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여성전용예배당 건축기념사진-한국 최초의 자립예배당(우각로)

 

1918년 영화여학교 헤스 교장 송별기념사진

 

1920년대 창영초등학교 건물

 

1923년 영화여자보통학교 개교식 사진

  

1939년 인천지방 교역자 기도회 기념사진(갬블의 집)

 

1938년 창영교회 예배당 착공기념사진

 

1890년대 우각로 일대 전경사진

 

경인철도개통식

 

기공식

 

 

 

인천 ‘배다리-우각로’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성

 


                                                         이성진

1, 인천 ‘배다리-우각로’ 문화 공간이 갖는 의미성과 현실 문제

 


인천의 근대역사는 ‘개항장’중심의 역사만 있고 ‘개항장’ 밖(변두리)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천이란 도시가 개항장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개항장은 중심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인천의 전통 구심지(관교동)는 개항의 위력 앞에 그 위상을 잃어 버렸다.

1899년 11월 개통한 제물포-노량진 간의 경인철도는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하도록 만들었다. 철도는 전통 도시들을 해체하거나 무력화하는 동시에 식민도시를 개발하는데 아주 유효한 것이었다. 식민지배에 방해가 되는 전통도시를 해체하고 일제가 개발한 식민도시가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였다. 인천도 마찬가지였다. 철도를 중심으로 인천의 문화와 역사가 재편되는 진통을 겪었다. 다시 말하면 부평도호부를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권은 부평역을 중심으로 새로 형성된 공업단지와 상업지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문학산 아래 인천도호부는 인천역, 축현역을 중심으로 하는 개항장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인천은 경인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역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이식문화 지역(중구 북성동, 관동, 항동, 송월동, 중앙동, 송학동, 신생동), 이식문화와 전통문화 공존지역(신포동, 용동, 내동, 경동, 전동)이 형성되었고, 북부지역은 조선인 이주민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으로 비교적 전통문화가 온존해 있는 변두리 문화지역(금곡동, 창영동, 송림동, 화수동, 만석동)이 형성되었다.

현재 인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훼손된 인천 근대 주류문화였던 개항장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자장면의 원조 공화춘 복원사업, 일본 지계의 일본인 가옥 복원, 인천근대건축전시관, 만국공원 복원 사업 등으로 추진하였거나 계획을 하고 있다. 중국인거리의 공자상 건립, 중국인 거리 입구의 패루, 북성동 동사무소 건축을 비롯하여 최근 중구청 앞 일본지계의 일본인 가옥과 같은 사이비 이식문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데 반해 한쪽으로 청라지구경제자육구역과 송도신도시를 연결하는 산업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인천 근대 변두리문화의 중심지이자 아직도 인천 근대 변두리문화의 흔적이 온존해 있는 ‘배다리-우각로’를 마구 훼손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배다리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배다리는 배다리’라고 말한다. 배다리라는 지명 자체가 자연스럽다. 배다리 시장 입구와 송현초등학교 일대까지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있어 이곳을 자연스럽게 ‘배다리’라고 불렀다. 배다리 지명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배다리 문화도 자연스럽다. 배다리 시장도 일제 때 인천으로 일자리를 찾아 온 조선인 노동자들에 의해 형성 된 공간이다. 한국 전쟁 후 피난민들이 고작 옷가지와 양은솥, 과일 따위 등을 내다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확장되었다. 또한 배다리 헌책방거리도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서민들이 책을 팔고 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 배다리-우각로 도로를 살펴보면 배다리-우각로의 ‘자연스러움’의 백미를 만끽할 수 있다. 최초의 경인도로인 ‘배다리-우각로’는 도시의 직선 도로에 맛들인 우리에게 옛 길의 맛스럼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시작하여 알렌별장(현 예루살렘교회) 앞길까지 우각리(쇠뿔고개)의 특성인 쇠뿔 모양이 그대로 살린 도로이다. 그리고 ‘배다리-우각로’를 걷다가 옆길로 들어가면 바로 골목길이다. 구불구불 미로처럼 복잡하지만 결국 한 길에서 만나는 한국 전통 골목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배다리-우각로’는 인위성보다는 자연성이 그대로 배어있는 곳이다. 이곳을 다녀보면 회색 콘크리트로 도배되어 있는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정겨움과 은은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조차도 ‘이상한 동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면 주사가 심한 사람이 이곳에 이사와 매일 술을 마시고 온 동네를 다니며 주사를 부렸다고 한다. 1년 후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집에 들어와서도 조용히 잠을 청할 정도로 변했다고 한다. 이것은 ‘배다리-우각로’ 문화가 갖는 동네의 개방성과 연결성에 연유한다. 그것이 바로 ‘배다리-우각리’가 살아있는 동네임을 말해 준다.

 이런 ‘배다리-우각로’ 살아있는 동네를 송도신도시-청라경제특구 산업도로가 가로질러 잘려나게 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개항장 중심의 역사에 함몰되어 있어 이곳의 사라진 이식문화를 복원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한 쪽에서는 인천 근대 전통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배다리-우각로’지역을 훼손하는 계획을 거침없이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수인선의 사례를 통해서 10년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 손익만 추구하여 폐쇄하였다가 다시 몇 수 십배의 비용을 들여 복원하는 우를 범하였듯이 ‘배다리-우각로’에서도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2. 인천 근대 역사 공간으로서 ‘배다리-우각로’

 


1) 인천 근대교육, 3.1만세운동 산실 ‘배다리-우각로’

 


배다리-우각로는 인천 근대교육의 산실로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인 영화초등학교와 인천 최초의 공립초등학교인 창영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영화초등학교는 존스선교사 부부가 1892년 4월에 세운 매일학교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초등교육기관이다. 남녀학교가 따로 운영하다가 1970년 남학교인 영화국민학교가 폐교되면서 여학교인 샛별초등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영화초등학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화초등학교가 배출한 인물은 한국 최초의 여대생 김애리시, 최초의 여성박사 김활란, 이화학당 이사장 서은숙, 이화여대 사범대학장 김애마, 이화여대 음대학장 김영의. 영화배우 황정순,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등이 있다. 또한 1916년 영화초등학교 안에 인천 최초로 인천지역 조선아동 교육을 위한 영화유치원을 개원하여 인천 지역민에게 유아교육에 관한 관심과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11년 9월 건축한 존스기념관은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성을 인정받고 있다.

1904년 한말 애국지사 정재홍이 우각리에 천기의숙(인명의숙 전신)을 설립하였다. 인천 신상협회․미상협회 등을 비롯한 인천지역 유력 사업가들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모금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또한 학부에서 사립학교 대신 공립학교 설립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는 의미로 ‘의무학교’ 설립도 추진하였다. 지역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통하여 의무학교를 크게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7년 조선 아동을 위한 인천 최초의 공립초등교육기관인 창영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1919년 3월6일 창영초등학교 3 ․ 4학년이 주축이 되어 동맹휴업을 하여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하고 4일간 등교를 거부하였다. 일본 경찰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만세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교직원에게 정보보고를 요구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월7일부터 인천지역에서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자 이에 대한 항의로 3월8일 밤 9시 창영초등학교에 4명의 학생(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이 나타난 학교 2층에 올라가 전화선을 자르고 전화기를 박살냈다. 이 일로 김진명은 1년6개월, 이만용과 박철준은 태형 90대, 손창신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창영초등학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이후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학생과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 개항장 주변 조선인상점의 철시항의.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창영초등학교는 인천지역의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학교로 발전하였다. 한국 미술사학자 고유섭, 대법원장 조진만,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 국회 부의장 김은하, 좌익운동가인 이승엽 등이 있다. 현재 1921년 건축한 본관 교사는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성을 보존하고 있다.

 


2)한국철도의 발원지 ‘우각역’

 


1899년 제물포-노량진간 경인선이 개통으로 한국 근대 철도가 시작되었다. 1897년 3월 미국인 모오스가 구한국 정부로부터 경인선철도 부설권을 따내 경인철도 기공식을 우각리에서

가졌다. 2년 6개월이 지난 후 개항의 최후 상징인 기차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350명의 노동자를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기술문제로 인하여 공사 진척은 지연되고 자본력이 없는 모오스는 결국 일본인에게 100만 달러에  매각하였다. 원래 노선인 우각역을 거쳐 독각다리(숭의로타리 서쪽 부근)를 경유하여 사동(인천여상 남쪽)에 종착역을 세우는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지주들의 강력한 반발로 우각역(현 도원역)을 거쳐 축현역(현 동인천역)을 지나서 종착역인 하인천역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도원역 근처 근린공원에 한국철도의 시원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다.

3)한국기독교 신학의 근원지 ‘에즈베리’ 예배당

 


‘배다리-우각로’는 한국 기독교 신학의 근원지이다. 1897년 미북감리회 선교사 조원시(존스)는 한국 서지방(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연안 등)선교를 위한 선교기지를 세웠다. 1895년 멕시코 은달러로 600달러를 들어 우각리 38번지와 42번지 일대를 매수하였고 1897년 7월  뉴욕주 감리교 감독인 휴즈목사의 재정지원을 받아 벽돌조 1층 건물인 에즈베리 목사관을 건축하였다. 에즈베리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러목사의 지시로 미국 파송된 최초의 감리교선교사이다. 선교사 조원시는 미국 최초로 감리교를 선교한 에즈베리 목사처럼 기독교의 불모지인 한국 서지방을 선교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명명이었다. 그 이전에는 한국최초의 자립예배당이 세워진 곳이다. 에즈베리 목사관을 통해서 인천, 강화, 황해도 연안, 남양, 부평, 부천, 영종 등지로 교세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후 남녀선교사 기숙사를 우각리 40, 42번지 일대에 건축하여 미국인 선교사 숙소 뿐만 아니라 인천, 부평, 부천, 연안, 강화, 남양 등 도서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이곳의 성경교육을 통해 각 지역의 선교를 확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우각리 에즈베리 선교기지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00년 우각리에서 한국최초의 신학월간지인 ‘신학월보’가 발행되었다는 것이다. 발행인은 조원시로 순한글로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신학 지식과 종교론을 소개한 신학잡지였다. 서울 냉골에 협성신학교가 세워지기 전 한국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정립하였던 역사적 공간이다.

 


4)인천노동운동의 산실 ‘배다리-우각로

 


인천은 일제가 경제적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먼저 일본인 자본가들이 들어와 공장을 세운 곳이다. 조선인 노동자를 채용하여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으로 노동을 착취하였다. 이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찾는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대 배다리(당시 금곡리)에 조선인촌주식회사(전 파카디리극장)가 있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성냥 제조공장으로 전국 보급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촌주식회사 금곡리 공장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 지배인의 잔악한 노동착취에 분노하여 1921년 3월 21일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 150명이 지배인 배척선언을 하며 동매파업을 하였다. 이것이 인천 지역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조선인 노동자 파업은 1923년 가등정미소 노동자의 동맹 파업의 계기되었다. 계속하여 1926년 4월 임금인하를 강요하는 회사의 부당한 방침에 대하여 남녀 및 소년 직공 200여명이 동맹파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2일 만에 파업을 철회하였다. 1931년 8월 여직공 170여명이 임금을 인하하려는 회사의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로 동맹파업을 진행하였다. 남직공도 작업이 불가능하자 회사 측이 굴복하여 종전대호 1월70전의 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1932년 이승엽, 김삼룡이 주도한 적색노조 운동이 확산되면서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360명이 임금인상,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하였다.

 


3. 맺는 말

 


 배다리-우각로는 개항장과 더불어 인천근현대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소이다. 경인도로로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가는 길인 동시에 인천의 근대교육, 기독교, 노동운동의 산실이다. 힘없는 민중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 민족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저항을 하였던 개항장이 주는 역사적 장소보다도 더 값진 인천 지역 민중의 역사적 의지가 담긴 장소이다.

‘배다리-우각로’를 가로지르는 산업도로 개설공사는 길이 갖는 순기능인 연결성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역기능인 단절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배다리-우각로’는 개항기에 서울-제물포를 연결하는 길의 순기능인 연결성의 역할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의 의도적 방해로 우각로 선교기지인 남선교사 기숙사(현 인천 세무서)와 여선교사 기숙사 사이 소방도로를 개통함으로 이전의 선교기지가 갖고 있던  연결된 공간성이 상실되고 별개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길이 갖는 역기능인 단절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배다리-우각로’ 안에는 인천 유형문화재 3곳이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이 공간이 담고 있는 역사적 가치성은 반드시 보존하여야 한다. 그리고 ‘배다리-우각로’만이 간직하고 있는 정겨움과 은은함도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존하고 이를 활성화시켜야 하는 인천시 문화예술 행정이 ‘배다리-우각로’를 가로지르는 산업도로를 개설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무섭고 우습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국가지정 유형문화재의 경우는 150m, 지방 문화재의 경우 100m 이내에서 건축이나 도로개설공사 등을 규제하고 있다. 인천시 조례에서는 어떻게 규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위법인 문화재 보호법에 크게 벗어난 규정을 정해서는 안된다.

 

 

인천 ‘배다리-우각로’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성-이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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