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s __ 오늘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노란 은행잎이 달려가는 바람에 후두둑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지난 밤에는 좀 더워서 잠못이루긴 했지만 어느 새벽녘에는 추워서 이불을 꺼내 덮기도 했다. 작업실 창으로 시원 바람이 달려든 것도 벌써 몇주전이다. 그냥 가을에 읽을 시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가을시, 가을에 읽으면 좋은 시, 가을에 어울리는 시 ... 이렇게 따라간 인터넷 검색창에는 김초혜, 류시화 .. 그리고 김남주 시인의 이름이 놓인다. 시인의 이름을 쫒아가니 <이 가을에 나는>이라는 시에 '눈물을 좀 흘렸다'는 백기완 선생의 시상으로 시작된 글을 퍼담아본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사슬에 손발이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광주옥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도시 거리의 인파를 빠져나와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에서
숫돌에 낫을 갈아 나락을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에서
빙둘러 서서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는 아이들의 제방에서
내려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내려서 손발에서 허리에서 이 오라 풀고 이 사슬 풀고
내달리고 싶다 아이와 같이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내달리고 싶다 발목이 시도록 논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슴에 바람 받으며 숨이 차도록
가다가 목이 마르면
손으로 표주박을 만들어 샘물로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땅으로 웃자란 하얀 무우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나 나를 태운 차는 멈춰주지 않고
들판을 가로질러 역사의 강을 건넌다
갑오농민들이 관군과 크게 싸웠다는 황룡강을
여기서 이기고 양반들과 부호들을 이기고
장성갈재를 넘어 전주성을 넘보았다는
옛 쌈터의 고개를 나도 넘는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 되어.


김남주
http://myhome.naver.com/vgnews/siindle.htm
 
1946년 전남 해남 출생. 1968년 전남대 영문과 입학.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9년째 복역중 1988년 12월 가석방조치로 출소. 1984년 첫시집 [鎭魂歌] 간행. 1987년 제2시집 [나의칼 나의피] 간행. 1988년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간행. 1989년 시선집 [사랑의 무기] 간행. 1989년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간행. 1991년 제 9회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음.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췌장암으로 별세.

이 닷컴의 시대에 닷컴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김남주 시인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봄이 깊어 갈수록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김남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박치음의 <산유화>를 듣는다. 굵은 저음에서 나오는 박치음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울림을 자아내는 듯하다.

김남주 시인은 1980년대 문학의 불이었다. 최근 신경림 시인이 창작과비평사 시집 통권 200권 돌파를 기념해 펴낸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는 엔솔로지의 제목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정신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김남주 시인은 1970년대의 김지하 시인이 그러하듯이 1980년대 문학의 뜨거운 상징이었다.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갔던 전사(戰士) 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 문단을 일깨운 민족 시인이다. 그러나……김남주를 기억하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옛 불은 꺼지고, 불씨가 언제 되살아날까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으니…….


젊은 정치인들의 광주 항쟁 추문(醜聞)화

지난 해 5월 20일, 민족시인 김남주기념사업회와 광주·전남작가회의 주최로 광주 항쟁 20주년을 맞아 광주 비엔날레공원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비(詩碑)가 제막되었다. 그때 나 역시 시비 제막식에 참여했는데, 화가 홍성담이 제작 총괄을 맡아 건립된 시비에는 대표작 「노래」가 새겨져 있었다. 양옆으로 대나무가 음각되어 있는 가운데, 약간 비스듬히 포즈를 취한 김남주 시인이 뭔가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은 자못 문인의 시비(詩碑)다운 향취가 물씬 풍겨났다. 여느 시비와는 다른 김남주 시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듯해 보기에 썩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주 항쟁이 일어난 후 성인식을 치르는 해에 시비가 건립되는 터라 시비 제막식의 의미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해프닝을 과연 엉뚱한 사건이었다고 치부할 수가 있을까. 갓 치른 4·13총선에서 당선된 젊은 정치인들이 망월동 묘지를 찾아 참배한 이후 이른바 술자리 파동이라는 유쾌하지 못한 사건을 일어켰다.

시비를 가리자는 뜻은 아니다. 그 사건을 보며 몇 가지 상념들이 스쳐 지났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980년 광주 항쟁의 정신과 더불어 1980년 광주 체험에서 비롯된 것들의 가치가 그러한 방식으로 망각되는가 하는 자괴감 섞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이른바 386세대라는 저널리즘이 상징 조작한 이미지와 바꿔! 열풍에 힘입어 정치권에 입문했을 터 아닌가? 그때 든 생각이 허울 좋은 386세대라는 말 대신에, 광주(光州) 세대라는 개념이 훨씬 더 제대로 된 세대 규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또 의례 행사처럼 치러지는 기념 행사에 대해 어느 시인은 쓴소리를 뱉었다. 항쟁 정신은 실종되고, 항쟁의 문화산업화만 남는 것 아닌가?

저항의 한 극단을 보였던 김남주의 시는 충격적인 시적 진술이 적지 않다. 가령, 「진혼가」를 비롯해 「학살」 연작시 그리고 「옥좌」 등의 옥중시는 서정시에 익숙한 독자로 하여금 당혹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김남주 시인의 시에 서려 있는 지독한 독기(毒氣)는 가위 원색적인 면마저 없지 않았다. 시와 궁합이 잘 맞지 않을 듯한 육두문자와 비속어가 날 것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김지하의 『오적』은 풍자와 해학이 있지만, 김남주의 시에는 잘못된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적대감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물론 두 시인이 구사한 시적 전략이 달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써 김남주 시인은 만해 한용운 ─ 이육사 시인을 잇는 한국 근대 옥중시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 「鎭魂歌」

김남주 시인은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컨추리(Country)풍의 마음 좋은 아저씨였다. 조금은 어리숙한 표정으로 입가에 웃음을 짓고는 하던 시인의 모습은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시와 사람이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인간적 신뢰감이 갔다. 솔직히 말해 작품의 명성에 비해 사람의 격(格)이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적잖이 보아야 했던 나로서는 김남주 시인의 모습은 참으로 이채로웠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대하며, 자신의 말만을 앞세우지 않고 까마득한 후배들의 의견도 귀에 담을 줄 알았다.


길은 그대 앞에 있는가

지난 해 나온 김남주 시인 추모 산문집 『내가 만난 김남주』(이룸, 2000)는 생전의 김남주 시인에 대한 다양한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아닐까 한다. 1990년대 강남 신사동에서 김남주 시인의 <한국문학예술학교> 강사 시절을 회고한 소설가 김남일은 모 탤런트와의 부르스마저 전혀 불온하지 않던 부르스였다고 회고한다. 나 역시 그 무렵에야 비로소 김남주 시인을 잠깐씩 보았다. 그런데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시절, 당시 소련 및 동구권의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시인은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나중에 시집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 「사상의 거처」 제2연


아!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심리 상태를 엿보게 된 것은 자못 우울한 일이었다. 이미, 시인은 옥중에서 발표한 시를 통해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길2」, 『나의 칼 나의 피』, 1988)라고 당당히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시인의 심사는 오죽했으랴. 그런 탓이었을까? 석방 이후 각종 재야 집회에서 시낭송을 통해 만인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시인의 사자후와도 같은 목소리에 뭔가 힘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얼마후 췌장암 진단을 받은 시인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짧고 굵은 생을 마감했다. 2월 16일, 민족시인 고 김남주 선생 민주사회장이 치러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다. 그리고 얼마후 문익환 목사도 생을 마감함으로써 한 시대가 갔다는 말이 실감나게 됐다.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표제시, 1995)

하루키류의 문학에서 자신의 문학적 친화감을 느끼는 풍토에서 시인은 이렇게 힘주어 말할지도 모른다. 제기랄! 별도 꺼지고, 노래가 사라진 지금, 차라리 내가 먼저 눈을 감겠다. 시인이라면 능히 그렇게 말하고도 남으리라는 생각이 턱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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