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가에서 가장 뜨거운 영화는 <1987>이다. 사실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이라면 한국도 어느 나라 못지 않다. 전쟁, 독재, 학살, 국가의 폭력 등등. 그래서 본문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의 이야기가 '다 어디서 보고 들어본'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굳이 떠올리기도 싫은 일들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이야기되고 알려져야 하는 일들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챙겨보자.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 현실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1. 블러디 선데이 (Bloody Sunday, 2002)

출처이미지=영화 <블러디 선데이>

아일랜드와 영국의 뿌리 깊은 분쟁, 특히 북아일랜드 사태는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그중 <블러디 선데이>는 1972년 북아일랜드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평화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4명이 사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뤘다. 영화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어떤 감정도 끼워 넣지 않은 사실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차라리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라 오히려 더 묵직한 충격이 느껴진다. 제이슨 본 시리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필립 그린그래스의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금곰상을 공동수상 했다.

 

2.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 2013)

출처이미지=영화 <액트 오브 킬링>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군부 정권이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작업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살해당했던 사람의 수는 무려 100만 명 이상. 이 영화는 학살을 주도했던 우익 조직의 행동대장 격이었던 안와르 콩고가 주인공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인도네시아의 이 끔찍한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자, 콩고를 섭외해서 그에게 자신의 업적을 재현하는 영화를 만들자고 한다. 그리고 콩고는 자신이 했던 살인의 추억을 아무 죄책감 없이 즐겁게 이야기한다.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큰 공포와 충격을 던져주는 다큐멘터리.

 

3. 그르바비차 (Grbavica : The Land Of My Dreams, 2005)

출처이미지=영화 <그르바비차>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엄마와 열두 살 딸 사라의 이야기다. 사라는 아버지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전사한 전쟁영웅이라고 믿고 있지만, 어머니는 딸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좀처럼 해주지 않는다. 사실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비밀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내전 당시 보스니아 여성 수만 명이 세르비아군의 ‘인종청소’에 따라 조직적으로 강간당하거나 혹은 목숨을 잃었다. 사라는 바로 거기서 태어난 아이인 것. 그르바비차라는 제목은 세르비아군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곳의 지명이다.

 

4. 이노센트 보이스 (Innocent Voices, 2004)

출처이미지=영화 <이노센트 보이스>

전쟁과 아이들은 영화의 중요한 소재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군과 게릴라의 싸움이 12년 동안이나 이어진 엘살바도르 내전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열한 살 소년 차바의 마을이 내전에 휘말리고, 이웃집 누나는 총을 맞아 죽고, 정부군은 아이들까지 징집해간다. 이 영화는 한 소년이 현실에 분노하고 결국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우울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전쟁이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아이의 시선을 통해 전달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5.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 2008)

출처이미지=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고,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가 이스라엘의 비호 아래 3천 명의 무슬림 민간인을 살해한 ‘사브라-샤틸라 학살’을 독특한 방식으로 담았다. 당시 레바논에 주둔한 이스라엘군의 한 명이었던 감독은 그때의 기억이 기억상실증처럼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하고, 이를 추적하는 과정을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관계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얼굴을 공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 애니메이션으로만 표현 가능한 초현실적 이미지가 뒤섞여, 충격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6. 디아즈 : 이 피를 지우지 말라 (Diaz : Don't Clean Up This Blood, 2012)

출처이미지=영화<디아즈 : 이 피를 지우지 말라>

2001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일어난 사건을 영화화했다. G8 정상회담이 개최되자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제노바로 모이고, 그중 100여 명이 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평화적인 집회를 이어간다. 그때 이탈리아 경찰이 갑자기 건물을 급습해 저항도 하지 않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21세기에 유례를 찾기 힘들만한 공권력의 만행이었다. 영화는 진압보다는 린치에 가까운 이 과정을 참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행되는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소름끼치도록 피부로 느껴진다.

 

페이퍼백 에디터 |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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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우리 학교의 생태연못, 그래서 정리한 생태연못 조성부터 관리까지!

최근 생태주의(Ecologism)가 국내에서 점차 주목을 받는 추세이다. 이미 우리나라보다 생태주의, 생태에 대한 연구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지식이 많이 축적된 독일, 영국, 일본 등보다는 섬세한 연구나 자료의 양은 부족하다. 


처음에 허술하던 빈틈을 채워나가는 것에 기여한 수많은 우리나라의 연구자와 이 분야에 미칠 정도로 푹 빠진 사람, 일명 덕후들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이들이 존재하고 생겨난다. 이들은 이 심오하고 우리 삶과 동떨어진 듯한 생태주의와 관련 키워드를, 사람들의 삶에 녹여내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할 뿐만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더욱 끈끈하고 견고하게 축적했다. 그 덕에 오늘날의 많은 대중이 생태주의를 기반을 둔 삶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여긴다. 


생태주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인식은, 환경 문제가 대두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다. 생태주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분명히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해줄 것이다.

   

이러한 생태주의가 뜨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가 변화하고 있으며, 이미 변화한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주말에 온 가족이 텃밭을 가꾸어서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가정이 늘어났고, 땅에 쓰레기를 묻거나 태우던 과거에서 벗어나 분리수거를 생활화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부도 탈핵(脫核) 의지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생태주의는 더 섬세한 것들도 바꾸고 있다. 건축도 생태라는 키워드와 결합하고 있고, 친환경 농산물을 활용한 식품도 많이 개발되는 등 우리의 의식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넘어서, 예술문화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면 벽을 긁는 방법과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서 벽화를 그리는 기존의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는 다르게, 이끼와 유제품을 믹서기로 갈아 만든 액체를 벽에 바르는 모스 그래피티(Moss graffiti)처럼 말이다. 신기하게도 몇 주 동안 이끼 액체를 바른 자리에 물을 꾸준히 주면, 바른 자리를 따라서 이끼가 자란다.  

 

오늘날의 사회는, 생태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한번 격변할 것으로 전망된다.


 △ 지난 6월, 이우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최한 예술주간에 학생들이 모스 그래피티를 활용한 벽화를 선보였다.

                                                                                                                                     (©김민정)  

 

나는 생태주의를 항상 온 몸으로 느끼며 지낸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현재 내가 다니는 이우학교는, 설립이념에서부터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겠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념에 모순되지 않도록 학교 건축을 할 때도 콘크리트의 사용을 최소화하여 자연으로 빠른 환원이 되는 목재와 재활용이 쉬운 철골을 이용해서 건축하였으며, 유기농 농수산물을 활용한 급식을 공급하고, 냉난방도 지열 에너지를 활용하는 등의 노력을 한다. 또한, 이우중고등학교의 2학년은 농사 교과 수업이 편성되어 있고, 중학교 1학년에는 환경 교과 수업, 고등학교 3학년에는 환경과 녹색성장 교과 수업이 편성되어 있다. 


이우학교 건물은 숲속에 건설하였기 때문에 주위 산림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 유실수를 심어서 주변에서 서식하는 야생동물이 먹이를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여러 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생태연못 조성을 하여 생태계 파괴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우학교는 여전히 생태와 관련한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듯하다. 특히 그 문제는 생태연못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우학교의 생태연못은 어떤 장소이며,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 


2006년에 학부모회 산하 환경위원회의 노력으로 완성한 이우학교의 생태연못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에 일부분에서 물이 바닥으로 스며드는 현상이 점점 심해져서 물의 저장이 어려워졌다. 결국, 2014년에 일부 연못 바닥에 시멘트 미장을 하였다. 그 후로 매년 봄, 연못에 알을 낳으러 오던 개구리가 집단 폐사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원인은 시멘트 속의 유해물질인 포름알데히드(HCHO)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  폐사한 참개구리(위)와 산개구리(아래).  

                이우학교 연못 일부에 시멘트를 바른 후부터, 매년 알을 낳으러 연못을 찾아온 개구리가 폐사한다.

 

학교 부지 내에 조성된 여러 곳의 생태연못 중,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된 커다란 생태연못에서는 물이 빠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시멘트를 바르지 않았다. 하지만 노랑어리연꽃과 창포가 독점하는 현상이 심각하다. 생물다양성이 존재해야 할 생태연못에서, 특정한 식물만이 독점하게 되면 다른 식물들이 자랄 수 없다.이것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인데, 이들이 빽빽하게 자라면 물이 순환하지 못하여 탁한 물이 바닥에 고이게 되고 녹조현상이 쉽게 일어난다. 

 

  △ 이우학교의 생태연못을 독점한 노랑어리연꽃

 

연못의 생태계의 기반인 습지 생태계는, 물과 공기, 무기물과 흙, , 식물과 동물, 미생물 등 생물학적인 요소와 비생물학적인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체계이다. 연못과 습지의 생태계는 이러한 요소들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때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이우학교의 생태연못에서 관찰되는 문제는, 습지 생태계의 균형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우학교의 생태연못 중 시멘트를 바른 곳과 바르지 않은 곳. 전자는 시멘트를 바르면서 생물학적인 요소와 비생물학적인 요소의 상호작용을 방해했으니 당연히 문제점이 명확하고, 후자 역시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하니 복잡한 문제점이 존재한다. 


내가 다니는 이우학교의 생태연못은,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이우학교의 생태연못은 과연 잘 만든 것인지 당연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아직 생태주의와 관련된 전문적인 정보가 많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생태연못이 많이 조성되는 추세이다.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학교의 생태연못도 문제점이 많았기에,다른 곳의 생태연못 역시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대로 조성하지 않은 곳이 많았다. 


자연 상태의 연못과 습지에서는 당연히 존재해야 할 다양한 식생을 재현하지 못하였고, 녹조현상과 부영양화 등으로 인해서 수질 관리에 차질이 심한 사례도 잦았다. 식물을 잘못 심거나, 수심의 높낮이를 다양하게 구성하지 못하여 종 다양성이 풍부하지 못하거나, 물고기나 다양한 수서곤충 같은 포식자가 거의 없어서 모기가 번성하는 곳도 많았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여 연못을 메워버리거나 물을 말려버려서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생태연못에 관심이 많았다. 꼬맹이였던 내가 연못을 만들겠다며 땅을 파서 비닐을 덮은 자리에 물을 들이부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 자료와 서적들을 읽으며 여러 지식과 정보를 습득했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생태연못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깊은 애정이 있다.

 

 △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시도했던 연못.

                                         곧 겨울 추위가 찾아와서 물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더니 비닐이 찢어졌다. 

 

생태연못 만들기에 실패한 생태주의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이 기사에 담는다.


연못이 정원의 구성 요소로서 개념이 확립된 시기는 18~19세기 무렵부터이다. 다양한 품종의 수련이 보급되고 화훼 시장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연못은 수생식물의 전시장으로 발전해갔다. 습지의 중요성이 주목받으면서 다채로운 습지 생태계를 재현하는 것을 꾀한 생태연못(Ecological pond)이라는 개념이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생태연못은 야생의 습지 생태계를 시각적으로 해석한 공간이며, 안정적인 생태계 기반을 활용하여 다양한 수생식물을 심어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생태연못에서는 다양한 습지의 생명이 서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종 다양성(Species diversity)이 풍부해지는 등 잠재적인 가치가 높은 비오톱(Biotope)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 이우학교의 생태연못에서 촬영한 등검은실잠자리의 산란 행동.  

                                     오늘날의 연못은 습지의 생명이 상생할 수 있는, 생태연못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연꽃을 심고 잉어를 기르던 전통적인 형태의 연못으로부터 더 나아가 생태연못, 빗물정원, 습지원 등의 이름이 붙은, 물을 주제로 삼는 생태적인 정원들이 많이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물을 다루는 정원은 간단하지 않다. 생태연못을 설계하기 전에는 호소생태계(Lake ecosystem)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시각적으로 다채롭고 조화로울 수 있도록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호소생태계는 무엇일까? 그리고 호소는 무엇일까? 

호소(lake)는 내륙에 있는 정수역 , “멈춰있는 물이 고여있는 곳을 뜻한다.


호소생태계가 무엇인지 이해하기에 앞서, “생태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생태계란, “어떤 장소에서 생물학적인 요소와 비생물학적인 요소가 상호 작용하는 복합적인 체계를 말한다. 호소생태계에서 의미하는어떤 장소는 바로 호소인 것이다. “호소에서 여러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체계 호소생태계라고 정의하며, 수심에 따라서 호수, , 소택지, 습원, 습지림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호수 
    호소생태계의 초기 단계이다. 일반적으로 5m 이상의 수심이 유지되는 곳을 호수라고 한다. 호수의 형성 이유는 다양하다. 화산 폭발 시 발생한 분화구에 물이 고이거나, 지각의 충돌로 인해서 생긴 분지에 물이 고이거나, 하천 유역에 댐이 건설되며 물이 저장되어서 형성되는 경우 등이 있다. 수심이 깊다 보니, 물가의 수심이 얕은 구역 이외에서는 수생식물이 자생하기 어렵다. 

  2.  

    호수의 형성 이후 토사의 퇴적이 진행되면서 수심이 5m보다 더 얕아지면 늪이 된다. 수심이 얕아지게 되면 햇빛이 물속 바닥까지 비추게 되고 나사말, 붕어마름, 물수세미 등의 침수식물이 번성한다. 온대기후의 지역에 형성된 늪에서는 수심 2m 정도부터 수련, 네가래와 같은 부엽식물이 유입되고 수심 1~2m 구역에서는 부들과 흑삼릉 등이 군락을 이룬다. 

     

  3. 소택지 

    늪에서 퇴적이 계속 진행되면서 수심이 1m 이하로 낮아진 단계이다. 개수면(open water)이 적게 남게 되면서 복잡한 형태를 이룬다. 부들, , 사초속(Carex)에 속하는 식물과 같은 물가에서 서식하는 정수식물의 군락을 중심으로 다양한 수변 식물이 서식한다. 수변 식물이 번성하면서 양서〮파충류나 얕은 물과 수생식물 줄기 속에 알을 낳는 잠자리목(Odonata)에 속하는 곤충 등이 안정적으로 서식한다. 소택지를 모방하여 습지원을 조성한 사례를 제법 볼 수 있다. 

     

  4. 습원 

    개수면이 거의 없고 수심이 아주 얕거나 육화된 단계이다. 습초지가 함께 형성되며, 축축한 땅이 펼쳐진 습원에서는 다채롭고 다양한 호습식물이 서식한다. 

     

  5. 습지림 

    습원의 육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습초지에서 습지림 즉, 숲으로 변화하는 천이(Succession)가 진행된다. 습지림은, 육지에 형성된 일반적인 숲에 비해서 천이의 속도가 느리고 종 다양성(Species diversity)이 낮은 경향이 있다. 습지림에서는 주로 오리나무, 낙우송, 귀룽나무, 버드나무속(Salix) 등의 나무가 자생한다.

 

 △ 1997년 03월 28일에 국내 최초로 람사르협약 습지로 등재된 대암산 용늪.  

                       과거에는 늪이었으나 이미 육화가 진행되어, 소택지와 습원이 혼합된 형태로 변화하는 중이다. 

 

생태연못을 조성하고자 할 때는 호소생태계의 개념과 그 종류를 잘 이해하고, 어떠한 형태로 구성할지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충분히 고려하고 설계를 해야 생태연못이 생태적인 기능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생태적인 정원 자체로서의 정체성이 확보된다. 

 

호소생태계와 관련된 부분은 생태연못의 큰 틀을 이루는 요소이다. 이제 생태연못 조성의 섬세한 부분을 짚어보겠다. 생태연못을 더 섬세하고 생태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식물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연못에 식물을 심을 때는 고려해야 할 정보가 많으며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생태연못을 처음 만들어보는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연못에 심는 식물은 주로 수생식물이다. 수생식물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수련과 연꽃, 갈대, 개구리밥, 부레옥잠만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호소생태계의 환경에서는 이보다 더욱 다양한 생명들이 공생하는 구조이다. 


연못의 생태계는, 물을 핵심으로 두는 다양한 환경을 치밀하게 조성할수록 풍성해진다. 주변의 저수지나 오래된 연못을 오랫동안 찬찬히 바라보자. 물속에서는 수심에 따라서 식물의 분포 차이가 확연하다. 물 바깥에서는 건조한 육상생태계의 식물이 호소생태계의 식물과 끈끈하게 연계된 특징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 비해서 연못의 생태계를 훨씬 더 풍성하게 조성할 수 있다. 호소생태계에서 서식하는 식물과 주변 환경에서 서식하는 식물이 서로 연결되어 공존하는 습지의 체계를 이해하고, 연못 안에 재현할 줄 안다면, 더 풍성한 생태연못을 만들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 자연적으로 발생한 호소생태계 기반 환경에서는  

                                                        다양한 식생이 호소생태계와 육상생태계를 끈끈하게 연계시킨다.

 

호소생태계에서 서식하며 물에 의존하는 식물은 선호하는 수심에 따라서 서식 장소, 뿌리가 활착한 장소,줄기의 곧고 유연한 정도 등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특징을 기반으로 수생식물을 부유식물, 침수식물, 부엽식물, 정수식물, 호습식물까지, 이렇게 다섯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 수생식물은 선호하는 수심에 따라서 여러 가지 차이점을 가지게 된다.


  1. 부유식물 Floating plant 

    뿌리를 땅으로 뻗지 않고 물 위에 떠서 자라는 풀이다. 이들의 잎이 수면에서 햇빛을 차단하고, 뿌리를 통해서 수중의 유기물을 흡수하여 부영양화와 녹조현상을 억제한다. 

    (개구리밥, 생이가래, 통발, 부레옥잠 등) 

     

  2. 침수식물 Submerged plant 

     

    물속 바닥에 뿌리를 뻗 고 물속에 잠겨 자라는 풀이다. 식물체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 있어서 잘 안 보이므로 관상 가치가 떨어지지만, 물속으로 많은 양의 산소를 배출하며 부영양화를 일으키는 조류의 번식을 제한하기 때문에 수질 정화 능력이 뛰어나다. 

     

    (붕어마름, 검정말, 물수세미, 나사말 등) 

     

  3. 부엽식물 Floating leaved plant 

    잎과 꽃은 물 위에 띄우고 뿌리는 물속 바닥에 뻗어 자라는 풀이다. 수심이 1~2m인 구역에서 서식하며, 대부분의 부엽식물에 해당하는 식물은 잎이 넓어서 물속에 투과되는 광량을 줄여서 녹조현상을 억제하고 무더운 여름에 주위 수온을 시원하게 유지하여 수서생물이 쉴 곳을 마련해준다. 대부분 화려한 꽃을 피워서 이들의 관상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네가래, 마름, 노랑어리연꽃, 연꽃, 개연꽃, 수련 등) 

     

  4. 정수식물 Emerged plant 

    물가에서 자라는 풀이다. 수심 1m 이하의 얕은 곳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수서곤충과 조류의 휴식처 및 번식처를 제공한다. 정수식물의 서식처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수심이 깊은 물가에서는 흑삼릉, 부들 등이 자라고, 얕은 물가에서는 골풀, 고랭이속Scirpus에 속하는 식물 등이 자란다.

    (골풀, 큰고랭이, 고마리, 벗풀, 흑삼릉, 부들 등) 

     

  5. 호습식물 Water loving plant 

    물가에서도 자라고 물가에서 조금 먼 축축한 땅에서도 자라는 풀이다. 호습식물에 대한 개념이 해외에서는 널리 알려졌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역시 정수식물에 포함하기도 한다. 매우 화려한 꽃을 피우는 종이 호습식물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생태연못 조성 시에 중요한 소재로서 여겨진다. 

    (느리미고사리와 처녀고사리처럼 습한 땅을 선호하는 양치식물, 노루오줌속(Astilbe), 동의나물속(Caltha), 꽃창포속(Iris), 곰취속(Ligularia), 앵초속(Primula)에 속하는 식물 등) 

  6.  

 

△ (위) 부엽식물에 해당하는 네가래. 이우학교 인근 논에서도 많이 관찰된다. 
(아래) 호습식물에 해당하는 꽃창포속 식물인 부채붓꽃. 이우학교 연못 주위의 축축한 땅에서 소규모로 자생한다.

 

이러한 식생 구성을 최대한 완벽히 재현하여야만,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생태연못의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우리나라의 많은 생태연못에서 잘 지켜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식생 구성이 제대로 조성되지 못한 곳들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었는데, 연못 주위 물가에 바위를 일률적으로 배치하는 조성 방법이 만연했다.  


아이들의 그림 속 연못은, 대부분 물가에 돌멩이와 바위를 빙 둘러놓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우리나라 곳곳에 조성된 대부분의 연못도 마치 아이들의 그림처럼 생겼다. 생태연못도 예외는 없었다.


  △ 연못 주위 물가에 바위를 일률적으로 배치하여 조성한 모습

 

연못 터를 파다가 나온 바위를 활용하거나, 흙이 쉽게 무너지는 곳을 보강하거나, 계곡의 모습을 연출하는 등 시각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해서 연못 주위에 바위를 배치한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연못과 생태연못에서는 바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위가 가져다주는 기능만을 고려하여 과다하게 많은 양의 바위와 돌을 연못 주위에 일률적으로 배치하게 되면 생태연못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바위를 연못 주위에 일률적으로 배치하면, 물과 육상 간의 연결이 단절되고 정수식물과 호습식물 간의 연속성이 깨졌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부드러우며 생태적인 식생 조성을 방해한다. 또한, 연못과 육상을 오가는 양서〮파충류와 수서곤충의 이동을 방해하는 등 생태계를 격리하게 된다. 생태적인 부분의 논외로, 바위가 생태연못 주위로 빙 둘린 모습은 매우 인위적이라서 생태연못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게 느껴진다.

 

 △ 이우학교 생태연못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자주 관찰되는 유혈목이. 

                             연못 주위에 바위를 일률적으로 배치하면, 연못과 육상을 오가는 생물의 이동을 방해한다. 

 

웬만하면 필요한 일부 구간에만 바위를 배치하고, 물과 육지 사이 경계는 식물이 자생할 수 있도록 흙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한 생태연못 조성 방법이다. 참고로 물 위에 드러나는 바위의 높이를 최대한 낮게 조절해주면 새가 날아와서 앉기도 하고, 양서류가 햇볕을 즐기는 공간으로 탄생할 수 있으니 기왕 바위를 배치하겠다면 약간의 신경을 더 기울여보자. 


생태적인 정원 조성을 다루는 책 한 권을 읽었는데, 그 책의 일부분이 윗부분에서 언급한 내 심정과 견해를 무척 잘 대변하여 발췌했다.

 

 

비오톱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국내에도 크고 작은 연못들이 조성되었다.

최근에는 자생하는 수생식물과 더불어 다양한 외국의 품종들이 활발하게 유통되어

습지원 조성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축축한 땅의 부재는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다.

  

자연의 습지는 지속적인 퇴적으로 수심이 변화해간다.

수심의 변화에 따라 습지로 유입되는 식생 또한 다양해진다.

축축한 땅Wet Land은 습지의 수위보다 살짝 높은 곳에 형성된 토양층으로

습원 단계에서 대규모로 발달한다.

  

이곳에는 대표적인 습지식물인 호습식물Water Loving Plants 군락이

광범위하게 형성되며 수변식물 군락과 더불어

다양한 수서동물의 서식처로 이용된다.

  

그러나 현실의 습지원은 대부분 물이 있는 연못 속과

물이 없는 연못 밖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중략) 

  

개념도에서는 생태를 이야기하지만

물 속 공간은 자연의 습지와 달리 획일적인 서식 기반으로 단순화된다.”

  

 

김봉찬 저, <자연에서 배우는 정원> 발췌

 

 

생태연못은 여러 생명과 인간이 상생하기를 바라는, 생태주의자들의 염원과 이상이 표현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국내 생태연못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희망이 발 디딜 틈조차 부족한 듯하다.


연못의 식생 구성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워서 중요하기도 하지만, 식생은 수질과도 매우 밀접하기 때문이다. 연못은 고인 물이라서 언제든지 썩을 수 있다. 요즘과 같이 무더운 여름에는 부영양화가 쉽게 일어나서 수질이 악화하기 쉽다. 분수와 같은 기계의 힘을 빌려서 물속의 용존산소량을 늘리면 부영양화를 억제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수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정화하기에는 한계가 있고,기계라서 관리하기가 어려우며 지속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 


처음부터 생태계의 균형이 유지되는 생태연못을 조성하여, 연못이 자신 스스로 수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시작이 생태연못의 식생을 치밀하게 계획하는 것이다. 수생식물을 심을 때도 안정적인 생태계 유지를 위해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수심을 고려하여 식물을 심는다. 물가에는 호습식물과 정수식물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을, 깊은 물에는 부엽식물과 침수식물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을 배치하여 심는다. 식물을 심기 전 배치를 계획할 때에, 식물이 시각적으로 부여하는 질감, 색감 등을 고려하여야 하고, 개화기를 미리 파악해 놓아서 겨울을 제외한 연중 꽃을 관상할 수 있도록 종을 구성하면 아름다운 생태연못을 장식할 수 있다. 그리고 양서〮파충류와 수서곤충의 이동, 조류나 포유류의 접근 등을 고려하여 식물을 배치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흑삼릉, 부들, 창포, 수련, 연꽃 등은 증식 속도가 다른 식물에 비해서 매우 빠르므로 연못 전체를 금방 독점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물을 주제로 다루는 정원인 연못에서 물이 노출되는 부분이 줄어들어서 경관을 해칠 뿐만이 아니라, 생태계의 균형이 흔들려서 수질 관리에 차질이 생기며 종 다양성이 낮아진다. 작은 생태연못을 계획할 때는 되도록 이들을 심지 않는다. 작은 연못에 꼭 심어보고 싶은 경우나 단기간의 전시 등을 이유로, 이들을 심겠다면 미리 화분에 심은 것을 그대로 땅에 묻는 방법이 있다.


  △ 증식 속도가 빠른 흑삼릉의 군락. 큰 연못이 아니라면 되도록 이들을 심지 않는 것이 좋다.

 

개구리밥, 생이가래, 통발, 부레옥잠 등의 부유식물이 과잉 증식하면 햇빛을 가리며, 침수식물의 생장을 방해하므로 수시로 제거해준다. 


호습식물은 물기가 많은 땅을 매우 좋아하고, 햇빛이 잘 드는 자리를 선호하는 양지식물이다. 더욱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습지의 식생 재현을 원한다면, 연못 주위의 햇빛이 잘 들고 습기가 항상 풍부한 축축한 땅을 호습식물에게 양보해보자. 


육지더라도 연못 주위는 아주 습한 땅이기 때문에 자랄 수 있는 나무의 종수가 제한적이다. 연못 주위에는 습한 땅을 선호하는 나무를 심는다. 


버드나무속(Salix), 낙우송, 메타세콰이아, 물황철나무, 미루나무, 사시나무, 오리나무, 때죽나무, 다릅나무,물푸레나무, 야광나무, 칠엽수, 신나무, 귀룽나무, 쉬땅나무, 꼬리조팝나무, 산수국 등의 나무가 습한 땅을 선호한다. 

 

  △ (위) 개쉬땅나무, (아래) 꼬리조팝나무. 꼬리조팝나무는 이우학교 연못 주위에서도 자생한다.

 

식물까지 다 심게 되면 생태연못 조성이 거의 다 끝났다고 보면 된다. 그 후에는 물을 채우고, 아마 물고기도 방사할 것이다. 땅에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몇몇 식물들은 물 위에 둥둥 뜨게 되어서 다시 땅에 꽂아야 하는 약간의 번거로움도 있을 테고 말이다. 생태계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반영하여 계획하고 조성한 생태연못이라고 하여도, 조성 초기에는 습지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생태연못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성 초기부터 연못을 그대로 내버려 둬야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생태연못이더라도 조성 초기에는 정기적인 관리가 필수이다. 생태연못의 조성 이후에는 신경을 기울여야 할 핵심이 수질 유지이다. 생태연못의 관리는 대부분 수질 유지를 위한 작업이다.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생태연못의 생태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녹조현상과 부영양화 등이 쉽게 일어난다. 따라서 녹조류가 물 위에 많이 떠다닐 것이다. 이를 내버려 두면 물과 대기 중의 산소교환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여 수서생물의 생명을 위협하며, 햇빛을 차단하여 침수식물의 성장을 억제하기 때문에 녹조류를 수시로 걷어주어야 한다. 

 

         △ 연못의 생태계 균형이 불안정할 때 발생하는 녹조현상. 생태연못 조성 초기에 흔히 발생한다 

 

새로 조성한 생태연못의 식물 역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착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풀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며, 나무는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생태연못에 심은 식물들이 각자의 군락을 안정적으로 형성할 때까지 지속적인 관리가 요구된다. 어떠한 형태의 정원이든 조성 초기에 그렇듯이, 생태연못도 조성 직후에는 내가 심지도 않은 식물이 자라기도 한다. 저절로 자란 식물들은,인위적으로 심은 식물과 경쟁하기 마련이므로 수시로 제거해줘야 한다.


새로 심은 식물이 적응을 못 하여 죽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새로 보식을 해야 한다. 정원이든 생태연못이든, 처음에 만들어놓고 끝이 아니다. 새로 전시하고자 하는 식물이나 기존에 심은 식물과 함께 심으면 어울릴 수 있는 식물을 추가로 보식할 수 있다. 


생태연못 조성이 끝나면 물고기를 방사하곤 한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모기의 애벌레인 장구벌레를 섭식함으로써 모기 개체 수를 낮춰주는,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이다. 물고기의 배설물에 포함된 암모니아는 아질산과 질산염으로 변환되는데 그중에서 질산염을 수생식물이 영양분으로서 섭취하며, 수생식물에 이산화탄소를 제공한다. 물고기 역시 생태연못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물고기를 방사할 때도 주의할 점이 있다. 대부분 물고기를 방사할 때 잉어를 많이 선택하는데, 이러한 대형 어종은 방출하는 배설물의 양이 많은 편이다. 대형 어종을 연못에 많이 방사하여 생기는 많은 양의 배설물은, 수질 정화를 돕는 수생식물 등이 분해하고 정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안정적인 생태계의 균형 유지를 위해서라면 붕어, 버들붕어, 납자루아과(Acheilognathinae), 송사리과(Adrianichthyidae), 미꾸리과(Cobitidae), 피라미아과(Danioninae), 모래무지아과(Gobioninae), 종개과(Nemacheilidae) 등에 속하는 소형 어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 납자루아과에 속하는 떡납줄갱이. 주로 하천이나 저수지, 농수로 등에서 서식한다.

 

이렇게 조성되고 관리하는 생태연못이 안정적인 생태계를 갖추어가고 있는지는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연못의 규모가 크다면 pH 검사와 같은 수질 검사를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추천한다.


pH, 물의 산성 혹은 중성에서 알칼리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이다. 우리나라의 하천 및 담수의 pH6~8 정도인 중성 혹은 약한 알칼리성을 띈다. 생태연못의 경우도 pH 수치가 6~8 정도를 유지해야 한다.


만약 시멘트와 석회석 등의 유입으로 인해 pH 수치가 높아져서 강한 알칼리성을 띄게 되며, 죽은 식물이 물에서 부패하거나 물고기의 배설물이 쌓이게 되면 질산성 질소가 급증하게 되면 pH 수치가 낮아져서 강산성을 띄게 된다. 이렇게 되면 pH의 수치가 우리나라의 생태계와 맞지 않게 변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생물들이 서식하는 생태연못에서 생물학적인 각종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물고기와 양서류가 폐사하거나 식물의 생육이 정상적이지 못하게 되며, 생태연못 내에서의 자체적인 수질 정화에 장애가 발생한다.


이러한 증상을 예방하고 감시하기 위해서 수질 검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추천하는 것이다. pH 등의 수치에 이상을 발견하면,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정확하게 찾기 쉬우며 신속하게 해결 방법 및 진단을 결정할 수 있다. 강한 알칼리성을 띄게 되면 시멘트나 석회질이 물에 유입된 것이기에 연못에 있는 시멘트나 석회석을 건져내야 하고, 강산성을 띄면 원인이 되는 죽은 식물 등을 연못에서 건져내면 된다.

 

  △ 이우중학교 환경동아리 학생들이 연못의 수질을 검사하고 있다.

 

제가 다니는 이우학교와 국내의 잘못 만들어진 생태연못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정리해본 생태연못 조성부터 관리까지의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담은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우선 제법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끈기 있는 여러분, 고맙습니다! 사진이 차지하는 공간을 제외해도, Microsoft Word 형식 파일로 총 17페이지가 넘는 글을 읽어주셨습니다! 


생태연못은 멸종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많은 생명이 안심하고 서식할 수 있는 생태적인 공간입니다. 그와 더불어, “아름답다라는 형용사와 공생 상생이라는 명사를 아이들이 자연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육적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생태연못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께 알릴 수 있어서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생태연못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태주의자, 그리고 생태연못 만들기에 실패한 생태주의자. 이 두 부류에 속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에 속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쓰기도 했습니다.


이 기사는, 생태연못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분들에게 다시 시도해보기를 격려하는 말이 될 것이며 생태연못을 만들어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하나의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얄팍한 지식만을 가지고 조성한 연못들만이 이들의 참고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사를 썼습니다.


이 기사를 읽어주신 분들 가운데, 생태연못을 만들 계획이 없는 분도 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오히려 그런 여러분께서 이 기사를 읽어주신 분들의 대부분일 듯합니다. 여러분이 이 기사 읽으며 관심을 가지는 것이,더 나은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도 제대로 된 생태연못 하나를 만들어주셨습니다. 

 

 △ (위) 황새 (멸종위기야생동식물 I급) , (아래) 금개구리 (멸종위기야생동식물 II급) .

               생태연못은 멸종위기에 처한 많은 생명의 안식처로 거듭나고 있다.

                             사진은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에 조성된 예산 황새 공원 내의 생태연못에서 촬영하였다. 

 

 

 △ 생태연못에서 전문가에게 생태 해설을 듣고 있는 이우고등학교 생태위원회의 학생들.

     생태연못은 생태 교육의 장으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  

 

우리의 꿈은 머지않아 생태연못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생태주의로 격변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께,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한 사람이 남겼던 말을 전해드립니다.

  

  

“When we dream alone it is only a dream,
but when many dream together it is the beginning of a new reality”

 
혼자 꿈을 꾸면 한낱 꿈일 뿐이지만,
우리가 모두 함께 꿈을 꾼다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

  

 

 
 

 
 

끝으로, 이우학교의 생태계를 지키겠다는 소신으로 행동하는

이우고등학교 생태위원회 산하 이우를 숲으로 위원 여러분께 이 기사를 바칩니다.


<그린기자단 권순호, 이우고등학교>


스캔이 잘 안되네요.. 눈을 크게 뜨시고 잘보셔야 할 듯~~~@@

 

 

수문통이란 물이 드나드는 수구문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서 인천 뿐만 아니라 전남 설도를 비롯해 충남 등 댐이 있거나 매립을 한 뒤 수문을 만들어 놓은 곳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입니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는 동구 송현동 일대의 수문통은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갯골로 넓은 갯벌 위에 갈대가 무성했던 저지대 습지였습니다.

이 갯고랑은 현 동국제강 위치에 있는 수구문에서 부터 시작되어 화평파출소 아래에서 중앙 시장 밑으로 “ㄱ"자로 흘러 배다리 철교 아래까지 이어진 뱃길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중앙시장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배다리라는 지명도 이처럼 배를 타고 들어온 주민들이 나무로 만든 다리를 밟고 내리던 것에 유래되었다 하니 당시에 갈매기 날아 들던 수문통과 배다리의 풍광이 그려짐니다.

옛 화도진지도를 보면 지금의 화수동과 송현동 사이로 여러 갈래의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한줄기로 모여 흐르는 것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근대사의 인천의 지형은 반도 형태로 튀어 나온 모습으로 빙 둘러 곳곳에 포구가 많이 있던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남동구 논현동 앞엔 호랑이가 입을 벌린 형태의 호구포가 있었고, 신흥동 앞엔 탁포(터진개), 현재 파라다이스 호텔 앞은 제물포, 인천역이 위치한 바로 뒤는 북성포, 괭이부리 마을 이 있는 만석동엔 조선시대 각지의 세곡의 쌓아두던 미곡창고가 있어 성창포라 불리었고 현재 주안역 뒤 주안 5공단이 들어서 있는 곳을 십리포라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수문통으로 길게 이어진 갯골엔 섭도포라는 포구가 있었습니다.

.

 

이처럼 인천은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해수면이 비교적 낮은데다가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면 수천㎡의 갯벌이 드러나 바다를 매립하기 쉬운 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빗금친 부분) 현재 동국제강이 있는 곳부터 현 화평파출소까지 약 780여m의 길이를 수문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조계지인 현 중구와 동구지역을 포함하는 제물포 일대를 장악한 일본인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 확장을 위해 도로와 항만, 공장부지, 주택 등 지을 부지가 부족 하여 많은 땅을 필요로 했는데 이에 시작을 한 것이 바로 매립공사이었습니다.

수문통 갯골을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일본인 요시다라는 사업가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약 10만㎡(3만3천여평)를 매립하면서 화평동과 배다리까지 "ㄱ"자로 꺽이는 하수로를 만들고 하류에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을 설치해 바닷물을 막은 것입니다

 

물막이 공사를 한 뒤 현 광성고등학교 언덕과 화평동 언덕 그리고 송림산(수도국산)언덕을 깎아 흙을 매립했다고 전해짐니다.

 

요시다는 이 일대를 매립해 당시에 십만원이 넘는 어마 어마한 돈을 벌어 동아 조선등 언론에 특혜 시비에 거론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시다가 이렇게 특혜시비에 연루되자 땅집고 헤염치기로 번 돈을 생색내기로 빠져 나가기 위하여 모색한 것이 지금의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송림초등학교는 당시 아사히초등학교( 현 신흥초등학교)의 부속 건물을 해체한 목재로 지었다고 하니 요시다가 송림초등학교를 지으며 들어간 건축비는 그리 큰 돈은 들어 가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복개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위 사진을 촬영한 정확한 년도를 알기가 쉽지 않네요... 위에 보이는 건물이 옛 경기도 적십자병원이었습니다.

56년에 설립돼서 운영하다가 77년인가 숭의동 현재 유비스 병원밑에 성인천한방병원 자리로 갔다가 96년 연수동으로 이사했지요

이 건물은 이후 송현성당이 이어 받아 개축을 해서 성당으로 사용 작년 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현재 허물어져 울타리를 쳐 놨더군요.

복개가 되기 전 이 수로는 높이가 약 7-8m였는데 만조때는 물이 넘칠 때가 많아 주변 주택들의 부엌에도 흥건하게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 수문통엔 마누라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사는 곳"이라 했다 하는군요.

물이 빠지면 작은 바닷게와 망둥이들이 많아서 이를 잡아 먹기 위해 몰려드는 뱀이 특히 많았다 합니다.

이 수로는 특히

동구 송림,화평일대의 유일한 하수구이기도 했지요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버리는 생활 오폐수가 모두 이 수로를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냄새도 많이 나고 질퍽거렸던 동네였습니다.

송현교와 가까이 있던 곳에서는 돼지고기와 순대, 돼지 부산물들을 파는 가게가 많았고

이 가게들이 후엔 양키시장 옆 순대골목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합니다.

 위 사진을 찍은 위치를 찾아 찍어 봤습니다. 적십자 병원 건물 자리는 중앙에 노란색 프랑카드가 있는 울타리 자리입니다.

건물이 아직 남아 있으면 연세가 56세가 되시는건데..... 아쉽지요.. 옛 건물들이 자꾸만 허물어져 가는 것이.

 
























 송현교 교각 입니다.

 

 

지금은 복개된 아스팔트 도로 위로 차들이 달리고 있어 이곳에 작은 배들이 다니던 갯골이었다는 얘기가 믿겨지지 않지만 1940년대까지도 갈매기와 함께 나룻배가 드나 들던 뱃길이었음을 알 수 있는 표지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또한 이 갯고랑 위에 설치되었던 송현교는 화평동과 송현동을 가로 지르는 큰 갯골을 건너기 위해 축조된 다리로서 사람들만 겨우 건너던 외나무 다리를 걷어 내고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폭3m에 길이15m로 철근 콘크리트 다리였습니다. 지금도 화평파출소 옆에 두 개의 화강석 교각이 서있어 당시 다리의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수문통지역은 1989년 송현치안센터에서부터 삼두1차아파트까지 복개되었고 1999년 현재 송현교 표지석이 있는 화평치안센터까지 완전히 복개되었습니다. 지금 우측에 보이는 상가들이 있는 자리가 옛 공작창자리였습니다. 지금은 동구 센트레빌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공작창은 기차의 부품이나 부속품을 만들던 곳입니다.

1945년 해방된 이듬해 이곳에서 만든 해방호 열차가 경부선을 달렸다고 합니다.

일본인 사업가 요시다가 자리를 잡은 그 자리에 오늘날의 송현초등학교가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송림초등학교는 1937년 개교를 하였으니 7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네요.

유서깊은 학교이지요...

위에 금산건강원 경운상회가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1943년경에 가마니 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최근에 지붕을 다시 했더군요, 원래 바람이 드나들도록 이층 원두막 창이 있었는데.....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인들의 쌀퍼나르기가 본격화 되지요. 1900년대 초 인천에서 제일 활발하게 일어났던 사업은

당연히 정미소였습니다. 일본인들의 정미 사업은 미두취인소라는 거래소를 탄생시켰고 정미소가 제일 많았던 인천과 가까이에 있던 경기도 일원의 농촌에서는 가마니를 짜서 공급을 했습니다. 볏집으로 만든 쌀가마니죠.

육로로 실어나르기 힘든 시절..... 뱃길로 수문통 갯골을 따라 배로 실어다가 바로 저와 같은 가마니 창고에 보관했다가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곳에서 야채가게를 운영 하시는 경운상회 사장님은 연세가 70이 넘으신 분인데요, 수문통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수문통에 사시는 분이심니다.

야채를 도매가격으로 싸게 팔다보니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 오시는 손님들이 많더군요.

무우 배추 채소를 주로 파시는데 말만 잘하면 덤으로 두어개씩 막 더 주세요..ㅎㅎ

뒷 골목엔 아직도 일제시대의 적산가옥들이었던 집들이 남아 있어요.

왼쪽에 저집은 어느 영화에도 나왔던 집이라든데...

특히 이 건물은 비어 놓은지 좀 오래된 듯 한데요. 담쟁이를 뒤집어 쓰고 있어 허물어질 것처럼 낡았습니다.

이 건물이 있는 주변엔 매립이 시작된 1939년 이후 일본인들의 관사가 지어 지기 시작했던 곳으로 지금도 맛배지붕을 한 일본식 2층 다다미 집들이 여러채 남아있긴 합니다. 몇 년전 빌라 붐이 일어났을 때 많이 헐려 나가고 이젠 몇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수문통에 있던 공작창과 학교, 공장을 관리하던 간부급들인 일본인들 관사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현재

동국제강이 자리 잡고 있는 수문통 끝의 수구문이 있는 자리죠...

저기 보이는 아래 교각 밑으로 아직도 바닷물이 들고 있습니다.

저기서 왼쪽으로 꺾이어 쭉 나가면 바다입니다.

사람들이 드나 들지 못하도록 철망을 쳐 놓아서 철망 사이로 폰만 집어 넣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ㅎㅎㅎ

 

이상--- 수문통을 아십니까 1부를 마침니다



스캔이 잘 안되네요.. 눈을 크게 뜨시고 잘보셔야 할 듯~~~@@

 

 

수문통이란 물이 드나드는 수구문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서 인천 뿐만 아니라 전남 설도를 비롯해 충남 등 댐이 있거나 매립을 한 뒤 수문을 만들어 놓은 곳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입니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는 동구 송현동 일대의 수문통은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갯골로 넓은 갯벌 위에 갈대가 무성했던 저지대 습지였습니다.

이 갯고랑은 현 동국제강 위치에 있는 수구문에서 부터 시작되어 화평파출소 아래에서 중앙 시장 밑으로 “ㄱ"자로 흘러 배다리 철교 아래까지 이어진 뱃길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중앙시장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배다리라는 지명도 이처럼 배를 타고 들어온 주민들이 나무로 만든 다리를 밟고 내리던 것에 유래되었다 하니 당시에 갈매기 날아 들던 수문통과 배다리의 풍광이 그려짐니다.

옛 화도진지도를 보면 지금의 화수동과 송현동 사이로 여러 갈래의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한줄기로 모여 흐르는 것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근대사의 인천의 지형은 반도 형태로 튀어 나온 모습으로 빙 둘러 곳곳에 포구가 많이 있던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남동구 논현동 앞엔 호랑이가 입을 벌린 형태의 호구포가 있었고, 신흥동 앞엔 탁포(터진개), 현재 파라다이스 호텔 앞은 제물포, 인천역이 위치한 바로 뒤는 북성포, 괭이부리 마을 이 있는 만석동엔 조선시대 각지의 세곡의 쌓아두던 미곡창고가 있어 성창포라 불리었고 현재 주안역 뒤 주안 5공단이 들어서 있는 곳을 십리포라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수문통으로 길게 이어진 갯골엔 섭도포라는 포구가 있었습니다.

.

 

이처럼 인천은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해수면이 비교적 낮은데다가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면 수천㎡의 갯벌이 드러나 바다를 매립하기 쉬운 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빗금친 부분) 현재 동국제강이 있는 곳부터 현 화평파출소까지 약 780여m의 길이를 수문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조계지인 현 중구와 동구지역을 포함하는 제물포 일대를 장악한 일본인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 확장을 위해 도로와 항만, 공장부지, 주택 등 지을 부지가 부족 하여 많은 땅을 필요로 했는데 이에 시작을 한 것이 바로 매립공사이었습니다.

수문통 갯골을 당시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일본인 요시다라는 사업가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약 10만㎡(3만3천여평)를 매립하면서 화평동과 배다리까지 "ㄱ"자로 꺽이는 하수로를 만들고 하류에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을 설치해 바닷물을 막은 것입니다

 

물막이 공사를 한 뒤 현 광성고등학교 언덕과 화평동 언덕 그리고 송림산(수도국산)언덕을 깎아 흙을 매립했다고 전해짐니다.

 

요시다는 이 일대를 매립해 당시에 십만원이 넘는 어마 어마한 돈을 벌어 동아 조선등 언론에 특혜 시비에 거론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시다가 이렇게 특혜시비에 연루되자 땅집고 헤염치기로 번 돈을 생색내기로 빠져 나가기 위하여 모색한 것이 지금의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송림초등학교는 당시 아사히초등학교( 현 신흥초등학교)의 부속 건물을 해체한 목재로 지었다고 하니 요시다가 송림초등학교를 지으며 들어간 건축비는 그리 큰 돈은 들어 가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복개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위 사진을 촬영한 정확한 년도를 알기가 쉽지 않네요... 위에 보이는 건물이 옛 경기도 적십자병원이었습니다.

56년에 설립돼서 운영하다가 77년인가 숭의동 현재 유비스 병원밑에 성인천한방병원 자리로 갔다가 96년 연수동으로 이사했지요

이 건물은 이후 송현성당이 이어 받아 개축을 해서 성당으로 사용 작년 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현재 허물어져 울타리를 쳐 놨더군요.

복개가 되기 전 이 수로는 높이가 약 7-8m였는데 만조때는 물이 넘칠 때가 많아 주변 주택들의 부엌에도 흥건하게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 수문통엔 마누라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사는 곳"이라 했다 하는군요.

물이 빠지면 작은 바닷게와 망둥이들이 많아서 이를 잡아 먹기 위해 몰려드는 뱀이 특히 많았다 합니다.

이 수로는 특히

동구 송림,화평일대의 유일한 하수구이기도 했지요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버리는 생활 오폐수가 모두 이 수로를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냄새도 많이 나고 질퍽거렸던 동네였습니다.

송현교와 가까이 있던 곳에서는 돼지고기와 순대, 돼지 부산물들을 파는 가게가 많았고

이 가게들이 후엔 양키시장 옆 순대골목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합니다.

 위 사진을 찍은 위치를 찾아 찍어 봤습니다. 적십자 병원 건물 자리는 중앙에 노란색 프랑카드가 있는 울타리 자리입니다.

건물이 아직 남아 있으면 연세가 56세가 되시는건데..... 아쉽지요.. 옛 건물들이 자꾸만 허물어져 가는 것이.

 
























 송현교 교각 입니다.

 

 

지금은 복개된 아스팔트 도로 위로 차들이 달리고 있어 이곳에 작은 배들이 다니던 갯골이었다는 얘기가 믿겨지지 않지만 1940년대까지도 갈매기와 함께 나룻배가 드나 들던 뱃길이었음을 알 수 있는 표지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또한 이 갯고랑 위에 설치되었던 송현교는 화평동과 송현동을 가로 지르는 큰 갯골을 건너기 위해 축조된 다리로서 사람들만 겨우 건너던 외나무 다리를 걷어 내고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폭3m에 길이15m로 철근 콘크리트 다리였습니다. 지금도 화평파출소 옆에 두 개의 화강석 교각이 서있어 당시 다리의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수문통지역은 1989년 송현치안센터에서부터 삼두1차아파트까지 복개되었고 1999년 현재 송현교 표지석이 있는 화평치안센터까지 완전히 복개되었습니다. 지금 우측에 보이는 상가들이 있는 자리가 옛 공작창자리였습니다. 지금은 동구 센트레빌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공작창은 기차의 부품이나 부속품을 만들던 곳입니다.

1945년 해방된 이듬해 이곳에서 만든 해방호 열차가 경부선을 달렸다고 합니다.

일본인 사업가 요시다가 자리를 잡은 그 자리에 오늘날의 송현초등학교가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송림초등학교는 1937년 개교를 하였으니 7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네요.

유서깊은 학교이지요...

위에 금산건강원 경운상회가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1943년경에 가마니 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최근에 지붕을 다시 했더군요, 원래 바람이 드나들도록 이층 원두막 창이 있었는데.....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인들의 쌀퍼나르기가 본격화 되지요. 1900년대 초 인천에서 제일 활발하게 일어났던 사업은

당연히 정미소였습니다. 일본인들의 정미 사업은 미두취인소라는 거래소를 탄생시켰고 정미소가 제일 많았던 인천과 가까이에 있던 경기도 일원의 농촌에서는 가마니를 짜서 공급을 했습니다. 볏집으로 만든 쌀가마니죠.

육로로 실어나르기 힘든 시절..... 뱃길로 수문통 갯골을 따라 배로 실어다가 바로 저와 같은 가마니 창고에 보관했다가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곳에서 야채가게를 운영 하시는 경운상회 사장님은 연세가 70이 넘으신 분인데요, 수문통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수문통에 사시는 분이심니다.

야채를 도매가격으로 싸게 팔다보니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 오시는 손님들이 많더군요.

무우 배추 채소를 주로 파시는데 말만 잘하면 덤으로 두어개씩 막 더 주세요..ㅎㅎ

뒷 골목엔 아직도 일제시대의 적산가옥들이었던 집들이 남아 있어요.

왼쪽에 저집은 어느 영화에도 나왔던 집이라든데...

특히 이 건물은 비어 놓은지 좀 오래된 듯 한데요. 담쟁이를 뒤집어 쓰고 있어 허물어질 것처럼 낡았습니다.

이 건물이 있는 주변엔 매립이 시작된 1939년 이후 일본인들의 관사가 지어 지기 시작했던 곳으로 지금도 맛배지붕을 한 일본식 2층 다다미 집들이 여러채 남아있긴 합니다. 몇 년전 빌라 붐이 일어났을 때 많이 헐려 나가고 이젠 몇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수문통에 있던 공작창과 학교, 공장을 관리하던 간부급들인 일본인들 관사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현재

동국제강이 자리 잡고 있는 수문통 끝의 수구문이 있는 자리죠...

저기 보이는 아래 교각 밑으로 아직도 바닷물이 들고 있습니다.

저기서 왼쪽으로 꺾이어 쭉 나가면 바다입니다.

사람들이 드나 들지 못하도록 철망을 쳐 놓아서 철망 사이로 폰만 집어 넣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ㅎㅎㅎ

 

이상--- 수문통을 아십니까 1부를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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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문재인 대통령 제주4.3 희생자 추념사

  • 뉴스제주
  • 승인 2018.04.03 12:19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읊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제70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읊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념이 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학살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 ‘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습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이 일어섰습니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천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의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 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의 승리가 진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어섰습니다.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그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추념식이 4.3영령들과 희생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우리 국민들에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4월 3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 재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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