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_도시, 영희의 고향이야기 - 5

 

부평연와의 간략한 역사와 벽돌공장 노동자들의 삶

-김규문씨와 인터뷰를 통해 듣다!

 

김규문. 1965년, 20살이 되던 해 서울 영등포에서 부개동으로 내려와 88년 5월까지 24년 일하고, 지금까지 벽돌말 사람들과 친목계를 하며 부평에 살고 계신 김규문씨와의 인터뷰를 하며 벽돌공장 역사와 마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공장에 관련한 다양한 이야길 해 주셨고, 그 내용을 정리했다. 

 

 

공장앞에서 .. 김규문씨.

 

 

 

부평연와는 어떻게 생긴거예요.

 

최성순. 일본 회사 소사일을 보다가 일본군들이 철수하면서 적산물-공장포함 약 38천평 소유. 어디가 자기땅인지도 모를 정도로 넓었다-로 받음. 벽돌을 굽기 위해서 연탄이 필요해서 연탄장사를 하던 이종수씨를 불러들임. 돈이 있던 사람이 아니라 일본놈들이 주안서 연탄을 받아 썼는데 (벽돌을 굽기위한)연탄을 받아놓은 상태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퇴직금으로 연탄으로 줌. 그래서 쌓아놓은 연탄을 다 팔아먹었는데 쌓아놓은 연탄 아래가 평지인줄 알았는데 파도 파도 계속 연탄이 나오는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고운 연탄이 아니라 투닥투다 튀는 연탄 .. 곡수라 하는데 .. 이것이 타고 나면 그 가루가 밑으로 떨어지는데 그건 이미 타버렸기 때문에 팔 수도 없는데 그것을 다시 흙과 섞어서 손으로 뭉쳐 말려서 팔았다. 화력은 세지 않아도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많이 사서 썻다.(양성연씨_ 루핑공장에서 겨울에 일 없을때 가서 그걸 상차-차에 싫어주면서 얻어오곤 했다.)

 

부평연화합자주식회가 상무-이혁재.동인천에서 철물점을 크게하고 있었는데 현찰이 많았고, 사장-최성순은 땅과 공장을 갖고 있었고, 이종수-연탄을 대서 합자해서 벽돌공장을 차렸다. 기본 재산가가 아녔기 때문에 일은 많고, ??는 큰데 노상 돈이 없어 벌벌했다.

 

언젠가 70년대 중반인가는 그 넓은 마당에 깔았던 벽돌까지 다 팔아서 돈을 엄청 벌었다. (허태동씨_맞어, 언제 한 번 그 마당이 텅 비었더러구. 그때... 나쁜 벽돌도 많이 만들고 그랬지 ... 양성연씨_ 그래, 그때 벽돌 파동 날  때 한번 있었지)

 

그런데도 왜 망했냐면 사장들이 상주하지 않고 주안 본사에만 있었단말이야. 그런데 그 밑에 일하는사람이 몇 천장 팔아도 몇 백장 팔았다며 보고를 하니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돈을 벌었지. 근로자들은 12달에서 7개월 일하고 5개월 일했으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벗어날 수없는거야. (양성연_노깡도 똑같았어. 겨울에 가불해서 먹고, 여름내 갚아가며 살았지.. 가불을 했으니 나갈수도 없고) 흙 만지는 사람들 똑같았어 .. 그때는 정말 고생들 많이 했지.

 

그 고생하고 있었으니 새마을운동이다 하며 먹고살게 해준건 박정희가 잘했어. (양성연씨_외국 갔다와서 경부고속도로 뚫은거 아냐..)월남도 우리나라에서 군인을 수출해갖고 그걸루 .. 월남 갔다온 사람들이 월급이 문제가 아니고 미국 원조물들을 갔다온 당사자들 한테 줘야하는데 안주고  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뚫은거야 .. 한국에 있으면 무조건 가야했는데 월남 갔다가 죽은 사람한테만 보상을 많이해주고 갔다 살아 온 사람은 보상이 없었다. 그거 가지고 개발한거야.

(... 네 분이서 월남 파병과 2명 밖에 잘 수 없는 작은 집, 보리 한 말 가지고 열흘을 살았다는 이야기, 지역감정은 종철이가 만들었다.. 등 .. 당시의 열악한 도시 서민들이 생활을 이야기하셨슴 .. 강)

 

당시 벽돌 공장 사진은 벽돌 나온거 이거 하나 뿐. 송신소 철탑에 올라가서 찍음.

 

월급이 따로 없었다. 흙 벽돌을 찍어내는 만큼 돈을 받았다고 한다. 10개 찍으면 만원, 5개 찍으면 오천원. 그런건데 그게 일종의 도제다.

 

 

돈을 많이 벌때도 있었는데 한 번 잘 벌면 3년 동안은 불경기었다.

(강_그렇게 불경기면 어떻게 해요?)중간에 시마이를 한다. 그러면 근로자들은 죽거나 살거나 회사가 돈이 없는걸 어떻게 하냐. 대물을 할 수 없다. 회사가 돈을 벌든 안벌든 요즘엔 으쌰으쌰 하면 다 받아주지 않나. 그러나 그때는 으쌰 할 수가 없다. 조금 싫은 소리만 해도 해고를 시켜버렸다. (강_아..그때는 마음대로 해고 했어요?) 그렇지, 그땐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엎드려서 "살려주십쇼" 해야했어. 근로자는 아무 힘이 없었지.

 

88년 5월에 나오면서 벽돌공장 노조를 맨 먼저 만들어줬다.

나는 축산을 하기때문에 사료를 저렴하게 사기 위해서 사업자등록증을 냈거든. (그래서 기록을 잘 해놨지.) 그런데 그때 회사에서는 이중장부를 써서 깜짝 놀란거야. 퇴직금 안주면 세무서에 가서 이중장부 신고하겠다 했지. 월금 3만원 줬는데 2만원 줬다고 쓰고 나머지는 탈세를 한거야. 나도 월급 주고 받은거 다 써놨거든. 그 기록을 보여주며 협박을 했지. 그래서 나는 퇴직금을 받았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1원 한 장 못받고 나왔거든. 억울하잖아 .. 그래서 (내가 노조를 만들어주고 나왔지.) .. 그래서 (사업주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지.

여의도에 전국금속노조연맹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었어. (그때는 벽돌공장이 금속노조에 속해있었어요?) 그때는 요업쪽은 다 금속쪽이었어.그 사무실에 가서 설립을 했지. 그때 노조를 만들어놓으니까 조금씩 으쌰으쌰도 하고 ...

 

그때는 상여금이라고 있었어.월급을 받는게 아니고 하루종일 .. 시간도 노임도 결정되지 않았어. 일본말로 하면 우께도르, .. 라고 하지. 일 하는데로 받는거야. 10개 만들면 만원 받고, 5개 만들면 오천원 받고 하는 식이지. 자기 능력껏 .. 그걸 상여금이라고 했다. 그래서 퇴직금이 없어. (강_월급도 없고? .. 그렇게 받고 어떻게 살아요?)  ..  이 즈음 네 어르신들이 한참 도제식 일과 상여금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 중략 ..

 

사람이 살고 죽는거에 지금은 여러가지 이유를 만들어서 편하게 만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하나 죽는 게 파리 한마리 죽는 것과 똑같애. 어디 법에 하소 할 때가 전혀 없었어. 일하다 다치면 처음 한 번만 치료비의 반을 줘. 처음에만 .. 그러고 나서  몸이 낫지 않으면 그냥 해고야. 그만두라 하는거지. (강_ 계속 치료해야 하는데 치료비도 안주고 해고요?) 전혀 없지 ..

그런 세상을 .... 살았어. 그런 세상을 살아오다가 .. 지금은 참 좋은 시절이지 ...

 

 

그러면 언제 부평연와-벽돌공장이 문을 닫은거예요? 우리집은 94년 즈음에 나온 거 같은데 ..  

나오기 전에 벽돌공장 마당에 운전면허학원이 있었는데 ..

 

 망한 게 아니고 자동차 운전면허학원(삼원)으로 전환을 한거야. 벽돌공장은 문을 닫고 .. 나중에 상동에 보상이 나오면서 .. 벽돌은 그만 만들게 되고, 삼원자동차운전면허학원으로 전환한거지.  93년쯤 생긴거야. 

 

  ...여기에서 언제 문을 닫고, 언제 자동차 학원이 생기고 .. 하는 것이 서로의 의견이 분분했다. 일괄로 모두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상 받고 나갈때마나 집을 부수는 방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각자의 기억이 좀 달랐다. 집단적인 저항이 없었던 건 보상을 충분히 준 마지막 개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또 1대 1로 해결을 하며 집을 없앤것_허태동. 양성연씨가 자동차면허를 그 학원에서 따려다가 다 못따고 나왔다고 하셨는데 그 년도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셨는데 95-6년으로 알고 계셨다.

 

  그리고 98년 상동이 개발되면서 바뀌었는데 부평연와쪽은 조금 늦게 개발된게 2000년 즈음이다. 벽돌연와사택은 벽돌공장과 같이 98년에 모두 비워졌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삼원자동차 학원은 벽돌공장 앞마당을 세를 준거고, 그 학원이 잘 되자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뒷마당을 사서 한독 자동차 학원을 차렸고, 앞마당은 부평연와에서 계속운영했다. 자동차 면허학원도 부평쪽은 허가가 나지 않았고 부천쪽만 허가가 나와서 공장의 반쪽에만 면허학원이 두개가 있었다고 한다.

 

 

흙산은 언제 없어졌어요? 있는거 보고 나왔는데 ..

 

흙산은 자동자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있었어. 개발할 때까지 남아있어는데 벽돌은 안찍으니까 .. 그냥 그 흙이 그냥 있었던거지. 그래서 개발사에서 그 흙산을 샀어. 저지대가 많았으니까 그걸 평평하게 만들어야 하잖아. (강. 맞아요. 공씨 할아버지내 집이랑 밭있는 끄트머리에 3미터 넘는 높이 차이가 있었고, 그 아래서는 논농사를 지었잖아요.)

 

(양성연씨_그걸 부평연와에서 다 파먹은거야. 부평연와에서 ..)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부평연와에서) 경인천철 밑에서부터 해마다 내 년에 땅을 팔 자리면다 싶으면 오늘 부터 토주들이랑 계약을 해. 그래서 (흙을) 파 먹어. 그려면 새땅이 되니까 토질이 좋잖아. 그러면 농사 지을 사람한테 팔아. 옆에 땅 높이가 높은 땅은 논농사를 짓는데 물이 다 빠져버려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잖아. 그러면 토주들이 공장에 팔고, 공장은 그 땅을 사서 흙을 파서 쓰고, 그 땅을 또 농사 지을 사람한테 팔고 .. 그러면 흙은 공짜로 오는거야. 그렇게 하다보니까 여기(경인전철 밑에서)부터 파다보니 .. 동아기업 앞까지 다 파먹은거지.

 

나중에 국가에서 흙을 파는 것에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기가 왔지. 흙을 파고 매립-원상복귀를 해야하는데 당시에는 연탄재가 많이 나왔거든. 그래서 그 연탄재를 돈을 받고 받아서 그 땅을 매립해서 팔았지. 그런데 4-5년간은 그 땅에 작물이 자라지 않는거야. 농사도 안되고, .. 그런 사람들을 요즘에는 보호해주지만 그땐 그런게 없었거든  토주들이 농사를 못짓고 동아기업에 팔은거야. 공장하기엔 딱 좋은거야. 비가 많이와도 물이 다 빠지고 .. 단단하고 .. 동아기업(자동차 부품 만들던 공장)이 싸게 사서 들어왔지.

 

신상리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땅-흙을 파먹은 자리-오른쪽 저지대에서는 오랜동안 농사를 지었고, 왼쪽에는 동아기업 외에도 공장이 많이 들어섰는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란 걸 이제야 알았다. 부평연와에서 흙을 파기위해 땅을 샀는데 이 땅을 깊에 파서 쓰곤 했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는 깊은 웅덩이가 많았던 기억이 있다. 시화오빠도 그런데서 친구들과 수영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흙을 쓰고 거기를 연탄재로 매립하고 그 땅을 팔았는데 거기서 일 하던 간부들이 많이샀다. 비싸져서 일반인들은 사지 못했다고 한다. _강.

 

 

그럼 그렇게 땅 팔면서 부평연와도 돈을 많이 벌지 않았어요?

 

돈을 많이 벌었어도 회사측도 7개월은 일하고 5개월을 쉬니 실제적으로 돈을 벌었다고 할 수 없지. 게다가 사장들이 부평 본사에서 행정만 보지 여기 공장에는 남들이 있었던거지. 그러니 10차 팔고도 7차 팔았다고 보고해도 모르는 거지. 그때 돈 번 사람들은 벼락부자로 잘 먹고 살았거든. 자기 대에서는 잘먹고 살았는데 자식들 커서 대학졸업하고 사업하고 하면서 다 날려먹었지.

 

오흥근씨가 그때 떼돈을 벌었지. 오흥근씨가 나보다 2년 늦게 왔는데 부평연와 전부랑 고종사촌간이야. 전무 엄마가 오흥근 고모야. 오흥근이가 총각때 와서 많이 고생했지. 아무래도 친척이니까 그 일을 해서 돈을 벌게 된거지... 이러면서  오흥근씨에 대한 다양한 애피소드가 나왔다. 가방만 매고 올라와서 돈을 많이 벌었다며 자랑하고 교회를 지었다며 자랑하고 그러면서도 동네 사람에게 밥 한끼 사지 않고 자랑만 해서 인심을 좀 잃었다는 말도 .. 장사하다 마누라가 힘들어 해서 시골에 있던 동생(오대근)을 데려와  연탄가게를 하게 했는데 형 덕분에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자기가 고생해서 번거라는 알아야 한다며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며 가족사로 이어졌다.

 

 

 

몇 마디 질문을 하면 수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의 삶은 그렇게 촘촘히 각자의 삶을 살고, 그것들이 어우려서 역사라는 수를 놓는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슬프고 가끔은 기쁜 삶들이 어우러진다. 부평연와 벽돌공장의 이야기는 더 촘촘히 수 놓아질 수도 .. 이것이 거의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커다란 벽돌공장이 있던 작은 마을의 역사에 설긴 수가 놓여지고 있다.

 

 

 

 

 

 

재개발로 사라진, 그 마을과 공장

인천 최초의 공장 '부평연와'

옛날에 '부평연와'라는 벽돌공장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공장으로 인천 최초의 공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는 부평이나 그 일대에 벽돌공장이 좀 더 생겼었나 봅니다. 인터넷이나 시청, 구청, 국토지리정보원, 부평역사박물관등에 관련 자료나 지도, 사진 등을 찾아보는데 내용이 적고, 맞지 않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반, 재개발로 그 마을의 흔적은 부평동중학교, 부평여중학교와 일부 길을 제외하면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00년대 초 동중학교 입구이자 부개역 입구에 살면서 동네 한 바퀴 돌며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네.'하는 생각뿐이었지만 몇 년 전 산책길에 만난 붉은 벽 - 부평 동중학교  외벽을 보며 여기에 전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무심히 했습니다.

 

 


어쩌면 고향이었던 그 마을 이야기

왠 벽돌공장이냐구요? 제가 그 '부평연와'가 이던 벽돌막 마을-부개동이었다가 부개 2동이 되었다가 이제 3동인 그 어디에서 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거든요. 20대 초중반 나이에 지금의 부개주공아파트 단지로 재개발이 되면서 그 마을이 사라졌습니다. 논과 밭, 작은 공장과 작은 집들이 있던 그 곳에는 이제 거대한 아파트들이 내려앉았습니다.

아무 저항도 없이 우리는 왜 그 마을을 떠났을까? 그곳에 살아가던 많은 분들은 이제 어디에서 무얼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곳에서 어울렸던 동무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가? 경일이 오빠, 순실이, 지연이, 선녀, 광일이 오빠, 용구 ...

이제 도시 한 가운데가 된 그 마을은 도시의 외곽이었습니다. 논과 밭도 많았고, 공장도 많았습니다. 단순히 벽돌공장에 다닌던 사람만 살았던 건 아니었거든요. 배추꽃 피던, 냉이 캐던 그 붉은 밭의 포실포실 보드라운 흙이 저는 아직도 기억에 선 합니다. 송사리 잡겠다고 갔던 웅덩이에서 시커먼 거머리에 놀라 엉엉 울면 누군가 풀잎으로 떼어주던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이면 논에 잔뜩 쌓아놓은 볏짚더미에서 아랫쪽 볏짚을 빼내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옹이종기 모여 앉았던 기억도 납니다.

벽돌공장이나 노깡공장 가마는 벽돌이나 노깡을 굽고 난 온기가 남아잇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 안에서도 꽤 많이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비를 피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찰흙을 가져오라면 그 공장 흙반죽을 퍼 갔는데 모래가 좀 섞여 있는 것이 늘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마을 어르신들의 부음을 들으며

십 수년 전 부터 그 마을 어르신들의 부음을 어머니를 통해 전해듣고 있습니다. 대부분 암이거나 더러는 교통사고였던거 같습니다. 올 해 76세 되신 (호적상은 44년생 일제로는 40년생) 어머니는 지인의 부음을 전해들은 날이면 " **가 죽었단다. 암 걸렸다더니 ... **엄마 알지? .. 참 착했는데 .. " 하시며 돌아가신 분의 인품이라던가 그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산다더라. 누구는 어떻다더라, ... 마을이 사라지고 흩어진 분들은 30-40년 이어온 친목계모임을 통해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식사하시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시기도 하고, 부평시장인근에서 장사를 계속하고 계신 어머니 가게를 참새 방앗간 삼아 들러가시기에 소식이 머무릅니다. 

 

어머니도 아프시고, 그 옛 어르신들 주름살이 깊어지니 당신들 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 마을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작년 겨울 옛 마을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다는 오빠와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개인의 가족사?

그것은 한 시대의 역사다.

 

사람이, 그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시간'과 '공간'들이 바로 역사라는 생각, 한사람 한사람의 역사가 모여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은 마을공동체활동, 공동체 문화예술활동을 하며 굳어진 저의 역사관입니다.

 

역사속에서 수 많은 민중의 역사를 몇 퍼센트 되지 않는 이들의 글 속에서 자간과 행간을 읽어가며 찾아내야하는 것이 저는 좀 억울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역사도 그렇게 쓰여지겠다는 생각에 화도 났습니다.

 

'내 손으로 기록하겠다.' 제 사진이 예술이나 작품이라는 이름에 붙히지 않고, 그저 이 시대와 공간, 사람들의 '기록'인 이유입니다. 손가락에 인대가 늘어나고, 부딪혀서 찌그러져가는 카메라를 손에 붙히고 사는 이유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라는 말 .. 한 생을 살아간, 내 삶을 책으로 쓰면 몇 권인지 모른다는 우리 엄마들의 말 .. '그렇게 찍으면 몇 장은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 

 

 '도시 - 인천, 영희의 고향 이야기'는 그래서, 그렇게 그 곳- 사라진 마을에 살았던 우리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을 시작합니다. 

 

 

옛 흔적을 수 백년을 이어가는 유럽의 도시들처럼

미래들에게 고향, 인천을 전해줄 수 있을까?

 

도시는 고향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없을까? 고향은 무엇일까? 인천에는 어떤 사람들이 왜 모여살고 있을까? 중학교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역 역사를 배우는 경우도 없었고, 어떤 선생님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만 그래도 내가 사는 도시가 궁금했습니다. 궁금증을 풀 방법도 마땅히 몰랐기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

 

제 2의 고향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부터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린 조카들에게는 당연히 고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향과 살았던 적 있던 곳에 대한 괴리를 발견하며 고향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굳이 유럽의 옛 건물이 있는 도시를 생각한 건, 배다리에서 옛 도시의 조각을 살려내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 김정후 박사의 영향입니다. 보도블럭 하나를 바꿔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그곳이 도시를 지속시키는 방식, 옛  것들 그저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새로 쌓아올리는 새마을 운동처럼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내 머릿속에 있는 그 마을 풍경을 생각하며 전통과 역사를 잇고, 변화, 지속시키는  성숙한 시민은, 도시는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라진 그 마을의 이야기,

아직 거기에 있는 당신의 마을 이야기가 인천의 역사입니다.

 

인천의 한 귀퉁이, 이제는 사라진 그 마을에 살았던, 아직 그곳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 인천의 역사 한 조각을 써내려갑니다. 그들로 인해, 저에겐 도시, 인천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젠 지금, 제 이웃으로 살아가는 당신들의 역사가 있어 저에게 인천이 의미가 있습니다. 너무 옛날 이야기 아니어도 내가 아는 당신의 역사가 인천의 역사입니다. 한 번 들려주세요.

 

 

rain-o2@hanmail.net

010-7389-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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