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송윤아 거부감 비판] 유교 파시즘?…'82cook' 충격도 | ||||||||||||
性엔 관용, 愛는 용서 못하는 사회 | ||||||||||||
소름 돋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늘 어두워 보였던 설경구와, 예쁘고 어쩐지 신뢰 가는 송윤아가 결혼 발표를 했단다. 그 결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송이 눈물을 보였다길래, 그들이 곡절 많은 사랑을 해왔던 것 같아 공연히 가슴이 따끔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 아니 스포츠 신문 같은데 굵은 활자로 찍혀 있는 글을 지나가면서 본 듯하다. 설경구가 별거, 이혼을 했다고. | ||||||||||||
사랑으로 만난 하나의 커플이 와해될 무렵, 또 다른 사랑이 주변에 다가오는 일은 흔하고도 자연스런 일이다. 종종 우린 그 시간 차이의 미묘함으로 예민해지곤 하지만, 그래봐야 그 인과 관계를 자로 재듯 측정하기란 힘들며, 따라서 전후관계를 규명하려는 혹은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그러면서 박정희도 조강지처를 버리고 육영수와 결혼하는 바람에 둘 다 비명에 가는 운명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더불어 따라다녔다. 박근혜는 장녀가 아니라 차녀라는 이야기도. 그래서 이참에 박근혜도 싸잡아서 공격하자는 듯이. 그들은 집안에 있는 마누라를 돌같이 볼지언정, 어지간하면 이혼하지 않고 살고, 대신 다각도로 심오하게 발달한 이 나라의 매춘시스템을 활용하면서 허전함을 달랜다. 그들에겐 가정을 함께 유지하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소비하는 여자가 있을 뿐, 그들이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마음을 교류하는 여자가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집 여자'를 소비하는 것은 사회적 관례이고, 아내 아닌 여자와 마음을 나누며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일은 불륜이다. 성(性)은 관용하되 애(愛)는 결코 용서 못한다. 여자가 한 남자를 위해 수절하는 것을 독립투사 떠받들듯 대단한 덕망으로 칭송하는 모순된 풍습을 조장하고, 칠거지악(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사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아들이 없음, 음탕함, 질투함, 나쁜 병이 있음,말이 많음, 도둑질을 함)같은 족쇄를 만들어 여성을 유용한 가축 정도로 취급해오던 유교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강렬하게 지니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누려야 할 삶에서의 감정적 만족과 성적인 즐거움등을 작위적으로 틀어막았던 사회에서 매춘이 최대의 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회에서 그 최대의 피해자인 여성들이 열녀문을 세워주던 사대부들과 똑같은 어조로 결혼의 금 밖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두 남녀를 엄중하게 꾸짖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러나 당위와 현실이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 가정은 또한 권위와 권력이 학습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기반으로 한, 권위주의적 사회를 형성하는 최초의 단위이도 하다. 남자에게 가정은 그들이 잘 다스려야할 최초의 조직이고, 그것을 잘 하고 난 다음에 더 큰 조직을 다스리고 군림하도록 훈련되어져 왔다.
이런 구조는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위선은 가족 내에서의 질서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방조했고, 거기서 많은 불행이 재생산되었으며, 그 불행은 침묵으로 감춰지도록 강요되어 왔다. 모든 가족 구성원은 가부장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다스려지는 가정의 이미지를 위해 크고 작은 희생을 언제나 감수해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입되어 온 이 하나의 틀만이 우리가 그토록 벌벌 떨며 유지하고자 하는 '정상'의 틀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엄마와 아이들 만으로도, 혹은 결혼이라는 법적인 제도를 거치지 않은 커플만로도, 혈연관계가 아닌 자매들, 형제들끼리도 가정은 얼마든지 형성되며 유지된다. 중요한 것은 그 구성원들이 나누는 소통과 애정의 밀도이지,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틀 자체가 아닌 것이다. 성정치, 성해방이 대한민국 진보진영에서 가장 부실한 논의의 토대를 가지고 있는 영역인 것도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도덕을 들어 신랄하게 공격받기 너무도 쉽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정치적인 해방의 문제로 이해시키는 데는 너무 많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에 의해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탄생한 가치가 오늘날의 도덕적 요구로 지속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도덕은 우리의 숨통을 조이는 데, 그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도 기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만 쓰이는 것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통령한테 쥐박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쓰레기 같은 기사를 써오면서 수십년 동안 우리의 사고를 조종해온 언론사 앞에 쓰레기 더미를 과감하게 던져주는 이 품의와 예의를 상실한 태도가 비로소 우리의 삶을 옭아매던 자들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해주었다. 우린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때론 떠나고 때론 남겨진다. 마음이 떠난 사람과 허울뿐인 관계를 부여잡고 있어봤자, 상처만 더 커질 뿐이다. 이혼하지 않고 원수처럼 지내는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이 받는 상처는 더 크다. 공연히 더 큰 원망을 키우기 보다는 인간사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추스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떠나간 남자에겐 적어도 아이 아빠로서 절반의 양육을 위한 책임은 확실하게 묻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다른 사랑을 만나든, 다른 삶의 터전을 가꾸든,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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