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12.11 (월) 16:37
             

인천, 노래, 그리고 음악인 – 배다리와 동인천(전편)

 

인천광역시를 대표하는 명소들을 떠올리며 해당 장소의 간략한 역사와 그 곳을 소재로 탄생했던 여러 대중가요들, 그리고 관련된 인천 출신, 혹은 인천을 근거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의 알려진, 또는 숨은 이야기들을 함께 엮어본다. 

 

인천사람들에게 ‘배다리’는 동구 금창동과 송현동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 표현 그대로 19세기 말까지는 이 지역에는 마을 어귀까지 작은 배가 바닷물이 들어오던 수로를 통해 철교 밑까지 드나들 수 있었기에, ‘배가 닿는 다리’라는 뜻을 지닌 ‘배다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 역시 인천의 개항과 관련이 있다. 1883년 개항이 되면서 개항장 지역이 개발되면서 일본인들과 외국인들이 주로 살게 된 후, 당시 이쪽에 살던 조선인들은 그보다 좀 더 북쪽에 위치한 배다리로 모여들게 됐다. 

 

배가 닿던 곳…‘헌책방’ 거리로 유명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에 이 곳 역시 인천의 근대 100년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소와 건물들이 많다. 가장 먼저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 철도의 기공식이 우각리(현재 도원역 부근)에서 이뤄졌다. 원래 경인 철도는 우각리를 거쳐 독각다리(숭의로타리 서쪽 부근)를 경유하여 사동(인천여상 남쪽)에 종착하려던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지금 경인 전철이 다니는 경로로 노선이 정해졌다. 또한 이 지역에는 1907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3.1운동 당시에는 인천지역의 만세 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 바로 옆에는 1910년 기공되어 1912년 인가를 받은 서구식 사립학교인 ‘영화학교’(현 영화 초등학교 본관동)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한국과 인천 근대 교육 보급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한 단면이다. 그 외에도 미국 감리교 기독교 선교사들이 1897년부터 이곳을 근거로 선교 기지를 세운 것을 보면 인천과 한국 개신교 전파를 위한 주요 근거지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곳에 세운 남녀 선교사 기숙사 건물들 가운데 현재는 여자 기숙사 건물(한국 전쟁 이후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됨, 현 창영사회복지관)만이 보존된 상태다.

해방 이후부터 배다리는 인천 시민들과 타지 사람들에게 소위 ‘헌책방 거리’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인천을 떠나며 자신들이 소장했던 책들을 매각하자, 그 책들이 배다리 시장으로 흘러들어왔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월남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헌책을 내다 팔면서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1-11970년대에는 서울(청계천), 부산(보수동)에 이어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손꼽혔던 이 곳은 지금은 과거의 명성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 규모는 줄었지만, 여전히 아벨 서점 등 몇 곳의 서점이 그 맥을 지켜나가고 있다. 특히 1955년 개점하여 2대에 걸쳐 가업으로 이어가고 있는 ‘한미서점’은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하면서 인천 외 지역 사람들에게도 이젠 많이 알려졌다. (그 외에도 배다리 주변 공간들이 드라마에 비춰지면서 인천을 알리는 데는 꽤 도움이 되고 있다.)

근대사의 모든 굴곡을 거쳐 온 배다리는 시대의 변화 속에 더 이상 인천 상권의 중심지는 아닌 곳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인천의 고유한 문화의 향기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더욱 그 전통을 어떻게 아름답게 계승할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금도 이 곳의 생명력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와 21세기, 두 곡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타 지역 사람들, 특히 현재의 5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 물을 때 희한하게도 언급되는 노래가 한 곡 있다. 바로 그 분들이 군대 복무 시절 훈련을 받으면서 익히게 되었다던 그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다. 사실 이 노래는 조금은 외설적(이자 성차별적) 가사로 인해 심의 제도가 살아있던 2000년대 이전에는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음반화가 된 적은 없었던 곡이나, 그래도 코미디언 남보원이 원맨쇼 무대 등에서 성대모사들을 추가해 코미디 송으로 불렀던 버전이 어르신들의 기억에는 꽤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구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퍼지다보니 가사도, 멜로디(가장 많이 알려진 멜로디는 일본 해군가 <ラバウル小唄>(라바울 속요)의 일정 부분이 차용된 버전이다)도 변화된 버전이 다양하나 대체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가사는 이러하다. 

 

“인천의 성냥공장/성냥공장 아가씨/하루에도 한 갑 두 갑/일 년에 열두 갑/치마 밑에 감추고서/정문을 나설 때/치마 밑에 불이 붙어/아 아/성냥공장 아가씨는 백 갈매기”

 

위에서 언급했듯 남성들에 의해 구전되어 온 노래이기에 분명 외설적/성차별적 요소가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는 잠시 논외로 하고 이런 노래가 왜 인천, 특히 배다리 지역을 배경으로 생겨났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바로 1917년 일본인들이 (현재 우리의 기억에서는) 피카다리 극장(그 이전엔 문화극장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가 있던 곳으로 기억하는 자리에 조선인촌 주식회사를 설립해 ‘조선성냥’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 공장은 당시엔 거의 한국에 보급되는 성냥의 70%를 생산할 만큼 독점적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세워진 한국의 성냥공장들도 많은 곳들이 배다리 근처 동구 지역에 설립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성냥이 매우 귀한 물건이라 성냥 한 통이 쌀 한 되와 맞먹는 가격이었고, 공장에서 적은 임금으로 노동해야 했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충분히 이 노래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족을 위해 성냥을 숨겨 나올 수 있었을 것이란 추론은 가능할 것 같다. 표현의 문제를 넘어 현대사의 애환의 나름 투영된 노래인 셈이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대에 인천의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일제의 강압적 수탈에 맞서 이 곳 최초의 노동쟁의로써 동맹 파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후 1921년 10월 21일 인천 정미소 여성노동자의 동맹파업과 1926년 11월 9일의 인천 부두노동자의 동맹파업으로 이어진 이 파업은 한국의 여성 노동운동의 효시로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한편, 21세기로 넘어와 지난 2011년, 인천 토박이 가수이자 경인방송 iFM의 DJ이기도 한 백영규는 이 곡에서 모티프를 따와서 새로운 창작곡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를 발표했다. 물론 원곡의 가사와는 전혀 달리 청춘의 추억을 되새기는 가사를 담은 곡이다. 그래도 편곡의 일부분에서 20세기 곡의 멜로디가 차용되고 있긴 하다. 
 


 

2017년, 배다리 추억 되돌아보는 또 하나의 노래, 김광진의 <배다리>

가장 최근에 배다리에 대해 노래한 곡이 하나 있다. 1990년대에는 거의 국민가요급 인기를 얻었던 노래 <마법의 성>을 발표한 듀오 더 클래식(The Classic)의 보컬이자 솔로 싱어송라이터도 활동하는 김광진이 올해 4월 발표한 디지털 싱글 <배다리>다. 그 역시 인천, 특히 이 배다리 마을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보냈고, 그래서 이 곳은 마음의 고향과 같았음을 그는 역시 송림동 출신인 그의 아내 허승경씨와 함께 이 노래의 가사에 잘 담아놓았다. 

 


 

“태어나 자란 동네 배가 들어왔던 다리래/배도 다리도 이제는 없지 예쁜 이름만 거리에 남아

헌책방 많던 동네 교복 입은 친구들 모여/깔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낙서 없는 교과서를 찾지

세월 지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나네/음 음 떠나네

 

기차가 지나던 곳 제일 큰 사거리 너머에/매일 기다리던 나를 찾아 단발머리 소녀가 달리네

오늘도 보물찾기 헌책방 구석에 숨겨진/형들 누나들의 비밀얘기 어깨가 으쓱한 낡은 책들

먼지 속에 겨우 찾아 냈던/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낡고 또 해어진

 

변한 게 없는 거리 추억도 그대로지/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해

세월은 변해가도 내 모습이 변해도/수줍은 내 어린 날 미소를/마주칠 것만 같은 거리”

(김광진 <배다리> 가사)

 

※ <배다리>의 주인공 김광진과 그가 이 노래를 만든 계기가 된 또 한 명의 선배 가수의 이야기, 동인천의 1990년대 이야기는 후편에서 이어집니다.

 

 

글 김성환 음악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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