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꽃은 무슨 꽃일까요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

작은 아기 얼굴 만큼 크고, 여린 꽃잎이 유난히 화려하게 보이던 이 꽃에

카메라 앞에서 피었습니다.

 

바림아 몹시 불던 봄 날

계단 옆에 곱게 피었던 붉은 철쭉이

뚝뚝 떨어져

회색빛 바닥에 흩어졌습니다.

 

얼마 전

장미가 아주 작은 봉오리를 찍으면서 5월이 오겠구나 했는데 ..

벌써 5월이 중순에 접어듭니다.

어린이날 ..

일도 손에 안잡히고 해서 시내에서 어슬렁  거리며 찍은 사진 입니다.

소년 소녀 상이 있는데 .. 왠지 느낌이 .. 비슷하지요?

부평 문화의 거리는

나무와 상점 간판과 사람들이 뒤엉켜있습니다.

익숙하지만 좀 아쉽습니다.

쉴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 다운타운에서 겨우 쉴 곳이지만

상업공간 속의 쉼터는 더 지치게 합니다.

어린이 날이라고 

오랜만에 아빠가 아기와 함께하고 있네요 

눈이 똑 닮았네요 ㅎㅎ

 

  

철지난 색전구가 어지러이 널려있고,

온갖 간판이 가로등 마냥 거리를 뒤덮습니다.

밤이면 이 거리는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밝습니다.

 

오랜만에 본 짱구도 귀엽고

아이의 넋 빠진듯 무언가 쳐다보난 눈도 귀엽습니다. 

 

이 호화찬란한 거리는

벌서 40년이 되어가는 부평시장과 이어집니다.

많은 노점상들이 이 거리가 만들어지기위해 �겨났습니다.

예전 .. 문화의 거리가 생길때 .. 이 거리에서 수십년 장사하시던 분들과

나눴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날이 좋아서

어르신들의 작은 쉼터가 되어주네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한 껏 꾸미고 나와 앉았습니다.

작은 무대가 앞에 있는 데 그곳에서는 한 미술학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페애스 페인팅을 해줍니다.

한 가족의 표정입니다. 잠시 쉬는 모양입니다.

이 거리에서는 돈을 쓰지 않으면 달리 즐길 꺼리가 없습니다.

어디나 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가족의 제각각 모습이 묘한 느낌을 주어서 한 컷!

 

한 소녀의 미소가 고왔습니다.

 

여자들 조끼는 유행이 아니라 거의 팔지 않아서 구제가게에 드를려고 갔는데

부모닙은 가계에서 신발과 옷가지를 사는데 형편이 어려운 모양인지 몇 천원 짜리 구제품을 사느라 주인과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커다란 눈과 까만 피부가 예뻐서 한 컷 ..

뒤돌아 오는 길에 가족 사진을 찍어줄 껄 .. 하는 아쉬움이 있어서 되돌아 갔는데 가족은 사라졌습니다.

쩝 .. 날이 어두워지는 시각이라 .. 좀 멀리서 찍었더니 .. 포커스도 나갔넹 ㅡ.ㅡ;;

 

우리 동네 손바닥 공원 풍경 ..  

 

 

"진보는 단순화다" - 간디

  -신영복의 <강의>중 묵가편에서 ..

 

신영복 선생의 <강의>가 이제야 끝나간다.

시경에서 시작해 .. 묵자에서 순자로, 법가로 ..

3월 초 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 신당 창당이다 총선이다 하면서 자기 전 침대 머리맡에서 몇 장 읽는 게 전부였는데 .. 거의 두 달 만에 끝이 보인다.

밑줄이 많이 그어지는 책이었고, 행간이며 자간에 담긴 뜻과 말이 많은 책이다.

빨리 읽을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빨리 읽으면 안되는 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 생각한다.

 

이 동양 고전 강의에서 묘하게도 .. "지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원전 7세기에서 2세기라 햇으니 .. 요즘시대로 하면 50년 내외 쯤 되는 거 같다. 이시대의 고민이 우리의 고민과 닮았다고 할까?

 

춘추전국시대의 오로지 부국강병만을 위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무한경쟁시대의 모습이 21세기 초인 지금과 다르지 않으며, 그 가운데에 백가쟁명과 같은 인간과 사회와 정치, 철학이 새로운 담론을 고민해야 할 시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며칠 전 읽었던 묵자가 자꾸 떠올랐다.

딱 내스타일이다. 

우리들은 묵가가 되어야 한다. 전사처럼 ..

그러나 리버럴한 자유주의자 성향에서 벗어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80년대 선배들이 딱 .. 묵가 스타일이다.

나는 할 수 있을까? 묵가의 강경한 실천규범에 대해 .... 좀 고민이 됐던건 사실이지만 못할 건 없다고 본다. 꾸꾹 눌러서 10년쯤은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지난 밤 다시 읽은 부분이 "진보는 단순화"라는 말이다.

너무 빨리 말고, 너무 멀리 말고 .. 딱 반걸음만 앞서가는 진보

그러나 스스로는, 정신적으로는 아주 많이 앞서 가야하는 자다. 

 

사진모임 '결정적 순간'에 이름갖고 떠든다.

참, .. 싫어지려고 한다.

직접행도도 .. 싫어지려고 한다.

자신의 역동성을 이름이나 이론에 쳐박는 순간 ..

단순하지만 명확한 실천, 경쾌한 대중이론이 나오기 위해서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 나는 '이미' 생각은 무지 많이했다고 본다. 그리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 경쾌함과 실천이 '말'에 뭍혀서

그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 그리고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 그 모든 것이 과연 함께가는 진보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거라 보기엔 너무 함부로 말하고, 경박하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배려를 느끼기엔 .. 상처가 너무 크다.

민노당의 경험이 너무 큰 상처였을까? 너무 큰 '화'였을까?

 

나는 어떨까?

말꼬리를 느리자면 나의 이 비판조차도 .. 부족함이겠다.

적극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고민이 되려먼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다들 '화'에 치밀어 있고,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럴때마다 ..

내 올 해의 목표? 계획에  ..

더 믿고, 더 배려하고, 더 사랑하고, 더 포용하고, 더 따뜻하자는 .. 일기장 첫 장을 들여다 본다.

 

묵가를 다시 읽어본다.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믿는 다는 것이 , 신뢰한다는 것이 ..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건 맞다.

현실이라는 것이, 상황이라는 것이, 환경이라는 것이 .. 그렇게

그렇게 만드는 거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 그것을 놓치고 가면 안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배반의 칼날에 쓰러질때까지 .. 믿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 .. 해야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의 '흐름'을 믿고 모인 사람끼리는 말이다.  

 

신뢰 속의 논쟁과 토론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억지 땜빵이 아닌 ..

아니면

아직도 내가 그들을 아니, 우리를 .. 어쩌면 나를 ..

신뢰하지 못하는 지도 ...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

나에게 그것은 분명 가슴 두근거리는

흥분과 아름다움이 있다.

다양한 의미에서 긍정적이고 바람직하리라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가?

국가 차원의, 이데올로기 차원의,

심지여 진보정당이라는 내부에서조차

왜 그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 여전히 이상이고 꿈이어야 하는가?

왜 여전히 현실이 되지 못하는가?

왜 기득권자와 권력자들은 여전히 기득권자이고 권력자인가?

 

나에게 민주주의는 다양성의 소통과 조화다. 

다양성 .. 위라고 불리우는 영역보다 아래라 불리우는 영역이 훨씬 다양하다.

위와 아래로 불리우는 역할들이 있는 것 같다.

 

위는 소수小數다. 

심지어 최고위원회나 공동대표라는 여러명이 있는 경우도 상대적으로 그렇다. 

조율도 쉽고, 소통도 쉽고, 추진도 쉽다.

권리도 의무도, 자격도, 책임도 분명히 하기 쉽다. 

 

그 소수는 일종의 개인이다.

아주 특별한 사명과 신념과 .. 뭐 그런것들이 있다해도 거의 그렇다.

자신들이 누구의 대표이며 누구의 대의자라는 것을 얼마나 기억하는 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다.

개인의 사리사욕과 부패, 가족의 안녕, 권력과 기득권 향유의 경험

그 모든 것이 아니라 해도

개인인 인간의 본성은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가까이 가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믿음이 어디까지 일까?

 

이것을 평당원이라는 집단 아닌 집단에게,

평당원이라는 나에게,

대표라 불리우는 이들에게,

물어본다.

 

대선후보선출과정과 대선, 그리고 그 이후 지금에까지 이르는 각종 논의, 논쟁들 속에서

'평당원의 이름으로 '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

라는 중요한 의미들의 투영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권리와 자격의 주체는 역으로

책임질 주체, 행동할 주체, 지속할 주체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건 자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거기에는 희생이라는 헌신이라는 개인이라는 인간에 대한 포기도 포함된다.

좌파라 불리우는 진보라 불리우는 이들이

꼴통 엔앨이네 머리나쁜 엔앨이네 욕을 하고, 비꼬고, 비판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실천하는 자주파라 불리우는 이들에 대한 경의가 있는 것도 아마 이때문인 것을 많이 봐왔다.

 

20세기 말부터 보편화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영향이 가장 많이 미친 부분 중에 하나는

'나'다.

개인을 억압하는 군사독재와 그 사회의 분위기

경직된 유교의 전통과 형식들 ..

심지어 운동권의 권위와 억압이 숨막히도록 싫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비판하는 '군대'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사회가 끔찍이 싫었다.

 

개인적으로도

'운동'이라는 것은 스포츠라는 '몸'운동과 우리들이 말하는 '정신문화'운동 모두 쉽지 않다.

'운동'+' 선수' 아닌 다음에야 ..

일상적으로 습관적으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 또 다른 데로 새는 것 같아 중략 ^^;;

 

여하튼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거의)

위로부터의 하사下賜(?)된 민주주의에 익숙한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스스로 획득하는 방법을 .. 나는 잘 모르겠다.

다른 이들은 아는가?

스스로 권력화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지닌 개인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책임지지 않는 대중 .. 그 '아래'는 결국 수 많은 개인이다.

로마 경기장의 관중들이 그러한 대중이었고,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났던 대중들이 그러하다.

물론 혁명을 이끌어내고, 민란을 이끌어낸 민중도 있다.

 

언제나 이 모든 논의에는 '나'라는 개인이 포함되어야 한다.

권리도 책임도 의무도 자격도 ..

당연한가? 그런데 왜 그것들은 드러나지 않는가?

왜 들끓지 않는가?

우리는 진정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실현을 얼마만큼 간절히 원하는가?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가?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가?

얼마나 헌신할 수 있는가?

 

우리 마음속에 심상정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 등에 가졌던 희망과 좌절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노신평전을 읽는데 ..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치라고 말하고 있는데 ..

계속 그 말이 머리를 맴돈다.

그런걸까?

과연 그렇다면 우리의 지위에서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지위를 만든 것은 무얼까?

 

이런저런 고민들과 생각들 속에서

문득 .. '평당원'도 .. 하나의 패권이라는 말이 떠 올랐고

요즘의 이런저런 상황들에 머리에 그려지면서

스스로에게 다시 물음을 던진다.

 

난잡한 글을 올려 죄송하지만

함께 .. 그러나 부디 .. 우리 스스로에게, 개인인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아닌가 해서

올려봅니다.

 

무지 혼란스러운 정황속에서

무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헤매며 .. 드립니다.

 

거짓말은 나쁘다 '그리고' 학벌사회도 나쁘다

 

정규 학력이 없다고 해서 사람의 재능이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순진한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것은 옳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다.

능력이 있어도 학력이 낮으면 인정받을 수없는 또는 거의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가 바로 학벌사회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든 성공하려고 했던 사람들 중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력을 위조한 것이 이번 이슈의 핵심이다.

 

거짓말은 나쁘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질타받는 부분은 '거짓말'이다.

아름다운 재능을 아프게 만든 것이 바로 그 거짓말이다.

누구나 다 하는 거짓말 .. 하지만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본인이든 주위사람이든 그리고 그의 재능을 파는 사람들에 의해서든 만들어진 것은

 

'거짓'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 모든 소중한 가치들이 덮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에 대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사죄한다.

 

 

학벌사회가 더 나쁘다.

 

그러나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가?

사람의 재능을 학력으로 재단하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아마도 학력을 지닌 자들 일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성.

그 성안에 있는 자들끼리만 나눠먹는 거다.

그래서 저마다 자신들만의 성을 쌓기 시작했고, 성 밖의 사람들은 성에 들어가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무대가 있어야 재능을 펼칠 수 있다. 일반적으로 ..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무대를 갈구한다. 그러나 학벌이 없이는 무대위로 갈 길이 없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가 있다.

스스로 무대를 만들기엔 힘겹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이름을 위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회에서 그래도 재능은 거짓말을 감춰줄 수 있었다.

 

재능을 시샘하는 자의 문제일까?

자기 성을 더 튼튼하게 두껍고 높게 쌓기위한 자들의 의도일까?

 

학력으로, 나이로, 성별로, 인종으로, .. 겹겹이 수많은 성을 쌓는 사회

 

성 안의 사람들은 계속 스스로의 이익을 확대하려고 한다. 그래서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숫자를 제한한다.

로스쿨이 그렇고, 대학이 그렇고, 대기업이 그렇고, 타워펠리스가 그렇고, 이동통신사가 그렇고 .. 중략 ..

 

학벌사회가 거짓말을 만들었다.

거짓말은 절대 나쁜 것이지만 나쁜 것을 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만들지 않는 한 끊임없이 지속될 거짓말.

 

이익을 지키거나 확대하기 위해서,

피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위해서,  

때론 생존을 위해서 ...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진실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진실만이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거짓말을 하고도 철면피처럼 그리고 아주 잘 먹고 잘 사는 전두환 같은 인간도 있다.

하지만 그 한사람 때문에 거짓말을 해도 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양심없는 자가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사회적 역사적 인류사적으로 합리적이지 못한지, 정당하지 못한지를 이야기할 수 없는 한계가 발생한다. 제길... )

 

이미 존재하는 거짓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당연히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직업, 직장, 기회 등)를 많이 그리고 넓게 만들어야 한다 

재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야 하고, 그 교육이라는 것도 제도권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의 형태와 방법을 인정해야한다.

 

 

어떻게 측정하냐고? 

 

보면 다 알게되지 않은가? 그야말로 경험하고 보면 다 알게된다.

 

서울대 나왔다고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 있다.

회사에 입사하면 처음부터 다 배워야 한다는, 처음부터 다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학력이나 빽이나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들은 그야말로 편견을 갖게한다.

그래서 그것에 미치지 못할 때 회사도 개인도 좌절하고 만다.

 

빠르게 빠르게 .. 그래서 그 능력에 대한 측정을 학력이나 그야말로 배경으로 측정해 왔던 결과가

그리 좋지많은 않다는 것을 모두 깨닫고 있지 않은가?

 

기본적인 요구사항은 있다.

기자는 기자가 뭔지 알아야 하고, 전기기술자는 전기가 뭔지 전선이 뭔지 알아야 하고, 음악가는 음표가 뭔지 음악이 뭔지 알아야 하고, 국어교사는 국어가 뭔지 교사가 뭔지 알아야 한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한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다 뽑냐고?

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스스로도 느끼고, 시스템도 느끼고, 과정에서도 다 알지 않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할 때, 진정으로 즐거운 것을 할 때

사람들의 재능은 꽃피고, 행복하고, 즐겁다.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발견과 다양한 무대, 다양한 일꺼리와 다양한 삶의 모습,

사람답게 사는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할 때 .. 우리 각자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다.

 

오로지 대학만을 향해가는 입시공부를 하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꿈이 무엇인지, 자신이 즐겁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채 커왔던 우리들과 우리들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 ..

 

바꿔야하지 않겠나.

다음이 아니라 지금 ..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에도 결코 바뀌지 않을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나부터, 우리가게, 우리회사 .. 그렇게 시작해야한다.

 

모든 것들은  서서히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억지로 선택한 자리는 결국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국가에게도,

삐그덕거리는 불안과 불평등,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 수 밖에 없기때문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재능을 펼칠 수있는 사회

학벌이 없어도 재능이 인정되는 사회

그리고 다양한 재능을 개발하고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

 

우리 꿈꾸기를 멈추지 말자 ..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네티즌 모임' 이라고 했던 정체성을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대우자동차 대량해고사태등 관련 영상물을 편집하다가 깨닫게 된 부분이었습니다.

 

해고당한 노동자가 울분으로 들이키는 소주 한 잔에도 들어있는 세금.

우는 아이에게 물려주는 사탕 하나에도 들어있는 세금.

 

51% 의 간접세 ..

1000억 부자도 길거리 부랑자도 마시는 소주값이 같다는 것이 평등일까요?

과연 .. 형평성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지금 2007년 대한민국에서 정치는 '세금'에 녹아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금문제를 건드리지 못하면 민주노동당이나 어떤 진보당들도 저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열우당이 진보라고 생각하면 .. 그건 아닙니다.) 

세금을 걷고 쓰는 것에 대해 모든 정책과 방향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지금 .. 또는 '영화로운' 과거를 유지하고 싶거나 그 과거를 '확대'하고 싶은 자들은

정치가 대중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랄껍니다.

  

정치는 일상입니다.

  

 주민등록증이 나온 청년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빠르면 고등학교 2학년 부터 나오는 주민증 ..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은 입시지옥 ..

 그들에게 표를 얻으려면 입시지옥을 완화시키거나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내용을 제시해야 겠지요

 

 입시와 관련된 수많은 이익집단과 개인들 - 학원, 과외교사, 교재를 만드는 출판사, 입시연구소

 등 의 문제를 삼으며 그들의 표도 어쩔 수 없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제 막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는 정치적인 인상들이 

 이후의 모든 정치적 상황들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낼 것이기 때문에 분명 바꿀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예 보수정치권은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겁니다.

 그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입시가 이토록 큰 이익의 핵심이 된 이유가 어디서 부터 왔겠습니까?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을 보고 이익창출의 근본으로 본거지요.

 그 이익을 지속적으로 확대시켰고, 이제는 학벌사회를 이루게 된겁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윤석화씨의 인간적 예술적 가치가 없어지나요? 

 김창하 교수의 마음과 재능이 역시 없어지는 걸까요? 강석씨의 재능이 문제가 되나요?

 정덕희 교수는 더더욱 억울한 상황이었습니다만 그분 이야기는 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언론의 폐해, 잘못된 인식, 정부부처의 괴상한 의도들이 엉뚱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습니다.)

   

 학벌에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 .. 

 학벌이 없으면 능력도 인정되지 않는 사회 ..

 학벌없이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용기와 포기가 요구되는 사회 ..

 학벌이 훨씬 많은 자리에서 능력을 표현할 수 있게하고, 

 학벌이 훨씬 많은 많은 기회를 주는 사회 ..

 

 이런 사회에서 과연 ..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걸 이야기해야 할까요?

 진실만이 통한다는 걸 이야기 해야 할까요? 

 

 이건 정말 '말'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란 걸 알껍니다.

 

 저 같이 바보같은 자만이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능력과 재능을 아프게 만든 거짓말이라고 ...

 그렇게 이야기 하면 다들 너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ㅎㅎㅎ

 

 그러나 정말 이야기 해야할 것은

 

 이 사회의 왜곡된 구조 - 학벌사회로 대변되는 - 그리고 그것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  ..

 수 천 만원에서 수 억 원이 들어가는 교육의 현실 - 사교육의 과도한 비용과  

 왜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어가는 교육현장이 되었는가 ..

 진정한 교육의 의미와 입시교육의 현실 -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교육이 되었는가? 

 그리고 왜 주민증이 나온 청년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가

 그 결과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

 

 이야기 하는 우리들도 차근히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줘야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게 차근차근히 설명해줘야 합니다.

 

 당신이 이 과정을 이야기하는 동안

 진정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

 믿음을 주는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한번만 .. 단 하나의 고리를 끊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짓말이 너의 아름다운 재능과 멋진 능력과 가능성을 아프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잘못되었어도 너는 공부나 하라' 는 말  

 '그것봐라!  대학을 나와야 하느니라 .. 하는 그러니 공부하 해라'라는 말

 

 현실이 그렇다고 포기하는 발언을 하진 마십시오.

 판단은 그 아이들이 할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들은 생각보다 현명하고, 앞으로 더 현명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믿어주지 않으면 아이도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살아온 과거이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모습이 지금과 같아선 안되잖습니까?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힘든 아이들에게 선명할 것입니다.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암담한 오늘을 강요하지 마세요.

 미래는 그 아이들이 만들어 갈껍니다.

 무엇보다도 ..

 당신은 그 아이들에게 가치있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이슈가 주제가 되어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것 ..

 삶의 교육이고, 현장 교육이고,  현실교육이 될 것입니다

 

 

 세금 이야기, 정치 이야기에서 멀리도 왔지요?

 하지만 그것이 결코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란 걸 말하고 싶습니다.

 

 사교육과 입시교육이 어떻게 수조원을 넘는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지 ..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어떻게 아이들의 삶을 왜곡시키는 지 .. 

 그렇게 왜곡된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사회에 문제를 만드는 지 ..

 그럼에도 왜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지 ..

 '세금과 정치' 그러면 멀게 느껴지지만 .. '돈과 정치'라고 하면 너무 쉽죠. 

 

 국민은 국가의 주인임에도 .. 지금의 국민은 마치 회사나 대 재벌의 노예같은 현실이지만 ..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 ..

 그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공부 .. 그러나 그 공부가 사람을 키우는 공부여야 하지

 오로지 대학을 들어가기위한 공부가 되어서는 안되는 거 ..

 

 공부는 좁은 삶의 공간에서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없는 많은 경험들을 갖게해서

 그 아이들의 재능을 적절하게 개발하고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2 조카와 이야기 했습니다.

 

 ' 왜 공부를 하니? ..'

 ' 먹고 살기 위해서요 .. '

 ' 니가 원하는 게 뭐야?.. '

 ' 공부는 조금만 하고 많이 놀고 싶어요'

 ' 네가 투표를 할 수 있다면 어떤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어?'

 ' 공부를 안하고 놀게 해줄수 있는 ..'

 ' 공부를 왜 하는 데? .. '

 ' 대학 ..... '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학력위조와 관련된 최근의 이슈를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라도 공부는 필요한 것이라는 설명,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재능이 있다는 것,  아이들이 일탈은 어른들의 잘못 .. 과외로 돈벌고 입시학원 교사를 하는 고모가 아는 사람들은 그게 다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저의 순진한 경험까지 ..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아이들의 교육은 학원을 알아보는 것 보다

 TV와 신문에서 들어 보았을 법한 이야기에 서로의 의견을 물어보고 생각을 나누는(강요하지 마시구요) 것이 긴 인생에서는 훨씬 큰 공부가 될 것이란걸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학력위조 .. 고백

 나, 영화아카데미와 영화학교 .. 돈이 없어서 완전 수료는 못했습니다.

 돈 내야 수료증이 나온다고 했는데 ...ㅠ.ㅠ 결국 못내서 .. ㅋㅋㅋ ... 진짭니다.

 공부는 다 했지만 돈을 안내서 수료증 못받았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공부 많고, 알고 싶은 것들이 무지 많은데 죄다 돈이 너무 많이 들더군요

 게다가 성인은 더더욱 ..

 어렸을 때 다들 많이 공부해보길 .. 청소년 할인 너무 좋은 거 더군요 .. ㅎㅎㅎ

 

 

 

 

  

홍보방향을 바꿔라!!!

 

뻔한 몸개그 인줄 알았다.

영화선전지에서 느낀 건 .. 정말 뻔한 코미디 ..

선전지에서 감독의 말만 황당하게 느껴졌다. 

또 얼마나 어거지 생쑈 코미디일까 싶었다.

개봉 벌써 전에 선전지를 봤지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아는 형이 자꾸 보자고 했었는데도 안봤었다.

 

결국 보게 됐는데  .. 이거 왕 감동이었다.

 

두 남매의 귀엽고 예쁘고 슬픈 만담은 처음부터 웃고 다시 울게 만든다. '정리'하러 마을에 들어간 조폭과 '마을'은 묘하게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지만 그들의 좌절만큼 닮아있다. 가난하고 예쁜 사랑도 너무 귀엽고, 복싱을 하는 아빠와 딸의 마음이 가슴을 저려온다. 그 아빠와 그 딸을 키운 관장의 절절한 사랑과 아픔이 있고,

 

나름 무지 밝게 이 가난한 마을을 그린다.

그리고 무지 즐겁고 재미있다. 어거지 코미디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 결국 이들의 끝은 정해져있지만 .. 영화는 결국 꿈을 이야기한다. 아니더라도 안되더라도 꾸어볼 수 있는 꿈 ..

 

부산에 물망골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의 힘을 모아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동네.

 

개발에 밀려 밀려 산비탈까지 갔지만 부단한 노력과 노력으로 스스로의 의미를 발견하고 찾은 사람들. 개발의 끝은 아파트가 아니라 사람일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아름다운 판자촌이 있다.

 

그 마을의 현재도 중요하지만 그 현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 과정을 보기를 ..

그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보기를 .. 그래서 그들이 다시 설 수 있었던 과정을 우리 사회의 이제 더 많아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도록 하길 ..

 

영화 자체도 잘 만들어졌다.

달동네의 처절한 실상과 코미디는 아무래도 안맞을꺼 같지만

사람 사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아서 나오는 유머,

그 유머속에 세련되게 깔린 정치, 권력, 사회 비판의 위트

상당한 공력이 .. 느껴졌다.

억지가 없이 이렇게도 정말 감동이 있는 코미디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

 

희망을 위해 좀 억지를 부리긴 한다.

너무 절망적인 현실로 끝내기엔 안타까운 .. 그래서 

언제나 땅에 떨어지던 '날고싶은 아이'가 에버랜드 위를 날아가는 것  같은 부분이지만 그래도 웃어볼 수 있다.

그 희망이 너무 멀지만

폐부를 찌르는 아픔을 세련되게 사람의 냄새로 채운

마치 .. 채플린의 영화같다는 생각을 했다.

슬랩스틱은 아니지만 충분히 .. 그 가치를 이어받고 있다.

 

영화 선전지를 보면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 이 영화 권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기원전의 역사가 궁금했다.

블루스크린과 CG가 넘쳐나는 이 영화는 전쟁신의 여러 구성이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에 전쟁을 연상케 했고, 어디선가 보아온 그리스의 조각상이나 그림을 생각나게 했으며, 심지어는 스토리라인 조차도 글라디에이터와 겹쳐졌다.

 

하지만 비쥬얼에 뻑 .. 갈 수밖에 없었다. 콘트라스트가 살아있으면서도 디테일이 죽지않은 세련된 화면, 하드록등 다양한 록음악이 깔리면서 하드록뮤비같은 느낌에, 그리스 조각상을 데려다 부활시켜 놓은 듯한 전사들의 모습도 경이로왔고, 왕이 성장하는 모습으로 잠간잠깐 나왔던 어린 배우들의 모습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할 정도다.

 

'스크린에서 살아 숨쉬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제작진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났다. 일반적인 영화문법을 파괴해나가는 것은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다가 말고 요즘 많이 보았던 잘만들어진 뮤직비디오와 연결되어버리고 말았다.

 

시체로 벽을 쌓는 이들, 잔혹하게 죽어가는 페르시아 병사들, .. 그 당혹스러움은 마치 .. 그 시대를 상상케 했다. 브레이브 하트가 옛 유럽의 원시적인 전쟁을 그린 것 처럼 그리스, 페르시아 .. 그 시대의 전시상황을 상상케 했다. 창에 찔리고 컴에 베이는 소리는 디아블로의 좀비들이 죽을 때 나는 소릴 연상케 했다.

 

스파르타의 호전성의 근원을 한번 더 생각하게 했다. 그시대의 상황이 궁금했었는데 영화가 끝난 뒤 드르게 된 서점에서 마침 신판으로 나온 서양문명의역사라는 책에서 살짝 엿봤다. 그 책에서 몇장 없는 그리스인 조각상 사진이 있는데 왕의 모습은 그 책에서 그대로 걸어나온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리스 페르시아 아테네 스파르다 ...

 

그 책에서 그리스 문명을 개략 설명하는 말에서 .. 내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게 느꼈던 말이 튀어나와 너무 놀랐다. 어쩌면 당연하지만 오랜만에 보게되니 더더욱 그렇게 느꼇던거 같다. 그들이 믿는 신 조차도 거부하는 이성의 인간시대, 자유로운 인간의 시대, ... 자유에 목숨을 거는 시대 .. 그리고 피와 목숨으로 지켜지는 자유를 이야기하며 문득 우리들의 투쟁의 의미를 묻게된다.

 

그리고 왕이 죽으면서 마지막에 마이레이디, 마이와이프, 마이러버를 흚으면서 죽은게 너무 생뚱맞게 느껴졌다. 그의 전사들이 옆에서 죽어가는데 말이다. 페르시안 왕의 캐릭터도 상당히 놀라웠는데 눈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CG였을까?

 

강인한 전사만을 키워낸 스파르타 그렇기 위해 장애가 있는 자들을 언덕에서 떨어뜨리거나 살기위해서는 스파르타를 떠나야했다는 것이 왠지 극단적이긴 하지만 지금의 장애인들 모습과도 겹쳐져 속상했다. 문제는 그 300의 전사들에 마지막싸움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그를 부상자를 돌보는 것 외에 방패를 들어 동료를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 이해가 되어버린거다. 제길 ..

 

꽤 탄탄한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는 최대한 단순화 시켰고, 전사라는 이들의 맹목적 싸움의 모습을 최대한 그림이 되도록 살려냈다. 만화원작을 보지 못했지만 그 만화 그대로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내용은 말고 .. 비쥬얼에 있어서는 영화를 위한 영화 또는 스크린을 위한 영상이라고나 할까? 넷을 뒤져보니 .. 비쥬얼에만 목숨을 걸 수 있었던 이유가 원작의 탄탄함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스 인간중심의 이성과 자유를 부르짓던 문명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지리적 위치로 가장 원시적이고 호전적이었다던 스파르타를 더 알고싶어졌다. 문명을 중심으로 기술했다던 역사책도 보고 싶고, 잔혹한 전쟁의 시대 그 한 가운데를 보면서 멍~~ 할 정도로 난감하기도 했는데 .. 이 영화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누군가의 설명*

영화 "신 시티(Sin City)"로 잘려진 작가 프랭크 밀러의 동명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한 영화 "300"은 기원전 480년 그리스의 도시 국가 였던 스파르타와 동방의 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실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에서는 제3차 페르시아 전쟁 중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하는데, 당시 다리우스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크세르크세스는 상당한 병력과 물자를 동원해서 그리스를 공격합니다. 이때 그리스의 도시 국가 중 하나인 스파르타를 통치하던 레오디나스는 그리스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테르모필레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서 약 1000여명의 병사로 방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디나스와 스파르타군은 페르시아군에게 전멸당하고 테르모필레는 뚫리게 됩니다. 하지만 숫적 열세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보인 레오디나스와 그를 따르던 스파르타 병사들의 용맹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는데 이를 영화로 만든 것.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나래이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공부를 할때부터 가진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마치 거추장스러운 옷을 억지로 겹쳐 입은 듯한 느낌을 갖는다.

 

첫 장면은 잔인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자이길래 저토록 잔인한 사형선고일까 ..

영화는 그렇게 물음표를 던지며 시작한다.

 

하지만 나에게 첫 장면은 생선시장이다.

냄새.

비릿한 피냄새와 썩은 생선냄새가 금방이도 밀려올 것 같은 이 장면은 어쩌면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나래이션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영화가 지루해지고, 집중이 되지 않고, 짜증스러워졌다.

냄새를 느끼게하지 못하고 말았다.

마치 TV오락프로그램에서 감정까지 설명하는 그것처럼 밋밋하고 화가나는 설명 .. 없었어도 충분할 수 있는 화면이었는데 ........ 

 

얼마나 지났을까? 

향기를 쫒는 그르누이 .. 그리고 붉은 머리 소녀 ..

그렇게 이 영화는 조금 늦게

눈을 뜬다. 자신이 책이 아니라 영화라는 것을 인식한다. 

 

책이 있는 줄 몰랐다.

15년 전에 씌어진 책이라고 한다.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시기에 그와 견줄만한 센세이션한 소설이었는데 작가가 영화화를 거부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벤 위쇼)에게서 나는 퐁네프의 드니라방 그러니까 알렉스의 느낌을 받았다. 춤을 추는 거리의 곡예사 .. 왜 그가 생각이 났을까? 아주 닮은 느낌이다.

 

자신의 냄새가 없는 者가 자신의 냄새를 갖고자 하는 이 연쇄살인범은 냄새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을 받고자 한다. 향기 .. 또는 냄새라는 것이 주는 미지의 매혹과 함께 .. 영화는 존재감을 갖기 시작한다.

 

천재적인? 아니 동물적인 .. 아니 그보다 .. 모든 냄새를 맡고 기억할 수 있는 이 능력의 소유자는 어쩌면 신과도 같다. 그는 .. 신의 외로움, 신의 광기, 신의 .. 그러나 스스로의 신일뿐 .. 그 스스로는 인간들에게는 존재감이 없는 .. 외로운 신 ..

 

그 냄새맡는 신이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스러운 빨강머리 소녀의 향기를 '맡은' 그는 그 향기를 갖고자 하고 .. 그것은 엄청난 광기로 .. 부유한 향기의 도시에 순수하고 고결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들의 '향기'를 수집한다. 되시는 패닉에 빠져 그를 찾지만 아무도 이 냄새나지 않는 신를 찾아내지 못한다. 

 

인간이 되고 싶은 신 ..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은 외로운 신 ..

그러나  신이 아니기에 더욱 외롭고 슬펐을 한 인간의 이야기

 

영화는 그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한다.

그 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영화는 시간이 없다.

뭔가 이야기 하고 싶은걸 다 못담은 듯한 ..

 

마지막에 시퀀스 ..

다시 사형장 시퀀스에서의 황당시츄에이션은 ..

 

결국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을 제외한 캐릭터 설명이 너무 미흡하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했다. 벙찐 느낌 .. 하지만 곧 이해가 된다. 그의 마지막까지 가면서의 느낌 .. 생각이 필요한 영화다.  

 

마지막 시퀀스도 정말 코미디다. 그것은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건데 .. 그게 또 우리네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양한 이야기가 풍부하게 .. 그리고 세련되고 위트와 유머, 페이소스가 담긴 ..

그러나 책의 상상력을 느끼기엔 부족하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책이 주지 못한 구원을 허락한다.

 

너무 멀리 앉아서 본 것도 실수인거 같다.

그 향기를 느끼려면 화면에 조금 더 가까이 가야한다.

그리고 깊이 빠져서 보라. 될 수 있으면 그가 되어서 영화를 보는 것이 좀 더 그의 '향수'를 쫒는 방법일 수 있겠다.

 

책은 먼저 읽어도 좋고, 나중에 읽어도 좋고 ..

영화와 책을 함께 보는게 좋겠다.

다양한 느낌과 색깔과 .. 냄새가 읽을 때마다

볼때마다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

영화 <향수>를 보고, 책으로도 읽었다.

그리고는 냄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많은 냄새들이 보이지만 정작 .. 사람의 냄새는 잘 느낄 수 없다. 그르누이의 그것처럼 온갖 화합물들(샴푸, 비누, 화장품... )의 조합일수도 있고, 또는 온갖 음식물들이나 박테리아들의 냄새일 수도 있고 ..

 

정말로 자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게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중 누구도 그럴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무심하기도 하고 또는 예민해지기도 하며 ..

 

그가 인간의 향기를 갖기위해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 것 처럼 우리도 자신의 향기를 위해 향수를 쓰기도 하고 허브를 쓰기도 하고  화장품을 쓰기도 하면서 지구상의 다른 것들에 대해 보이지 않는  살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섬뜩해진다. 그래서 ... 채식주이자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의 향기, 인간의 향기 ... 그르누이의 향기는 존재다.

어떤 존재로 확인되고, 그 존재로서 사랑받기를 원했던 슬프고도 외로운 인간.

우리도 그처럼 어떤 존재로서 인정받고자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스스로에게는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지도 ..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그르누이와 같은 상황인지도 모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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