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화학공장 .. 주거지에서 200미터 이건 아니죠! 이래놓고 사고 나면 인재니 뭐니 그러구 그냥 넘어갈꺼잖아 .. 1000만분의 일이라도 이런 위험한걸 마을근처에 박아놓으면 안되잖아 http://t.co/2ntNwxDz9Z
  • 박통 당선과 함께 썩은 .. 가라앉아있던? 슬러지?쑤레기 엑기스들이 죄다 따라올라오누만요. 어디다 신고하면 돼죠?
  • MBㄱ이 녹조가 수질이 좋아지는거라한단다. 역사 왜곡도 모자라 과학까지 힘으로 누르려는 이 무식은 어쩌누? 그래서 멕쿼리로 뒷돈 빼내고? ...

[스포츠월드] 세계는 왜 이우환의 예술에 열광하는가.
학고재가 번역 출간한 '이우환-타자와의 만남'은 세계 정상급 미술가 반열에 오른 이우환(1936∼) 작품의 힘을 현대미술의 국제적 맥락에서 분석한 책이다.

이우환은 일본 현대미술에 큰 영양을 미친 모노하(物派:가공되지 않은 자연적 물질이나 물체를 그 자체로 사용한 작가들)를 주도했고, 1970년대 한국 미술계에 단색화 열풍을 일으켰다.

동양사상으로 서양의 미니멀리즘을 극복했다는 찬사를 받았고, 백남준, 구사마 야요이와 함께 아시아 대표작가 3인으로 선정될 정도로 현대미술사에 뚜렷한 괘적을 남겼다. 독일 미술사가인 저자 발라베는 서양 예술을 통해 단련된 유럽저술가의 관점에서 이우환 예술의 의미를 정신사적 문화사적 맥락에서 짚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관계항' 연작에서 1990년대 이후 '조응' 연작까지 이우환의 40개 작품활동을 다섯 개 장으로 나누고, 동 시대 서구 작가들의 조형언어와 비교하면서 이우환이 지닌 미술사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제시했다.

저자는 이우환의 작품이 지니는 사상적 측면을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레비나스의 타자이론, 데리다의 해체이론, 그리고 일본의 선사상을 동원해 설명한다.

이우환은 서울대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와 도쿄를 오가면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는 '사물' '장소' '만남' '비움' '타자' 등의 핵심 개념을 조각과 회화 작업 뿐만 아니라 '여백의 예술' '만남을 찾아서' 등의 저서로 변주해온 탁월한 예술이론가이기도 하다.

질케 폰 베르스보르트-발라베 지음/이수영 옮김. 도서출판 학고재 펴냄, 2만원.
강민영 기자 mykang@sportsworldi.com

 

 

▲ 이우환_From Point_3pcs_Pigment suspended in glue on canvas_162.1x291cm_1977

 

  "이우환의 작품이 외국 미술시장에서 한국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깼다.
미술품경매사 서울옥션에 따르면, 26일 홍콩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서울옥션의 제10회 홍콩경매에서
추정가 20억원에 나온 이우환의 1977년 작 '점으로부터'가 21억3000만원(수수료 제외)에 낙찰됐다.

수수료를 포함하면 24억2100여만원에 이른다.

'점으로부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질서정연하게 찍어 나가는 점을 통해 작가의 철학적 사고를 표현한 작품이다.

세로 162.1·가로 291㎝ 크기의 3점 세트다." 

이런 내용의 기사들이 오늘 이슈가 되었는데요~ 

저는 그것보다 이 기사의 댓글들이...훨~~~~씬 더 충격이었습니다.

 

 

. 미적가치 와 역사적(미술사적,고고학적)가치의 구분

 

많은 사람들이 -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적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뭐 이우환씨의 작품이 미적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다만

이우환 씨의 그림의 가치- 역사적, 혹은 미술사적 가치가

그만큼(24억쯤) 된다고 이해하시는것이 더 빠를것 같아요.

미적가치와 역사적(미술사적)가치는 분명 다른거에요.

 

이를테면 말이죠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아름다워서, 미적가치가 탁월해서 그는 현대미술의 아버지가 되었나요?

(뭐 현대미술의 할아버지를 세잔이라고 칩시다.)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없던 가치를 만들면서 그는 역사적인 예술가가 된거죠.

변기통? 우리집에도 있는데?

그거 내다팔면 돈되나?

돈안돼구요~~걍 잘 닦아서 깨끗하게 볼일볼 때 쓰셔요 ㅋㅋ

 

아티스트 남준 팩의 티비쌓아놓은 것을 보면서 '간지난다'라고 느낀적은 없습니다.

다만 누구도 그렇게 실험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영상예술 역사의 The First 가 된것이죠.

그의 가치는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앞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대서 가까이서 보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나리자를 보면서 그 미적 아름다움에 감탄하러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어 나 '루브르'에서 '모나리자' 봤어!!' 그 자체를 자랑으로 삼습니다.

마치 세계적인 연예인이나 셀레브를 목격한 그 감동말이죠~

미적가치로 따진다면야 루브르의 모나리자 보다

연예인 김태희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죠 ㅎㅎ

아닌가요? 나만 그런가??ㅋㅋ

아니 여러분들의 여자친구분이 더 미적가치가 훌륭할 수 있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은 미술관이지만 또한 '박물관'입니다.

모나리자가 유명하게 된 것은(미적가치 만큼이나) 그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때문입니다.

그 것을 착각하시면 곤란하죠.

그런데..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모나리자를 완벽하게 복제해낼 수 있다고 한들

그건 정말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지금에와서는 전혀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도 발가락에 연필 꽃아 그리면 저렇게 그리는데?

나도 점 저렇게 찍을 수 있는데..라는 식의 생각은

정말 알지못해서 생기는 헤프닝인거에요.

그리고 그 작품값을 단순히 실물경제의 소비재가격으로 환산해서 비교하면서

작품의 가치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단순한 헤프닝이라 생각하기에...리플들의 수준은 정말... 그래서 중학교를 잘나오셔야 합니다ㅋ

무튼..이우환님의 24억 짜리 작품보다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2. 무비판적 교육의 주입

 

 대학가면 필독서로 읽게되는 교양서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젠슨부부의 서양미술사.

그 책들 또한 미술史, 미술의 역사책인거에요.

역사적으로 가치있는(가치있게 된) 작품들을 소개하는 거죠.

즉 거기나온 작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다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닌데.

이미 미술사의 권위를 등에업다 보니

그것들을 아름답다 생각하지(강요받지)않으면

마치 자신이 교양없고 무식한 티를 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거에요.

(이것이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예전에

국내에 피카소와 모네의 전시가 있었는데(시립미술관에서)

제가 보기엔 거의 작업실에 나뒹굴던 습작들, 작가의 B급도 안되는 C급 작품들이 반입이 되서 전시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마치 그속에서 억지로 감탄할 것들을 끄집어내어

뭔가 마치 대단한 작품들인양 억지 감탄을 하려 노력하더군요.

거의.. 자기기만 수준입니다.

 

그것도 아마 미술사책에 언급된 이름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모두 훌륭하다!

라고 '믿어의심치 않게 되는' 잘못된 교육의 문제점입니다.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미적가치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네가 위대한 작가이긴 하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훌륭한건 아니란 뜻이에요.

모네의 작품 중에서도 미적가치가 쓰레기급 되는 작품도 있다는 거죠.

피카소의 드로잉이 몇억하는 것은 그게 몇억하는 만큼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피카소의 역사적가치, 시장가치가 그만큼 되는것 뿐인 경우가 더 많을거에요.

 

그리고 '서양'미술사 이기 때문에 역시 백인남성들의 중심에서 쓰여진 반쪽짜리..아니

반의 반쪽짜리 미술역사 교과서 가운데 하나라고 보심 됩니다.

그러므로 그 책들을 '신봉'해서는 안되는거죠.

 

그리고 나는 세잔을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나는 세잔의 그림이 그다지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면

그것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미술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전혀 다른 미술사도 쓰여질 수 있죠.

서양미술사를 비판하고 문제점을 꼬집은 서적들도 상당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작품은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검증된 작품들을 비판할 수 있는 용기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비판이 아니라 '싸잡아 비난'은 정말..아니라는 거죠.

 

네이버 리플들의 수준은..정말 참담합니다.

 

 

3. 미술품의 가치  

 

있는자의 돈놀음? 제태크를 위한 수단?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주식이 오르기 전에 사놨다가 오를때 판다고 생각하면 쉬울까요.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24억을 주고 산 사람은 그 작품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거에요.

그렇게 시장은 움직이게 되어었어요.

 

우리나라의 고려청자와 조선의 백자가

500억에 낙찰되었다 칩시다.

그것을 단순히 미적가치만을 보고 구입하는 극도의 탐미주의자는 거의 없을거에요.

나중에 되팔기도 하겠죠. 그 청자 백자의 가치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가치가 상승할테니까요.

우리의 미술품의 역사적 가치가 그만큼 된다는데 오히려 자부심을 가질 일입니다.

 

epl축구 좋아하시나요?

러시아 석유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삼성이 유니폼을 후원하는 첼시FC의 구단주에요.

스페인 국대 축구선수인 '토레스'를 900억을 주고 데려왔습니다.

그만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지금은 그 토레스 선수가 포텐을 터트리지 못하고 하향세입니다만

그렇다고 누가 로만 구단주를 비난할 이유가 있을까요?

로만은 토레스선수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 돈을 주고 데려온것 뿐이에요.

로만에게 900억은 껌값보다 조금 비싼 돈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우리가 '말도안된다' '거품이다' '그 돈으로 빌딩을 사네 마네' 이런사고로

로만을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요?

 

문제는

정말 값어치가 없는 작품들이 언론플레이와 시장의 검은 손들을 통해

없는 아우라를 주입하고 포장하여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겠죠.

특히나 현대미술의 경우에요.

 

그리고 재벌들의 탈세와 돈세탁을 위한 수단으로 다루어 질 때겠죠.

 

그것들을 판별하는 눈을 기르기위해서도 미술교육은 제대로 이루어 져야 합니다.

 

 

4. 미술교육의 부재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동안

미술시간은 몇시간 정도 수업을 받으셨나요.

그리고 그 수업시간에...질 높은 교육을 받긴 받으신건가요.

아마 아닐겁니다.

 

미술시간에 영어 수학 참고서 펼쳐놓고 공부한 경우가 더 많을것 같아요.

아닌가요? 저희때는 그랬습니다.

학교에서 어디 미술이라는 과목이 존재감이 있었던가요?
수능에 과목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미술, 음악이 어디 과목 취급이나 받았나요.

그리고 그 과목들을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은 어떤 대우를 받으셨을까요..

 

오늘 보고 분노했던 네이버 리플들도 결국 그들의 잘못, 혹은 그들의 교양수준을 탓하기전에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눈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이 교육환경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술'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자체가 너무 없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삶속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술이..배부른 자의 취미생활(따위)로 여겨지는

그저 눈가리고 아옹하며 사기나 치고 허세나 부리는

차라리 평생 초코칩 자바 프라푸치노를 평생 먹는것이 나은 정도의

가치로 여겨지는것이..너무..슬프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초코칩 자바 프라푸치노많이 드시지 마세요..뱃살에 손잡이 생깁니다ㅋㅋㅋ)

 

물질만능주의, 천박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뒷모습이겠죠.

리플들을 보면서 느낀 깊은 절망은 그런거였어요.

 

세상엔 돈으로 환산하거나 교환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프랑스가,루브르를, 그리고 모나리자를, 돈으로 교환을 할까요?

억만금을 주더라도 팔지않을 것이에요.

왜일까요?

그것은 돈으로 교환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꼭 모나리자에 비유치 않더라도

돈으로 살 수없는,값을 매길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가치들 속에 예술은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거에요. 

 

디자인 서울..ㅎㅎ

간판정리한다고 문화강국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백년대계라는 우리의 교육은. 언제쯤 그 질과 깊이를 얻을 수 있을까요.

 

 

ps

이우환 님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이렇게나 많군요~!!

(많은 덧글과 공감!! 들을 보니 말예요 ㅎㅎ)

이우환 화백이 10여년 전에 출간하신 수필집이 있습니다.

예전엔 '디자인 하우스'라는 곳에서 출판했었는데 지금도 나오는지 모르지만

이우환 화백의 작품세계나 사상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에겐

조금이나마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실것 같으네요~

 

 

"선생은 늘, 산다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며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슴하시곤 했다. 어느 날 밤, 술자리에서 내게 곰곰이 말씀하신 것도,

생각이나 일을 못하게 되면 나는 적어도 내 쪽에서

산다는 짓거리 따윈 그만두고 싶다, 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머리나 행동이 없는 식물인간인 양 부질없는 목숨의 연명에 급급한,

수많은 세상의 속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 이우환 '시간의 여울'(p127) 가운데서_

오늘은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오전에 잠시 차를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의외로 차들이 많지 않아 금새 볼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잠시 차를 세워두고 누군가를 기다릴 일이 있어
골목에 차를 세운 후 차 시동을 꺼 놓았습니다.
차 앞유리면에 물방울들이 맺혀
뒤의 풍경과 함께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더군요.
싸이 톰블리(Cy Tombly, 1928~)의 그림들이 떠올랐습니다.

Untitled, 1963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이 톰블리의 그림을 처음 보면,
"이것도 예술작품이야?"
하고 의아해 하곤 합니다.
하지만, 싸이 톰블리는
작품 하나당 40억원에 그림이 거래되는
유명한 작가입니다.

Natural History (Some Trees of Italy), Part II, Sheet 5
,1976


그의 그림은 낙서와 휘갈겨 쓴 글씨들을 이용하는데,
대개는 도시 풍경이나, 풍경을 자주 그립니다.
그저 그래보이고,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어보이는 낙서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탈리아의 몇그루 나무'라는 제목의 그림은
나무의 생생함과 뒤로 펼쳐진 정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삐뚤삐뚤한 글씨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모래밭에 새겨놓은 낙서들 같지요.
그 살아있는 순간이 낙서에 담기게 됩니다.

Untitled
, 1961


그는 늘 스케치북을 손에 들고 다닙니다.
아이들이 노니는 모습, 나무들, 광장의 사람들,
분수대, 모든 것이 그의 그림 소재가 됩니다.
마치 아이가 그린 것처럼 그의 선에는


 

꾸밈이 없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그리는 세상,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요?
Untitled (New York City)
, 1968


 

복잡하고 정신없는 뉴욕의 모습이
어린아아같은 화가의 눈엔 이렇게 비췄나 봅니다.
눈을 부시게 하는 네온싸인과, 끝도 없이 이어진 차들의 행렬.
하는 끝까지 닿으려는 듯 높은 빌딩들로
검게 드리운 그림자.
그리고 아름다운 뉴욕의 밤하늘.

Sans Titre (Roma)
, 1963


그의 그림들이 즐거운 단 한가지 이유는.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그려진 무제의 위 그림은 무엇을 그린 걸까요.
여름날, 공원에 모여 밤하늘에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모습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불이 난 건물에 물을 뿌리는 분주한 소방수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노란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멋진 미소의 정원사일 수도 있지요.
그의 그림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답니다.

싸이의 그림은 낙서니까요.
 
Untitled (Rome)
, 1961

그의 그림은, 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몇 안되는 막그린 듯한 선들이지만, 분명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쫓고 있지요.
아이의 눈을 닮고,
자연을 닮은 그림을 그리는
싸이 톰블리는 정말 멋쟁이 화가입니다.

 

 

 1. untitled, 1961, 164.5cm * 200cm

직접 손을 사용해서  물감을 캠퍼스에 묻히는 방법은 회화사에서 신체성을 극도로 강조 한다. 이 그림에서 다양한 붉은색과 주황색 물감은 마치 관능적인 신체의 부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뿐 아니라, 신체가 화면에 스친 자국을 통해  그것의 흔적이나 사건을 기록 하고 있다. 이 신체적이면서도, 심지어 성적인 상호 관계를 통해  화면은 요동치고, 난폭한 향연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톰블리에게  있어 표현은 화가의 신체와 켄버스, 그리고 화가가 떠올리는 기억속의 신체 사이에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려 진다기 보다 묻는 것이며, 나아가  서로 만지는......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서로  '더듬어  나가는 것 (tatonner) '이 된다.

 

 

 

   2.from point, 1977, glue on canbus, 182*227cm colleection 도쿄 국립미술관

 

 

 

   3.vergil, 1973,69.8*99.6cm

버질은 라틴시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의 유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로마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아우구스트 황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메세나를옹호하고 그를 위해 가장 위대한 국가적 서사시로 알려진 에네이드를 썼다. 그의 중요한 초기작은 목가시 ( bucolic)로 테오크리트의 시를 흉내 내어 썼어며, 이후에는 농사에 대한 교훈적인 농경시(gedrgic)로 알려졌다. 톰블리는 아마도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프란체스카에게 이끄는 버질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쓰고 지우고 다시쓴 일련의 그의 작품은 작가가 드로잉을 통해 어떤 것을 재현 할려고 하는지 탁월한 예로 보여준다. 그것은 '책읽기'를 통해 만나는 존재에 대한 직접적 호출의 행위인 것이다.

 

 

 

4.untitled,1967, 70cm*100cm

나선형의 '끄적임(gouillage)'은 마치 시인의 손의 움직임 이거나 , 딱히 무엇을 쓰야 할지 알 수 없는 작가의 심리상태가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톰블리의 드로잉회화는 기억과 기억의 겹침. 상호 텍스트( inter-textuality), 기록이 생산하는  중층적 의미에 대한 인문학적 단서를  회화를 통해서 단일한 시각적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것은 기호일뿐 아니라, 그 자체로 신체의 등가물이다.

 

 

 5. untitled, 1954, 174.5cm * 218.5cm

초기의 톰블리회화는 추상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흑백의 배경에 배치된 단순한 기호들의 부분적인 이미지로부터 오래된 건물 벽에서 발견된 때묻은 낙서 흔적에 이르기까지, 소묘와 회화사이를 오가는 톰블리 작품 세계는  이미 이때 부터 나타났다. 신체성을  통해 드러나는 심리적 풍경이라는 이항적관계 역시 표현의 기본틀로서 심도있게 다루고 있음을 볼수 있다.

 

 

 

 

*. 20 c회화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싯적인 화가를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싸이 톰블리를 떠올릴 것이다.

톰블리는 회화를 통해 서양문화의 바탕을 이해하고, 그것이 불러 일어키는 영감의 본질을 재현하는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한 화가이다. 그의 양식은 간결하면서도 예측을 뛰어 넘는 놀라운 시각적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시와 낙서, 회화와 서예, 리듬과 텅빈 여백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어떻게 보면  석도(石濤)나 팔대산인과 같은 예술가들이 추구해온 회화적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사이 톰블리는 1980년대초 트랜스 아방가르드나 신표현주의와  같은 제스츄얼페이팅의 세계적인 확산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80년대말 에 이르러 생존화가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간주되었으며, 20세기 회화사에서핵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톰블리는 그의 경력에 비해서 매우 늦게 알려진 작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국민적화가 제스퍼 존스, 로버트 라루셴 버그등과 함께 아이비리그에서 수학했다. 또 이들과 함께 주목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에 20대 초반 이었던 이들은 미국을 위시해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세례를 받으며성장한 회화의 자율성과 개념적 순수성에 대한 관념을 뿌리 깊이 내면화한 세대다. 그러나 톰블리는 대학 졸업후 미국을 떠나 곧 바로 이탈리아 로마에 정착했다. 그리스,로마의 라틴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기인한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 그로 하여금 미국의 주류무대에서 한발 물러서게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얀 켄버스톤의 배경위에서 아무렇게나 그어댄 듯한 선과 스쳐서 묻은것 같은 색채의 얼룩은 내리쬐는 태양볕 아래에 빛나는 고대 지중해도시의 건물벽에 남겨진, 이름모를 고대흔적을 보는것 같다.

신과 시인들의 이름이거나, 무언가를 쓰려고 하다가 다시 지워 버리고한듯한 헝클어진 선들이 여유로움과 관능성을 관통한다.

 

바르트는 톰블리의 회화를 후기구조주의 문학의 주요한 테마중의 하나인 '글쓰기(criture)'라는 개념을 통해 바라 보았다. 즉 가장 순수한 의식의 표현은 무언가에 대해 쓰고자 하는 의도적 노력이 아닌, 그저 글을 쓰고 있는 행위의 실천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의 사유는 또하나의 사유로 이어지고계속해서 사유의 새로운 네트워크가 혹은 형태를 구축해 간다. 바르트는 그런점에서 글을 쓰는행위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한 생각의 사례를 톰블리에게서 발견 한 것이다.

가벼움과 통찰, 머뭇거림과 내면의 울림,끼적거림과 직관의 혼재야 말로 글쓰는 행위의 핵심적인 즐거움을 이룬다.

톰블리의 '글쓰기'는 바르트가 동경해 마지 않던 그것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를 보여 주었다. 톰블리 회화는 무엇 보다도  '드로잉', 즉 소묘에 가까운 선의 흔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사실상 그의 그림은 낙서나 꺼적꺼림에 가까운 선묘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 마저도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매우 희박하게 표시되어져 있다. 이러한 적은 표현은 미니멀리즘의 영향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실은 매우 구체적인 시적 표현 양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톰블리의 드로잉은 정확하게 이미지를 드러내는 대신,  그것을 찾아가는 행위를 기록한다. 재현적 과정에서 비롯된 선들이 아니라 일종의 '호출'. 즉 드러낼수 없는 뭔가를 부르는 몸짓, 발짓 같은 것의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일종의 소리나 흔적, 암시적기능으로서의 호출 유발성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년 ~ 1970년)는 추상회화의 본질과 형상에 혁명을 일으킨 미국인 화가 세대에 속한다.[1] 45년에 걸친 마크 로스코의 활동 시기는 리얼리즘 시기(1924~1940), 초현실주의 시기(1940~1946), 과도기(1946~1949), 고전주의 시기(1949~1970)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두 시기에 로스코는 전원풍경화, 실내화, 도시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뉴욕의 지하철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 중 마지막 주제는 이후의 작품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차 대전과 전쟁 직후에 그린 작품들은 상징적이며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적 모티브에 기반을 둔 것들이다. 로스코는 순수추상회화로 옮겨가던 과도기 시절에 소위 ‘멀티폼’이란 것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한, 직사각형의 색면, 즉 유명한 고전주의 시기 작품으로 점차 발전해 나갔다.

 

마크 로스코는 194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 일었던 급격한 화풍의 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해외에서의 전쟁으로 인한 폐해와 혼란을 피해 뉴욕으로 온 마크 로스코와 동시대 화가들의 회화는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이행한다.

1923년 뉴욕으로 온 뒤 전설적인 예술 학생 연맹에서 수학한 것을 제외하면 마크 로스코는 정식 미술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다. 마크 로스코에게는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라는 중요한 스승이 있었으며, 에버리의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은 젊은 로스코의 작업 방향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 드라마에 가졌던 관심을 발전시켜 신화와 심리 분석서들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고, 렘브란트의 그림, 모짜르트의 음악, 니체의 철학은 마크 로스코의 사상에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1940년대에 이르러 마크 로스코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라고 알려져 있으면서 때로는 '뉴욕 학파'라고도 불리는 느슨하게 구성된 일군의 화가들과 함께 활동한다. 그러나 이들 화가들이 전부 뉴욕에 기반을 두고 활동한 것은 아니며, 또한 추상화에 대한 접근방식도 서로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밝은 시각 효과를 내는 색면이 일깨우는 신체적 감각을 탐구했다. 마크 로스코는 추상 이미지가 "휴먼 드라마"의 근원적 속성을 직접 반영할 수 있고, 회화가 비극, 환희, 숭고함과 같은 영원한 주제들과도 때로는 맥을 같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초기: 1920년대 - 1930년

1920년에서 1930년대 시기동안 마크 로스코는 누드, 자화상, 인물이 있는 내부정경, 도시와 자연경관 등을 그린 수백 점의 그림을 종이와 캔버스에 남기고 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형태의 고의적 변형과 물감의 엄격한 적용은 몹시 선망한 아프리카와 대양주 미술, 어린이 미술과 같은 몇몇 비서구 시각 전통이 공유한 특징들이다. 드로잉과 회화의 재료와 도구에 대한 초창기 실험적 시도는 흑연, 잉크, 투명/불투명 수채, 유채를 포함한 많은 소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크 로스코의 초기 전시회에는 야외 풍경을 그린 ‘무제’(풍경화)와 같은 수채 풍경화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의 유기적 곡선 묘사는 재빨리 도시의 기하학적 구도로 대체된다. 동시에 형상은 갈수록 뒤틀려 나타나고, 이런 특징은 1930년대 말 그려진 두 작품 ‘거리 풍경’과 ‘지하철 환타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후자는 마크 로스코가 뉴욕 지하철을 인간 소외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탐구한 대표적 작품이다. 평면적이고 무표정하면서 지극히 연약한 인물들은 그물망 같은 답답한 지하세계에서 건축적 배경과 뒤섞인다.

 

과도기: 1940년대

자신의 예술이 인간조건의 비극성을 표현하기를 원했던 마크 로스코는 "이제 누구도 형상을 훼손하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는 때가 왔다"라고 말했다. 1940년 즈음 마크 로스코는 면 분할된 영역 속에 위치한 반복되는 형태와 심하게 분절된 인간 형상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 ‘무제’와 같은 일련의 회화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진행될수록 마크 로스코의 이미지는 더욱 상징성을 띠고, ‘근원’, ‘물속 드라마’처럼 신체적 변형을 그린 회화로 이행하면서 추상화에 더욱 근접한다. 이 그림들은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종이와 캔버스를 이용해 그려진 많은 그림들의 일부분이다.

1947년은 바야흐로 마크 로스코의 회화에서 모든 구상적 이미지는 다 사라지고 대신 느슨하게 정의된 "다층 형상"이라 불리는 색면의 비객관적 구도가 등장한다. ‘작품 9번’이 대표하는 다층 형상의 시기는 1947년에서 1949년까지 지속되며, 이 시기 마크 로스코의 작품 세계는 가장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캔버스화의 방향과 모양, 그 위에 창조된 형태, 색조 범위는 구도상 절제되고 극도로 복잡한 색면을 특징으로 하는 마크 로스코 독특한 양식의 기초가 된다.

 

원숙기: 1950년 - 1970년

1950년경 마크 로스코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여 ‘단순한 표현 속의 복잡한 심정’이라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이들 작품은 보통 1955년작 ‘무제’에서 나타나듯이 두개에서 네개의 직사각형이 큰 색면 위에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는 구도를 보인다. 이런 형태 안에서 마크 로스코는 폭넓은 색채와 색조, 여러가지 양식적 관계를 활용해 극적이고 소박하며 시적이기도 한 다양한 분위기와 효과를 자아낸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1957년 ‘무제’에서 볼 수 있듯이 1950년대에 상당히 어두워졌다. 1958년 무렵에는 화려한 색상 대신 붉은색, 갈색, 고동색, 검은색 등 어두운 색을 선택하여 사용하였고, 특히 생애 마지막 10년동안 몰두했던 벽화작업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1968년 대동맥류가 발병한 후 마크 로스코는 주로 커다란 캔버스에 그리던 것을 그만두고 종이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 중 상당수는 판넬이나 직물 위에 설치되어 틀이 없는 캔버스화처럼 보인다. 1969년작 ‘무제’는 마크 로스코가 생애 마지막에 그린 고동색 혹은 검은색과 회색의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그의 작품 구도는 기본적인 색채, 색조, 색면의 대치구도로 한층 집약된다. 하지만 선명한 붉은색으로 가득찬 1970년작 ‘무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오로지 어두운 색채만이 그의 작품을 압도했던 것은 아니다.[3]

연보[편집]

  • 1903년트코비치가 9월 25일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안나 골딘과 야콥 로트코비치 사이에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 1910년 아버지 로트코비치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정착하다.
  • 1913년 마르쿠스와 어머니, 누이가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가족들이 다시 모이게 된다.
  • 1914년 아버지가 사망하다.
  • 1921~23년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위치한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다.
  • 1924년 뉴욕 시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ASL)에서 조지 브리지먼의 해부학 강의를 듣다.
  • 1925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맥스 웨버의 회화 수업을 듣다. 웨버의 영향으로 표현주의의 양식으로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다. 채색하기 전에 언제나 밑그림을 그리곤 했다.
  • 1926년 웨버 밑에서 계속 회화 공부를 하다.
  • 1929년 브루클린의 유대인 센터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다.
  • 1932년 밀턴 에이버리와 아돌프 고틀리브를 만나 친구가 되다. 이디스 사샤와 결혼하다.
  • 1933년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다. 센터 아카데미에서 드로잉과 수채화를 제자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다.
  • 1935년 독립 미술가 협회 ‘더 텐’을 공동창립하다. 벤 자이언, 아돌프 고틀리브, 루이스 해리스, 잭 쿠펠트, 루이스 샹거, 조지프 솔먼, 나훔 차즈바조프 그리고 일리야 볼로토프스키 등이 회원이었다. 로스코는 1940년 그룹이 해체되기까지 ‘더 텐’과만 전시회를 열었다.
  • 1936년 뉴욕의 공공사업촉진국(WPA) 회화부에서 일하다.
  • 193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다.
  • 1940년 이때부터 마크 로스코라는 이름만 사용하다.
  • 1941년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로 종이나 캔버스에 그리다.
  • 1944년 초현실주의 양식의 추상화를 수채, 구이슈, 템페라로 종이에 그리다. 이디스 사샤와 이혼하다.
  • 1945년 마리 앨리스(‘멜’) 비스틀과 재혼하다.
  • 1946년 초현실주의 양식의 마지막 작품을 종이에 그리다.
  • 1947년 멀티폼의 등장으로 점점 더 추상화 경향을 띠고, 이것은 몇 달 후 후기작을 특징짓는 사각형 색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 종이에 그리는 일이 적어진다. 뉴욕의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다.
  • 1948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 미국 조각, 수채, 그리고 드로잉 연례 전시’에 참가하다. 어머니 케이트가 가을에 사망하다.
  • 1949년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치고 현대미술 강의를 맡게 되다. 베티 파슨스 화랑에서 성숙기 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하다. 이후 작품 제목은 모두 번호와 제작 연도로만 이루어지게 된다.
  • 1950년 여객선을 타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하다. 딸 케이트가 태어나다.
  • 1951년 브루클린 대학의 드로잉 교수가 되다.
  • 195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유명한 ‘15인의 미국인전’에 참가하다.
  • 1954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개인전을 열다.
  • 1955년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다.
  • 1958년 뉴욕의 시그램 빌딩 벽화 제작을 맡게 되다.
  • 1961년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홀리요크 센터의 식당 벽화 주문을 바다.
  • 1964년 존과 도미니크 드 메닐에게 고용되어 휴스턴의 새 예배당을 위한 기념비적 벽화를 제작하다.
  • 1966년 세 번째로 유럽을 여행하다.
  • 1968년 동맥류를 앓아 3주간 병원에 입원하다.
  • 1970년 2월 25일에 자살하다.
  • 1971년 텍사스 주 휴스턴의 로스코 예배당의 봉헌식이 거행되다.[4]

대표 작품[편집]

  • <<무제>>, 1956년
  • <<무제(지하철)>>, 1937년경
  • <<무제(하양과 빨강 위의 바이올렛, 검정, 오렌지, 노랑)>>, 1949년
  • <<전조>>, 1943년
  • <<무제>>, 1948년
  • <<무제(빨강 위의 파랑, 노랑, 초록)>>, 1954년
  • <<No. 61(녹빛과 파랑)[파랑 위에 갈색, 파랑, 갈색]>>, 1953년
  • <<사프란>>, 1957년
  • <<무제(노랑, 빨강, 파랑)>>, 1953년
  • <<패널 1(하버드 3면 벽화)>>, 1962년
  • <<무제>>, 1968년
  • <<No. 207(짙은 회색 위의 빨강과 짙은 파랑)>>, 1961년
  • <<No. 14/No. 10(황록색)>>, 1953년
  • <<무제(회색 위에 검은색)>>, 1969/1970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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