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스타 번역가' 정영목이 묻고


'번역 스승' 황현산이 답하다

"지식은 '안 할 말'이 무엇인가를 아는 데 많이 쓰인다. 정부나 청와대 대변인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안 할 말'이나 '할 말'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람이 글과 공부를 오래 하면 상투적인 말을 피하게 된다. 부정직한 말, 대충 해버리는 말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노학자는 나지막하게 꾸짖듯 거듭 말했다. "좋은 글은 상투적인 말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 '밤이 선생'이라며 강직한 글쓰기의 충격을 던진 바 있는 '번역의 스승' 가운데 하나다. 대담자로 나선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는 "스타 번역가"(한 청중의 표현)로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은 지난 10일 오후 고려대 번역과레토릭연구소에서 연 제1회 '번역대담 프로젝트: 번역을 묻다' 행사에 나란히 앉았다. 주로 '후배' 정 교수가 '대선배' 황 교수에게 답을 구하는 형식이었다. 외국어 좀 한다 하는 누구나 '번역'에 조금씩은 토달기 좋은 시대, 그럼에도 '번역' 없이는 우리말 소통도 잘 이뤄지지 않는 시대 아닌가. 통·번역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목마른 사람들이 우물 찾듯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예상인원의 두배가 넘는 100여명이 자리를 메웠고, 주최쪽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청중들 사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얘기가 간간이 터져나왔다.

고려대 '번역대담 프로젝트' 첫회
예비 통·번역자들 100여명 참석
"지식은 '안할 말' 가리는데 사용
좋은 글은 상투적 말 쓰지 않는것
번역가는 공감하는 능력 필요…
고통의 언어, 자기 말로 바꿔야"


행사 앞머리에선 프랑스인 기욤 아뽈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 프랑스어 원문과, 잇따라 조금씩 다른 두편의 번역본 낭송이 이어졌다. 황 교수는 100번 이상 번역되며 '한국인의 애송시' 반열에 오른 이 시의 흔히 알려진 싯구절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는 대목의 오류를 먼저 설명했다. 1950년대까지 일본, 한국,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이렇게 이해되었지만, 구두점이 복원된 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는 것이다(복원본은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 나온 '우체국 직원 습격사건'의 발단이 된 책이라고 황교수는 말했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젊음도 가면"이라는 대목도 원문에서 "나날이 가고 주일이 지나가고…"라고 적힌 것을 한국인의 시간 관념과 정념에 맞게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국어를 어떻게든 (원문에 맞게) 번역하려다보면 우리 말의 숨은 힘들을 낡은 창고에서 기구 꺼내듯 해야 한다. 적당히 번역하려고만 하면 우리 말이 가진 힘을 다 이용할 수도 없다. 그 말들이 현실 속에 와 활동하게 만들면서 표현역량을 드높이고 현실의 사고 방법이나 체계까지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타자적 힘'이다."

'직역'의 중요성, 곧 언어가 가진 가능성과 역동성에 대해 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번역의 오랜 숙제, '직역이냐 의역이냐'는 질문에서 황 교수는 대답을 회피하지 않고 '직역'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라보 다리'를 원문 그대로 직역했다면 한국인의 애송시가 되지 못했을 수는 있더라도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라도 좀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시를 이용하며, 그 질문과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번역할 필요가 있는 텍스트는, 다 도끼같이, 사람을 치는 힘이 있다"든지 "아뽈리네르를 소월 시처럼 번역하려면 소월 시를 읽지 왜 아뽈리네르를 읽어야 하느냐"라고도 일갈했다. 번역이 가져다준 "충격과 요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표현만 가지고는 여전히 그 사고방식, 세월호를 침몰시킨 사고방식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언어로 흔들지 않는 한 세상은 한치도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말의 '묵은 힘'을 찾아내 충격을 주고 골격을 흔드는 것이 번역의 가장 큰 장점일 수 있다."

후배들에 대한 조언은 사자후 같았다. "글을 잘 쓰려면 강력한 자기 문체가 있어야 한다. 번역도 글을 잘 쓰는 것이다. 번역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좌파여야 한다. 우선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두번째는 고통의 언어를 자기 말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게 바로 이런 좌파적 상상력이다."

글·사진 이유진 기자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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