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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조 화가_소나무에서 삶을 찾다 사람과 더불어

2014. 4. 1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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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인 이창조 작가와는 페이스북에서 그림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다가 강남의 갤러리 엘르에서 만난 후 인터뷰의 인연으로 발전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용인 수지에 있는 그의 작업장을 찾았다. 작업장이라고 하지만 온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 서양화가 이창조 작가는 동양화의 단골 소재이자 우리의 나무 소나무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창조 작가(본명: 이창기)는 중고신인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프로작가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전시경력은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이다. 그는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줄곧 미술학원을 경영했다. 평생 그림과 함께 호흡을 했다고 자부하던 터라 두려움은 없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작업실을 구해야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대형아파트를 싼 값에 전세를 얻는 행운을 가졌다. 아파트 방방마다 그림창고이다.

그의 부인에게 물었다. 미술학원을 접고 고되고 힘든 프로작가의 길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미술학원을 경영하면서 매양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라구요. 그 소리에 지쳐가던 중, 더 이상 늦어지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아 전업화가를 허락했어요.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발자국 소리도 방해가 된다고 해서 까치발로 걸어 다닐 정도에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붓이 낯설었다고 한다. 붓이 낯설었다는 것은 마음먹은 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던 중 자주 다니는 교회의 길목에 서 있는 소나무가 그의 눈길을 잡았다. 그 소나무에서 그는 불꽃같은 영감을 얻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다가 프로작가로 데뷔한 화가는 많다. 그럼에도 그는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오히려 자기세계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중고신인이 발전가능성이 많으므로 그것이 큰 강점이라고 한다. 이제 그는 그림으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평생을 그림과 함께 호흡하였기에 빠른 속도로 자기의 세계를 어필하고 있는 화가이다.

이 작가는 어릴 때부터 공부는 뒷전이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런 영향으로 형제들도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아버지에게는 “저 놈 때문에 자식농사 망쳤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던 그가 원광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자퇴했다. 상경하여 재수를 했으나 처음 들어본 과목이름이 있을 정도로 공부와 담을 쌓았던 자신을 발견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를 전공하긴 했지만, 졸업 후에 닥친 현실은 그를 생업으로 내몰아 미술학원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학원을 운영하는 동안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전업화가, 프로화가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하곤 했는데, 나이 50을 넘어서야 그 꿈을 찾았죠.”

그가 소나무를 그리게 된 이유는 교회 가는 길목에 있던 소나무가 어느 날 눈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소나무는 우리의 옛 선조들이 즐겨 그리던 소재입니다. 동양화에서 소나무는 도인들의 선계를 나타내곤 했죠. 십장생에 들어가 있으며,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꼭 필요한 소중한 나무였죠.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말없이 곁에 있어준 소나무와 우리의 몸과 마음은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랬다. 그의 말대로 소나무는 우리의 나무이고, 그만큼 친근한 나무이다. 차가운 아파트촌에서도 소나무가 가장 좋은 조경수이듯이 말이다.

화가들이 소나무를 묘사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철갑과 솔잎 그리고 솔방울이다. 이창조 작가도 철갑을 그리지만 점차 생략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바람과 운무 속에 숨겨 그윽하게 표현하여, 철갑과 같은 피상을 초월한 나무줄기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정적인 나무를 동적인 표현으로 시각화한 것은 바람과 운무이다. 바람과 운무는 공간과 시간을 의미한 우주를 나타내고 있다.

  
 

반대로 솔잎은 시공이 정지된 듯 우리 앞에 또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해준다. 이렇듯 우주 속의 나무, 소나무를 통하여 인간과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 또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처럼.

이창조 작가는 늦깎이 화가이지만, 그의 그림에서 발산되는 내공은 어느 프로작가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작품에서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세월의 두께가 진실됨을 의미한다.

그의 소나무를 그리는 표현기법은 매우 탁월하다. 동양화에나 어울릴 소나무가 그의 손에 이끌려 서양화로 우리 앞에 나섰다. 그의 소나무에서 우리의 삶과 우주적 존재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곧 개인전도 가진다. 9월 25일부터 10월 8일까지 인사동 백송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전 타이틀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다.

  
▲ 이 작가는 개인전이 끝난 후 전국의 소나무를 찾아가는 소나무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다.

“전시회가 끝나면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소나무를 찾아 트레킹을 하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희망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이창조 초대展

 

 

 

 

 

2017. 3. 17(금) ▶ 2017. 3. 30(목)

서울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소나무 농사꾼

 

우리나라 해안이나 내륙에 자생적으로 자란 수목 중 상록 침엽수인 소나무가 있다. 해안과 내륙의 소나무는 품종이 같아도 자란 생김새가 다르고 크는 성장이 다르다. 어느 곳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유독 소나무만큼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

조상들이 오래전 기원하는 산신 목으로 소나무를 선택하였던 것은 부정(不正)을 물리치고, 정화 시킨다고 믿었다. 또 출산을 앞둔 부모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잡귀와 부정을 막기 위해 금줄과 숯 고추 백지 솔가지 등을 준비 하였다. 오래 살기를 바래는 마음이 보태 졌을 것이다. 이렇듯 소나무는 개인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반려목이 되었다.

 

2017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유독 소나무가 그립고 기대고 싶은 이유들이 생겼다.

소나무는 역경 속에 푸르름 간직하고 꿋꿋한 절개와 충절을 의미한다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뼛속까지 새겨졌다. 소나무는 개인을 뜻하기도 하고 지도자의 자질을 언급하기도 한다. 때론 국가와 국민을 상징할 때 소나무의 강인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서두에 언급한 출생의 부정을 막기 위해 금줄에 솔가지를 걸었던 민족의 풍습처럼 이젠 집안마다 소나무 한그루 심거나 때론 작품 한 점 소장하려 했던 마음은 청빈과 경청하려는 삶의 자세와 교훈을 받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마음 자세를 바르게 할 즈음에 이른 것 같다.

 

 

 

 

나는 소나무인가 묻고 싶다. 소나무 같은 지도자를 간절히 바라는 국민의 염원이 절실해 본 적 있었던가. 국민이 소나무 같아야 소나무 같은 지도자가 나올 것이다. 국민이 소나무가 아니면 그 속에 어찌 기둥이나 서까래 대들보 같은 지도자가 나올 수 있으며 늘 건강하고 푸른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작가 이창조는 평생 반려목으로 소나무 키우는 산지기이자 농사꾼이다.

작업실 풍겨나는 테라핀 원료가 송진이다. 외적 작업이 소나무라면 내적 작업은 신앙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중도의 치우침 없는 작업이 푸른 엔진이 되었다. 자칫 고루할 수 있는 소나무가 현대 회화로 밀도 있는 채색과 속도감으로 긴장감을 끌어 올렸으며, 소나무 내면의 부정과 강직함만이 아니라 지친 삶을 풀어 주는 피톤치드 같은 에너지를 끊임없이 솟아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낮은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겸손한 성품이다.

작가 이창조가 바라는 건강한 소나무는 작가의 자화상이며 국민이며 지도자일 것이다. 이제 작가는 이 땅에 컨템포리한 소나무를 푸르게 가꾸고 키울 것이다.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초연한 모습으로 푸르게 빛나는 전시를 함께 축하해 주십시오,

글 금보성

 

 

 

 

 

 

 

 

 

 

 

그 시절 벽돌공장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

부평연와 벽돌공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로 김규문씨(72세)의 이야기를 모아 기록했다. 툭툭 끊어지는 기억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는데 20살에 부개동으로 와서 지금까지 부평연돠 벽돌공장 사람들과 그 주변 주민들과 만튼 친목계모임을 이끌어오시면서 공장과 관련된 가장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계셨다. 이 이야기는 그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아내 되시는 분과 그곳에서 일하셨던 분들이 주신 사진 등으로 당시의 벽돌공장 모습을 그나마 그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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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에 서울서 부평연와로 일하러 오신 분은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군대에 가기 싫었단다. 60년대는 살벌했단다. 일을 하려면 신분증-신원을 확인하는데 이런 공장에서는 신분증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공장이 불이나 망하게 되고, 곧 영장이 나왔는데 도망치듯 친구들과 같이 내려왔다. 이런 공장은 말하자면 당시 범죄자 소굴이었던 샘이다.

일년에 7개월 일하고 5개월을 사는데 월급도 없이 상여금으로 살았다. 상여금이 뭐냐면 월급에 덧붙혀 주는 보너스가 아니라 그때그때 일당치기로 일을 하는데 하루일당 500원이었다. 거기에 공장 주인들이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에 세금내며 적는 장부와 주인들에게 보고하는 장부가 달랐다고 했다. 조금 더 만든 벽돌을 팔아 개인임금으로 먹는데 이것을 상여금이라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6시까지 일했다. 비오고 눈오고 추우면 벽돌일은 할 수 없었다. 돈을 제때 다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떠날 수도 없었다. 사택이라고 집도 주었기 때문에 나머지 계절에는 공장과 상관없이 온갖 잡일을 하며 버텼다. 일하다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가야 했다. 사고가 나서 병신이 되도 치료비 한 푼 못받고 그대로 쫒겨났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사람들도 다 당연한 것을 생각했다.

부천쪽 상동에 흙을 3-4미터 파서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다. 땅을 사서 땅을 파고, 깊어져서 물이 잘 모이니까 논농사가 잘 되었다. 다시 얼마간의 땅을 사서 흙을 파서 쓰고 다시 그 땅을 농자 지을 사람들에게 팔고 그랬다. 흙만 쓰고 팔았다. 나중에 흙을 파서 쓰는 것도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그 전까지는 마음데로 파서 썼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웅덩이가 많았다. 글쓴이는 동생과 함께 마을 흙웅덩이 빠져 익사할뻔 했던 기억이 있다.

88년에 노조 만드는 걸 도왔다. 나(김규문씨)는 이미 퇴직금을 받아 먼저 나왔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이 쫒겨나게 생긴거다. 그래서 당시 금속노조(당시에 요업같은 것도 모두 금속노조로 포함되었다.) 사무실에 가서 가입했고, 이 사람들이 결국 그거라도 해서 얼마간의 퇴직금이라도 받고 공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90년대 재개발이 결정된 마을의 토지보상은 후했다고 한다. 가난한 마을에서 그만큼의 보상을 받기가 어려웠기때문에 후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별다른 싸움 없이 다들 마을을 떠났고, 사람들이 나가면 그집은 즉시 부숴졌다고 했다.

98년도 이전에 폐업을 했고, 98년 토지와 건물등의 배상을 받고 완전히 문을 닫은 후 운전면허시험장이 들어왔다. 보상을 받으며 사택에 살던 사람들은 나왔고, 사택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아파트가 동중학교 뒤에 있는 백영아파트다.



 

지난 9/15-16 오후 3시에 삼산주공 1단지와 갈산주공 2단지에서는 흥겨운 음악소리가 가득 퍼졌다. 삼산미술교실과 시화 동아리의 전시회를 겸한 마을잔치로, 삼산어린이집 어린이들과 갈산 2단지 어르신 합창단이 공연을 하고, 15일 삼산동에서는 다문화 음식 체험과 에너지 절약 체험이 있었다고 한다. 



'임대단지 주민예술체험마당 <얼쑤>'는 사회적기업_'인천자바르떼'가 '주택관리공단 삼산1단지 갈산2단지 관리사무소'와 함께 '삼산&갈산 종합사회복지관', 아이다 마을, 인천소비자연맹, (사)한국기후변화학회, 삼산YWCA어린이집, 갈산어르신합창단이 협찬하여 함께 자리를 마련했는데 관리사무소와 사회복지관이 함께 어울려 준비한 자리는 전국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16일 갈산주공 2단지에서 진행된 전시와 행사를 둘러봤다.

타고있던 전동자가 간석에서 갑자기 멈췄는데 크레인이 철로위로 넘어져 단전되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연락이 뒤늦게 전해졌고, 택시를 타고 갔으나 30여분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부평공업고등학교 뒷편의 임대아파트와 굴포천이 이어진 곳은 풍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줬고, 멀리서부터 섹소폰 소리와 뽕짝 노래가 들려왔고, 나무 그늘에서 많은 분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공연을 기다리는 예술인들도 흥겹게 즐기고 있었다.

 

공연은 팝콘 한 봉지, 음료수 하나 손에들고 봐야하는 법 ^^

 

'삼산, 사람을 만나다'는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 장애를 가진 분들 중에서 원하는 분들을 모아 미술교실수업을 진행했고, 그 수업 결과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자리였다

 

그림들이 놀라웠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 어르신들마다 다양한 방식으료 표현하셨는데 마음에 많이 들어왔다.

 

어르신들이 그림 옆에서 즐겁게 공연을 보신다.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웃으시고, 박수를 치신다. 괜스레 마음이 뿌듯했다.

 

공연장 옆에 마련된 전시장

 

한 어머니께서는 이 그림을 보며 눈물이 펑펑 났다고 했다. 그림은 창 밖에서 바라본, 담배 피우는 이의 뒷모습을 연필로 그린 작품이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눈부시고 따가왔따. 

공연장 의자보다 아파트와 나무그늘에서 많은 분들이 즐겼다.

 

'예전전통국악예술단'에서 다양한 경기민요와 함께 어른들의 흥을 돋구웠는데 흥을 즐기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함께 어울렸다

 

촬영하는 내가 마음 뿌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성의있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능숙하고 애정어린 진행과 성의있고, 열의에 찬 공연자들의 태도가 느껴진 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들 흥겹게 즐기셔서 사진을 찍는 내내 필자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만나지고 있다.

 

풍물패 '타투'는 태평소와 더불어 전통 풍물과 잽이들의 개인놀음이 묘기에 가까운 놀음을 전하며 놀라움과 거움을 주었다.

 

참 고맙고 멋진 놀음에 이어 어르신들도 흥겨움을 나눴다.

 

 

 

"어르신들이 정말정말 즐겁게 즐기셨답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그런 맘이 절로들었다. 지역 주민과 단체, 관에서 함께 소툥하여 마련한 잔치가 정말 풍성하고 넉넉하고 즐거웠다. 돌아가는 길에 보니 주변 아파트 단지 주민들도 많이 구경하고 있었다.  

 

마음의 벽을 허무는 일은 모두의 마음이 모아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문화는 마음과 마음이 모여,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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