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관극장 역사
오늘은 "극장" 이야기를 올립니다.
동인천지역에는 한때 19개의 극장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동인천지역은 구도심이 되어버렸지만 최고의 시네마 천국이었습니다.
극장 밀집도가 이렇게 높은 지역은 동인천이 최고였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 바로 동인천에서 생겼습니다.
그것도 현존하는 극장입니다.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그런데 슬프하게도 애관이 역사적인 극장이라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모르십니다.
인천 사람들 조차도요. 하긴 저도 3년전에 처음 알았을 정도입니다.
애관극장은 인천의 보물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극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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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협률사 ( 이 사진은 서울 협률사 사진으로 추정)
을미개혁이 있던 1895년. 인천의 대부호 정치국이 협률사라는 공연장을 현재의 애관극장 위치보다 좀 더 위, 용동 쪽에 세웠습니다. 1902년 서울 정동의 협률사보다 7년. 1908년 이인직 원각사보다 13년. 1907년에 세워진 종로 단성사보다도 14년 앞선 것입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사진
정치국 (1865~1924
부산 출신. 젊은 시절 인천으로 이주했고 막대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endif]-->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1910년 전후 약도. 협률사(애관자리)가 보입니다.
1911년 축항사(築港舍)라 명칭을 바뀌게 되는데 부지 48평을 가진 2층 건물의 정원 500명 규모였습니다. <!--[endif]-->
여기에서 극작가 진우촌·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元雨田) 등 기라성 같은 <!--[endif]-->
인천 문화계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endif]-->
1924년에 애관으로 개칭됩니다.
애관은 일본 발음으로 아이강. 당시 극장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1928년 대중잡지 별건곤에 소개된 애관과 외리
기사를 보면 애관의 위치가 자세히 나옵니다. 불당은 능인사이며 성당은 답동성당입니다. 요리집의 장고소리는 용동권번입니다.
세상이란 멋대로 지내는 것이란 것을 한 장에 그려놓은 표본이 바로 인천의 외리라는 대목이 재밌습니다.
애관은 연극이나 영화만 상영하던 공간이 아니였습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던 곳입니다.
1928년 5월 5일 어린이날. 동화극 '참새' 상영
1928년 11월 24~25일 나운규 '아리랑'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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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무도대회를 애관에서 열었습니다
1934년 전인천야구 대회. 애관에 실업팀 야구단이 있었습니다. 조선인만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팀이었습니다.
1935년에 우승까지 합니다.
1930년대 중후반에 최승희의 공연이 열렸습니다.
1936년 애관의 입장객은 15만명에 이르렀습니다.
권투 경기까지 열립니다.
1945년 8월 18일 애관극장에서 조봉암 선생께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빨리 결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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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틀 뒤 8월 20일 애관극장에서 조봉암의 주도로 보안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조봉암의 딸 조호정 씨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집 근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유독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했다"며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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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창단한 인천관현악단의 처음 공연도 애관에서 펼쳐졌습니다.
1948년. 맨 오른쪽 아래 건물이 애관극장
1948년
Norb-Faye씨께서 답동성당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촬영하신 사진
1950년 9월 15일, 함포사격으로 인해 소실됩니다.
종군기자이셨던 임응식씨께서 촬영하신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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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25일. 폐허가 된 애관극장에서 바라본 답동성당의 모습입니다.
1951년. 임시로 세운 애관극장.
진남포에서 피난 나온 18세 한명숙은 태양악극단에 들어가고 데뷔 무대가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1953년 애관에 특설링을 설치하여 레스링 대회가 열렸습니다.
1954년 5월로 추정
예전 극장 자리 보다 좀 길가로 내려와서 지금 애관 자리에 다시 건물을 지었습니다.
1955년 5월. 피아노 연주자 번스타인의 내한공연이 열렸습니다. <!--[endif]-->
애관에서도 그의 연주가 펼쳐졌다고 합니다.
1956년의 애관극장
1956년. 동산고 학생들.
애관극장 앞입니다. <!--[endif]-->
1960년 9월 6일 애관극장 신축
) -->극장 외형은 비슷한데 이 시기 전후를 살펴보면 입구 계단이 없고 있고 차이가 있습니다.
이때 '애관'이 '애관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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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인천공고 졸업앨범 사진
1964년 이봉열 씨가 인수하여 확장 리모델링합니다
65년. 신성일 엄앵란 애관 쇼에 출연.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합니다
1972년 탁상덕 씨가 인수합니다.
1980년대에 내부 리모델링.
1989년 70mm 영사기와 입체음향 설비를 갖추었습니다. 당시 전국에 네군데 극장 밖에 없었던 70미리 영화 상영관이었습니다.
현 애관의 주인, 탁경란 사장
1999년 인천CGV14가 개관하여 위기를 느낀 애관극장은 2004년 5개관으로 증축합니다. (사진은 2016년)
애관 극장주
정치국(1895~)
홍사헌(?~)
김윤복(1924~)
기신양행(1928~)
실업자전도회 대표 최복산(1945~)
김장복 (목재상)
김태성
김석신(1954~)
이봉렬(1960~)
탁상덕(1972~)
탁관(1991~)
탁경란(2000~현재)
애관극장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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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관은 단순하게 영화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한 극장은 아니었습니다. 애관은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도 각광 받았습니다. 정부가 주관하는 종두 접종에서부터 노동 단체의 총회나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시위 모임, 민간 사설 단체가 주도했던 강연회나 연주회 내지는 각종 행사 등이 애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120년이 넘은 애관극장.
애관극장만은 앞으로도 계속 꿋꿋하게 버텨주길 기원합니다.
학교 단체관람으로 본 007 시리즈.
지금도 타이틀 곡을 들으면 가슴이 뜁니다.
동인천역에서 걸어서 5분 정도입니다.
[출처] 인천 최초의 극장-애관극장|작성자 개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