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새로운 문화 실천 현장



올해 인천 문화예술 운동에서 의미 있는 사건 하나를 꼽으라면 구월동에 자리잡고 있던 인천작가회의와 스페이스 빔이 잇달아 배다리로 활동 공간을 옮긴 일을 들 수 있겠다. 활동 공간을 옮긴 것 자체가 무어 그리 큰일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 깔린 배경을 살펴보면 ‘문화적 사건’으로 명명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사무실 임대 조건의 변화나 활동의 편의성 같은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예술 활동의 목적을 전제로 한 자발성과 의식성에 기초한 공간 이전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두 단체로 하여금 공간 이전을 고민하게 만들어 준 계기는 인천시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이었다. 배다리를 관통하는 산업도로를 뚫겠다는 시의 계획은 처음부터 주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채 진행됐고, 더욱이 배다리 일대의 역사․문화적 가치에 대해 고민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산업도로가 배다리를 가로지르게 되면 마을이 양쪽으로 나뉨으로써 마을의 고유한 형태가 사라지고 주민들의 공동체적 삶의 공간 자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관통도로를 뚫고 나서 자연스레 주변 지역에 대한 재개발 사업을 통해 주상복합단지 등을 조성하겠다는 시의 의중에는, 오랜 세월 동안 배다리에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들의 삶에 깃든 애환을 개발 이익과 바꾸겠다는 비인간적이고 몰가치적인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이에 맞서 산업도로 무효화를 위한 주민대책위가 꾸려졌으며, 문화계 인사들과 지역 시민들을 중심으로 ‘배다리를 지키는 인천시민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들 속에서 그 동안 지역에 기반한 문화예술운동을 고민하던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활동 공간 자체를 배다리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가장 먼저 배다리에 둥지를 튼 단체는 ‘퍼포먼스 반지하’로 창영초등학교 가는 길 쪽에 지역공동체 문화공방 ‘기억과 새로움의 풍경’을 열고 주민이야기마당과 벽화작업 등을 진행했다. 이어서 인천작가회의가 옮겨 왔으며, 대안미술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온 스페이스 빔이 폐가로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옛 인천양조장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재개관 행사를 가졌다.

 

이들 문화예술인들을 배다리로 끌어들인 직접적인 원인은 앞서 말한 인천시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이지만, 배다리에 형성되어 있던 헌책방 거리 또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한때는 40여 개에 달했던 헌책방의 숫자가 지금은 크게 줄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런 요인이 오히려 문화적인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있다. 학창시절에 헌책방을 드나들었던 추억과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배다리라는 공간에 정서적 친화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든 헌책방 거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나아가 배다리 일대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새롭게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문화예술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렇잖아도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인천에서 헌책방 거리마저 자취를 감춘다면 그 자체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스며든 공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지닌 가치는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다. 이런 소중한 공간을 아무런 문화적 소양도 갖추지 못한 개발주의자들의 손에 넘겨버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문화예술인들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다.      

 

따라서 배다리에 모여든 문화예술인들의 작업은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헌책방 거리를 중심으로 배다리 일대를 자생적이면도 역동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헌책방 운동을 해 온 최종규 씨가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를 개관하고, 아벨서점 곽현숙 대표가 ‘배다리 작은 책 시가 있는 길’이라는 전시관을 열어 헌책방 거리를 활성화하기 위한 물꼬를 트긴 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헌책방이라는 고유의 아이템에 플러스알파가 보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문화예술단체들이 들어간 것이고, 매달 넷째 주말에 여는 문화마당 등 구체적인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인천작가회의는 계간지 『작가들』 가을호 특집에 배다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실었으며, 화도진 도서관과 연계하여 학생들과 함께 지역문학 탐방 행사를 갖기도 했다. 문학인들의 작업은 아무래도 숙성의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들을 내놓기는 힘든 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스페이스 빔이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연과 전시, 교육을 아우를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의 장점을 살려 확실한 문화아지트로 자리매김할 것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배다리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인천시로 하여금 문화의 힘을 믿게 하고, 개발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접근법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참에 배다리를 인천문화, 나아가 황해를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 문화의 배꼽으로 만들고자 하는 큰 꿈을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

 

두 번째 축은 앞으로 펼치게 될 다양한 문화활동을 지역 주민들의 삶 속으로 녹아들게 하는 일이다. 현장성과 구체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문화적 실천은 공허할 뿐더러 오래 갈 수도 없다. 배다리의 주인은 타지에서 치고(?) 들어간 문화예술인들이 아니다. 문화적 사명감 못지않게 배다리 주민들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바탕 위에서 전개되는 문화적 실천만이 유효성과 감응력을 지닐 수 있다. 배다리 주민들의 삶을 존중하고 자긍심을 높여줌으로써 그들이 변화의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게 해야 한다. 문화예술이란 모름지기 당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구체적 삶의 생기를 끌어내고 그러한 생동감이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지역에서 벌이는 문화적 실천이야말로 더욱 그러한 자세가 필요한 법이다. 

 

배다리에서 벌이고 있는 문화적 실천은 이제 겨우 첫 발을 떼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아직은 구체적 성과를 이야기하기 힘든 실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실험은 지역 문화운동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번 실험이 장차 성공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현실이란 언제나 녹록치 않은 법이니까. 그러므로 지금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 함께 달라붙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문화예술의 활로가 막혀 있다고 손을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드러난 구체적인 현장에서부터 뚫고 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플랫폼> 2007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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