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와 세상]‘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 이현우 | 서평가·필명 ‘로쟈’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자본주의적 인간관에 충실하자면 물론 ‘돈’이라고 해야겠다.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인센티브’가 우리를 움직인다. 어떤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자극이 인센티브다. 인간을 경제적 동물, 곧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정의하는 인센티브 만능론자들은 아예 인센티브를 통해서 인간을 얼마든지 주조할 수 있다고까지 믿는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 영감을 받은 과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도 적절한 보상과 강화를 통해서 인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령 책을 잘 읽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현금으로 보상하면 자연스레 독서로 유인할 수 있다는 식이다. 심부름을 하거나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아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우등생과 선행 학생은 인센티브를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그런 식의 금전적 보상이 독서나 선행 같은 ‘재화’의 가치를 변질시킨다고 말한다. 독서나 선행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될 것이고, 그럴 경우 자발적인 독서나 선행이 갖는 의미와 만족감 또한 훼손될 수밖에 없다. ‘행위와 인센티브’라는 보상체계가 우리를 어떤 행위의 주체가 아닌 단순한 수행자의 위치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실상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정의 자체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체적인 존재이고자 한다.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옹호가 철학자들만의 레퍼토리인 것은 아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드라이브>란 책에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인센티브가 오히려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지루한 반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을 독려할 때는 인센티브가 꽤 유용하지만 지적 도전을 수반하는 업무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자신의 성취가 금전적 가치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해야 할까. 현대 수학의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였던 ‘푸앵카레 추측’을 푼 공로로 2006년 국제수학자연맹이 필즈 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를 거부한 러시아 수학자 페렐만의 사례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이후에 미국의 한 수학연구소에 의해 100만달러의 상금이 걸린 ‘밀레니엄 상’ 수상자로도 선정됐지만 그 역시 거부했다. “나의 증명이 확실한 것으로 판명됐으면 그만이며 더 이상 다른 인정은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고집스러운 생각이었다.
예외적인 성취와 예상 밖의 수상 거부로 화제를 모으긴 했으나 페렐만의 경우가 이해 불가능한 사례인 것은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사고와 경쟁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모토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말은 자본주의적 주술이다.
지난 6월 말 방한했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필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게 되면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금전적 보상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적 방식이다. 물론 어느 정도가 ‘생존을 위한 필요’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이 다를지 모른다. 고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지 않은 페렐만은 도심 외곽의 방 2칸짜리 낡은 아파트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 이상은 사치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 때나 온수로 샤워할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의 꿈이었지만 그런 아파트에 산 지 십 수년째다.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아직 퍼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의 실감이다. 각자의 꿈이 이루어진 곳에서 그 꿈을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주체적 삶이 아닐까.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 영감을 받은 과거 행동주의 심리학자들도 적절한 보상과 강화를 통해서 인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령 책을 잘 읽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현금으로 보상하면 자연스레 독서로 유인할 수 있다는 식이다. 심부름을 하거나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아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우등생과 선행 학생은 인센티브를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옹호가 철학자들만의 레퍼토리인 것은 아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드라이브>란 책에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인센티브가 오히려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지루한 반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을 독려할 때는 인센티브가 꽤 유용하지만 지적 도전을 수반하는 업무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자신의 성취가 금전적 가치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해야 할까. 현대 수학의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였던 ‘푸앵카레 추측’을 푼 공로로 2006년 국제수학자연맹이 필즈 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를 거부한 러시아 수학자 페렐만의 사례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이후에 미국의 한 수학연구소에 의해 100만달러의 상금이 걸린 ‘밀레니엄 상’ 수상자로도 선정됐지만 그 역시 거부했다. “나의 증명이 확실한 것으로 판명됐으면 그만이며 더 이상 다른 인정은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고집스러운 생각이었다.
예외적인 성취와 예상 밖의 수상 거부로 화제를 모으긴 했으나 페렐만의 경우가 이해 불가능한 사례인 것은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사고와 경쟁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모토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말은 자본주의적 주술이다.
지난 6월 말 방한했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필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게 되면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금전적 보상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적 방식이다. 물론 어느 정도가 ‘생존을 위한 필요’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이 다를지 모른다. 고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지 않은 페렐만은 도심 외곽의 방 2칸짜리 낡은 아파트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 이상은 사치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 때나 온수로 샤워할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의 꿈이었지만 그런 아파트에 산 지 십 수년째다.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아직 퍼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의 실감이다. 각자의 꿈이 이루어진 곳에서 그 꿈을 널리 공유하고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주체적 삶이 아닐까.
[이택광의 왜?]자기계발
한국어로 ‘덕’이라고 번역되는 영어 virtue는 라틴어로 virtu이다. 어원은 그리스어 arete라는 말에서 나왔다. ‘덕’이라고 하니까 착한 사람이나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이 말은 어떤 기예나 능력을 갖춘 상태를 의미한다. ‘능란함’이나 ‘능숙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인 소피스트들은 이런 기예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교육이라고 불렀고, 학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문에 대한 태도가 이미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셈인데,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는 이 상황을 일컬어 “우리는 다시 소피스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피스트의 시대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자기계발서야말로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자기계발서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도 자기 변화를 거쳤는데,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성공하는 자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요즘은 <시크릿> 같은 이른바 ‘힐링’에 대한 조언들이 유행 중이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은 연원을 따지자면, 1990년대 무렵에 대기업이 도입했던 사원 연수 프로그램에서 사용되기 시작해서 이제는 서점의 매대 하나를 독립적으로 사용할 만큼 하나의 장르 개념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이런 자기계발론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서동진 교수가 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을 통해 제기됐다. 일종의 자기 식민화로서 자기계발론은 노동자들을 자본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저당 잡히는 주체로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저자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현상 자체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 그 원인이 ‘더 많은 자유에 대한 요구’라는 점이다.
‘더 많은 자유에 대한 요구’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계발론의 핵심이다. 더 자유로워지라는 자유주의의 지상과제에서 탄생한 것이 자기계발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절대 자유에 대한 방어 논리가 세속화한 것이 자기계발 열풍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계발서의 창궐은 이런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통해 가능했다. 따라서 특정한 개인에게 자기계발론을 유포시킨 책임을 따져 묻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주 트위터에서 자기계발론과 관련한 논쟁이 일어나 화제가 됐다. 발단은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였다. 변 감독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예로 들면서 20대의 불행을 팔아서 장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지를 펼쳤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저자인 김난도 교수가 직접 트위터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지금 젊은이들이 ‘아픈’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이고, 여기에 대해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썼다는 것인데, 이것을 변 감독처럼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견이었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자기계발서라는 규정에 묻어 있는 뉘앙스는 ‘현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내용을 얄팍하게 늘어놓는 책’이라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데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희망고문’을 자행하는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미 출간된 자기계발서들을 쭉 훑어보면, 대체로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을 자기계발의 방책으로 제시하고 있기 일쑤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의 책들이 자기계발서인 것이다. 누구도 소장하면서 두고두고 읽을 최고의 자기계발서를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의 기능은 충실한 일회용 가이드로 족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엄청난 선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자기계발서로 소비됐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너도나도 정치의식을 갖는 것을 ‘더 많은 자유’를 가지기 위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이것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을 자유로운 존재와 동일시하는 환상이 만들어낸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할 수 없는 제약에 있다. 자기계발은 ‘능력 있음’을 정상적인 것으로 전제하는데, 이 정상성을 결정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치 기준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더 많은 자유’라지만, 사실 그 자유의 실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의하는 그 자유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계발에 매진했지만,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냉소주의를 자기방어로 채택하기 마련이다. 냉소주의의 미학이 바로 자기반영의 유희이다. 잉여가 자신을 잉여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처럼 자기계발론은 사회구조 문제나 기성세대의 책임을 등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냉소주의에 아무런 대책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문에 대한 태도가 이미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셈인데,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는 이 상황을 일컬어 “우리는 다시 소피스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피스트의 시대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자기계발서야말로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자기계발서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도 자기 변화를 거쳤는데,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성공하는 자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요즘은 <시크릿> 같은 이른바 ‘힐링’에 대한 조언들이 유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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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자유에 대한 요구’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계발론의 핵심이다. 더 자유로워지라는 자유주의의 지상과제에서 탄생한 것이 자기계발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절대 자유에 대한 방어 논리가 세속화한 것이 자기계발 열풍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계발서의 창궐은 이런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통해 가능했다. 따라서 특정한 개인에게 자기계발론을 유포시킨 책임을 따져 묻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주 트위터에서 자기계발론과 관련한 논쟁이 일어나 화제가 됐다. 발단은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였다. 변 감독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예로 들면서 20대의 불행을 팔아서 장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지를 펼쳤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저자인 김난도 교수가 직접 트위터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지금 젊은이들이 ‘아픈’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이고, 여기에 대해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썼다는 것인데, 이것을 변 감독처럼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견이었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자기계발서라는 규정에 묻어 있는 뉘앙스는 ‘현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내용을 얄팍하게 늘어놓는 책’이라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데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희망고문’을 자행하는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미 출간된 자기계발서들을 쭉 훑어보면, 대체로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을 자기계발의 방책으로 제시하고 있기 일쑤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의 책들이 자기계발서인 것이다. 누구도 소장하면서 두고두고 읽을 최고의 자기계발서를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의 기능은 충실한 일회용 가이드로 족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엄청난 선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자기계발서로 소비됐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너도나도 정치의식을 갖는 것을 ‘더 많은 자유’를 가지기 위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이것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을 자유로운 존재와 동일시하는 환상이 만들어낸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할 수 없는 제약에 있다. 자기계발은 ‘능력 있음’을 정상적인 것으로 전제하는데, 이 정상성을 결정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치 기준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더 많은 자유’라지만, 사실 그 자유의 실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의하는 그 자유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계발에 매진했지만,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냉소주의를 자기방어로 채택하기 마련이다. 냉소주의의 미학이 바로 자기반영의 유희이다. 잉여가 자신을 잉여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처럼 자기계발론은 사회구조 문제나 기성세대의 책임을 등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냉소주의에 아무런 대책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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