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양조장
안녕하세요
오늘은 양조장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합니다.
옛 조선인이 술 빚는 모습
1892년 9월 일본인 오카자키가 용강정(현 인현동)에 연 35석(1석은 약 150㎏) 생산 규모의 청주 양조장을 세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든 청주는 주로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소비했으나 아무래도 원료와 제품의 질이 떨어져 그들은 자기 나라, 특히 규슈 지방에서 수입된 청주를 더 즐겨 마셨답니다. 러·일 간의 제물포 해전 후 인천에 일본인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술 소비도 늘어나 1908년에는 양조장이 7개, 생산량은 4만석에 이릅니다. 개항 이후 인천은 전국 최대 미곡 집산지였으며 정미업이 발달했고 자연스럽게 양조장도 발달하게 됩니다.
심견(후카미)주조장
1899년 설립되었습니다. 성학소주를 만들었고 한때 인천 술 전생산량의 30%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판매는 전국적이었고 멀리 중국까지 수출했답니다.
동인천 삼치골목 부근에 있었답니다.
다와이양조장. 동인천 삼치골목 인천집 뒤 주차장 자리였습니다
조일(아사히)양조장
가장 중요한 인천의 3대 양조장 중 하나입니다.
송월동 시절 조일양조장 자리입니다. (황금박쥐 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했습니다.)
조일양조는 1906년 송판정(송월동)에서 길금(요시가네) 양조장으로 시작하여 1919년 도산정(도원동) 다꾸고메이 인천양조장을 인수합니다. 한국 최초의 기계식 소주 대량생산공장입니다. 조일양조에서는 지금 우리가 마시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소주를 생산해냈습니다. 같은 해 6월 평양에 세워진 (주)조선소주가 가장 오래된 곳이지만, 남한에 세워진 공장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소주공장입니다. 이 회사의 ‘금강표’ 소주는 양조계의 대표적 상품으로 1939년 이후에는 만주지역 시장에도 진출하여 만주와 사할린 등지에서도 각광을 받았습니다. 조일양조는 1928년 전국 소주양조업자연합회 회장사(社)를 맡을 정도로 사세가 컸습니다.
사업이 잘되자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이라 할 수 있는 축구팀도 창단했습니다. '인천 조양'이라고 불린 조일양조팀의 실력은 각종 대회를 휩쓸 만큼 막강했습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초대 우승과 2회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해방 후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때 선발선수 대부분이 조일양조 소속이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전업과 함께 서울 지역권에서는 유이한 실업 축구팀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였으며, 16명의 최종 엔트리 중, 5명이 인천 조일양조 소속 선수였습니다. 조일양조 터에서 가까운 곳에 숭의축구전용구장이 있습니다. 인천 축구의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만나는 느낌입니다.
조일양조는 해방 후 적산 공장으로 계속 운영되다가 세금 체납 때문에 소주 600석이 차압되었고 미군정이 양조 금지령을 내리는 등으로 인해 한동안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최근까지 이런 건물로 남아있다가...
이런 주차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동양조조합
1928년 최승우가 외리(지금 경동)에 설립했습니다. 조일양조장의 금강소주가 인기를 끌자 옛 동부경찰서 인근에
공장을 신축하여 대동소주 출시합니다. 인천 5대 소주 중 하나였습니다.
최승우는 인천상업전수학교(동산중학교) 설립당시 학교 부지를 제공했고 인천흥업주식회사를 차렸습니다.
인천흥업주식회사.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있습니다. 수요양원(옛 인형극장) 앞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양조장. 바로 배다리에 위치했던 인천양조장입니다.
인천양조장
공식명칭은 인천조선주주식회사입니다. 인천 양조장은 1891년생 황해도 평산읍 출신 상공인 최병두 선생이 24세 때 인천에 정착하여 정미업을 운영하다 1926년 양조업으로 전업하여 설립한 공장 중의 하나로 1927년부터 가동하여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 막걸리인 소성주(邵城酒)를 생산하였다고 합니다. 최병두는 1938년에 만석양조장을 인수하여 더욱 번성합니다. 이후 인천 최초의 치과의사인 사위 임영균에게 운영권을 넘겼습니다.
(임영균은 영화학교를 졸업후 경성치전에 입학하고 인천에서 임치과라는 의원이름으로 첫 치과병원을 개원했습니다. 임영균의 큰아들은 전 베네수엘라 대사를 역임한 임명진씨입니다)
1974년 인천의 11개 양조회사가 합병하여 인천탁주합동제조회사(인천탁주)를 만듭니다. 그때 인천양조는 인천탁주 제2공장이 됩니다. 그러다 1996년 공장 문을 닫습니다. 한 때 아벨서점의 곽현숙 대표가 2003년 1월 <아벨전시관>을 개관하여 3년여의 기간 동안 인천 관련 각종 소중한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후 활용이 중단된 채 방치된 상태였다가 스페이스 빔이 2007년에 이곳으로 이전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양조장. 대화주조(대화양조장)입니다.
유명한 동인천 삼치골목에 위치했었습니다.
대화주조. 대화와 천일이 합영하여 1938년 대화주조가 됩니다. 정대현, 김규환이 공동 대표였습니다.
인천양조장의 최병두는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동인천 삼치골목, 최초의 삼치가게 '인하의 집'
황해도 출신인 고 홍재남은 대화양조장에서 술독 닦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내는 식모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화양조장 앞에서 밥장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버려지던 생선 ‘바라쿠다’를 연안부두에서 주어다 튀겨팔았답니다. 몽둥이 삼치라 부르는 것입니다.
1974년 대화양조장이 문을 닫자 인하의 집을 세웁니다. 그러면서 하나 둘 삼치가게가 생기게 되었고 지금의 삼치골목이 형성된 것입니다. 후발 가게들에게 아낌없이 노하우를 전수하여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가 홍재남의 정신이었습니다.
와룡양조장
제물포역 맞은편, 제물포 시장 뒤편에 위치했습니다. 와룡양조장은 인천 일대에서 유통되던 와룡 소주를 생산했습니다. 와룡 양조장이 위치해 있던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 4동 일대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거의 대부분 논밭이나 과수원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와룡이라고 적힌 와룡 양조장 굴뚝이 높이 서 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경동 옛 조흥은행 인천지점 자리. 현재 주차장.
김휘관양조장이 들어서 소성소주를 생산했습니다.
송도에 설치되었던 진로의 야외입간판입니다.
참고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양조회사는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설립된
진천양조상회로 지금의 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