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작가 박경리 씨 타계...금관문화훈장 추서
YTN | 기사입력 2008.05.05 17:11
[앵커멘트]
'토지', '김약국의 딸들'로 유명한 원로 작가 박경리 씨가 오늘 오후 타계했습니다.
우리 문단의 거목이셨는데 끝내 숨을 거두셨군요?
[리포트]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가 오늘 오후 2시 45분 타계했습니다. 사인은 폐암입니다.
고 박경리 씨는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투병해 오다 지난 달 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울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이후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왔는데 오늘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됐고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입니다.
[질문] 문화체육관광부가 고 박경리 씨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어왔군요.
[답변] 조금 전 결정이 됐는데요.
문화체육관광부가 고 박경리 씨에게 한국 현대문학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해 문화예술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문화부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가족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방침입니다.
[질문] 고 박경리 씨, 투병 중에도 작품들을 발표해 오셨다죠?
[답변]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8년여 만에 신작시 3편을 발표하는 등 문학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 왔습니다.
앞서 시집 세 권을 낸 박 씨는 "몸이 좋아지면 그간 쓴 시들을 정리해 시집을 낼 것"이라고 계획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경리 씨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추천돼 오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해 '시장과 전장', '파시' 등 문제작들을 잇따라 발표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에 걸쳐 5부로 집필한 장편 대하소설 '토지' 전 20권은 한국 현대문학을 빛낸 역작으로 꼽힙니다.
이 가운데 마지막 4부와 5부는 1980년 서울을 떠난 뒤 박경리 씨가 강원도 원주로 터전을 옮겨 10년 넘게 집필에 힘을 쏟은 부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토지'는 영어와 일본어, 프랑스어로도 번역됐으며 드라마로도 제작돼 국민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국 문단의 별이 지다' 소설가 박경리 별세
노컷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39[CBS문화부 정재훈 기자]
한국 문단의 큰 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소설가 박경리씨가 5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에서 향년 82세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경리씨는 1955년 8월 김동리씨가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추천하면서 등단해 '김약국의 딸들', '파시' 등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는 '현대문학'에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해 1994년 8월 '토지' 5부를 탈고하기까지 무려 25년에 걸쳐 '토지'를 집필하면서 한국 문학의 새 장을 열었다.
대표작 '토지'는 1897년에서 1945년까지 50여 년의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면서 700여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 전통을 총체적으로 그린 대하소설이다.
전 21권에, 원고지 분량만 3만여 장에 이르는 '토지'는 광복 이후 한국 문단이 거둔 최고의 수확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TV 드라마와 영화, 가극 등으로도 제작됐다.
박경리씨는 지난해 폐암 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강원도 원주에 머물다 지난달 4일 뇌졸중 증세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박씨는 보관문화훈장(1992)을 비롯해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1965), 올해의 여성상(1994), 제3회 용재석좌교수상(1997) 등을 수상했으며, 1996년에는 칠레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기념메달을 받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 현대아산병원으로 5일 문인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고향인 경남 통영이다. 유족으로는 딸 김영주(토지문학관 관장)씨와 사위 김지하(시인)씨가 있다.
floyd@cbs.co.kr
'토지'의 작가 박경리, 흙으로 돌아가다
중앙일보 | 기사입력 2008.05.05 15:04 | 최종수정 2008.05.05 17:11
[중앙일보 손민호.이에스더]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가 5일 오후 3시쯤 뇌졸중 등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한 고인은 55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월간문예지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토지』 『파시』 『김약국의 딸들』등을 내놓으며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무엇보다 고인이 69년부터 94년까지 26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는 '광복 이후 한국 문단이 거둔 최고의 수확'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전 21권에, 원고지 분량만 3만여 장에 이른다. 『토지』는 TV 드라마 뿐 아니라 영화ㆍ가극ㆍ창극 등으로도 제작됐다. 99년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세운 뒤 지금까지 후배작가들에게 창작실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고혈압ㆍ당뇨 등 지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지난해 7월 폐암에 걸렸고 지난달 4일 뇌졸중 증세를 일으켜 서울 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96년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보관문화훈장ㆍ월탄문학상ㆍ현대문학 신인문학상 등을 받았다. 유족은 딸 김영주(62)씨와 사위 김지하(67ㆍ시인)씨. 빈소는 서울 현대아산병원이며 5일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9일, 장지는 경남 통영 미륵산 기슭. ☎02-3010-2631.
-박경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턱, 걸린다. 손민호 기자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한국문학사에 우뚝선 대하소설 '토지'>25년만에 완성한 박경리 대표작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16 | 최종수정 2008.05.05 17:58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평가받는 '토지'(나남출판.전21권)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서희는 딸 양현으로부터 일본의 패망소식을 전해듣고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무겁게 조여왔던 고통스러운 쇠사슬에서 벗어난 기분을 맛본다.
소설은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서울, 만주, 일본을 거쳐 다시 평사리 섬진강 가에 이른 서희가 해방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난다. 작가가 원고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날을 소설이 끝나는 8월 15일로 잡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6.25때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을 기르며 힘들게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는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암 선고까지 받았다. 이로 인해 작가는 가슴에 붕대를 동여매고 '토지'를 집필했다고 한다. 게다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김지하 시인을 사위로 둔 탓에 작가의 삶은 언제나 무거운 쇠사슬을 휘감은 듯 고통의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작 '토지'를 마무리한 날은 그래서 작가 개인에게는 창작의 고통스런 족쇄에서 풀려난 날이었을 것이다.
'토지'는 구한말에서 시작해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수난기를 다루고 있다. 최참판댁 손녀 서희가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하동에서 하얼빈까지 유전하다가 고향땅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는 것이 소설의 큰 줄거리를 이룬다.
작품에는 동학농민전쟁, 을사보호조약, 청일전쟁, 1902년 7월 전국에 번졌던 콜레라, 1909년 간도협약,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관동대지진,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1923년 형평사 운동, 1937년 만주사변 등 역사적 사건이 무수히 등장한다.
'토지'에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아 이름없는 민초를 포함해 700여 명의 인물들이 명멸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아온 기존 역사소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토지'는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으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소설 시대를 열었다.
'토지'가 역사책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낸 것을 두고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사보다 더 역사적인 소설"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문학평론가 이재선 서강대 명예교수는 '창안적 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토지'에 부여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지'는 인물이나 사건을 하나의 주제에 종속시키는 서구 소설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창작실험을 시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문학평론가 정현기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판소리처럼 이야기의 중간에 이런저런 작은 이야기들이 마디처럼 삽입한 것을 놓고 '토지'의 창작방식을 '마디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상진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름을 가진 인물만 해도 578명이나 등장하는 '토지'에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것에 많은 연구자들이 공감한다"면서 "작품의 주인공은 서희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등장인물 모두이며, 이 때문에 이야기가 하나의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핏줄처럼 퍼져나가는 독특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어느 학자는 '토지'를 '대하(大河)소설'이 아니라 '다하(多河)소설'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흘러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토지'는 탈(脫)중심적 소설이기도 하다.
이상진 교수는 "이야기 전개와 창작방식에서 '토지'의 탈중심적 성격은 작가의 생명사상과 연결된다"면서 "어느 것도 중심이 아니며, 인물마다 제 몫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생명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작가의 사상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분석했다.
작가의 생명사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恨)과 연결된다. 작가는 모든 생명에는 한이 있다고 자주 말해왔다. 그 한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만 유지된다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었다. 이 때문인지 '토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불행한 사람들 뿐이다. 인간은 모두 한을 가진 존재라는 작가의 사상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과 사랑, 일본 제국주의 등 물신주의에 대한 올곧은 저항, 생명사상 등 '토지'가 가진 풍부한 내용 때문에 이를 원작으로 삼아 KBS와 SBS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TV드라마로 제작했고, 1974년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김지미와 이순재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됐다.
또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서사음악극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졌으며, 청소년판과 만화로도 출간되는 등 다른 장르로 끊임없이 변용돼 왔다. 또한 하동 평사리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작품 속의 공간인 평사리에서는 해마다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이는 '토지'의 가치가 그만큼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토지'는 서구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 근대문학을 절정기에 올려놓은 대작이다. 이후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최명희의 '혼불' 등 대하소설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소설은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작가적 사명을 예감했던지 박씨는 1966년 수필집 'Q씨에게'에 실린 '창작의 주변'이라는 글에서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의 것을 모두 습작이라 한다. 그것을 쓰기 위해 나는 이삼년을 기다려야 할까보다"라며 대작을 집필하겠다는 의욕을 내비친 뒤 실제로 3년 후 '토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후 그가 펼쳐낸 '토지'의 작품세계는 평사리 들판처럼 드넓고, 지리산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한국문학사에 자리 잡았다.
<박경리 선생 별세..원주 애도 분위기>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24
원주=연합뉴스) 김영인 기자
= 한국 문단의 거목인 박경리 선생이 어린이날인 5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2의 고향인 강원 원주시민들은 "문학계는 물론 지역으로서도 너무 큰 손실"이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민들은 비록 원주가 선생이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30년 가까이 거주하면서 지역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았고 이를 큰 자부심으로 삼고 함께 살아왔다며 애통해 했다. 시민들은 선생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 달 26일부터 옛 집인 단구동 토지문학공원에서 매일 저녁 촛불기도 모임을 갖고 쾌유를 간절히 빌어왔다.
시민들은 특히 선생이 원주에 정착한 뒤 대하소설 '토지'를 완간하고 옛 집을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하도록 선뜻 내준데다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을 만들어 창작의 산실로 삼는 등 지역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며 선생의 뜻을 기리는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기열 원주시장은 "지난 1980년 내려오신 뒤 활발한 작품활동은 물론 원주에 많은 애착과 관심을 가져 주셔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갖게 하신 분인데 황망히 떠나시게 돼 섭섭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조의를 표했다. 이어 "지역에는 고인이 남기신 많은 발자취가 있는 만큼 선생의 문향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기념사업 등을 추진해 원주를 토지의 고장으로 만들어 전 국민에게 훌륭한 문화자산으로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지역 출신의 이계진 국회의원은 "선생이 원주에 사시는 것 만으로도 원주인들은 행복했으며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며 흙과 함께 한 문학.생명정신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살아있을 것"이라며 "선생의 문학혼과 사상을 더욱 빛내고 원주의 영원한 상징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시민들의 뜻을 모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선생을 곁에서 보필해 온 고창영 토지문학공원 소장은 "병상에서 털고 일어나셔서 돌아 오시기를 그토록 간절히 기원했는데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시간과 모든 추억을 영원히 잊지 못 할 것"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시민 김성희씨(44.여)는 "토지문학 강좌를 통해 선생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게 된 뒤 원주에 너무 훌륭한 분을 모시고 사는 것 같아 늘 자랑으로 삼았다"며 "도시를 정서적으로 순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셨다"고 높이 평가했다.
원주시는 토지문학공원 내 선생의 옛 집필실 1층에 시민들이 조문을 할 수 있도록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故박경리 선생 "시련 없었다면 토지도 없어"중앙일보 | 기사입력 2008.05.05 15:28 | 최종수정 2008.05.05 18:49
[중앙일보 손민호] 박경리가 끝내 흙으로 돌아갔다.
영정 앞에서 외람된 언사일 수 있겠지만,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닐는지 모른다. 기억 속에서 박경리는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건강은, 나이가 있으니까….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아요. 하지만 혈압약만 먹어. 병원에도 1년에 두 번 정도만 가고.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
박경리는 흙의 작가요 생명의 작가였다. 굳이 『토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생전의 그는 텃밭에서 일군 채소를 손수 무치고 담가 토지문화관을 찾은 후배작가들에게 먹이곤 했다. 농약 한 번 쓰지 않은, 이른바 유기농 야채였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육신에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폐에 종양이 슬었어도 담배를 끊지 않았고, 한 달 가까이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는 치료진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렇게 박경리는 갔다. 흙으로 돌아갔다.
#모진 팔자 드센 인생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음력) 초저녁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초저녁'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생전의 작가가 들려준 사주 얘기다.
"초저녁에 나왔어요. 그러니까 초저녁 범띠 생이지.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막 먹잇감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할 때잖아. 여자 사주치곤 기가 아주 센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팔자대로 산 거 같아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여의었고 뒤이어 아들도 잃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62)은 남편 옥바라지로 호된 고역을 치렀다. 딸의 남편, 즉 선생의 사위는 김지하(67) 시인이다. 생전의 그는 "나에게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토지』에 매달릴 수 있었겠어"라고 되물었다. 1973년에 쓴 『토지』 서문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의 일화도 있다. 박경리가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어른이 소설가 김동리(1913∼95) 선생이다. 한데 박경리가 김동리에게 맨 처음 보여준 원고는 소설이 아니라 시였다. 54년 박경리의 습작시를 일독한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하게 평한다. 상심한 그에게 김동리는 대신 "소설을 써봐라" 권한다. 그래서 쓴 소설이 이듬해 '현대문학'에 발표된 '계산'이다. 박경리의 등단작 말이다. 박경리에게도 인생지사는 새옹지마였나 보다.
#『토지』 그리고 박경리
『토지』 1부의 배경인 경남 하동의 평사리 악양 들판. 박경리는 거기 땅 한 번도 안 밟아보고서 『토지』를 썼다. 2부의 주무대가 되는 만주땅 용정도 마찬가지다. 책이 다 나온 뒤에야 그는 소설 속 현장을 둘러봤다. 그러면 『토지』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오롯이 작가의 상상에 기댄 것일까.
"『토지』는 6ㆍ25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있어요. 외가는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콜레라)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 이 얘기가 후에 어떤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지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가설을 위한 망상』, 320쪽)
그 빛깔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박경리는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평사리의 악양 들판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평사리의 풍경이 소설에 묘사해 놓은 모습과 너무 똑같아 놀랐다고 털어놨다. 몇 해 전 세트를 짓고 TV 드라마를 촬영한 뒤로 평사리는 『토지』의 무대를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연중 부산하다.
누가 뭐래도 박경리는 『토지』의 작가다. 그러나 『토지』는 단순히 한 작가의 대표작에 머물지 않는다. 『토지』는 한국의 현대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자 하나의 극점이다. 프랑스 문학이 19세기 국민소설의 시대를 겪었던 것처럼 한국 문학은 『토지』로 인하여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었다.
『토지』가 세운 몇 가지 기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집필 기간 26년. 69년 시작해 94년 8월 15일 완결했다. 권수로 21권이고, 원고지 분량으로 3만1200장에 이른다. 등장인물은 700명을 웃돈다. 『토지』는 또 한국형 문화 콘텐츠의 전형이 되는 작품이다. 수차례 TV 드라마로 방영됐고, 영화ㆍ가극ㆍ창극도 제작됐다. 만화 『토지』와 청소년판 『토지』도 출간됐다. 『토지』의 두 주인공 '길상이'와 '서희'는 한국소설에서 가장 알려진 캐릭터 중 하나다.
#토지문화관과 청계천
박경리는 1999년 강원도 원주 오봉산 자락에 토지문화관(www.togicul.or.kr)을 지었다. 원주 시내에 있던 작가의 집이 개발되자 보상비와 지자체 지원금 등을 모아 세운 문화창작 공간이자 작가 자신의 처소다. 박경리는 여기에 작가 창작실을 마련해 후배 작가들이 공짜로 들어와 서너 달씩 살게끔 했다. 은희경ㆍ김선우ㆍ천운영ㆍ윤성희ㆍ천명관ㆍ백가흠 등이 토지문화관 단골 손님이다.
강원도 인제의 만해마을과 함께 한국에서 두 군데뿐인 작가 창작실을 두고 있지만 토지문화관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하다. 현재 15개인 작가 창작실을 더 넓히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생전의 박경리는 기업의 후원 따위를 한사코 거절했다. 여기저기에 얼굴 비치며 아쉬운 소리 꺼내는 걸 끔찍이 싫어했던 까닭이다. 박경리는 손수 고추밭과 배추밭을 일궜고, 손수 반찬을 만들어 후배 작가들의 밥상에 올렸다. 생태계 복원이란 큰 뜻 말고도 부식비라도 아껴 보려는 속사정이 담긴 밥상이었다.
토지문화관은 가끔 토론회와 세미나도 주최한다. 몇 해 전 열린 토지문화관 세미나에서 청계천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초로 제기됐다. 그 제안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가 자신의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니까 토지문화관은, 청계천 복원의 꿈이 맨 처음 여문 고향인 셈이다.
그 토지문화관이 주인을 잃었다. 딸 김영주씨가 관장으로 있고, 문화예술 단체의 지원이 당장 끊기진 않겠지만 박경리 없는 토지문화관은 생각만 해도 휑하다. 박경리의 빈자리가 벌써 걱정된다.
<박경리의 환경사랑과 토지문화관>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24 | 최종수정 2008.05.05 17:57
"사고(思考)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입니다. 하여 능동적인 생명을 생명으로 있게 하기 위하여 작은 불씨, 작은 씨앗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토지문화재단 설립의 뜻입니다. 이 뜻을 위하여 마련된 토지문화관에서는 숲 속의 맑은 공간에서 일과성이 아닌 지속되는 토론으로 문제를 다루려 합니다. 우리와 이웃 나라의 석학, 예술인이 모여 환경을 위하여 여러 방면의 현안 문제를 고민하고 토의함으로써 우리들 삶을 추구하고 미래를 모색해 보는 것입니다."
고(故) 박경리씨가 밝힌 토지문화관 설립 취지다.
5일 타계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는 문학적인 성과 외에도 환경과 생태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활동으로도 의미 있는 자취를 남겼다.
생명 하나하나의 존엄성이 존중돼야 한다는 생명사상은 '토지'를 비롯한 박씨의 여러 작품 속에서 엿보이며 이러한 그의 생명사상은 환경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좀처럼 단체의 대표 직책을 맡지 않았던 그였지만 1993년 환경운동연합 출범 당시 공동대표를 맡기도 할 정도였다.
청계천 복원 문제가 처음 제기될 때에도 박씨가 관여했다.
2000년 청계천 복원을 꿈꾸던 학자들로 구성된 '청계천살리기연구회'가 토지문화관에서 청계천 복원 구상과 관련한 세미나를 개최했고 구상 단계에만 머물던 이 계획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구체화됐다.
그러나 박씨는 사업 과정에서 복원이 아닌 개발 위주로 흘러가는 데 대해 우려를 표하며 "지금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미력이나마 보태게 된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 발등을 찧고 싶을 만치 후회와 분노를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박씨는 2003년에 문학과 환경문제를 다루는 계간지 '숨소리'를 창간하기도 했으며 2004년에는 1995년부터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글로 엮은 환경 에세이집 '생명의 아픔'(이룸)도 출간했다.
박씨의 환경사랑의 연장선상에서 1999년 설립된 토지문화관도 '토지' 이후 박씨의 활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오봉산 기슭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은 환경과 생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터전 역할을 해왔다.
여러개의 집필실을 갖추고 작가들에게 공짜로 창작공간도 제공해 소설가 박완서, 박범신, 은희경, 천명관, 고진하 영화감독 이광모 등이 토지문화관 창작실에서 작품을 탄생시켰다.
"목에 힘주다 보면 / 문틀에 머리 부딪쳐 혹이 생긴다 /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 혹생긴 연유를 모르고 /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 낮추어도 낮추어도 / 우리는 죄가 많다 / 뽐내어본들 우리는 도로무익(徒勞無益) /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우리들의 시간')
토지문화관 1층에서 읽을 수 있는 이 시구절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포용하려는 박씨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소설가 故 박경리 연보>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05 15:14
▲1926년 = 10월28일 경남 통영시 명정리서 박수영(朴壽永)씨 장녀로 출생. 본명 박금이(朴今伊).
▲1945년 = 진주고등여학교 졸업
▲1946년 = 1월30일 김행도씨와 결혼. 딸 김영주씨 출생
▲1950년 = 12월25일 남편과 사별
▲1955년 = 8월 '현대문학'에 김동리에 의해 단편 '계산' 추천
▲1956년 = 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 추천돼 본격적인 문단활동 시작
▲1957년 = 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58년 = 첫 장편 '연가'를 '민주신보'에 연재, 단편 '벽지', '암흑시대' 등 발표
▲1959년 = 장편 '표류도' 발표, 이 작품으로 제3회 내성문학상 수상
▲1962년 = 전작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발표
▲1963년 = 장편 '파시' 연재
▲1965년 = 장편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 수상. 장편 '녹지대' 연재
▲1966년 = 단편 '집', '인간', '평면도', 연작 '환상의 시기'발표, 수필집 'Q씨에게'간행
▲1968년 = 단편 '우화',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 발표
▲1969년 =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 1969년 9월부터 1972년 9월까지
▲1970년 = 단편 '밀고자' 발표, 장편 '창' 연재
▲1972년 = '토지' 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 수상. '토지' 2부를 '문학사상'에 연재.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1973년 = 4월 딸 영주씨, 시인 김지하와 결혼
▲1974년 = 장편 '단층' 발표
▲1977년 = '토지' 3부를 '독서생활'(1977년 1-5월), '한국문학'(1977년 6월-1978년 1월)에 연재 수필집 '호수', '거리의 악사'(민음사) 간행
▲1979년 = 박경리 문학전집 전16권(지식산업사) 간행
▲1980년 =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
▲1983년 = '토지' 4부를 '정경문화'에 연재. 1983년 7-12월
▲1985년 = 수필집 '원주통신'(지식산업사) 간행
▲1987년 = '토지' 4부'를 '월간경향'에 연재. 1987년8월-1988년 5월
▲1988년 = 시집 '못 떠나는 배'(지식산업사) 간행
▲1990년 = 제4회 인촌상 수상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 시집 '도시의 고양이들'(동광출판사) 간행
▲1991 = 8월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 시작
▲1992년 = 9월1일부터 '토지' 5부를 '문화일보'에 연재 시작
▲1993년 = 장편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나남출판) 간행
▲1994년 = '박경리의 원주통신 -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문학선 '환상의 시기', '가을에 온 여인' (나남출판)간행. 8월15일 집필 26년만에 '토지' 탈고.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 10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올해의 여성상' 수상. 12월 유네스코 서울위원회 '올해의 인물'로 선정
▲1995년 = 3월 연세대 원주캠퍼스 객원 교수로 임용.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현대문학사) 간행
▲1996년 = 3월 제6회 '호암상 예술상' 수상. 4월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기념 메달' 받음. 5월 토지문화재단 창립 발기인 대회
▲1997년 =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로 임용. 사단법인 토지문화관 이사장
▲1998년 = 토지문화관 착공, 1999년 6월 9일 개관
▲1999년 = 장편 '표류도'(나남출판) 간행
▲2000년 = 시집 '우리들의 시간'(나남출판) 간행
▲2002년 = 1월 '토지' 재발간(전 21권. 나남출판)
▲2003년 = 1월 '만리장성의 나라' 재출간(나남출판). 1월 9년만의 신작소설 '나비야 청산가자' 현대문학 4월호에 연재 시작.(3차례 연재 후 중단. 원고지 440매 규모). 4월 문화와 환경전문 계간지 '숨소리' 창간(2004년 말 폐간). 7월 청소년용 '토지' 12권으로 완간(이룸). 7월 첫 장편동화 '은하수' 출간(이룸). 1960년에 쓴 장편 연애소설 '성녀와 마녀'출간(인디북)
▲2005년 = 11월 팔순잔치
▲2007년 = 5월 만화가 오세영 작 만화 '토지'7권 출간(마로니에북스) 5월 13년만의 신작 산문ㆍ소설집 '가설과 망상'출간
▲2008년 = 3월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설' 등 신작시 3편 발표. = 5월5일 타계 (서울=연합뉴스)
"박경리 선생, 노년에 '토지' 한편 더 쓰신 것"
머니투데이 | 기사입력 2008.05.05 1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