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오전에 잠시 차를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의외로 차들이 많지 않아 금새 볼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잠시 차를 세워두고 누군가를 기다릴 일이 있어
골목에 차를 세운 후 차 시동을 꺼 놓았습니다.
차 앞유리면에 물방울들이 맺혀
뒤의 풍경과 함께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더군요.
싸이 톰블리(Cy Tombly, 1928~)의 그림들이 떠올랐습니다.

Untitled, 1963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이 톰블리의 그림을 처음 보면,
"이것도 예술작품이야?"
하고 의아해 하곤 합니다.
하지만, 싸이 톰블리는
작품 하나당 40억원에 그림이 거래되는
유명한 작가입니다.

Natural History (Some Trees of Italy), Part II, Sheet 5
,1976


그의 그림은 낙서와 휘갈겨 쓴 글씨들을 이용하는데,
대개는 도시 풍경이나, 풍경을 자주 그립니다.
그저 그래보이고,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어보이는 낙서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탈리아의 몇그루 나무'라는 제목의 그림은
나무의 생생함과 뒤로 펼쳐진 정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삐뚤삐뚤한 글씨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모래밭에 새겨놓은 낙서들 같지요.
그 살아있는 순간이 낙서에 담기게 됩니다.

Untitled
, 1961


그는 늘 스케치북을 손에 들고 다닙니다.
아이들이 노니는 모습, 나무들, 광장의 사람들,
분수대, 모든 것이 그의 그림 소재가 됩니다.
마치 아이가 그린 것처럼 그의 선에는


 

꾸밈이 없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그리는 세상,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요?
Untitled (New York City)
, 1968


 

복잡하고 정신없는 뉴욕의 모습이
어린아아같은 화가의 눈엔 이렇게 비췄나 봅니다.
눈을 부시게 하는 네온싸인과, 끝도 없이 이어진 차들의 행렬.
하는 끝까지 닿으려는 듯 높은 빌딩들로
검게 드리운 그림자.
그리고 아름다운 뉴욕의 밤하늘.

Sans Titre (Roma)
, 1963


그의 그림들이 즐거운 단 한가지 이유는.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그려진 무제의 위 그림은 무엇을 그린 걸까요.
여름날, 공원에 모여 밤하늘에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모습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불이 난 건물에 물을 뿌리는 분주한 소방수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노란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멋진 미소의 정원사일 수도 있지요.
그의 그림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답니다.

싸이의 그림은 낙서니까요.
 
Untitled (Rome)
, 1961

그의 그림은, 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몇 안되는 막그린 듯한 선들이지만, 분명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쫓고 있지요.
아이의 눈을 닮고,
자연을 닮은 그림을 그리는
싸이 톰블리는 정말 멋쟁이 화가입니다.

 

 

 1. untitled, 1961, 164.5cm * 200cm

직접 손을 사용해서  물감을 캠퍼스에 묻히는 방법은 회화사에서 신체성을 극도로 강조 한다. 이 그림에서 다양한 붉은색과 주황색 물감은 마치 관능적인 신체의 부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뿐 아니라, 신체가 화면에 스친 자국을 통해  그것의 흔적이나 사건을 기록 하고 있다. 이 신체적이면서도, 심지어 성적인 상호 관계를 통해  화면은 요동치고, 난폭한 향연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톰블리에게  있어 표현은 화가의 신체와 켄버스, 그리고 화가가 떠올리는 기억속의 신체 사이에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려 진다기 보다 묻는 것이며, 나아가  서로 만지는......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서로  '더듬어  나가는 것 (tatonner) '이 된다.

 

 

 

   2.from point, 1977, glue on canbus, 182*227cm colleection 도쿄 국립미술관

 

 

 

   3.vergil, 1973,69.8*99.6cm

버질은 라틴시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의 유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로마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아우구스트 황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메세나를옹호하고 그를 위해 가장 위대한 국가적 서사시로 알려진 에네이드를 썼다. 그의 중요한 초기작은 목가시 ( bucolic)로 테오크리트의 시를 흉내 내어 썼어며, 이후에는 농사에 대한 교훈적인 농경시(gedrgic)로 알려졌다. 톰블리는 아마도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프란체스카에게 이끄는 버질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쓰고 지우고 다시쓴 일련의 그의 작품은 작가가 드로잉을 통해 어떤 것을 재현 할려고 하는지 탁월한 예로 보여준다. 그것은 '책읽기'를 통해 만나는 존재에 대한 직접적 호출의 행위인 것이다.

 

 

 

4.untitled,1967, 70cm*100cm

나선형의 '끄적임(gouillage)'은 마치 시인의 손의 움직임 이거나 , 딱히 무엇을 쓰야 할지 알 수 없는 작가의 심리상태가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톰블리의 드로잉회화는 기억과 기억의 겹침. 상호 텍스트( inter-textuality), 기록이 생산하는  중층적 의미에 대한 인문학적 단서를  회화를 통해서 단일한 시각적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것은 기호일뿐 아니라, 그 자체로 신체의 등가물이다.

 

 

 5. untitled, 1954, 174.5cm * 218.5cm

초기의 톰블리회화는 추상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흑백의 배경에 배치된 단순한 기호들의 부분적인 이미지로부터 오래된 건물 벽에서 발견된 때묻은 낙서 흔적에 이르기까지, 소묘와 회화사이를 오가는 톰블리 작품 세계는  이미 이때 부터 나타났다. 신체성을  통해 드러나는 심리적 풍경이라는 이항적관계 역시 표현의 기본틀로서 심도있게 다루고 있음을 볼수 있다.

 

 

 

 

*. 20 c회화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싯적인 화가를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싸이 톰블리를 떠올릴 것이다.

톰블리는 회화를 통해 서양문화의 바탕을 이해하고, 그것이 불러 일어키는 영감의 본질을 재현하는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한 화가이다. 그의 양식은 간결하면서도 예측을 뛰어 넘는 놀라운 시각적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시와 낙서, 회화와 서예, 리듬과 텅빈 여백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어떻게 보면  석도(石濤)나 팔대산인과 같은 예술가들이 추구해온 회화적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사이 톰블리는 1980년대초 트랜스 아방가르드나 신표현주의와  같은 제스츄얼페이팅의 세계적인 확산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80년대말 에 이르러 생존화가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간주되었으며, 20세기 회화사에서핵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톰블리는 그의 경력에 비해서 매우 늦게 알려진 작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국민적화가 제스퍼 존스, 로버트 라루셴 버그등과 함께 아이비리그에서 수학했다. 또 이들과 함께 주목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에 20대 초반 이었던 이들은 미국을 위시해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세례를 받으며성장한 회화의 자율성과 개념적 순수성에 대한 관념을 뿌리 깊이 내면화한 세대다. 그러나 톰블리는 대학 졸업후 미국을 떠나 곧 바로 이탈리아 로마에 정착했다. 그리스,로마의 라틴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기인한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 그로 하여금 미국의 주류무대에서 한발 물러서게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얀 켄버스톤의 배경위에서 아무렇게나 그어댄 듯한 선과 스쳐서 묻은것 같은 색채의 얼룩은 내리쬐는 태양볕 아래에 빛나는 고대 지중해도시의 건물벽에 남겨진, 이름모를 고대흔적을 보는것 같다.

신과 시인들의 이름이거나, 무언가를 쓰려고 하다가 다시 지워 버리고한듯한 헝클어진 선들이 여유로움과 관능성을 관통한다.

 

바르트는 톰블리의 회화를 후기구조주의 문학의 주요한 테마중의 하나인 '글쓰기(criture)'라는 개념을 통해 바라 보았다. 즉 가장 순수한 의식의 표현은 무언가에 대해 쓰고자 하는 의도적 노력이 아닌, 그저 글을 쓰고 있는 행위의 실천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의 사유는 또하나의 사유로 이어지고계속해서 사유의 새로운 네트워크가 혹은 형태를 구축해 간다. 바르트는 그런점에서 글을 쓰는행위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한 생각의 사례를 톰블리에게서 발견 한 것이다.

가벼움과 통찰, 머뭇거림과 내면의 울림,끼적거림과 직관의 혼재야 말로 글쓰는 행위의 핵심적인 즐거움을 이룬다.

톰블리의 '글쓰기'는 바르트가 동경해 마지 않던 그것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를 보여 주었다. 톰블리 회화는 무엇 보다도  '드로잉', 즉 소묘에 가까운 선의 흔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사실상 그의 그림은 낙서나 꺼적꺼림에 가까운 선묘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 마저도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매우 희박하게 표시되어져 있다. 이러한 적은 표현은 미니멀리즘의 영향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실은 매우 구체적인 시적 표현 양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톰블리의 드로잉은 정확하게 이미지를 드러내는 대신,  그것을 찾아가는 행위를 기록한다. 재현적 과정에서 비롯된 선들이 아니라 일종의 '호출'. 즉 드러낼수 없는 뭔가를 부르는 몸짓, 발짓 같은 것의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일종의 소리나 흔적, 암시적기능으로서의 호출 유발성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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