 누명을 쓰고 이렇듯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나라 헌정사상 첫 사법살인은 그렇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