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원희룡 지사 "분단 상황서 제주 4.3 성격 규정 시 또 다른 상처"

KBS 입력 2018.04.04. 10:38 수정 2018.04.04. 10:41


□ 방송일시 : 2018년 4월 4일(수요일)
□ 출연자 : 원희룡 지사(제주도)

“원희룡, 큰아버지 가족 네 분 희생…어릴 때 가족사로 금기시”…“2003년 조사 때 빠진 수형인 명예 회복 필요…해결 8부 능선 넘어”

[윤준호] 유채꽃이 만발하는 4월의 제주 아름다운 만큼 아픔의 역사 또한 깊습니다. 어제 제주 4.3 평화공원에서는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는데요. 문재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가 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서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제주 4.3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지 원희룡 제주지사와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원희룡 제주지사님, 안녕하십니까?

[원희룡] 안녕하세요?

[윤준호] 어제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습니다. 벌써 70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아픔은 완료 상태가 아니고요. 우리 청취자분들도 그렇고 많은 국민들이 4.3에 대해서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특히 젊은층에서는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수 있거든요. 먼저 4.3은 언제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부터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원희룡] 4.3은 1945년에 일본에서 해방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다음에 남북 분단하고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극심한 이념 대립이 있었죠. 남북 간에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요. 그 과정에서 1948년에 남한 단독 정부 수립해서 5월 10일에 총선거 방침이 정해지니까 이에 대해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당시에 남조선노동당이죠. 이쪽에서 4.3을 기화로 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여기까지는 이념 충돌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 과정에서 소위 남노당의 무장비들은 군인이나 경찰 가족들을 공격해서 죽였고 그다음 진압작전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군경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10월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그리고 그 후에 4년간 진압작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희생됐죠. 그래서 양쪽에 의한 희생자가 전부 해서 3만 명 정도가 희생되는 그런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 바로 4.3입니다.

[윤준호] 3만 명이면 당시 제주 인구의 거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죠, 지금?

[원희룡] 그렇습니다.

[윤준호] 4.3이 이렇게 70년이나 됐지만 사실상 그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어왔습니다. 양지로 나온 것이 지난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4.3 진상규명 특별법 만들면서인데 그동안에 이야기되는 것 자체가 물론 우리 지사님 어렸을 때도 제주에서 학교 다니면서도 이것 이야기 못했었죠, 그런 상황이었죠?

[원희룡] 저는 개인적으로는 큰아버지 가족 네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제 어릴 때도 물론 가족사로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금기시되었죠. 왜냐하면 이게 발단은 우선 남노당의 무장봉기에 의해서 발단이 되었거든요. 그렇다 보니까 그 과정에서 실제 무장봉기의 주동자나 핵심 관여자들도 섞여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 보니까 특히 이승만 정부라든지 이어진 군사정권이나 이런 데에서는 4.3은 결국 공산주의 내지는 북한과 연결된 그런 색깔이 많이 칠해지면서 금기시되고 또 관련된 사람들이 감시당하고 연좌제로 불이익을 보고 그랬죠.

[윤준호] 김대중 정부에서는 4.3 진상규명 특별법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에 진상규명 작업은 어떻게 진행이 됐습니까?

[원희룡] 정부 차원에서 4.3 특별법이 진상규명 및 명예 회복이니까요. 그에 의해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가 진행되어서 2003년에 정부 차원의 제주 4.3 진상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확정이 됩니다, 국가 차원에서요. 그리고 이에 의거해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가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국가 원수로서 사과를 하셨습니다.

[윤준호] 그런데 아직도 그러니까 4.3 진상규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건 18년 됐고 2003년에 보고서가 만들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8년 동안 아직도 미완의 상태로 남은 즉,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해결 일들은 어떤 부분들이 남아 있습니까?

[원희룡] 2003년 당시에 포괄적으로는 진상조사가 채택이 됐는데요. 여기에서 빠져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추가 조사도 필요하고 특히 당시에 빠져 있던 피해자들이 어떤 분들이냐 하면 수형인, 형을 산 분들 있죠. 이분들이 당시에는 군사 재판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 와서 이렇게 확인되는 것으로는 정당한 절차를 안 밟은 것은 물론이고 기록조차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지금은 이것을 대법원에서 재심을 하려고 해도 기록이 없으니 어떻게 구제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당시 군사 재판이나 수형인들에 대한 진상조사와 명예 회복도 필요하고요. 그러니까 이런 차원에서 추가적인 진상조사와 이에 기반한 수형인들의 불법 재판에 대한 어떤 무효 선언 그리고 전반적인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과 보상 이런 문제들이 현재 손이 아직 덜 대진 상태입니다.

[윤준호] 그 부분이 어제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식에서 이야기한 4.3의 완전한 해결과 직결될 수 있는 그런 부분인가요? 그 정도면 완전히 해결로 간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원희룡] 그러한 내용들이 들어가면 한 8부 능선은 넘는 셈이 되겠죠. 그다음에 완전한 해결이라는 것은 결국 서로 완전한 화해, 용서 그다음에 역사적인 평가까지도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의 일부는 후세에 남겨질 몫도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현재로는 진실에 대한 조사 그리고 피해에 대한 명예 회복이라든가 배보상 등 원상 회복도 아직 미진하기 때문에 많이 미진한 거죠.

[윤준호] 그런데 이전의 요구사항을 보면 책임자 처벌도 들어가 있었죠? 그런데 70년이나 됐는데 책임자 처벌이라는 조항은 그냥 상징적인 이야기인가요?

[원희룡] 그 책임이 당시에 미군정에 있었기 때문에 과연 미국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느냐도 현재 논의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고요. 당시에 책임자들이라고 한다면 아마 자연인으로 거의 다 돌아가신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당시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어저께 문재인 대통령께서 국가 차원의 공권력 행사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공식으로 사과를 하시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신 거거든요.

[윤준호] 현대사의 유명한 사건들은 대부분 다 이름이 있습니다. 4.19는 혁명, 부마사태 항쟁, 광주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 이런 식으로요. 4.3은 아직까지 날짜로만 되어 있고 이름이 없고 진보진영에서는 학살 또는 항쟁, 보수진영에서는 폭동, 반란. 어떤 식으로 어떤 이름이 지어져야 할 것으로 기대하시는지요?

[원희룡] 이점이 2003년 당시에 정부 차원의 진상 보고서 채택 당시에도 고건 총리로 기억합니다만 4.3에 대한 전체적인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후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중립적인 용어로 4.3이라는 어찌 보면 상당히 애매한 용어를 쓴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떤 문제가 있냐 하면 예를 들어서 학살이라는 것은 무장대에 의해서도 토벌대에 의해서도 양쪽에서 의해서 모두 진행됐기 때문에 물론 비중은 무장대에 의한 것은 한 20%? 그다음 토벌대에 의한 게 한 80% 정도로 추정은 됩니다만 학살이라는 것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 자체는 맞는 것인데요.

[윤준호] 의미 부여가 안 되죠.

[원희룡] 그러면 당시에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무장봉기를 한 그 투쟁의 내용과 방식까지도 어떤 평가를 하면서 가는 만약에 그런 의미에서 항쟁이라고 붙인다고 했을 때는 이게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에 있어서의 역사적인 전통성의 문제로 직결되게 되고요. 또 그렇게 됐을 때 그러면 현재 헌법재판에 의해서는 당시에 4.3 무장봉기의 남노당 핵심 주동자들은 4.3 특별법 대상에서 배재되어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사실은 북한의 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도 상당히 있고 그 뒤에 조총련이라든가 이런 실제로 남북 분단에 가장 예민한 부분에 직결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직 분단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부분을 굳이 정리하려는 게 또 다른 상처와 갈등을 낳을 수 있다는 그런 점에 저희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윤준호] 그러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또 치유와 화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좀 더 거친 다음에 이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군요.

[원희룡]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윤준호] 이번에 제주도에서는 이것을 지방 공휴일로 처음 공포를 했는데 그건 어떤 의미였나요?

[원희룡] 도의회에서 지방 공휴일로 조례를 제정해서 저희들이 공포한 건데요. 4.3 유족만 6만 명입니다. 추가 신고를 받으면 8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제주 인구가 68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은 한 집 건너서는 거의 제주도민 모두가 사실은 4.3과 관련된 직접적인 연관자들이죠,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 차원에서는 이날을 전 도민적으로 추념하기 위해서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것이고요. 이런 것은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에는 지방 공휴일이 지방 분권 차원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진행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 이번에 상징적으로 70주년이라는 차원에서 저희들이 선포를 했죠.

[윤준호] 원 지사님께서 최근에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대한 특별법 개정안 처리 국회에 촉구하셨는데 특별법 개정안에 지금 어떤 내용들이 들어가 있습니까?

[원희룡] 아까 말씀드렸던 배상과 보상 그다음에 정당 절차에 의하지 않은 군사 재판의 무효 그리고 진실 규명을 위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추가 조사 그리고 트라우마 치유 센터 건립 이런 내용들이 핵심적으로 다 들어가 있고요. 이것을 가지고 4.3 70주년 전에 심의라도 착수해달라고 지난번에 유족회와 함께 국회를 모든 당을 다 방문해서 약속을 받았었는데 아직 본격적인 심의 절차에 국회가 못 들어가고 있네요.

[윤준호] 여야가 그 부분은 약속했다고 하니까 진행이 될 것 같고요. 다만 큰 개헌이라든가 현안 때문에 밀리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또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업도 추진 중이다, 이렇게 이야기 들었는데 지금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있습니까?

[원희룡] 2021년 등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올해 국비로 예산 1억 원이 반영돼서 실무적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해 준비해서 내년 문화재청 신청을 하고 2020년에는 유네스코 신청을 해서 2021년에 기록 유네스코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윤준호]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원희룡] 가능성은 매우 크고요. 왜냐하면 유네스코라는 게 이런 역사의 교훈을 인류가 공유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저희가 4.3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윤준호] 4.3 70년 됐습니다. 현대사적으로 우리에게 지금 주어지는 의미,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원희룡] 4.3은 해방 정국 당시로 보면 분단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일어났던 이념 충돌에 민간인이 희생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고요. 그 이후에 침묵이 강요되고 탄압이 있던 시절에 4.3에 대한 기억과 목소리를 내기 위한 이런 과정에서는 민주화의 역사이기도 하고요. 지금에 와서는 과거 가해자와 피해자 이념에 의한 좌우 대립 이것을 넘어서서 진실의 바탕 위에서 서로 용서하고 미래에는 진정한 우리 남북 통일과 이념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우리 미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그런 우리 공통의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4.3은 당시 피해자, 가해자로 서로 맞물려 있던 경우에 그러니까 전직 경찰 동호회하고 유족회하고 조건 없는 화해를 이미 2013년에 선언해서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모든 행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 미래에 이념의 틀로 진영 논리로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그러한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모범 사례라고 저희들은 보고 있습니다.

[윤준호] 이른 시간에 인터뷰 요청드렸는데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원희룡] 고맙습니다.

[윤준호] 지금까지 원희룡 제주지사였습니다.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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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간 동네영화관
애관극장

저렴하고 한적한 애관극장은
한국인이 경영한 최초의 상영관이다.
도착해서 올라가자마자 왼쪽을 보면 매표소가 보인다.

요금은 성인 7000 / 학생 6000원
조조는 4000원이라서 조조에 보면 완전 이득!


실내는 대략 이런 분위기 ㅋ
최초라는 말에 알맞게 정말 옛날스럽다.


매점도 있는데 이곳은 무조건 현금결제!

가격은 저렴한 편이라서 현금결제인듯 싶다.

아이스크림도 팔지만 상영관 내 반입금지!


아이스크림 파는 곳 옆을 보면 복도가 보이는데
복도를 따라가면


화장실이 있다!ㅋ
화장실은 남여 구분되어 있고 깔끔한편!


화장실가기전 복도 중간에 빠지면
이렇게 오락실이 보이는데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1관 이외의 상영관으로 갈수있다.


오락실옆에는 주차공간도 협소하지만 있는데
만차일경우 그 근처에 주차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1관 바로 앞에서 올라가면 이렇게 대기할수있는
장소가 있어서 나름 기다렸다가 영화 볼수있다.


오늘 나는 2층 3관에서 영화를 봤는데


3관 좌석은 대략 이렇다.
개인적으로 F열에 앉아도 괜찮은듯~


영화관에 입장!영화 시작전이었는데 주말인데 10팀가량 영화를 보러왔다.(제발 영화관이 망하지 않았으면..)

영화 앞에 있는 광고는 거의 없는편이라 시작시간에 광고가 아닌 영화가 상영된다.
늦지않고 미리 가 있는 센스가 필요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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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극장" 이야기를 올립니다. 



동인천지역에는 한때 19개의 극장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습니다.

지금 동인천지역은 구도심이 되어버렸지만 최고의 시네마 천국이었습니다.

극장 밀집도가 이렇게 높은 지역은 동인천이 최고였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 바로 동인천에서 생겼습니다.

그것도 현존하는 극장입니다.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그런데 슬프하게도 애관이 역사적인 극장이라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모르십니다.

인천 사람들 조차도요. 하긴 저도 3년전에 처음 알았을 정도입니다.



애관극장은 인천의 보물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극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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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협률사( 이 사진은 서울 협률사 사진으로 추정) 

을미개혁이 있던 1895. 인천의 대부호 정치국이 협률사라는 공연장을 현재의 애관극장 위치보다 좀 더 위, 용동 쪽에 세웠습니다. 1902년 서울 정동의 협률사보다 7. 1908년 이인직 원각사보다 13. 1907년에 세워진 종로 단성사보다도 14년 앞선 것입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사진 

정치국 (1865~1924 

부산 출신. 젊은 시절 인천으로 이주했고 막대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endif]-->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1910년 전후 약도. 협률사(애관자리)가 보입니다.


 
     

1911년 축항사(築港舍)라 명칭을 바뀌게 되는데 부지 48평을 가진 2층 건물의 정원 500명 규모였습니다. <!--[endif]--> 

여기에서 극작가 진우촌·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元雨田) 등 기라성 같은 <!--[endif]--> 

인천 문화계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endif]--> 

1924년에 애관으로 개칭됩니다.

애관은 일본 발음으로 아이강. 당시 극장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1928년 대중잡지 별건곤에 소개된 애관과 외리 

기사를 보면 애관의 위치가 자세히 나옵니다. 불당은 능인사이며 성당은 답동성당입니다. 요리집의 장고소리는 용동권번입니다. 

세상이란 멋대로 지내는 것이란 것을 한 장에 그려놓은 표본이 바로 인천의 외리라는 대목이 재밌습니다.​  

애관은 연극이나 영화만 상영하던 공간이 아니였습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던 곳입니다. 

192855일 어린이날. 동화극 '참새' 상영 

19281124~25일 나운규 '아리랑'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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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무도대회를 애관에서 열었습니다 

1934년 전인천야구 대회. 애관에 실업팀 야구단이 있었습니다. 조선인만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팀이었습니다. 

1935년에 우승까지 합니다. 

  

1930년대 중후반에 최승희의 공연이 열렸습니다.



1936년 애관의 입장객은 15만명에 이르렀습니다 

권투 경기까지 열립니다 

1945818일 애관극장에서 조봉암 선생께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빨리 결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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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틀 뒤 820일 애관극장에서 조봉암의 주도로 보안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조봉암의 딸 조호정 씨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집 근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유독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했다""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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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창단한 인천관현악단의 처음 공연도 애관에서 펼쳐졌습니다.

 

1948. 맨 오른쪽 아래 건물이 애관극장


 


1948

Norb-Faye씨께서 답동성당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촬영하신 사진 

 

1950915, 함포사격으로 인해 소실됩니다. 

종군기자이셨던 임응식씨께서 촬영하신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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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925. 폐허가 된 애관극장에서 바라본 답동성당의 모습입니다.


 

1951. 임시로 세운 애관극장.

진남포에서 피난 나온 18세 한명숙은 태양악극단에 들어가고 데뷔 무대가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1953년 애관에 특설링을 설치하여 레스링 대회가 열렸습니다.


 


19545월로 추정 

예전 극장 자리 보다 좀 길가로 내려와서 지금 애관 자리에 다시 건물을 지었습니다.  

19555. 피아노 연주자 번스타인의 내한공연이 열렸습니다. <!--[endif]--> 

애관에서도 그의 연주가 펼쳐졌다고 합니다.

 

1956년의 애관극장



 

1956. 동산고 학생들.




애관극장 앞입니다. <!--[endif]--> 

196096일 애관극장 신축

) -->극장 외형은 비슷한데 이 시기 전후를 살펴보면 입구 계단이 없고 있고 차이가 있습니다 

이때 '애관''애관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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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인천공고 졸업앨범 사진


1964년 이봉열 씨가 인수하여 확장 리모델링합니다

 


 

 

65. 신성일 엄앵란 애관 쇼에 출연.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합니다

1972년 탁상덕 씨가 인수합니다.

 

1980년대에 내부 리모델링.




198970mm 영사기와 입체음향 설비를 갖추었습니다. 당시 전국에 네군데 극장 밖에 없었던 70미리 영화 상영관이었습니다.




현 애관의 주인, 탁경란 사장



1999년 인천CGV14가 개관하여 위기를 느낀 애관극장은 20045개관으로 증축합니다. (사진은 2016)

애관 극장주

정치국(1895~) 

홍사헌(?~) 

김윤복(1924~) 

기신양행(1928~) 

실업자전도회 대표 최복산(1945~) 

김장복 (목재상) 

김태성 

김석신(1954~) 

이봉렬(1960~) 

탁상덕(1972~) 

탁관(1991~) 

탁경란(2000~현재) 

 


 


애관극장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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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관은 단순하게 영화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한 극장은 아니었습니다. 애관은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도 각광 받았습니다. 정부가 주관하는 종두 접종에서부터 노동 단체의 총회나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시위 모임, 민간 사설 단체가 주도했던 강연회나 연주회 내지는 각종 행사 등이 애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120년이 넘은 애관극장. 

애관극장만은 앞으로도 계속 꿋꿋하게 버텨주길 기원합니다. 


                                                                         
 

학교 단체관람으로 본 007 시리즈.

지금도 타이틀 곡을 들으면 가슴이 뜁니다.



동인천역에서 걸어서 5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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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김진국/ 애관의 탄생, 영화의 시작          

2018년 01월 17일 00:05 수요일       

공교롭게도, 애관극장(이하 애관)과 영화는 같은 해 탄생한다. 1895년 인천엔 공연장 '협률사'가 들어섰다. 현 애관의 전신이다. 같은 해 프랑스에선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을 세상에 공개한다. 50초짜리 무성영화였다. 애관과 영화가 비로소 만난 때는 1920년대 중반이다. 1924년 애관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인천 최초의 '활동사진 전문관'으로 변신한다. 영화관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한 세기를 넘긴 지금까지 애관은 현재 '신과 함께', '1987'과 같은 최신 대작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다.  

영화는 물론 연극, 레슬링대회, 조봉암 선생의 건준위 인천지부 발족식에 이르기까지 애관은 인천문화의 랜드마크였다. 뤼미에르 형제의 사진기술 혁명은 영화란 장르를 21세기 세계문화의 중심축 반열에 올려 놓았다. 고색창연한 아우라(Aura)를 펑펑 내뿜는 애관과 몽환적 영상으로 가득한 최첨단 CG영화의 만남. 애관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123년을 관통하는 공간에서 과거-현재-미래를 자유롭게 오가는 꿈결 같은 영화를 관람한다는 데 있다.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 세계를 경험하는 셈이다. 

거대자본으로 무장한 멀티플렉스가 상영관을 장악한 시대. 애관이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극장주 탁경란 씨의 철학과 투자가 없었다면 문을 닫았어도, 벌써 닫았을 것이었다. 부친 탁상덕 씨에 이어 그가 애관을 인수하면서 인터뷰할 당시, 빈틈없는 미장셴으로 빛나는 스크린 같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런 그가 극장 매각을 결심했다면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공익기관이 아닌 일반 자본이 애관을 사들일 경우 철거나 변형이 우려된다는 사실이다. 인천기상청, 공보관, 애경비누공장과 같은 오랜 역사를 품은 건물들이 허망하게 철거되면서 받은 트라우마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다. 정작, 있는 것은 부수면서 대불호텔 복원, 존스톤별장 복원 등을 논하는 것을 보면 대체 어쩌자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지자체나 공익기관이 애관을 매입한다면 그 비용은 사라져 버린 옛 건물 복원 비용에 한참 못 미칠 게 분명하다.

어디에 있건 간에, 가족은 존재만으로 행복감을 안겨준다. 애관극장은 그런 가족 같은 존재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쁨과 안도감, 평온한 휴식을 주는 그런 존재 말이다.


‘애관극장 살리기’ 나선 인천시민들 2018-01-15 03:00수정 2018-01-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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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통 국내 최초 실내극장… 멀티플렉스에 밀려 매각설 돌자
시민모임 결성 “문화유산 지켜야” 市도 “공공시설로 보존 방안 검토”

매각설이 불거지고 있는 120년 전통의 국내 최초 실내극장인 인천 중구 애관극장의 현재 모습(왼쪽 사진). 6·25전쟁 때 소실돼 다시 지은 1960년대 애관극장 모습. 외관과 뼈대는 거의 그대로다. 김영국 채널A 스마트리포터 press82@donga.com·인천시 제공

영화 ‘1987’에서 대학생 박종철 고문에 가담한 형사의 아버지 역을 한 배우 이상희 씨(57)는 인천 중구 애관극장 단골이다. 아내와 함께 1주일에 한 번꼴로 애관극장을 찾아 영화를 본다. ‘남한산성’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그는 고향인 인천에서 극단 ‘사랑마을’을 운영한다. 이 씨는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점 영화관보다 학창시절 추억이 많이 묻어 있는 애관극장에서 꼭 영화를 감상한다. 스크린이 큰 1관보다는 소극장처럼 작고 아담한 2∼6관이 좋다”고 말했다. 이 씨는 120년 전통의 애관극장이 경영난에 처했다는 얘기에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인천참여예산센터 같은 시민단체 회원과 변호사, 예술인 등 100여 명은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애사모)’이란 단체를 만들어 애관극장 살리기에 나섰다. 국내 최초 실내극장을 이렇게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애사모는 14일 성명서를 통해 “인천의 소중한 건축 자산인 애관극장을 인천시가 매입해 공공문화 유산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애관극장 매각협상 사실을 처음 알린 향토사 연구자 A 씨는 “소유주가 애관극장 전통을 이어가려 노력했지만 지인에게 ‘극장을 팔아야겠다’고 토로했다”고 말했다. 애관극장 현황을 조사한 인천시 관계자는 “애관극장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건물을 담보로 상당한 금융부채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애관극장 관계자는 “경영난에 따른 매각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애관극장의 전신은 협률사(協律舍)로 1895년 인천 경동에서 문을 열었다. 서울 최초의 실내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1902년 문을 열었으니 이보다 7년이 빠르다. 서울 협률사는 황실과 국고 지원으로 지었지만 인천 협률사는 객주 출신의 ‘인천 부자’로 통했던 정치국(丁致國)이 세웠다. 

벽돌로 지은 인천 협률사는 개관 무렵에는 남사당패나 성주풀이 같은 전통 악극을 공연했다. 1910년 신파극을 선보이며 축항사(築港舍)로 이름을 바꿨다. 1921년에는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며 연극도 공연하면서 이름을 애관(愛館)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극작가 함세덕 진우촌과 연기자 정암 등 인천 문화계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자주 찾았다. 6·25전쟁 때 소실된 뒤 1960년 현재 모습으로 지어 애관극장으로 재개관했다.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인천 시네마거리가 형성됐다. 1980년대까지 주변에 미림 인영 현대 자유 키네마를 비롯해 극장이 20곳 가까이 생겼다. 200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 영화관 열풍이 불면서 모두 문을 닫았지만 애관극장만은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인천시 관계자는 “극장 소유주가 매각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은 만큼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서울 세실극장처럼 폐쇄되지 않고 영화사를 잘 간직하는 공공시설로 보존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인천 애관극장 매각설 '해프닝'…"근대 문화유산 보호 계기 돼야"

"지역경제 활성화, 문화유산 보존과 함께 해야"( 최태용 기자 | 2018-01-14 17:52 송고   

1950년대 애관극장 모습.(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제공)/뉴스1 © News1 DB

우리나라 최초 실내극장으로 알려진 인천의 '애관극장' 매각설이 돌면서 지역 시민·문화단체들의 보존 요구가 이어졌다.

극장 측 부인으로 매각설은 결국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지만 지역 근대문화 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인천시 관계자는 "애관극장 측으로부터 매각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다"며 "오히려 시민단체와 언론의 지나친 관심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고 14일 밝혔다.

애관극장은 1895년 청일전쟁 때 지어진 창고를 개조해 '협률사(協律舍)'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국내 첫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알려졌으며, 1912년 '축항사(築港舍)'에서 1926년 '애관(愛觀)'으로 이름을 바꿨다. 원래의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돼 현재의 극장은 1960년대 지금의 동인천역 부근에 지어졌다.

동인천 상권 부흥기에는 영업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2000년대 들어 거대 자본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밀려 폐관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04년 5개 상영관을 갖추고 재개관했지만 지역 상권이 오랫동안 침체돼 경영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 6시께. 주말 오후였지만 인천 중구 동인천동의 애관극장 골목은 오가는 사람 없이 한산했다. 인근 동물병원과 카페가 있는 상가 몇 군데만 불이 켜졌을 뿐 옷가게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상가는 문을 닫았다.

우현로 건너편의 신포시장과 문화의 거리는 중구에서 설치한 갖가지 조명들로 빛났다. 그러나 역시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곳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A씨는 "젊은 사람들이 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동인천은 인천에서 가장 잘 나가던 곳이었다. 당시엔 왜 그랬는지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철거 전 인천 중구 가톨릭회관.(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제공)/뉴스1 © News1 DB

인천 중구는 '답동성당 일원 관광자원화 사업'을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가톨릭회관을 철거하고 주차장을 만들고 있다. 1973년 지어진 가톨릭회관은 1970~80년대 군부 독재 시절 시국회의와 농성이 열린 지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앞서 중구는 지난해 5월에도 세제·비누 제조업체인 애경의 모기업이 공장으로 사용했던 115년 된 '애경사' 건물을 역시 주차장을 짓겠다며 철거했다.

아울러 1930년 일제 강점기 당시 지어진 송주옥(1930년)과 1939년 지어진 조일양조장, 1941년 지어진 동방극장도 모두 철거되고 표지석만 남았다.

인천시는 뒤늦게나마 역사적 지역의 역사적 건축물을 전수조사하고 문화재 지정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는 2016년 11월 했던 실태조사를 토대로 개항기인 188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지어진 건축물 233곳을 관리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 가운데 172곳(82%)이 개항장 주변인 중·동구에 밀집돼 있다.

대안예술공간 스페이스빔의 민운기 대표는 "이번 일은 지자체가 지역 문화유산의 가치를 자각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지역경제 활성화도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의 틀 안에서 진행할 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철거 전 인천 중구 애경사.(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제공)/뉴스1 © News1 DB



한국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

1892년에 설립된 사립학교 영화학당.


이화학당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던 마거릿 벤젤이 인천에 정착하여 여자 어린이 교육을 시작한 것이 영화학당의 시작이다. 벤젤은 인천 내리교회 제2대 담임 존스 목사와 결혼하여 존스 부인으로 불렸다.


1892


영화학당은 1892년 8월에 내리교회 안에 설립되어 교육에서 배제되어온 여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다.

초기에는 선교사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으로 학생 수가 거의 늘지 않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차 인천의 명문 학교로 발전하여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서울의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데 반하여 영화초등학교는 초등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학교를 졸업한 여자 어린이들은 선교사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화학당 제1세대로 한국 여성계의 선구자인 김활란, 서은숙, 김애마, 김영의가 모두 영화학당 출신이다. 그러나 영화초등학교에 이들의 학적부는 남아있지 않다. 그밖의 유명한 영화학당 졸업생으로는 일장기 말소 사건의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과 영화배우 황정순이 있다.



1910



1916


1928


1930



1936


1936




1948
http://db0353.blog.me/1008820561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yberali&logNo=80056043055&categoryNo=35&viewDate=¤tPage=1&listtype=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36347



출처: http://qlstnfp11.tistory.com/671 [qlstnfp]

우리나라에 맥주가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말입니다.

1876년 개항 이후 서울과 각 개항지에

일본인 거주자가

늘어나면서 일본맥주가 흘러 들어 왔는데

초기에 들어온 것이 `삿뽀로 맥주` 였고

그 후 1900년을 전후하여

`에비스 맥주` 와 `기린맥주` 가 들어왔다

당시 맥주를 소비하는 계층은

일부 부유층과 상류층에 한정되어

1905년 까지만 해도

연간 소비량은 1,570kl에 불과했으나,

1910년을 고비로 일본 맥주회사가

서울에 출장소를 내면서 소비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1920년대 에는

수입주류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격적인 맥주회사 설립은

1933년 일본의 대일본 맥주 주식회사가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한것이

시초이며, 뒤이어 같은해 역시 일본의

기린맥주 주식회사가

소화기린맥주 주식회사[동양맥주의 전신]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들 두회사는 해방과 함께 1945년

적산 관리 공장으로 지정되어 미국 군정에

관리되어 오다가 1951년에 이르러

민간에 팔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맥주[현 하이트맥주]와

동양맥주[현 오비맥주] 주식회사 입니다.



과거 국민소득이 높지 않을때에는

맥주는 일반 대중이 소비하기에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술이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전체주류중 탁주의 비중이 50% 이상이였고

이때 맥주는 겨우 6%선에 그쳤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와

국민소득의 증대로 인해서

주류에 대한 소비자의 성향이

점차 고급화 경향을 보이면서

1985년 5월 들어서는 맥주의 비중이

전체 주류의 45%를 기록하는 등

맥주소비는 대폭적인

증가세를 보이게 됩니다.



특히 1987년을 기점으로 출고량에서도

탁주를 제침으로써 맥주는

대중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맥주소비가 급격히 늘어난 요인은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여성음주 인구의 확대,

식품 산업 발달에 따른 소비자 생활양식 및

음주 패턴의 변화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상

한국맥주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맥주역사는 양파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맛이 대체 왜... 최선입니까? 갑자기 시작된 의문 때문에 오늘 마시즘은 우리나라 맥주의 시대별 변천사에 대해 알아본다. 그 옛날 조상님부터 아재들과 형제들은 맥주를 어떻게 즐겼을까?

1세대 맥주(1876~1970) : 맥주 식민 시대, 있으나 마시진 않았다
(국내 최초의 맥주공장, 사진출처 : 1937년 조선총독부 조선신궁 어진좌 10주년 기념책자)

#1876년 맥주 식민시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 초등교육을 마친 이라면 강화도 조약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한 가지 위안거리는 있는 법.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최초의 맥주가 한반도에 들어온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삿포로 맥주다. 그 후 기린, 에비스 등의 일본 맥주들이 국내에 맥주공장을 설립한다.

#광복 그런데 맥주 독립은? 광복 후에 맥주회사는 미군정에 의해 관리가 된다. 맥주의 맛은 미군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렇게 한국의 맥주는 라거 스타일로 바뀌게 된다. 어차피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이, 광복 초기에는 미군이 마실 맥주여서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1952년 민간에게 돌아가다. 맥주회사가 드디어 민간에게 돌아갔다. 조선맥주(하이트진로)와 동양맥주(OB맥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사람은 여전히 막걸리나 소주를 마셨다. 1974년까지만 하더라도 막걸리가 전체 주류의 74.2%를 차지했다. 그다음으로 찾는 것은 소주. 그다음은 아마 보리차? 

2세대 맥주(1975~1999) : 생맥의 시대, 모든 맥주 이름이 500cc로 불리다
(우리는 오랫동안 맥주의 이름을 500cc라고만 불러왔다)

#1975년 송창식과 생맥주. 맥주가 청년들의 술로 인정을 받을 때다. 이 시기의 청년문화는 바로 청생통(청바지, 생맥주, 통기타)으로 불린다. 송창식의 고래사냥 가사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청년들. 이럴 수가 엄마, 아빠도 YOLO족일 때가 있었잖아?

#1986년 최초의 호프집. 하지만 생맥주는 대중적인 술은 아니었다(전체 맥주시장의 7~8%정도). 생맥주 한 통을 판매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 김 빠진 맥주 취급을 받았었다. 이때 동양맥주의 이영길 씨는 독일에 방문해 '브로이'라는 생맥주집에서 해결책을 찾아 돌아온다. 그리고 11월 5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최초의 호프집 'OB호프'를 만든다. 그 뒤로 너나 나나 호프집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쓴다(홉은 맥주의 부재료다).

#1998년 IMF와 호프집. 1998년 IMF의 외환위기를 통해 많은 직장인이 거리로 내앉았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되었다. 많은 실직자가 호프집 사장님이 되었다. 골목골목에 호프집들이 생기고, 실직자의 동료직원들이 회식마다 호프집을 방문함으로써 '2차는 호프'라는 무언의 공식이 만들어진다.

#생맥주의 유산 '치맥'. 생맥주는 시원하고 탄산이 가득하지만 생맥주 자체의 맛만을 즐기기에는 부족하다. 때문에 많은 안주들이 테이블에 함께 자리했다. 그중에 인기는 단연 치킨이다. 치킨의 완성은 한국 맥주였고, 한국 맥주의 완성은 치킨이라고 할까. 위대한 마리아주의 탄생을 기리자.

3세대 맥주(1983~2010) : 폭탄주 투하, 맥주는 말아 마셔야 제맛이지!


#1983년 여의도 폭탄주 투하. '한국에서 폭탄주를 뺀 여의도 이야기는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이 있다. 맥주를 폭약으로 위스키를 뇌관으로 하는 폭탄주는 1970년대 미국의 노동자들이 즐겨마시던 술이다. 하지만 어쩐 일에 선지 한국에서는 검찰, 군대, 정치인들이 몰래 즐겨마셨다. 폭탄주가 역사에 드러난 것은 1983년 박희태(당시 춘천지검장)가 지역 기관장들과 폭탄주 회식을 하고 검찰에 이 문화를 전파시켰다고 한다.

#1986년 폭탄주와 사건사고. 폭탄주를 마시는 이들은 말한다. 이처럼 짧은 시간, 공평하게 취할 수 있는 민주적인 술이 어디있냐고. 어쨌거나 곱게 마시면 좋을 텐데 폭탄주는 사건사고를 불러일으켰다. 1986년 3월 31일 군장성들과 국회 국방위원들의 폭탄주 파티가 대표적이다. 고급 요정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난투극을 벌인 이 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최측근들이 좌천돼버린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도 폭탄주의 존재를 알게 된다.

#2005년 폭소클럽의 탄생. 폭탄주와 정치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1999년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과 관련한 국회 청문회에서 '왜 폭탄주를 마시냐?'라는 질문에 진형구 당시 대검 공안부장은 "양주가 너무 독해서"라는 명답변(?)을 남기기도 했다. 계속되는 오명에 17대 국회의원 30명은 박진의원(한나라당)을 필두로 폭소클럽(폭탄주 소통 클럽)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 명씩 낙오하여 박진의원만 남게 되었다는 슬픈비화가 있다. 그리고 18대 국회의원에서 새로운 이름의 클럽이 탄생한다. 조폭클럽(조용히 폭탄주를 마시는 모임)이라고.

#폭탄주의 유산 '소맥'.  윗물이 폭탄주면 아랫물도 폭탄주라고 할까? 계속되는 폭탄주 뉴스에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폭탄주를 만드는 시도가 있었다. 2000년 때마침 소주가 20도 이하로 순해지자 국민들은 발견하고 말았다. 맥주와 소주의 환상적인 조화를. 폭탄주는 비싼 양주 대신 소주로 변했고 우리의 소맥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4세대 맥주(2013~2017) : 수입맥주의 진격, 4캔에 만원이 가져온 혁신

#1981년 하이네켄 상륙. 1988년 서울올림픽은 정말 중요한 시기였나 보다. 해외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1981년 동양맥주는 하이네켄의 기술 및  상표권을 받아 하이네캔 맥주를 생산한다. 그 뒤로 1984년 맥주 수입이 자유화되어 각국의 수입맥주들이 한국의 문을 두드린다. 근데 비싸.

#2012년 이코노미스트.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의 한 기자는 "한국의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라는 도발적인 기사를 쓰게 된다. 많은 한국인들은 충격을 받는다. 맛이 없는 것은 알았지만, 북한보다 맛이 없다고? 이는 곧 국내 맥주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고 수입맥주를 찾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2013년 4캔에 만원. 발맞추어 나온 것이 바로 마트와 편의점의 '수입맥주 4캔에 만원' 행사다. 잠깐의 이벤트로 하려고 했던 이 행사는 반응이 너무 좋아 현재도 상시 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2013년 당시 맥주 판매 비중의 26.4%였던 수입맥주는 지난해 하반기 68.4%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한평생 라거만 알던 한국인은 IPA나 에일 등의 새로운 스타일의 맥주를 알게 되었다. 

#수입맥주의 반격이 낳은 유산 '혼맥과 편맥'. 그전까지의 맥주가 취하기 위해 마셨다면, 최근에는 즐기기 위해 마시는 맥주로 변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고르는 재미에 맥주의 무대가 술집이 아닌 편의점과 내 방으로 바뀌었다. 또한 여럿이서 많이 마시는 함술러에서, 혼자 다양하게 즐기는 혼술러로 맥주의 주체가 변하고 있다.

5세대 맥주(2014~) : 수제맥주, 대동여맥주의 시대를 열까?
(문재인 대통령의 건배주로 선정된 세븐브로이의 강서맥주, 사진출처 : 청와대 기자단)

#2014년 주세법 개정. 소규모 양조장에서 직접 만드는 수제맥주(Craft Beer)는 미국 전체 맥주시장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해외에서는 대중적인 문화다. 하지만 '하이트냐 카스냐'의 이분법이 지배하던 한국 맥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2014년 주세법이 개정되며 중소 양조장을 옭아매었던 규제가 풀리게 된다.

#2016년 마트에 수제맥주 입점. 주세법 개정으로 많은 수제맥주가 생기게 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을 하나 꼽자면 단연 '세븐브로이'다. 그동안 맥주를 만들어 온 중소기업 맥주였지만,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이태원에 펍을 내고 입소문을 타며 수제맥주들의 갈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2016년 대형 마트와 편의점에서 대기업의 맥주들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게 된다.

#2017년 청와대 맥주. 수입맥주 시장이 연평균 30%의 성장률이 보이고 있다면, 국내 수제맥주는 연 성장률 100%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호프미팅'의 건배주로 세븐브로이의 '강서맥주'가 선정된다. 강서맥주는 강서지역의 특징으로 만든 지역수제맥주로 현재 전국의 소규모 양조장에는 그 지역의 이름을 넣은 수제맥주들이 생산되고 있다.

#수제맥주는 새로운 문화를 이룰 수 있을까? 맥주를 만드는 재료는 간단하다. 하지만 새로운 맥주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일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농업기술과 양조기술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음주문화라는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100년 남짓한 우리의 맥주는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관심을 갖고 맥주를 한 잔 하는 것이 아닐까?


  

작성일 2017.12.11 (월) 16:37
             

인천, 노래, 그리고 음악인 – 배다리와 동인천(전편)

 

인천광역시를 대표하는 명소들을 떠올리며 해당 장소의 간략한 역사와 그 곳을 소재로 탄생했던 여러 대중가요들, 그리고 관련된 인천 출신, 혹은 인천을 근거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의 알려진, 또는 숨은 이야기들을 함께 엮어본다. 

 

인천사람들에게 ‘배다리’는 동구 금창동과 송현동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 표현 그대로 19세기 말까지는 이 지역에는 마을 어귀까지 작은 배가 바닷물이 들어오던 수로를 통해 철교 밑까지 드나들 수 있었기에, ‘배가 닿는 다리’라는 뜻을 지닌 ‘배다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 역시 인천의 개항과 관련이 있다. 1883년 개항이 되면서 개항장 지역이 개발되면서 일본인들과 외국인들이 주로 살게 된 후, 당시 이쪽에 살던 조선인들은 그보다 좀 더 북쪽에 위치한 배다리로 모여들게 됐다. 

 

배가 닿던 곳…‘헌책방’ 거리로 유명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에 이 곳 역시 인천의 근대 100년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소와 건물들이 많다. 가장 먼저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 철도의 기공식이 우각리(현재 도원역 부근)에서 이뤄졌다. 원래 경인 철도는 우각리를 거쳐 독각다리(숭의로타리 서쪽 부근)를 경유하여 사동(인천여상 남쪽)에 종착하려던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지금 경인 전철이 다니는 경로로 노선이 정해졌다. 또한 이 지역에는 1907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3.1운동 당시에는 인천지역의 만세 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 바로 옆에는 1910년 기공되어 1912년 인가를 받은 서구식 사립학교인 ‘영화학교’(현 영화 초등학교 본관동)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한국과 인천 근대 교육 보급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한 단면이다. 그 외에도 미국 감리교 기독교 선교사들이 1897년부터 이곳을 근거로 선교 기지를 세운 것을 보면 인천과 한국 개신교 전파를 위한 주요 근거지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곳에 세운 남녀 선교사 기숙사 건물들 가운데 현재는 여자 기숙사 건물(한국 전쟁 이후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됨, 현 창영사회복지관)만이 보존된 상태다.

해방 이후부터 배다리는 인천 시민들과 타지 사람들에게 소위 ‘헌책방 거리’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인천을 떠나며 자신들이 소장했던 책들을 매각하자, 그 책들이 배다리 시장으로 흘러들어왔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월남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헌책을 내다 팔면서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1-11970년대에는 서울(청계천), 부산(보수동)에 이어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손꼽혔던 이 곳은 지금은 과거의 명성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 규모는 줄었지만, 여전히 아벨 서점 등 몇 곳의 서점이 그 맥을 지켜나가고 있다. 특히 1955년 개점하여 2대에 걸쳐 가업으로 이어가고 있는 ‘한미서점’은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하면서 인천 외 지역 사람들에게도 이젠 많이 알려졌다. (그 외에도 배다리 주변 공간들이 드라마에 비춰지면서 인천을 알리는 데는 꽤 도움이 되고 있다.)

근대사의 모든 굴곡을 거쳐 온 배다리는 시대의 변화 속에 더 이상 인천 상권의 중심지는 아닌 곳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인천의 고유한 문화의 향기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더욱 그 전통을 어떻게 아름답게 계승할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금도 이 곳의 생명력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와 21세기, 두 곡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타 지역 사람들, 특히 현재의 5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 물을 때 희한하게도 언급되는 노래가 한 곡 있다. 바로 그 분들이 군대 복무 시절 훈련을 받으면서 익히게 되었다던 그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다. 사실 이 노래는 조금은 외설적(이자 성차별적) 가사로 인해 심의 제도가 살아있던 2000년대 이전에는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음반화가 된 적은 없었던 곡이나, 그래도 코미디언 남보원이 원맨쇼 무대 등에서 성대모사들을 추가해 코미디 송으로 불렀던 버전이 어르신들의 기억에는 꽤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구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퍼지다보니 가사도, 멜로디(가장 많이 알려진 멜로디는 일본 해군가 <ラバウル小唄>(라바울 속요)의 일정 부분이 차용된 버전이다)도 변화된 버전이 다양하나 대체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가사는 이러하다. 

 

“인천의 성냥공장/성냥공장 아가씨/하루에도 한 갑 두 갑/일 년에 열두 갑/치마 밑에 감추고서/정문을 나설 때/치마 밑에 불이 붙어/아 아/성냥공장 아가씨는 백 갈매기”

 

위에서 언급했듯 남성들에 의해 구전되어 온 노래이기에 분명 외설적/성차별적 요소가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는 잠시 논외로 하고 이런 노래가 왜 인천, 특히 배다리 지역을 배경으로 생겨났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바로 1917년 일본인들이 (현재 우리의 기억에서는) 피카다리 극장(그 이전엔 문화극장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가 있던 곳으로 기억하는 자리에 조선인촌 주식회사를 설립해 ‘조선성냥’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 공장은 당시엔 거의 한국에 보급되는 성냥의 70%를 생산할 만큼 독점적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세워진 한국의 성냥공장들도 많은 곳들이 배다리 근처 동구 지역에 설립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성냥이 매우 귀한 물건이라 성냥 한 통이 쌀 한 되와 맞먹는 가격이었고, 공장에서 적은 임금으로 노동해야 했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충분히 이 노래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족을 위해 성냥을 숨겨 나올 수 있었을 것이란 추론은 가능할 것 같다. 표현의 문제를 넘어 현대사의 애환의 나름 투영된 노래인 셈이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대에 인천의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일제의 강압적 수탈에 맞서 이 곳 최초의 노동쟁의로써 동맹 파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후 1921년 10월 21일 인천 정미소 여성노동자의 동맹파업과 1926년 11월 9일의 인천 부두노동자의 동맹파업으로 이어진 이 파업은 한국의 여성 노동운동의 효시로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한편, 21세기로 넘어와 지난 2011년, 인천 토박이 가수이자 경인방송 iFM의 DJ이기도 한 백영규는 이 곡에서 모티프를 따와서 새로운 창작곡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를 발표했다. 물론 원곡의 가사와는 전혀 달리 청춘의 추억을 되새기는 가사를 담은 곡이다. 그래도 편곡의 일부분에서 20세기 곡의 멜로디가 차용되고 있긴 하다. 
 


 

2017년, 배다리 추억 되돌아보는 또 하나의 노래, 김광진의 <배다리>

가장 최근에 배다리에 대해 노래한 곡이 하나 있다. 1990년대에는 거의 국민가요급 인기를 얻었던 노래 <마법의 성>을 발표한 듀오 더 클래식(The Classic)의 보컬이자 솔로 싱어송라이터도 활동하는 김광진이 올해 4월 발표한 디지털 싱글 <배다리>다. 그 역시 인천, 특히 이 배다리 마을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보냈고, 그래서 이 곳은 마음의 고향과 같았음을 그는 역시 송림동 출신인 그의 아내 허승경씨와 함께 이 노래의 가사에 잘 담아놓았다. 

 


 

“태어나 자란 동네 배가 들어왔던 다리래/배도 다리도 이제는 없지 예쁜 이름만 거리에 남아

헌책방 많던 동네 교복 입은 친구들 모여/깔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낙서 없는 교과서를 찾지

세월 지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나네/음 음 떠나네

 

기차가 지나던 곳 제일 큰 사거리 너머에/매일 기다리던 나를 찾아 단발머리 소녀가 달리네

오늘도 보물찾기 헌책방 구석에 숨겨진/형들 누나들의 비밀얘기 어깨가 으쓱한 낡은 책들

먼지 속에 겨우 찾아 냈던/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낡고 또 해어진

 

변한 게 없는 거리 추억도 그대로지/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해

세월은 변해가도 내 모습이 변해도/수줍은 내 어린 날 미소를/마주칠 것만 같은 거리”

(김광진 <배다리> 가사)

 

※ <배다리>의 주인공 김광진과 그가 이 노래를 만든 계기가 된 또 한 명의 선배 가수의 이야기, 동인천의 1990년대 이야기는 후편에서 이어집니다.

 

 

글 김성환 음악 저널리스트


입력 2017.12.01. 10:56 수정 2017.12.01. 11:06 

서른살 스페인 청년 다니엘 꼬르네호
한국어 배우며 그린 '촌철살인' 한 컷으로 호응
3월엔 책 '번개' 펴내기도
"비윤리적인 문제에 반대할 의무있다고 생각..그림으로 표현"

[한겨레]

다니엘 꼬르네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에 올리는 ‘한컷’ 그림들. 본인 제공

그림 한 컷에 ‘아!’ 하고 이마를 탁 친다.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정치인들, 직원의 열정을 착취하는 기업가들,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성들, 태어날 때부터 격차가 벌어진 불평등한 사회…. 그림은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쉽게 질문하지 못하는 일에 묵직한 ‘직구’를 던지고, 무심코 지나쳐왔던 문제를 다시금 환기하게 한다. 한 컷, 한 컷 넘기다 보면 시원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무한경쟁, 소비지상주의, 성차별 등이 만연한 사회의 폐부를 꿰뚫는 글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이 더해졌지만, 이 그림의 작가는 1987년생 스페인 청년 다니엘 꼬르네호다. 한글을 독학하다가 한국에 와서 ‘한국문학 번역’ 과정까지 배웠다. 16만 8000여명에 이르는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대부분 한국인이다.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분석하며 영감을 받는다”는 그는 한글로 팔로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의 한 컷이 올라올 때마다 “볼 때마다 머리가 띵하고 곱씹어보게 된다”(@shw******), “통찰력이 뛰어나신 것 같다. 항상 감탄한다”(@grr****), “한 장면으로 모든 게 설명된다”(@eeu***), “진짜 소름돋는 문장이다”(@hap********)와 같은 반응이 뒤따른다.

그림이 호응을 얻으면서 지난 3월에는 그림을 모아 책 <번개-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롭고 번뜩이는 이야기>(도서출판 쿵)를 펴냈다. <한겨레>는 30일 다니엘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그는 현재 스페인에 살면서 그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번개’ 작가 다니엘 꼬르네호. 본인 제공

- 소개를 부탁해요

“‘다니엘’이라고 하는 스페인 작가예요. 그런데 사실은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몇달 전에 한국에서 <번개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롭고 번뜩이는 이야기>라는 일러스트레이션 책을 출판했지만, 요즘은 백수고 취미로 그림을 그려요. 앞으로 제 그림을 신문이나 잡지에 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국문학번역원’이라는 데에서 2년 동안 공부했지만 아직 제가 번역한 작품이 출판된 적은 없어요.”

- 한국은 왜 오게 된 건가요?

“한국인 친구 때문에 한국말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한국말을 공부하러 한국에 갔어요.”

(다니엘은 서강대어학당에서 한국어를,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한국문학 번역을 공부했다.)

다니엘이 그림을 모아 펴낸 첫 책. 도서출판 쿵 제공

- 그림을 보면 한국 사회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요.

“글쎄요. 제 그림을 보고 제가 한국 사회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렇게 잘 알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일반화하지도 못할 것 같고요. 제 그림은 한국 사회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 있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그림이에요. 스페인 사람이든, 한국이나 미국 사람이든 제 그림을 보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부러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렇게 그리는 거에요”

- 어떤 계기로 그림을 그리게 됐나요?

“어렸을 때부터 그렸어요. 그냥 좋아해서 그리는 거예요. 사회를 풍자하는 그림은 사회를 분석하다가 비윤리적인 문제를 발견했을 때 (그 문제를) 반대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는 것 같아서 그리게 됐어요. 페미니즘 그림처럼요. 요즘은 이런 그림을 그리는 일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어요.”

- 페미니즘 관련 그림을 여러 장 그리며 호응을 얻고 있어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가요?

“사회를 들여다보면 여성이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한 피해를) 당하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저는 그림을 통해 (이런 문제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로 했어요. 인구의 절반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한국과 스페인은 어떻게 다른가요?

“물론 문화적으로는 당연히 차이가 있어요. 하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한국과 스페인의 차이가 크지 않아요. 두 나라 다 같은 경제 제도(자본주의)가 있다 보니 사람들이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게 되죠. 가부장제, 소비지상주의, 외모, 끊임없는 경쟁 등이 (두 나라에서 모두)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 어디서 영감을 받나요?

“그냥 생활 속에서요? (웃음) 뉴스나 책을 보면서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도 있고요.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 같아요.”

- 한글을 사용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는 한국말을 연습하고 싶어서 썼어요. 그런데 한국분들한테 인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했어요. 한국에선 아무래도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외국인들이 인기가 좀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신선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요.”

다니엘은 더 많은 한국 독자들과 함께 그림을 공유하고 싶다는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그의 작품 일부를 소개한다.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다니엘 꼬르네호 인스타그램(@blameblameblameblame)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 이탈리아 베니스©André Vicente Gonçalves

포르투갈 출신의 포토그래퍼 안드레 빈센트(André Vicente Gonçalves)는 원래 컴퓨터 공학도였지만, 이탈리아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를 하던 중 컴퓨터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사진학과로 전과하여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해 현재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찍은 다양한 시리즈의 사진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가 전 세계를 여행하며 찍은 수천 장의 사진들을 조합해 만든 <세계의 창문 :Windows of the world>은 CNN에 소개될 만큼 큰 화제가 되고 있다.


  
▲ 포르투갈 몬토오르오노보©André Vicente Gonçalves

안드레의 <세계의 창문 :Windows of the world>의 시작은 창문에 대해 그의 호기심이었다.

  
▲ 런던 노팅힐©André Vicente Gonçalves

" 나는 어릴 적부터 창문을 좋아했다. 창문은 투명한 유리를 통해 건물 안에서 건물 밖 세상을 연결해 주는 통로이자 건물 밖의 세상으로부터 건물 안 우리를 보호해 준다. 또한 창문은 그 자체로 건물의 아름다움을 결정짓게 하기에 나는 다양한 창문의 모습을 기록하고 그것을 감상하던 중 본격적으로 <세계의 창문 :Windows of the world> 시리즈를 계획하였다.

  
▲ 포르투갈 에보라©André Vicente Gonçalves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가 다녔던 도시와 지역들에서 찍은 수천 장의 창문 사진들을 각 도시와 지역 별로 나누고 그중에서 다시 각 도시와 지역의 특색을 보여주는 창문들을 분류하는 이를 다시 조합함으로써 나는 창문을 통해 각각 도시와 지역이 가진 역사성과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 스페인 바로셀로나©André Vicente Gonçalves

나는 <세계의 창문 :Windows of the world> 시리즈를 통해 도시가 가진 각각의 특색을 미학적으로 바라보며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길 바란다. " _안드레 빈센트(André Vicente Gonçalves)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리스본©André Vicente Gonçalves
  
▲ 스페인 산타수산나©André Vicente Gonçalves
  
▲ 스위스 알프스©André Vicente Gonçalves
  
▲ 이탈리아 트렌토©André Vicente Gonçalves
  
▲ 이탈리아 브라노©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기마랑이스©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세심브라©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신트라©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알부페이라©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파로©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에리세이라©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오비도스©André Vicente Gonçalves

 

  
▲ 런던©André Vicente Gonçalves
  
▲ 포르투갈 포르토©André Vicente Gonçalves

출처 :www.andrevicentegoncalves.com

숲노래        2017. 11. 16. 12:22

   

2017년 올해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겹말풀이와 돌림풀이 다듬기>, <읽는 우리말 사전 2-군더더기 한자말 떼어내기> 이렇게 네 가지 사전-우리말 이야기책을 써냈습니다. 다음 2017년 12월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라는 살림노래(육아일기)를 내놓습니다. 이렇게 다섯 권에 이르는 새책을 쓰는 동안 시골집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를 나누려고 10갈래에 이르는 강의마실을 다니려고 합니다.


첫 갈래는 고흥에서 열고 싶으나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어요. 11월 30일이라는 날짜, 또는 11월 29일이 좋다고 여기는 마을책방이나 마을도서관에서 불러 주시면 고흥 이야기꽃은 그만두고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


그리고 2018년 1월 7일 뒤로도 이 이야기꽃을 듣고 싶은 마을책방이나 마을도서관에서는 얼마든지 자리를 마련해 주셔도 좋아요. 이제 거의 10갈래 이야기꽃 틀을 다 짰고, 날짜와 자리를 잡았기에, 알림글을 띄웁니다. 열 갈래 이야기꽃을 찾아서 이곳저곳 즐거운 마실을 다니셔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10갈래 이야기마실을 다니고서 2018년 1월부터 고흥 책숲집에서 조용히 "새 국어사전 쓰는 일"에 힘을 쏟으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 (숲노래 적음)


+ + +



“사전과 말” 이야기꽃

― 한국말사전 새로짓는 책숲집 지음이


* 이야기 갈래로 살피기 *

1. 사전은 어떤 책인가 (2017.12.13. 16시, 전북 전주 유월의서점)

2. 사전에 담는 말, 사전이 짓는 말 (2017.12.5. 18시, 전남 광주 무등공부방)

3. 사전을 어떻게 읽는가 (2017.11.28. 19시, 인천 배다리 요일가게)

4. 사전을 왜 읽는가 (2017.12.3. 15시30분, 충북 청주 앨리스의 별별책방)

5. 사전을 누가 지어 누가 읽는가 (2017.12.21. 19시30분, 서울 대륙서점)

6. 비슷한말, 다른말 (2017.12.12. 19시, 서울 메종인디아 트래블앤북스)

7. 겹말, 바른말, 고운말, 막말 (2017.12.22. 19시, 전남 순천 책방심다)

8. 삶말, 살림말, 사람말, 숲말, 사랑말 (2018.1.6. 19시, 대구 읽다익다 책방)

9. 시골말, 고장말, 텃말 (2017.11.24. 19시30분, 경남 진주 진주문고)

10. 아직 사전이 없는 나라 (2017.12.4. 11시, 경기 광주 서재도서관 책읽는 베짱이)


* 날짜로 살피기 *

2017.11.24. 경남/진주-진주문고 19:30

2017.11.28. 인천-배다리 요일가게 19:00

2017.11.30. 전남/고흥-……

2017.12.3. 충북/청주-앨리스의별별책방 15:30

2017.12.4. 경기/광주-책읽는 베짱이 11:00

2017.12.5. 전남/광주-무등공부방 18:00

2017.12.12. 서울-메종인디아 트래블앤북스 19:00

2017.12.13. 전북/전주-유월의서점 16:00

2017.12.21. 서울-대륙서점 19:30

2017.12.22. 전남/순천-책방심다 19:00

2018.1.6. 대구-읽다익다 책방 19:00



  한국말사전을 새로짓는 일을 책숲집(숲도서관)에서 합니다. 이 일은 책숲집 지음이 한 사람이 도맡아서 하지만, 앞에서 이끄는 몫을 한 사람이 도맡을 뿐, 숱한 이웃 지음님이 있기에, 이러한 힘을 받아서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전과 말―한국말사전 새로짓는 책숲집 지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꽃을 펼치려 합니다. 모두 열 갈래로 나누어서 이야기꽃을 펼칩니다. 어느 이야기꽃을 먼저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책숲집 지음이인 저 숲노래(최종규)는 전국 열 군데 마을책방이나 마을도서관에서 이 이야기꽃을 펼치려고 생각합니다. 먼저 열 가지 이야기를 열 군데에서 들려주고 나면, 이 이야기꽃은 책 한 권으로 여밀 생각입니다. 앞으로 누구나 사전짓기를 슬기롭게 할 수 있도록 밑틀을 다지고 알려주는 이야기꽃이에요. 열 가지 이야기는 전국 열 군데 마을책방이나 마을도서관에서 한 번씩 할 텐데요, 다른 이야기도 궁금하신 분은 열 가지 이야기꽃 나들이를 마친 뒤에 마음껏 마음에 드는 이야기 갈래를 골라서 다시 자리를 마련하자고 하실 수 있습니다. 열 갈래 이야기꽃을 밝히는 이름하고, 이 갈래에 맞춘 줄거리를 짤막하게 덧붙입니다.



1. 사전은 어떤 책인가 (2017.12.13. 16시, 전북 전주 유월의서점)

 - 책 가운데 책, 으뜸책, 밑책, 디딤돌책, 숨은 책, 수수께끼 책, 늘 새로운 책, 쉬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책, 끝이 없는 책, 어제하고 오늘하고 모레가 이어지는 책, 옛것에서 배워 새것을 낳는 책, 가장 쉬우며 어려운 책, 가장 넓으며 깊은 책, 모든 것을 다 알지만 모든 것을 죄다 모르는 책, 가장 느리면서 빠른 책, 온 나라를 잇는 책, 너랑 내가 하나되는 책, 하늘이 내리고 땅이 베푼 책


2. 사전에 담는 말, 사전이 짓는 말 (2017.12.5. 18시, 전남 광주 무등공부방)

 - 온누리 모든 말을 담는다, 흔히 써도 안 담는다, 사라지기에 담는다, 사라지지 않도록 담는다, 새로 태어나도록 담는다, 새로 태어났기에 담는다, 살림살이를 담는다, 밥·옷·집을 담는다, 들·숲·내를 담는다, 이웃을 담는다, 뭇목숨을 담는다, 마음·생각·느낌을 담는다, 이야기를 담는다, 꿈을 짓는 사랑을 담는다, 앞날을 담는다, 아이들을 담는다, 어른들을 담는다, 슬기로운 짓을 담는다


3. 사전을 어떻게 읽는가 (2017.11.28. 19시, 인천 배다리 요일가게)

 - 소리내어 읽기,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골라서 읽기, 여러 사전이나 여러 낱말을 겹쳐서 읽기, 늘 읽기, 아침저녁으로 읽기, 아이하고 읽기, 할머니하고 읽기, 동무하고 읽기, 손으로 종이에 적어 보며 읽기, 책을 읽으며 만나는 낱말을 몽땅 찾아서 읽기, 내가 쓰는 글에 나오는 낱말을 모조리 챙겨서 읽기, 옛말 읽기, 더없이 오래도록 살아서 숨쉬는 말을 읽기, ‘내 말 사전’을 지어서 읽기


4. 사전을 왜 읽는가 (2017.12.3. 15시30분, 충북 청주 앨리스의 별별책방)

 - 말을 배우려고, 말로 나타낸 삶을 읽으려고, 말로 담아낸 마음·생각·꿈을 읽으려고, 뜻을 제대로 짚으려고, 내 마음을 제대로 나타낼 만한 말을 모르기에 처음부터 새로 익히려고, 어버이가 아이한테 베푸는 사랑을 알려고,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사랑을 베푸는 길을 알려고, 가르치면서 배우려고 또 배우면서 가르치려고, 너랑 나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알려고, 온누리를 넘나드는 기쁨을 보려고, 모든 사람이 고르게 사랑인 줄 느끼려고, 뭇목숨하고 숲에서 태어난 삶을 알려고


5. 사전을 누가 지어 누가 읽는가 (2017.12.21. 19시30분, 서울 대륙서점)

 - 손수 삶을 짓는 사람이 짓네, 스스로 살림을 가꾸는 사람이 짓네, 몸소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짓네,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 짓네, 살림을 꿈꾸는 사람이 짓네, 어깨동무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이 짓네, 아이들이 짓고 어른들이 짓네, 슬기롭게 일하는 사람이 짓네, 기쁘게 배워서 고맙게 나누려는 사람이 짓네, 흙·물·바람·해·숲을 아는 사람이 짓네, 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짓네, 하느님 마음이 되면서 짓네


6. 비슷한말, 다른말 (2017.12.12. 19시, 서울 메종인디아 트래블앤북스)

 - 비슷한말은 다른 낱말이다, 다른말은 다르지 않은 낱말이다, 비슷한말 꾸러미를 짚지 않으니 말을 모른다, 다른말을 찬찬히 살피기에 온누리를 읽는다, 비슷한말을 지은 사람들 마음이란, 다른말로 나눈 사람들 뜻이란, 이쪽하고 저쪽을 보다, 이곳하고 저곳 사이를 잇다, 삶마다 다르면서 같은 결을 살리면서 지구라는 별에 깃든 뭇사람을 보다, 새롭게 이야기를 짓는 재미랑 기쁨을 깨닫다, 작은 곳을 나누되 큰 곳을 아우르는 보금자리를 이루다


7. 겹말, 바른말, 고운말, 막말 (2017.12.22. 19시, 전남 순천 책방심다)

 - 물질문명·자본주의·군사독재·일제강점기·봉건계급제 조선·끝없는 싸움이라는 발자국, 싸움이 일어나기 앞서 옛 한겨레, 말인가 한국말인가 한자말인가, 일본 한자말로 지식을 배워 무리를 이룬 지식권력, 시골사람이 손수 짓는 삶에서 길어올린 말이 새마을운동 물결로 무너지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고운 마음,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지거나 갚다, 말이 씨가 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8. 삶말, 살림말, 사람말, 숲말, 사랑말 (2018.1.6. 19시, 대구 읽다익다 책방)

 - 삶에서 짓기에 말, 살림하며 가꾸기에 말, 사람이 세우는 말, 숲에서 태어난 말, 사랑으로 손을 잡는 말, 삶이 없으면 말이 아니네, 살림을 모르면 말을 모르네, 사람다운 마음이라서 말을 짓네, 서울이든 시골이든 숲이 아니면 말이 없네, 오직 맑은 사랑일 적에 말이 나오네, 삶이 바로 말, 살림이 언제나 말, 사람이 고스란히 말, 숲이 통째로 말, 사랑으로 가득한 말


9. 시골말, 고장말, 텃말 (2017.11.23. 19시30분, 경남 진주 진주문고)

 - 삶을 손수 짓는 사람이 숲에 보금자리를 이루는 터전인 시골에서 말이 처음 나오다, 시골은 농촌이 아닌 살림꾼이 옷·밥·집을 짓는 자리, 서울은 시골 아닌 모든 도시를 가리키는 자리, 나고 자란 고장을 사랑하기에 태어난 말, 나고 자란 고장은 모두 다르기에 모두 다른 말, 손수 삶을 지어서 아이를 낳아 돌볼 만한 아름다운 터에서 지었기에 텃말, 텃사람이 텃집을 짓고 텃마을을 이루어 텃들을 일구니 텃마음이 모여 텃말이 자란다, 표준말이 무서운 까닭, 표준말을 세우는 나라가 숨기는 뜻, 교과서는 표준말을 버려야 한다, 고장말·손말·점글을 가르쳐야지


10. 아직 사전이 없는 나라 (2017.12.4. 11시, 경기 광주 서재도서관 책읽는 베짱이)

 - 한국은 아직 한국말사전이 없는 나라이다, 한국사람이 쓰는 말은 ‘국어’가 아니다, 왜 ‘국어사전’이라고 하는가, 한겨레한테 한글이듯이 한말, 한말책, 사전 한 권을 똑바로 짓자면 즈믄 해, 사전은 한 사람이 엮는다, 사전은 모든 사람이 함께 짓는다, 한국 정치·사회·문화·교육은 참다운 사전짓기에 힘을 안 보탠다, 모든 사람이 손수 사전을 짓고 읽고 나눌 적에 나아가는 길이란, 왜 사전을 짓고 읽으며 나누는가, 아름누리 아름책 아름님



* 숲노래(최종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 : 사진책도서관+한국말사전 배움터+숲놀이터〉를 꾸립니다. 1994년부터 한국말을 살찌우는 길을 스스로 찾아서 배웠고, 2001∼2003년에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과 자료조사부장으로 일을 했어요. 2003∼2007년에 이오덕 어른 유고·일기를 갈무리했습니다. 이 같은 일을 하며 온갖 사전과 책을 읽은 바탕으로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을 썼고, 어린이하고 푸름이하고 어른 모두 한국말을 슬기롭게 살려서 쓰는 길을 곱게 밝히려고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1-돌림풀이와 겹말풀이 다듬기》, 《말 잘하고 글 잘 쓰게 돕는, 읽는 우리말 사전 2-군더더기 한자말 떼어내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사자성어 한국말로 번역하기》,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뿌리깊은 글쓰기》, 《사랑하는 글쓰기》, 《생각하는 글쓰기》 같은 책을 썼어요. 청소년이 나아갈 길을 함께 찾으려고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책 홀림길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같은 책을 썼습니다. 책·삶·마을을 돌아보면서 《책빛숲, 아벨서점과 배다리 헌책방거리》, 《책빛마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헌책방에서 보낸 1년》, 《모든 책은 헌책이다》 같은 책을 썼고, 1인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을 열 권 썼습니다. 사진 이야기 《사진책과 함께 살기》를 썼고, 인천 골목마을 이야기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을 썼으며, 고흥에서 아이들이랑 지내는 삶을 담은 이야기 《시골 자전거 삶노래》를 썼습니다.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은 2016년에 ‘서울 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책’으로 뽑혔습니다. 공공기관 공문서 글차림·누리집·말씨를 쉽게 손질해 주는 일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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