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각로 배다리 - 구프
스캔이 잘 안되네요.. 눈을 크게 뜨시고 잘보셔야 할 듯~~~@@
수문통이란 물이 드나드는 수구문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서 인천 뿐만 아니라 전남 설도를 비롯해 충남 등 댐이 있거나 매립을 한 뒤 수문을 만들어 놓은 곳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입니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는 동구 송현동 일대의 수문통은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갯골로 넓은 갯벌 위에 갈대가 무성했던 저지대 습지였습니다.
이 갯고랑은 현 동국제강 위치에 있는 수구문에서 부터 시작되어 화평파출소 아래에서 중앙 시장 밑으로 “ㄱ"자로 흘러 배다리 철교 아래까지 이어진 뱃길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중앙시장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배다리라는 지명도 이처럼 배를 타고 들어온 주민들이 나무로 만든 다리를 밟고 내리던 것에 유래되었다 하니 당시에 갈매기 날아 들던 수문통과 배다리의 풍광이 그려짐니다.
옛 화도진지도를 보면 지금의 화수동과 송현동 사이로 여러 갈래의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한줄기로 모여 흐르는 것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근대사의 인천의 지형은 반도 형태로 튀어 나온 모습으로 빙 둘러 곳곳에 포구가 많이 있던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남동구 논현동 앞엔 호랑이가 입을 벌린 형태의 호구포가 있었고, 신흥동 앞엔 탁포(터진개), 현재 파라다이스 호텔 앞은 제물포, 인천역이 위치한 바로 뒤는 북성포, 괭이부리 마을 이 있는 만석동엔 조선시대 각지의 세곡의 쌓아두던 미곡창고가 있어 성창포라 불리었고 현재 주안역 뒤 주안 5공단이 들어서 있는 곳을 십리포라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수문통으로 길게 이어진 갯골엔 섭도포라는 포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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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천은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해수면이 비교적 낮은데다가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면 수천㎡의 갯벌이 드러나 바다를 매립하기 쉬운 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빗금친 부분) 현재 동국제강이 있는 곳부터 현 화평파출소까지 약 780여m의 길이를 수문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조계지인 현 중구와 동구지역을 포함하는 제물포 일대를 장악한 일본인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 확장을 위해 도로와 항만, 공장부지, 주택 등 지을 부지가 부족 하여 많은 땅을 필요로 했는데 이에 시작을 한 것이 바로 매립공사이었습니다.
수문통 갯골을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일본인 요시다라는 사업가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약 10만㎡(3만3천여평)를 매립하면서 화평동과 배다리까지 "ㄱ"자로 꺽이는 하수로를 만들고 하류에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을 설치해 바닷물을 막은 것입니다
물막이 공사를 한 뒤 현 광성고등학교 언덕과 화평동 언덕 그리고 송림산(수도국산)언덕을 깎아 흙을 매립했다고 전해짐니다.
요시다는 이 일대를 매립해 당시에 십만원이 넘는 어마 어마한 돈을 벌어 동아 조선등 언론에 특혜 시비에 거론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시다가 이렇게 특혜시비에 연루되자 땅집고 헤염치기로 번 돈을 생색내기로 빠져 나가기 위하여 모색한 것이 지금의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송림초등학교는 당시 아사히초등학교( 현 신흥초등학교)의 부속 건물을 해체한 목재로 지었다고 하니 요시다가 송림초등학교를 지으며 들어간 건축비는 그리 큰 돈은 들어 가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복개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위 사진을 촬영한 정확한 년도를 알기가 쉽지 않네요... 위에 보이는 건물이 옛 경기도 적십자병원이었습니다.
56년에 설립돼서 운영하다가 77년인가 숭의동 현재 유비스 병원밑에 성인천한방병원 자리로 갔다가 96년 연수동으로 이사했지요
이 건물은 이후 송현성당이 이어 받아 개축을 해서 성당으로 사용 작년 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현재 허물어져 울타리를 쳐 놨더군요.
복개가 되기 전 이 수로는 높이가 약 7-8m였는데 만조때는 물이 넘칠 때가 많아 주변 주택들의 부엌에도 흥건하게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 수문통엔 마누라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사는 곳"이라 했다 하는군요.
물이 빠지면 작은 바닷게와 망둥이들이 많아서 이를 잡아 먹기 위해 몰려드는 뱀이 특히 많았다 합니다.
이 수로는 특히
동구 송림,화평일대의 유일한 하수구이기도 했지요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버리는 생활 오폐수가 모두 이 수로를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냄새도 많이 나고 질퍽거렸던 동네였습니다.
송현교와 가까이 있던 곳에서는 돼지고기와 순대, 돼지 부산물들을 파는 가게가 많았고
이 가게들이 후엔 양키시장 옆 순대골목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합니다.
위 사진을 찍은 위치를 찾아 찍어 봤습니다. 적십자 병원 건물 자리는 중앙에 노란색 프랑카드가 있는 울타리 자리입니다.
건물이 아직 남아 있으면 연세가 56세가 되시는건데..... 아쉽지요.. 옛 건물들이 자꾸만 허물어져 가는 것이.
송현교 교각 입니다.
지금은 복개된 아스팔트 도로 위로 차들이 달리고 있어 이곳에 작은 배들이 다니던 갯골이었다는 얘기가 믿겨지지 않지만 1940년대까지도 갈매기와 함께 나룻배가 드나 들던 뱃길이었음을 알 수 있는 표지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또한 이 갯고랑 위에 설치되었던 송현교는 화평동과 송현동을 가로 지르는 큰 갯골을 건너기 위해 축조된 다리로서 사람들만 겨우 건너던 외나무 다리를 걷어 내고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폭3m에 길이15m로 철근 콘크리트 다리였습니다. 지금도 화평파출소 옆에 두 개의 화강석 교각이 서있어 당시 다리의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수문통지역은 1989년 송현치안센터에서부터 삼두1차아파트까지 복개되었고 1999년 현재 송현교 표지석이 있는 화평치안센터까지 완전히 복개되었습니다. 지금 우측에 보이는 상가들이 있는 자리가 옛 공작창자리였습니다. 지금은 동구 센트레빌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공작창은 기차의 부품이나 부속품을 만들던 곳입니다.
1945년 해방된 이듬해 이곳에서 만든 해방호 열차가 경부선을 달렸다고 합니다.
일본인 사업가 요시다가 자리를 잡은 그 자리에 오늘날의 송현초등학교가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송림초등학교는 1937년 개교를 하였으니 7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네요.
유서깊은 학교이지요...
위에 금산건강원 경운상회가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1943년경에 가마니 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최근에 지붕을 다시 했더군요, 원래 바람이 드나들도록 이층 원두막 창이 있었는데.....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인들의 쌀퍼나르기가 본격화 되지요. 1900년대 초 인천에서 제일 활발하게 일어났던 사업은
당연히 정미소였습니다. 일본인들의 정미 사업은 미두취인소라는 거래소를 탄생시켰고 정미소가 제일 많았던 인천과 가까이에 있던 경기도 일원의 농촌에서는 가마니를 짜서 공급을 했습니다. 볏집으로 만든 쌀가마니죠.
육로로 실어나르기 힘든 시절..... 뱃길로 수문통 갯골을 따라 배로 실어다가 바로 저와 같은 가마니 창고에 보관했다가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곳에서 야채가게를 운영 하시는 경운상회 사장님은 연세가 70이 넘으신 분인데요, 수문통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수문통에 사시는 분이심니다.
야채를 도매가격으로 싸게 팔다보니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 오시는 손님들이 많더군요.
무우 배추 채소를 주로 파시는데 말만 잘하면 덤으로 두어개씩 막 더 주세요..ㅎㅎ
뒷 골목엔 아직도 일제시대의 적산가옥들이었던 집들이 남아 있어요.
왼쪽에 저집은 어느 영화에도 나왔던 집이라든데...
특히 이 건물은 비어 놓은지 좀 오래된 듯 한데요. 담쟁이를 뒤집어 쓰고 있어 허물어질 것처럼 낡았습니다.
이 건물이 있는 주변엔 매립이 시작된 1939년 이후 일본인들의 관사가 지어 지기 시작했던 곳으로 지금도 맛배지붕을 한 일본식 2층 다다미 집들이 여러채 남아있긴 합니다. 몇 년전 빌라 붐이 일어났을 때 많이 헐려 나가고 이젠 몇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수문통에 있던 공작창과 학교, 공장을 관리하던 간부급들인 일본인들 관사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현재
동국제강이 자리 잡고 있는 수문통 끝의 수구문이 있는 자리죠...
저기 보이는 아래 교각 밑으로 아직도 바닷물이 들고 있습니다.
저기서 왼쪽으로 꺾이어 쭉 나가면 바다입니다.
사람들이 드나 들지 못하도록 철망을 쳐 놓아서 철망 사이로 폰만 집어 넣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ㅎㅎㅎ
이상--- 수문통을 아십니까 1부를 마침니다
[출처] 수문통을 아십니까( 1부 )...?|작성자 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