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친숙한 동네로 꼽히는 배다리마을! 

이곳은 지금도 1970~80년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헌책방거리는 인천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분위기를 줄 수 있는데요. 





구석구석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옛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기와지붕들이 보이면서 분위기를 한층 더 살릴 수 있습니다. :)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알록달록 예쁜 색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하죠! 





여기저기 다양한 벽화와 그림들 보이시나요?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곳곳에 있어 올라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앗! 입구를 지키고 있는 양철 로봇은 무엇일까요?





무시무시한 비주얼의 이 로봇은 옛 인천양조장 건물에 위치한 ‘space 빔’의 마스코트인데요!


space 빔은 ‘지역 미술 연구모임’으로 시작하여 2007년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위해 배다리에 왔다가 동네가 산업도로 공사로 철거된다는 소식에 배다리에 터를 잡았습니다. 





space 빔의 실내로 들어가 보니 먼저 1층은 전시공간으로 여러 볼거리들이 있는데요. 

무서운 겉모습과는 달리 꽤 정리된 모습도 있어 많은 분들이 작업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보니 1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는데요.

이곳은 사무실을 겸한 카페인 ‘쉼터 고두밥’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사책에서나 보일 법한 난로가 가장 눈에 띄는데요.

겨울에는 이 난로가 찾아오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해준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포근함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밑에 사진을 보면 가지런히 놓여있는 공구, 신문지와 뒤에 놓인 자전거까지 어떤 작품들이 탄생할지 기대 되는데요!





이곳에서 탄생되는 예술 작품들은 매달 다양한 행사를 통해 공개되어 문화예술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space 빔 전시실은 작가 활동 지원 전문 공간으로 전시 및 세미나, 모임 등을 원하는 사람들은 사이트에서 신청하여 방문해 보세요~ :D 단, 스페이스 빔 자체 일정 외에만 이용 가능하니 이 점 유의해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배다리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 번쯤은 들른다는 그 곳!

바로 ‘헌책방 거리’가 보입니다. 이곳에는 다양한 책방들이 가득한데요. 





그 중 배다리헌책방골목의 터줏대감이라고 불리는 아벨서점에는 꼭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분들이라면, 새 책은 대한서림이요. 헌 책은 아벨서점이라는 공식이 있을 정도니까요!





거리의 책방에는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모여 있어 현재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책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요즘은 크고 정리가 잘 된 서점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구매할 수 있는 새 책은 잉크냄새 또는 종이 냄새가 많이 나죠.


하지만 헌책방에서는 사람의 채취를 포함한 다양한 추억의 냄새가 납니다.




사진 속 작은 아이도 언젠가는 헌책방에서의 추억을 기억하는 날이 오겠죠?





오늘은 도심 속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양한 공간들을 함께 돌아봤는데요. 


디지털 기기들의 발전 속 최근 아날로그 감성을 추억하는 디지로그가 등장했는데요. 잠시 잊고 있던 옛 정취와 아날로그 분위기를 추억하고 싶은 분들 모두 배다리헌책방거리로 놀러 오세요~



출처: http://yourincheon.tistory.com/1238 [인천관광공사 블로그]

2010.09.19 19:43

9월 15일 공간환경학회, 환경정의 토지정의센터 분들과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우각리)을 방문했다.
배다리마을은 2007년 마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건설이 추진되다 주민들의 저항으로 유보되었고, 
지금은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으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이 마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 배다리마을에는 '공존을 위한 공공문화 표현집단'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퍼포먼스 반지하]라는 단체가 있다.
일명 '반지하'라 불린다.

'반지하'가 2007년 이곳 배다리로 옮겨오기 전에는 송림동에서 나름 꽤 공을 들여 지역활동을 펼치며 주민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송림동이 재개발되면서 주민공동체가 사라지고, 반지하의 지역내 활동기반과 네트워크도 공중분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배다리마을에서 진행하는 반지하의 활동에는 '기억'과 '새로움'을 화두로 하여 사라질지도 모르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려는 노력이 짙게 배어있다.
지역역사와 기록사진을 수집하고, 지역민의 지역생활사진을 수집하고, 주거와 가족을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과 공공미술을 덧씌웠다.
반지하는 이곳 배다리에서 말 그대로 '기억과 새로움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기억과 새로움의 풍경'은 반지하가 2007년 이곳 배다리에서 진행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제목이다.

퍼포먼스 반지하 홈페이지: http://vanziha.net/

인천창영초등학교 앞 퍼포먼스 반지하가 자리잡고 있는 공간(사무실?)이다.
컨테이너 판넬을 이용해 지은 건물인데, 필요에 따라 조금씩 고치고 덧붙이며 변신해가는 공간이란다.

오른쪽 편 공간 내부는 카페로 꾸며져 있어서 차도 마시고, 간단한 모임도 할 수 있다.
주민들도 오며가며 아무나 들어와서 차 한잔씩 마시고 간단다.

차는 셀프고, 차 값은 자율인데, 내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려운 살림에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반지하가 계속 활동하기를 바란다면 최소한의 성의를 담아주면 좋겠다.

왼쪽 편 공간은 교육장 겸 사무실이다.
앞쪽 창에는 교육프로그램과 일정 따위를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주요 행사 일정을 알리는 목판 게시판도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한쪽은 교육장으로 꾸며져 있다.
테이블, 의자, 스크린, 화이트보드... 있을건 다 있다.

교육장 오른편으로는 사무공간이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은도서관에 가깝다.

반지하 사무실 왼편으로는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방이 있다.
마침 쉬는 날이라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ㅜㅠ;

배다리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러 나왔다.
반지하 사무실 바로 앞 주차장 한켠에 작은 쉼터가 있다.
썰렁한 공터에 작은 쉼터를 만든 것인데, 반지하가 배다리마을에 와서 작업한 첫 작품이란다.

작은 쉼터 건너편 건물 벽에는 진짜 창문과 나란히 있는 작은 벽화가 있다.
얼핏보면 그냥 창문이 세 개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집 옆 텃밭에 심은 호박넝쿨이 지붕을 덮었다.
이 보다 더 좋은 여름철 지붕단열재가 또 있을까... ^^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던 공터도 화초와 의자가 있는 작은 쉼터로 바꿨다.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건물마다 작업한 시기도 다르고, 주제나 재료 등 접근방법도 다른 것 같다.

이제 몇 안남은 헌책방 중 한 곳인데, 골목길을 사진으로 돌아보는 전시회를 안내하고 있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시간을 낼 수가 없네...쩝..

"함께 산다는 건 옛날과 지금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함께 나누어가는 거란다.."
나도 이 마을이 좋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시가 지어져 있는 자체가 자산, 서울이 과거 품고 있다는 것 알아야”


                                         
 
서울 종묘를 방문한 라파엘 모네오. 그는 “담장 밖은 바쁜 서울인데 담장 안 종묘는 전혀 다른, 영적인 세계에 온 것 같다”며 감탄했다.

서울 종묘를 방문한 라파엘 모네오. 그는 “담장 밖은 바쁜 서울인데 담장 안 종묘는 전혀 다른, 영적인 세계에 온 것 같다”며 감탄했다.


1985년 스페인 메리다 지역에 지어진 국립 로마 박물관은 세계 건축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포스터모더니즘의 상업화로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건축물이 마구 지어지던 시기였다. 박물관은 기원전 150년경에 있었던 로마 유적지 위에 지어졌다. 붉은 벽돌로 로마식 아치벽을 옛 돌담 사이에 겹치지 않게 쌓아 올렸다. 밖에서 보면 박물관은 마치 로마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처럼 보인다. 건물은 지하 뿌리부터 유적지를 품고 있고, 거기서 나온 유물은 상층부에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과거를 되살린 집이었다.
 

한국 온 스페인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

건축가는 바르셀로나 공대의 건축이론과 학장을 역임하고 마드리드 공대에서 건축이론을 가르치던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80). 사람들은 이론 교육자가 세운 건축물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는 이후 미국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학장으로 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고, 96년 스페인 건축가 중 최초로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세계 건축계에서 드물게 이론과 실무를 양수겸장한 대스승으로 그가 꼽히는 배경이다.
 
반세기 넘게 활동하는 동안에 한국과 인연이 유독 없었던 그가 최근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서울에 6일간 머물며 도시를 관찰하고 있는 라파엘 모네오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단독으로 만났다.  

 
그의 방한 목적은 서울대 강연이었다. 김정식 목천문화재단 이사장(위 사진 오른쪽)이 서울대에 10억원을 기탁해 신설된 강연 시리즈 ‘에스앤유-목천 렉처(SNU-Mokchon Lecture)’의 첫 주자로 그는 지난 8일 서울대 강단에 섰다. 김 이사장은 “죽을 때 돈 싸들고 가는 게 아니지 않나. 그저 한국의 건축가와 후배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데 작은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술회했다. ‘에스앤유-목천 렉처(운영위원장 전봉희)’는 앞으로 매년 이어진다.
 
스페인 무르시아 시청사 (Murcia City Hall) 별관, 1998 광장 너머 1668년에 지어진 성당과 마주 보고 있다.

스페인 무르시아 시청사 (Murcia City Hall) 별관, 1998 광장 너머 1668년에 지어진 성당과 마주 보고 있다.

스페인 국립로마박물관(National Museum of Roman Art), 1985 고대 로마 유적지 사이사이 벽체를 쌓아 만든 박물관은 근대와 고대 건축의 합성물처럼 보인다.

스페인 국립로마박물관(National Museum of Roman Art), 1985 고대 로마 유적지 사이사이 벽체를 쌓아 만든 박물관은 근대와 고대 건축의 합성물처럼 보인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노스웨스트 코너 빌딩(Columbia University Northwest Corner Building), 2010 체육관 위에 세우기 위해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지었다. 외벽 자체가 기둥 역할을 하는 트러스 구조로 내부에 기둥이 거의 없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노스웨스트 코너 빌딩(Columbia University Northwest Corner Building), 2010 체육관 위에 세우기 위해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지었다. 외벽 자체가 기둥 역할을 하는 트러스 구조로 내부에 기둥이 거의 없다.



“옛 것과 새것 하나로 합쳐져 있어 놀라”
라파엘 모네오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도시를 걸었다고 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광화문에 다다랐고, 서촌까지 돌아보았다. 체류기간 동안 계속 서울을 걸었다. 종묘에서도 앞장선 해설사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여든의 나이는 말그대로 숫자에 불과해 보였다. 끊임없는 관찰과 호기심은 라파엘 모네오의 DNA이자, 그가 건축계의 대스승이 된 토대였다. 그를 일요일(11일) 이른 아침, 종묘에서 만났다. 땅 읽는 건축가에게 서울을 물어보기 좋은 장소였다.
 
질의 :서울에 대한 첫인상은 어떤가.
응답 :“전체적인 구조체계가 다른 대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던 것이어서 놀랍다. 중심과 주변, 옛 것과 새것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기보다 하나로 합해져 있다. 중심지에서 변두리로 이동한다는 느낌이 없다. 옛 도시와 고층 건물이 함께 존재한다. 전통적인 역사 도시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옛 모습을 바탕으로 도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사라진다.”  
 
질의 :유럽과 비교하면 서울의 변화 속도는 너무 빠른데.
응답 :“유럽 도시의 경험을 아시아 도시에서 적용하며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 도시만의 에너지와 용기가 있다. 새로 지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당연히 옛 것이 헐리고, 그러면서 혼합적인 성격을 갖는 게 당연하다.”  
 
질의 :다른 도시를 방문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나.
응답 :“사람이다. 그들이 도시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며 관계를 맺고, 공간을 사용하는 지 본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한 도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곳이 시장이라고 생각한다.”  
 
질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스페인 밖에서는 어떻게 작업을 시작하나.
응답 :“역시 본다. 대도시의 모습이 비슷해지는, 국제화 물결이 일고 있지만, 도시마다 각각의 성격이 분명히 있다. 건축가의 역할은 그걸 보는 것이다. 도시의 피드백을 감지하는 게 건축가의 일이다. 이를 통해 도시와 건축가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질의 :도시의 역사성이 왜 중요한가.
응답 :“거대 도시일수록 역사의 연속성을 가지는 게 불가능해졌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도시가 갖고 있는 고유의, 창조적인 조건을 많이 무시하는 것 같다. 서울이 과거를 품고 있다는 것을, 과거가 오늘날에도 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서울이 그곳에서 사는 도시민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도시에 귀 기울여라. 도시가 지어져 있는 것 자체가 자산이다.”
 
스페인 쿠르살 공회당과 회의장(Kursaal Congress Centre and Auditorium), 1999 산 세바스티안 해안가에 두 개의 바위처럼 놓인 컨벤션 센터. 서울대 최춘웅 교수(건축학과)는 “호주에 요른 웃존의 오페라하우스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라파엘 모네오의 쿠르살이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 쿠르살 공회당과 회의장(Kursaal Congress Centre and Auditorium), 1999 산 세바스티안 해안가에 두 개의 바위처럼 놓인 컨벤션 센터. 서울대 최춘웅 교수(건축학과)는 “호주에 요른 웃존의 오페라하우스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라파엘 모네오의 쿠르살이 있다”고 말했다.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 증축, 2008 1785년 지어진 신고전주의 건물 옆으로 붉은 벽돌의 회랑형 갤러리를 지었다. 증축 건물은 지하로 연결된다.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 증축, 2008 1785년 지어진 신고전주의 건물 옆으로 붉은 벽돌의 회랑형 갤러리를 지었다. 증축 건물은 지하로 연결된다.



건축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척도
스타 건축가라면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게 마련이다. 어디서 누가 봐도 그 건축가가 지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라파엘 모네오는 그런 스타일이 없다. 대신 땅의 이야기를 담는다. 집요한 땅 읽기를 거쳐 그 땅에 원래 있었던 듯한 건축물을 짓는다. 이병기 아키트윈스 대표는 “대도시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커튼 홀 구조의 유리 건물을 그냥 짓는 게 아니라, 라파엘 모네오는 역사 속에서 근거를 찾고 이야기를 담은 건축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지금껏 지었던 40여 개의 건축물의 모양새가 전부 다른 까닭이다.
 
이는 라파엘 모네오에 이어 두 번째로, 올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스페인 건축가 그룹 RCR의 지향점과 비슷하다. 자연 환경과 땅의 맥락을 중심에 두는 지역 건축이라는 점에서다. 건축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스페인에 요즘 세계 건축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파엘 모네오가 2007년 증축한 프라도 미술관의 경우 새 공간이 새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1785년 지어진 기존 신고전주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철저히 절제했다. ‘무르시아 시청사 별관(1998)’의 경우 1668년 지어진 성당과 1768년 지어진 성공회 궁전이 함께 있는 광장에 지어졌다. 모네오는 주변 건물의 높이와 재료, 기둥이 나열된 입면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시청 건물을 지었다.
 
재료에 대한 실험도 쉬지 않는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노스웨스트 코너 빌딩(2010)’의 경우 기존 체육관 위에 건물을 높이 들어올려 짓기 위해 비행기 만들 때 쓰는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질의 :건축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응답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시적인 사회일수록 건축에 더 의존하게 되지만, 현재는 많은 공간이 디지털화되고 있다. 공간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있는 시대고, 더 이상 그렇게 공간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다. 지금 시대에서 건축은 작은 공간 단위를 넘어서서, 더 큰 단위에서 도시와 관계를 맺으며 기반시설로써 역할을 고민할 때인 것 같다.”    
 
질의 :반세기가 넘게 현역 건축가로 학계와 현장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비결이 뭔가.
응답 :“교육자이면서 실무를 한 것이 큰 영향을 줬다. 건축가로 일한다는 것은 사회로부터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건축가는 주어진 땅 안에서 고립되는 게 아니라 더 넓게 문화적인 의미를 찾으며 작업해야 한다. 나는 작업을 하며 내가 그 의미를 찾고 있는지 질문하고 거기서 만족감을 얻는다. 가르치는 것 자체도 건축의 의미를 찾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다시 산다고 해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같은 방식으로 살 것 같다.”
 
그는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삼시세끼 한식만 먹었다. 된장찌개가 특히 맛있다고 했다. 나이 들수록 익숙한 음식을 더 찾게 되는데, 그의 입맛은 낯선 한국을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그 장소의 지역적 맥락을 살펴서 건축물을 짓는 건축가다운 입맛이기도 했다.
 
라파엘 모네오는 고국에서 15년째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어떤 일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며 “와인을 통해 내 삶이 얼마나 건축에 고립되어 있었는 지 깨달을 수 있었다”며 웃었다. 땅 위에서 평생 집짓기를 했던 건축가는 와인 농사를 지으며 또 다른 땅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와인을 재배하는 것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많은 요소가 결과를 지배함을,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말미에 우리가 왜 건축을 이해해야만 하는지 다소 도발적으로 물었다. 건축가는 양 손으로 몇 차례 얼굴을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건축을 볼 때마다 ‘왜 이걸 이렇게 지었을까’라며 이유를 찾습니다. 건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척도입니다. 문화적인 이유를 찾는 일이기도 하죠. 건축은 설명될 수 있어요. 나에게 나를 설명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알아가는 것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크지 않나요.”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Michael Moran/OTTO


안녕하세요

오늘은 양조장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합니다.

 

옛 조선인이 술 빚는 모습

18929월 일본인 오카자키가 용강정(현 인현동)에 연 35(1석은 약 150) 생산 규모의 청주 양조장을 세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든 청주는 주로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소비했으나 아무래도 원료와 제품의 질이 떨어져 그들은 자기 나라, 특히 규슈 지방에서 수입된 청주를 더 즐겨 마셨답니다. ·일 간의 제물포 해전 후 인천에 일본인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술 소비도 늘어나 1908년에는 양조장이 7, 생산량은 4만석에 이릅니다. 개항 이후 인천은 전국 최대 미곡 집산지였으며 정미업이 발달했고 자연스럽게 양조장도 발달하게 됩니다.

 

심견(후카미)주조장

1899년 설립되었습니다. 성학소주를 만들었고 한때 인천 술 전생산량의 30%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판매는 전국적이었고 멀리 중국까지 수출했답니다.

동인천 삼치골목 부근에 있었답니다.

 




 


다와이양조장. 동인천 삼치골목 인천집 뒤 주차장 자리였습니다

 

조일(아사히)양조장

가장 중요한 인천의 3대 양조장 중 하나입니다.


송월동 시절 조일양조장 자리입니다. (황금박쥐 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했습니다.) 

조일양조는 1906년 송판정(송월동)에서 길금(요시가네) 양조장으로 시작하여 1919년 도산정(도원동) 다꾸고메이 인천양조장을 인수합니다. 한국 최초의 기계식 소주 대량생산공장입니다. 조일양조에서는 지금 우리가 마시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소주를 생산해냈습니다. 같은 해 6월 평양에 세워진 ()조선소주가 가장 오래된 곳이지만, 남한에 세워진 공장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소주공장입니다. 이 회사의 금강표소주는 양조계의 대표적 상품으로 1939년 이후에는 만주지역 시장에도 진출하여 만주와 사할린 등지에서도 각광을 받았습니다. 조일양조는 1928년 전국 소주양조업자연합회 회장사()를 맡을 정도로 사세가 컸습니다.


 

 

사업이 잘되자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팀이라 할 수 있는 축구팀도 창단했습니다. '인천 조양'이라고 불린 조일양조팀의 실력은 각종 대회를 휩쓸 만큼 막강했습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초대 우승과 2회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해방 후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때 선발선수 대부분이 조일양조 소속이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전업과 함께 서울 지역권에서는 유이한 실업 축구팀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였으며, 16명의 최종 엔트리 중, 5명이 인천 조일양조 소속 선수였습니다. 조일양조 터에서 가까운 곳에 숭의축구전용구장이 있습니다. 인천 축구의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만나는 느낌입니다.

조일양조는 해방 후 적산 공장으로 계속 운영되다가 세금 체납 때문에 소주 600석이 차압되었고 미군정이 양조 금지령을 내리는 등으로 인해 한동안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최근까지 이런 건물로 남아있다가...

 


이런 주차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동양조조합

1928년 최승우가 외리(지금 경동)에 설립했습니다. 조일양조장의 금강소주가 인기를 끌자 옛 동부경찰서 인근에

공장을 신축하여 대동소주 출시합니다. 인천 5대 소주 중 하나였습니다.

최승우는 인천상업전수학교(동산중학교) 설립당시 학교 부지를 제공했고 인천흥업주식회사를 차렸습니다.



인천흥업주식회사.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있습니다. 수요양원(옛 인형극장) 앞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양조장. 바로 배다리에 위치했던 인천양조장입니다.

인천양조장

공식명칭은 인천조선주주식회사입니다. 인천 양조장은 1891년생 황해도 평산읍 출신 상공인 최병두 선생이 24세 때 인천에 정착하여 정미업을 운영하다 1926년 양조업으로 전업하여 설립한 공장 중의 하나로 1927년부터 가동하여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 막걸리인 소성주(邵城酒)를 생산하였다고 합니다. 최병두는 1938년에 만석양조장을 인수하여 더욱 번성합니다. 이후 인천 최초의 치과의사인 사위 임영균에게 운영권을 넘겼습니다.

(임영균은 영화학교를 졸업후 경성치전에 입학하고 인천에서 임치과라는 의원이름으로 첫 치과병원을 개원했습니다. 임영균의 큰아들은 전 베네수엘라 대사를 역임한 임명진씨입니다)

1974년 인천의 11개 양조회사가 합병하여 인천탁주합동제조회사(인천탁주)를 만듭니다. 그때 인천양조는 인천탁주 제2공장이 됩니다. 그러다 1996년 공장 문을 닫습니다. 한 때 아벨서점의 곽현숙 대표가 20031<아벨전시관>을 개관하여 3년여의 기간 동안 인천 관련 각종 소중한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후 활용이 중단된 채 방치된 상태였다가 스페이스 빔이 2007년에 이곳으로 이전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양조장. 대화주조(대화양조장)입니다.

유명한 동인천 삼치골목에 위치했었습니다.

대화주조. 대화와 천일이 합영하여 1938년 대화주조가 됩니다. 정대현, 김규환이 공동 대표였습니다.

인천양조장의 최병두는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동인천 삼치골목, 최초의 삼치가게 '인하의 집'

황해도 출신인 고 홍재남은 대화양조장에서 술독 닦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내는 식모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화양조장 앞에서 밥장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버려지던 생선 바라쿠다를 연안부두에서 주어다 튀겨팔았답니다. 몽둥이 삼치라 부르는 것입니다.

1974년 대화양조장이 문을 닫자 인하의 집을 세웁니다. 그러면서 하나 둘 삼치가게가 생기게 되었고 지금의 삼치골목이 형성된 것입니다. 후발 가게들에게 아낌없이 노하우를 전수하여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가 홍재남의 정신이었습니다.

 

와룡양조장

제물포역 맞은편, 제물포 시장 뒤편에 위치했습니다. 와룡양조장은 인천 일대에서 유통되던 와룡 소주를 생산했습니다. 와룡 양조장이 위치해 있던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 4동 일대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거의 대부분 논밭이나 과수원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와룡이라고 적힌 와룡 양조장 굴뚝이 높이 서 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경동 옛 조흥은행 인천지점 자리. 현재 주차장.

김휘관양조장이 들어서 소성소주를 생산했습니다.

송도에 설치되었던 진로의 야외입간판입니다.

참고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양조회사는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설립된

진천양조상회로 지금의 진로입니다.

[출처] 양조장 이야기|작성자 개항이


어른들만 몰라요, 그네 시소 미끄럼틀 모래밭 없어도 신나는데

오미환 입력 2017.06.10.


[다른 생활 탐구] 17. 놀이터를 놀이터답게

“한국의 놀이터는 어리석음 그 자체다. 왜 어디를 가나 똑같은가. 여름 날씨는 더운데 놀이기구는 왜 다 플라스틱이고 그늘은 왜 없나. 중앙에 비슷비슷한 놀이기구 하나가 떡하니 들어서 있던데, 이런 놀이터는 아이들보다 엄마들을 위한 공간일 뿐이다.”

독일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는 2014년 한국에 처음 와서 놀이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바보 같다’, 심지어 ‘감옥 같다’고 했다. 획일적인 놀이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나왔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파주출판도시 보리출판사 사옥 앞에 생긴 밧줄과 그물 놀이터. 어른들이 이틀간 워크숍을 하면서 직접 만들어 설치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195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산업화ㆍ규격화한 놀이터를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면서 그대로 베낀 결과라고 지적한다. 놀이터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아 온 적정기술과 기술놀이 교육연구가 김성원씨는 “한국의 놀이터는 미국어린이놀이터협회의 로비로 전후 일본 놀이터에 적용되기 시작한 ‘4S’를 그대로 모방했다”고 설명한다. 4S는 그네(Swing), 시소(Seesaw), 미끄럼틀(Slide), 모래밭(Sandbox)을 가리킨다. 한국의 4S놀이터는 1960년대 처음 등장해 지금까지 놀이터의 표준처럼 통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좀 더 창조적이고 개성있는 놀이터를 만들고 있다.


美 놀이터를 日거쳐 그대로 베껴

60년대부터 획일적 놀이터 고착

서구선 사회운동과 맞물려 변화

자연주의 모험놀이터 등 활발

어린이들이 설계 감리 참여한

순천 ‘기적의 놀이터’ 등

최근 우리도 “바꿔보자” 움직임


5월 27, 28일 파주출판도시 보리출판사에서 열린 놀이터 제작 워크숍은 어른 20여 명이 참여해 밧줄과 그물로 놀이터를 만들었다. 야외 데크에 설치한 기둥 구조물에 밧줄을 걸고 그물을 엮어 만든 그네와 정글짐, 나무에 매단 외줄 원반 그네는 놀러 온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김성원씨와 숲밧줄놀이 강사 김창호씨가 이끈 이 워크숍은 숲이 없는 도시 놀이터에 밧줄과 그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터를 제안하고 매듭법 등 필요한 기술과 관련 규정, 놀이기구를 소개했다. 추상적으로 놀이터의 중요성이나 원칙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실현 방안과 기술을 다룬 것이 이번 워크숍의 특징이다.


김성원씨는 “지금 한국에는 놀이 담론만 있고 놀이터와 놀이기구에 대한 담론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놀이와 놀이터, 놀이기구를 충분히 이해하는 전문가나 놀이터 디자이너가 별로 없는 것도 아쉽다”고 덧붙였다. 요즘 국내에서 유행하는 모험놀이터만 해도 ‘위험하지만 안전하게’라는 막연한 원칙만 있고 구체적 실현 기술과 구성 방법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산업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획일적 놀이터는 사회 인프라 분야의 적폐”라고 비판하면서 “시민사회와 예술가들이 참여해 창조적인 놀이터를 만들 수 있도록 안전을 이유로 창의를 막는 행정 관행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을놀이터, 한뼘 놀이터, 게릴라 놀이터 만들기를 사회적 일자리로 만들자”는 제안도 내놨다.

덴마크 아르후스 도서관ㆍ시민센터의 놀이터 중 일부. 이 놀이터를 만든 놀이터 디자인 기업 몬스트룸은 41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목수, 제작자로 이뤄져 있다. www.monstrum.dk

좋은 놀이터를 만들려면 조경 전문가, 건축가, 디자이너, 어린이, 어린이 전문가, 놀이터 전문가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덴마크의 놀이터 디자인 기업 몬스트룸은 41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목수, 제작자들이 함께한다. 몬스트룸이 만드는 놀이터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고, 아이들에게 상상과 도전을 통해 영감을 불어넣는 것을 가장 중시한다.


60년 전 4S시대에 멈춘 놀이터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서울문화재단이 시작한 ‘문화가 있는 놀이터’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놀이터를 아이와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놀이터 디자인를 공모해 놀이터 모델을 개발하고 놀이기구를 비롯한 놀이터 외형을 바꾸고 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기업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협력한 이 실험은 놀이터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씨앗이 됐다. 낡고 오래된 놀이터 300개를 리모델링한 서울시의 ‘상상어린이공원’ 프로젝트, LH공사의 친환경 놀이터 리모델링, 환경부 사업인 생태놀이터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나타난 이런 시도는 놀이터 디자인이 어린이의 정서를 고려해 다양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주로 형태에 치중하는 한계도 있다. 최근에는 생태, 친환경, 공동체, 주민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지자체의 놀이터 사업 중 요즘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순천의 기적의 놀이터다. 어린이들이 설계와 감리에 참여하고 전문가와 행정이 협력해 만드는 기적의 놀이터는 지난해 처음 선보였고 올해 5월 두 번째가 개장했다. 2020년까지 10개로 늘릴 계획이다. 틀에 박힌 붕어빵 놀이기구가 없고, 언덕과 비탈 같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스스로 몸을 돌보며 ‘건강한 위험’을 마주치는 놀이터를 지향하고 있다. 수원시도 올해부터 어린이가 직접 만드는 놀이터 사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디자인하는 이런 놀이터를 올해 5개 만들 계획이다.

6월 3일 서울 하자센터에 놀러온 아이들이 종이 상자로 만든 터널. 놀이기구가 있어야만 놀이터는 아니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가 2015년 시작한 ‘움직이는 창의놀이터’는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을 하다가 놀이의 중요성을 절감한 작가들의 놀이터와 놀이 제안 활동이다. 하루 동안 생겼다 사라지는 이 반짝놀이터는 그동안 시민청, 서울광장, 서울혁신파크에서 선보였고, 올해는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에서 ‘놀이터가 미끄덩’이라는 이름으로 판을 벌였다. 잔디밭 비탈에서 물에 젖은 비닐 미끄럼 타기, 깡통 신발 신고 걷기, 커다란 고무통에 쑥 들어가 데굴데굴 굴러가기 등 여느 놀이터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미끄덩 놀이터에서 펼쳐졌다.


놀이터는 자연이 사라진 산업도시의 산물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놀이터가 따로 없었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놀았고 자연은 가장 훌륭한 놀이터였다. 산업화로 집과 일터가 분리되면서 어른들이 일하러 간 사이 방치된 채 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다치는 사고가 많아지자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게 놀이터다.

올해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 팝업놀이터에 등장한 고무통 놀이. 데굴데굴 굴리면 빙글빙글 돈다.

서구에서 놀이터의 역사는 160년쯤 됐다. 놀이터의 변화는 사회운동과 맞물려 있다. 예컨대 전후 등장한 숲놀이터의 뿌리는1930년대 자연주의 놀이 운동이다. 1943년 나치 치하 덴마크 코펜하겐에 처음 나타난 모험놀이터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68혁명의 열기를 타고 전 유럽에 퍼졌다. 놀이터 구성, 놀이기구 제작과 설치, 놀이 선택권까지 전부 아이들에게 맡기는 게 모험놀이터의 본래 모습이다. 이런 맥락과 정신은 빠진 채 어른들이 만들어서 제공하는 체험 공간을 과연 모험놀이터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네덜란드 흐로닝엔의 목수 축제에서는 250명의 10~15세 아이들이 톱과 망치, 목재 팔레트로 나흘 만에 모험 공원과 아지트를 만들었다. ‘플레이파크’로 불리는 일본의 모험놀이터가 무허가촌이나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것도 완전한 자유의 결과다. 거기서 아이들은 불 피우고 구덩이 파고 나무에 오르고 기지를 만들고 댐을 짓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논다. 플레이파크는 1979년 도쿄 하네기공원에 처음 생긴 이래 일본 전역에 모험놀이터 만들기 시민단체가 400개를 헤아릴 만큼 널리 퍼졌다.


건축가, 예술가, 교육자 등이 참여해 전후 다양한 발상과 시도가 넘치던 세계의 놀이터 디자인은 1980년대 들어 위기를 맞는다. 안전 관련 법과 규제는 놀이터 시공업자와 놀이기구 업자들을 위한 표준이 되어 놀이기구의 획일화로 나타났다. 2000년대 들어 상업화한 놀이터에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과 예술가들이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다. 잘 놀아야 잘 자란다. 아이들은 놀면서 공간을 탐색하고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른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요즘 한국 아이들은 놀 시간도 장소도 함께 놀 친구도 없다. 아무 목적 없는 즐거움 자체여야 할 놀이를 창의력 발달에 중요하다며 생산성을 따지고, 놀이 체험 프로그램에 보내고, 키즈카페 같은 상업 공간에서 돈 내고 소비하게 하는 어른들의 강박은 놀이라는 ‘알리바이’를 구성할 뿐이다. 놀이터도 마찬가지다. 어른들 생각대로 만든 ‘알리바이 놀이터’가 많다. 이제는 놀이터다운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돌려줄 때다.

글ㆍ사진=오미환기자 mhoh@hankookilbo.com(mailto:mhoh@hankookilbo.com)



인천화도진도서관 강의노트 2016.11.01

 

죽산 조봉암과 근현대사

 

1.죽산 조봉암은 누구인가

1)한국 근현대사의 풍운아 - 1899년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한미한 농가 출생 - 보통학교 졸업 - 군청 사환, 임시 고원, 대서소 보조원 YMCA 중학부세이소쿠영어학교주오대. 독서와 토론 - 진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 뛰어난 강연술, 그리고 탁월한 사회기(司會技)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

 

2)독립운동가, 건국공로자 = 강화 31만세 옥살이 -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 최선의 길 판단 - 조선공산당 창당주역 - 상하이 망명 투쟁 중 체포당해 7년간 복역 - 815 광복 후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입안

 

3)세계 최고수준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 농민들에 희망 안겨줘 혁명포기 - 나라 전체가 공산화 막는 원인 -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 자녀교육 집중 - 뒷날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

 

4)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지내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차점 낙선 거물 정치인- 젊은 날 조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 전향 뒤 원죄 -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 국가변란과 간첩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 -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 현대사의 축소판

 

5)1959731 오전 11시 서울형무소 - 아침에 따님과 조카 면회거부 발길 돌려 - 바로 전날 오후 재재심 기각 - 1030- 마지막 술한잔도 거부당하고 처형 - 청중 한 분이 낭독

 

2.죽산 조봉암의 생애 요약

1)출생과 소년시절

*강화정신--고려 때 삼별초 저항-조선시대 병자호란 저항-조선말기 병인양요 운요호사건 신미양요-이동휘 진위대장과 잠두교회-1907년 진위대원 봉기-군청 뒤의 견자산 진위대 진지 보창학교

*1889년 강화에서 출생

*총명하나 공부 안 하는 아이였으나 학급회 토론과 주산에 탁월

*유찬식 조광원 조구원 정경창과 죽마고우로 교유(갈홍기는 나이 차가 많음)

*잠두교회에 나감.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군청사환 임시고원으로 일함

 

2)31만세운동과 청년시절

*읍내거리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다가 김이옥을 만남-6천명 모인 31만세운동에 참가 구속

*혹독한 고문당하고 서대문감옥에 갇힘--이가순과 민족적 각성

*YMCA 중학부에 다님--이상재 선생--동급생 인천 박남칠을 만남

*대동단사건으로 다시 평양경찰서에 구속--21.7 석방 후 일본 유학길

*4명의 친구와 동숙 엿장수 고학 세이소쿠영어학교 주오대학 정경과 김찬의 영향으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서적 탐닉 독서와 토론에 고학생동우회와 흑도회 가명을 朴鐵丸으로

*1922.8 귀국해서 청년논객으로 등장 22.11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출국 모스크바 담판에 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폐결핵으로 중퇴 귀국

3)조선공산당(조공) 창당과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

*코민테른이 조공 창당 예비작업으로 김재봉과 김찬 침투시킴--조봉암의 가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상하이 트로이카의 석방 합류 급진전-신흥청년동맹 전국순회강연 선풍적 인기-조선일보 기자-최고의 논객-인천에서의 결산강연 24.4.19 -사회운동 후배 김조이와 결혼

*1925.4.17. 조공 창당(1차공산당/김재봉당) - 승인 얻으려 밀사로 모스크바행

*임무 완수하고 공산대학 실링 21명 받아냄--아우 조용암 아내 김조이 소년시절 친구 정경창

*조공1차당 붕괴 상하이에서 투쟁(여운형이 죽산의 멘토)--25.5 만주 밀행 조공만주총국 조직--610만세사건 주도--2차당 붕괴 25.11

*27.1 사랑하면서도 헤어졌던 김이옥이 상하이로 와서 동거 딸 호정을 낳음 28.9--동지들의 비난 경제적 곤경 위상 약화됨--공금 전용 시비--정윤교 사건--이 무렵에 양이섭을 수하에 둠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윤봉길 의거--안창호 여운형 현정건 피체, 양이섭 피체, 반제동맹 주도--32.12 체포되어 압송--7년 징역 선고 신의주형무소 수감--김이옥 귀국 뒤 죽음--딸은 친척에 의해 인천으로

*전향 회유 정책 1년 감형 출옥 39.7

 

4)출옥 후 인천 정착과 유휴의 세월

*친척 조준묵과 YMCA 시절 동급생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 이승엽 등 미곡상 업계 인물들 인연, 부자가 된 정수근

*박남칠 등이 비강업조합 만들어줌--사무실은 서경정(내동) 건어물 거리에

*김조이와 재결합 부평으 셋집

*처가식구들이 인천으로 옴--처남들이 사업 도와줌--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

*긴 유휴기간을 보냄-조공 조직과 멀어지고

*일제와 묵시적 타협선--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두 가지--흥아신춘 광고와 국방헌금 사건

*45.1 결국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

 

5)광복 후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영광과 굴레

*45.8.15 여운형이 필동 헌병대 감방문 열어줌--내가 건준 만드니 인천을 장악하라--석방되어 인천으로

*집앞에 기다리는 청년들과 보안대 조직 치안장악 8.16 --건준 조직 8.18

*부활된 조공 동지들의 거부로 소외됨

*인천 민전을 조직, 그러나 박헌영이 비난 반조운동 충고와 자기반성 서신 CIC에 압수당함

*결국 공산당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의 공작으로 연행 전향성명 내고 공산당을 떠남 46.6.23--<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전국을 크게 흔듦

*우파와 결합 단독정부안 받아들임

*48.5 제헌의회 출마 당선--국회로 가서 무소속 그룹 통합 통합 통합 무소속 의원 85명의 대표로 떠오름--헌법기초위원이 됨--평등지권 주장 발언 이승만이 주목

*48.7. 초대농림부장관-농지개혁법 주도--신속한 토지 균등성 확보성공--농민들 장악

*국회부의장 탁월한 사회 솜씨--625전쟁으로 국회문서 피난 아내 납북

*부산임시수도에서 발췌개헌안 협조--이승만 한계 드러냄

*52.8.5 2대대통령 출마 70만표

*그후 야인이 되어 도정궁 칩거--호헌동지회의 요청으로 재등장

*55.12 진보당 구상하며 떠오름--서상일과 경쟁, 신익희와 단일후보 협상중 신익희 급서 단독후보 216만표 획득 56.5.15

*56.11진보당 창당 -- 여러차례 위기--장택상 벼룩에 굴레를 씌울 사람인데

*58.1 결국 서울시경 TF팀에 의해 함정에 걸려듦--양이섭이준 돈이 북한 공작금이라고--1심 인정하지 않아 52심 사형 대법원 파기자판 사형선고

*조호정의 탄원서

*죽산의 유언--사형당해도 애국심은 변합없어

*59.7.31 재심기각 17시간만에 처형

*총독부령 120호와 장례식과 비문 없는 비석

*왜 처형당했는가--분단을 정권연장에 이용

*미국의 태도--양다리 걸치기

 

6)53년만에 무죄선고 햇볕으로

*05.2.5 과거사 정리 진실화해위원회 설치--05.11 위원회 재심권유

*12. 11.1 대법원 무죄선고

*네 자녀들 형극의 길--외아들 규호가 걸어온 길/조호정 여사가 걸어온 길

 

 

3.[조봉암평전]에서 넓히려 한 지평

1)출생지 등

*2012년 가을 조사위원회 구성 강화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혹은 남산대로 정해진 과정

*김이옥의 호적 찾아냄 김이옥의 야학과 여성 운동

*동생 조용암의 존재 드러냄

 

2)인천 현대사 확충

*강화독립투쟁을 한국 독립운동사와 연결-조광원 유찬식 조구원 조용암 김이옥 부각시키기

*인천현대사를 한국사회주의운동사 맥락과 연결

*죽산이 일제강점기 어떻게 미곡상업계 인물들과 교유했는가

*광복 후 어떻게 전향을 하고 어떻게 조직해서 떠올랐는가 -- 인천의 명망가 신태범 박사 -- 재정후원자들 심계택 김수현 함효영 배인철 이필상 등

*어떻게 판세를 역전해 당선되었는가--하상훈, 이성민, 김성국, 임홍제와 겨뤄

 

3)인간적 풍모

*세 따님과 아드님에게서 들은 인간적 풍모--영화

*그를 사랑한 네 여성 이야기

 

4.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1)흥아신춘 광고와 휼병금 문제와 국가유공 수훈의 유보

2)419당시 김일성 주석의 발언을 기록한 푸자노프의 저널 공개

3)새얼재단의 동상건립운동과 맹목적인 안티조봉암 인사들

 

4. 실현하지 못한 죽산의 꿈 평등과 정의의 사회

1)죽산이 추구한 진보의 개념

<창당대회 개회사>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발기취지문> 우리는 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 강령>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종합적인 연차 경제계획

(3)민주우방과 제휴 민주세력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4)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5)노동자 권리 보장,

죽산이 처음 사용한 진보의 진정한 의미==책임정치 - 수탈없는 정의로운 경제 - 평화통일 흔히 3가지를 말하지만 강령에는 교육도 있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반세기 동안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금 고스란히 우리 정치의 주요담론이 되어 있다 - 놀라운 선견성 -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5. 죽산이 안았던 원제와 숙명의 고리

1)조공 창당 멤버,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이 인정한 핵심 광복 후 전향 결국 조공 창당 멤버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 막혀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본인의 인생은 모순 속에 함몰

2)3대대통령 선거 216만표 농지개혁의 결과 농민들의 지지 +무력 북진통일 독재 거부 민심 + 새로운 정치 이념 제시 충분한 정당성

3)남한 정권의 실력자이면서 제3세계, 사회민주주의 추구 공산당이었다는 과거를 원죄처럼 뒤집어 씌워 사사건건 빨갱이로 몰려 장택상의 벼룩의 굴레론 그러나 결국 서울시경의 정권의 함정에 빠져 쓰러져 분단모순의 상황 민중은 속으로만 울어

4)남북의 첨예한 대립 속에 정권은 분단모순을 이용 - 죽산에 대한 사법살인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50년이 걸림

5)올림픽, 월드컵 개최 세계 10위권 경제 - 소련붕괴 동유럽 블록 붕괴 국가의 자신감 진실화해위원회 발족 대법원 재심 무죄선고 국가 양심과 國格 회복

6)그러나 독립유공 서훈은 유보되고 있고 아직도 남은 맹목적인 안티 조봉암 그룹

 

6. 죽산이 뿌린 씨앗과 오늘

1)죽산의 진보와 현재 한국의 진보

*국가 발전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의 날개가 움직여야 - 그러나 한국 진보는 분단모순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 공산주의는 용납 안 되고 제3의 길이 가능한데 백범 김구와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성숙 박건웅 등 설 자리 잃어 -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나라 갈망 - 분단 모순 속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죽산은 제3의 길 신념대로 밀고가다가 쓰러짐 - 타협과 포용과 관용이 있었다 해방 조국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 - 그런데도 간첩으로 몰려 죽어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지켜보기 안타깝다 - 죽산과 함께 했던 늙은 진보당원들 - “죽산과 우리의 진보와 오늘의 진보는 다르다/임정치 경제민주화 평화통일이었다./ 오늘의 진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말로만 하는 입 진보다

*오늘의 진보 국민의 지지 10%도 안돼. <한겨레> 서평 - ‘넘사벽이다’ - 왜 그런가? - 현실정치를 무조건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고 냉소적이다 - 죽산처럼 온 몸으로 뛰어들어 대안세력으로서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데 입으로만 한다 - 종북 진보를 자처한다 - 변증법에서 말하는 진정성을 갖고 민중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2)죽산이 남긴 씨앗 키우기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잘 사는 나라 - 남북의 대회로써 평화통일을 이루기 - 네덜란드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국가유공 수훈의 관철 - 진정한 복권은 국가양심의 회복

 

 

#낭독텍스트 -죽산의 최후 (이원규, [조봉암평전], 2013, 한길사)

그 날, 죽산은 아침부터 감방에서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독서를 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길은 밀도가 깊은 철학서적에 푹 빠지는 것이 제일이었다. 아침에 창가로 와서 관식에 있는 콩알 몇 개를 얻어먹고 날아갔던 산비둘기가 이내 다시 돌아와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울었다.

오전 1030, 간수부장과 간수 한 사람이 와서 감방 문을 열었다. 그들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죽산은 처형이구나 생각했다. 그 순간 간수부장이 말했다.

선생님, 가시지요. 집행입니다.”

죽산은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막 태어났을 때의 인간처럼 머릿속이 순수하게 깨끗해지며 내가 착하게 살았는가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한번도 안 입고 아껴둔 새 모시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산뜻하게 빗어 넘기고 하얀색 새 고무신을 신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내밀어 형무관이 내미는 수갑과 포승을 받았다. 곧바로 옥사를 빠져나와 교수형을 집행하는 사형장을 향해 걸었다. 한여름 땡볕이 내려쬐는데 통행로 옆에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는 꽃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도 꽃이 피는군. 그런데 향기가 없어.”

15평 쯤 되는 목조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곳, 그러나 그곳이 죽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그 곁을 지나는 순간 죽산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60년 평생을 돌아보기에도 부족할 만큼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을 것을 알았는데도 왜 그걸 안 했을까. 국회 본회의 사회를 보던 순간, 대학생 교복을 입은 채 엿보따리를 들고 엿을 팔러 다니던 도쿄 거리, 고향 강화 염하의 칙칙한 바닷물, 농지개혁법을 기초하는 부하직원들을 격려하는 순간들이 마치 환등기 사진이 바뀌듯 바뀌어갔다. 왜 추억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환하게 웃는 큰딸 호정, 그리고 어린 세 자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있어라. 아들딸들아. 형무관들이 가볍게 등을 밀어 그는 목조건물로 들어섰다.

닫아놓은 커튼 사이로 올가미가 보이는데 반대편에는 십여 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고 검사, 형무소장, 보안과장, 목사, 형무관들이 앉아 있었다.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다.

본적 인천시 도원동 12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충현동 산45번지, 성명 조봉암, 나이 육십일 세, 맞습니까.”

. 맞습니다.”

다음은 인상(人相)조사였다. 신장, 체중, 얼굴빛, 머리숱,쉼표* 전체적 체형 등을 확인하는 절차, 형무관은 가장 분명한 인상인 마디가 잘라져 없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확인했다.

임석검사가 집행을 선언하자 집행관이 다가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

죽산은 곧 숨이 끊어질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골고루 잘 살려고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죄를 짓고 가니 미안한 뿐이오.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느냐 물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곧바로 교수대로 옮겨졌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몸 전체에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죽산은 임석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부탁했다.

목사는 성경을 펴들고 누가복음23장을 읽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집행관 중의 하나였던 고중렬(高重烈) 교도관은 20052신동아인터뷰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윽고 두 손과 무릎, 두 발이 포승줄에 묶인 조봉암 선생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한 교도관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 밧줄에 매달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숨이 끊어졌지만 30분도 넘게 매달아뒀다.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죽산 조봉암은 간첩 누명을 쓰고 이렇듯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나라 헌정사상 첫 사법살인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1895년 여성전용예배당 건축기념사진-한국 최초의 자립예배당(우각로)

 

1918년 영화여학교 헤스 교장 송별기념사진

 

1920년대 창영초등학교 건물

 

1923년 영화여자보통학교 개교식 사진

  

1939년 인천지방 교역자 기도회 기념사진(갬블의 집)

 

1938년 창영교회 예배당 착공기념사진

 

1890년대 우각로 일대 전경사진

 

경인철도개통식

 

기공식

 

 

 

인천 ‘배다리-우각로’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성

 


                                                         이성진

1, 인천 ‘배다리-우각로’ 문화 공간이 갖는 의미성과 현실 문제

 


인천의 근대역사는 ‘개항장’중심의 역사만 있고 ‘개항장’ 밖(변두리)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천이란 도시가 개항장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개항장은 중심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인천의 전통 구심지(관교동)는 개항의 위력 앞에 그 위상을 잃어 버렸다.

1899년 11월 개통한 제물포-노량진 간의 경인철도는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하도록 만들었다. 철도는 전통 도시들을 해체하거나 무력화하는 동시에 식민도시를 개발하는데 아주 유효한 것이었다. 식민지배에 방해가 되는 전통도시를 해체하고 일제가 개발한 식민도시가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였다. 인천도 마찬가지였다. 철도를 중심으로 인천의 문화와 역사가 재편되는 진통을 겪었다. 다시 말하면 부평도호부를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권은 부평역을 중심으로 새로 형성된 공업단지와 상업지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문학산 아래 인천도호부는 인천역, 축현역을 중심으로 하는 개항장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인천은 경인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역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이식문화 지역(중구 북성동, 관동, 항동, 송월동, 중앙동, 송학동, 신생동), 이식문화와 전통문화 공존지역(신포동, 용동, 내동, 경동, 전동)이 형성되었고, 북부지역은 조선인 이주민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으로 비교적 전통문화가 온존해 있는 변두리 문화지역(금곡동, 창영동, 송림동, 화수동, 만석동)이 형성되었다.

현재 인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훼손된 인천 근대 주류문화였던 개항장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자장면의 원조 공화춘 복원사업, 일본 지계의 일본인 가옥 복원, 인천근대건축전시관, 만국공원 복원 사업 등으로 추진하였거나 계획을 하고 있다. 중국인거리의 공자상 건립, 중국인 거리 입구의 패루, 북성동 동사무소 건축을 비롯하여 최근 중구청 앞 일본지계의 일본인 가옥과 같은 사이비 이식문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데 반해 한쪽으로 청라지구경제자육구역과 송도신도시를 연결하는 산업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인천 근대 변두리문화의 중심지이자 아직도 인천 근대 변두리문화의 흔적이 온존해 있는 ‘배다리-우각로’를 마구 훼손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배다리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배다리는 배다리’라고 말한다. 배다리라는 지명 자체가 자연스럽다. 배다리 시장 입구와 송현초등학교 일대까지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있어 이곳을 자연스럽게 ‘배다리’라고 불렀다. 배다리 지명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배다리 문화도 자연스럽다. 배다리 시장도 일제 때 인천으로 일자리를 찾아 온 조선인 노동자들에 의해 형성 된 공간이다. 한국 전쟁 후 피난민들이 고작 옷가지와 양은솥, 과일 따위 등을 내다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확장되었다. 또한 배다리 헌책방거리도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서민들이 책을 팔고 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 배다리-우각로 도로를 살펴보면 배다리-우각로의 ‘자연스러움’의 백미를 만끽할 수 있다. 최초의 경인도로인 ‘배다리-우각로’는 도시의 직선 도로에 맛들인 우리에게 옛 길의 맛스럼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시작하여 알렌별장(현 예루살렘교회) 앞길까지 우각리(쇠뿔고개)의 특성인 쇠뿔 모양이 그대로 살린 도로이다. 그리고 ‘배다리-우각로’를 걷다가 옆길로 들어가면 바로 골목길이다. 구불구불 미로처럼 복잡하지만 결국 한 길에서 만나는 한국 전통 골목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배다리-우각로’는 인위성보다는 자연성이 그대로 배어있는 곳이다. 이곳을 다녀보면 회색 콘크리트로 도배되어 있는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정겨움과 은은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조차도 ‘이상한 동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면 주사가 심한 사람이 이곳에 이사와 매일 술을 마시고 온 동네를 다니며 주사를 부렸다고 한다. 1년 후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집에 들어와서도 조용히 잠을 청할 정도로 변했다고 한다. 이것은 ‘배다리-우각로’ 문화가 갖는 동네의 개방성과 연결성에 연유한다. 그것이 바로 ‘배다리-우각리’가 살아있는 동네임을 말해 준다.

 이런 ‘배다리-우각로’ 살아있는 동네를 송도신도시-청라경제특구 산업도로가 가로질러 잘려나게 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개항장 중심의 역사에 함몰되어 있어 이곳의 사라진 이식문화를 복원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한 쪽에서는 인천 근대 전통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배다리-우각로’지역을 훼손하는 계획을 거침없이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수인선의 사례를 통해서 10년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 손익만 추구하여 폐쇄하였다가 다시 몇 수 십배의 비용을 들여 복원하는 우를 범하였듯이 ‘배다리-우각로’에서도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2. 인천 근대 역사 공간으로서 ‘배다리-우각로’

 


1) 인천 근대교육, 3.1만세운동 산실 ‘배다리-우각로’

 


배다리-우각로는 인천 근대교육의 산실로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인 영화초등학교와 인천 최초의 공립초등학교인 창영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영화초등학교는 존스선교사 부부가 1892년 4월에 세운 매일학교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초등교육기관이다. 남녀학교가 따로 운영하다가 1970년 남학교인 영화국민학교가 폐교되면서 여학교인 샛별초등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영화초등학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화초등학교가 배출한 인물은 한국 최초의 여대생 김애리시, 최초의 여성박사 김활란, 이화학당 이사장 서은숙, 이화여대 사범대학장 김애마, 이화여대 음대학장 김영의. 영화배우 황정순,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등이 있다. 또한 1916년 영화초등학교 안에 인천 최초로 인천지역 조선아동 교육을 위한 영화유치원을 개원하여 인천 지역민에게 유아교육에 관한 관심과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11년 9월 건축한 존스기념관은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성을 인정받고 있다.

1904년 한말 애국지사 정재홍이 우각리에 천기의숙(인명의숙 전신)을 설립하였다. 인천 신상협회․미상협회 등을 비롯한 인천지역 유력 사업가들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모금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또한 학부에서 사립학교 대신 공립학교 설립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는 의미로 ‘의무학교’ 설립도 추진하였다. 지역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통하여 의무학교를 크게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7년 조선 아동을 위한 인천 최초의 공립초등교육기관인 창영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1919년 3월6일 창영초등학교 3 ․ 4학년이 주축이 되어 동맹휴업을 하여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하고 4일간 등교를 거부하였다. 일본 경찰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만세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교직원에게 정보보고를 요구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월7일부터 인천지역에서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자 이에 대한 항의로 3월8일 밤 9시 창영초등학교에 4명의 학생(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이 나타난 학교 2층에 올라가 전화선을 자르고 전화기를 박살냈다. 이 일로 김진명은 1년6개월, 이만용과 박철준은 태형 90대, 손창신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창영초등학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이후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학생과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 개항장 주변 조선인상점의 철시항의.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창영초등학교는 인천지역의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학교로 발전하였다. 한국 미술사학자 고유섭, 대법원장 조진만,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 국회 부의장 김은하, 좌익운동가인 이승엽 등이 있다. 현재 1921년 건축한 본관 교사는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성을 보존하고 있다.

 


2)한국철도의 발원지 ‘우각역’

 


1899년 제물포-노량진간 경인선이 개통으로 한국 근대 철도가 시작되었다. 1897년 3월 미국인 모오스가 구한국 정부로부터 경인선철도 부설권을 따내 경인철도 기공식을 우각리에서

가졌다. 2년 6개월이 지난 후 개항의 최후 상징인 기차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350명의 노동자를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기술문제로 인하여 공사 진척은 지연되고 자본력이 없는 모오스는 결국 일본인에게 100만 달러에  매각하였다. 원래 노선인 우각역을 거쳐 독각다리(숭의로타리 서쪽 부근)를 경유하여 사동(인천여상 남쪽)에 종착역을 세우는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지주들의 강력한 반발로 우각역(현 도원역)을 거쳐 축현역(현 동인천역)을 지나서 종착역인 하인천역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도원역 근처 근린공원에 한국철도의 시원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다.

3)한국기독교 신학의 근원지 ‘에즈베리’ 예배당

 


‘배다리-우각로’는 한국 기독교 신학의 근원지이다. 1897년 미북감리회 선교사 조원시(존스)는 한국 서지방(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연안 등)선교를 위한 선교기지를 세웠다. 1895년 멕시코 은달러로 600달러를 들어 우각리 38번지와 42번지 일대를 매수하였고 1897년 7월  뉴욕주 감리교 감독인 휴즈목사의 재정지원을 받아 벽돌조 1층 건물인 에즈베리 목사관을 건축하였다. 에즈베리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러목사의 지시로 미국 파송된 최초의 감리교선교사이다. 선교사 조원시는 미국 최초로 감리교를 선교한 에즈베리 목사처럼 기독교의 불모지인 한국 서지방을 선교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명명이었다. 그 이전에는 한국최초의 자립예배당이 세워진 곳이다. 에즈베리 목사관을 통해서 인천, 강화, 황해도 연안, 남양, 부평, 부천, 영종 등지로 교세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후 남녀선교사 기숙사를 우각리 40, 42번지 일대에 건축하여 미국인 선교사 숙소 뿐만 아니라 인천, 부평, 부천, 연안, 강화, 남양 등 도서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이곳의 성경교육을 통해 각 지역의 선교를 확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우각리 에즈베리 선교기지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00년 우각리에서 한국최초의 신학월간지인 ‘신학월보’가 발행되었다는 것이다. 발행인은 조원시로 순한글로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신학 지식과 종교론을 소개한 신학잡지였다. 서울 냉골에 협성신학교가 세워지기 전 한국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정립하였던 역사적 공간이다.

 


4)인천노동운동의 산실 ‘배다리-우각로

 


인천은 일제가 경제적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먼저 일본인 자본가들이 들어와 공장을 세운 곳이다. 조선인 노동자를 채용하여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으로 노동을 착취하였다. 이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찾는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대 배다리(당시 금곡리)에 조선인촌주식회사(전 파카디리극장)가 있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성냥 제조공장으로 전국 보급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촌주식회사 금곡리 공장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 지배인의 잔악한 노동착취에 분노하여 1921년 3월 21일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 150명이 지배인 배척선언을 하며 동매파업을 하였다. 이것이 인천 지역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조선인 노동자 파업은 1923년 가등정미소 노동자의 동맹 파업의 계기되었다. 계속하여 1926년 4월 임금인하를 강요하는 회사의 부당한 방침에 대하여 남녀 및 소년 직공 200여명이 동맹파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2일 만에 파업을 철회하였다. 1931년 8월 여직공 170여명이 임금을 인하하려는 회사의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로 동맹파업을 진행하였다. 남직공도 작업이 불가능하자 회사 측이 굴복하여 종전대호 1월70전의 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1932년 이승엽, 김삼룡이 주도한 적색노조 운동이 확산되면서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360명이 임금인상,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하였다.

 


3. 맺는 말

 


 배다리-우각로는 개항장과 더불어 인천근현대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소이다. 경인도로로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가는 길인 동시에 인천의 근대교육, 기독교, 노동운동의 산실이다. 힘없는 민중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 민족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저항을 하였던 개항장이 주는 역사적 장소보다도 더 값진 인천 지역 민중의 역사적 의지가 담긴 장소이다.

‘배다리-우각로’를 가로지르는 산업도로 개설공사는 길이 갖는 순기능인 연결성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역기능인 단절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배다리-우각로’는 개항기에 서울-제물포를 연결하는 길의 순기능인 연결성의 역할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의 의도적 방해로 우각로 선교기지인 남선교사 기숙사(현 인천 세무서)와 여선교사 기숙사 사이 소방도로를 개통함으로 이전의 선교기지가 갖고 있던  연결된 공간성이 상실되고 별개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길이 갖는 역기능인 단절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배다리-우각로’ 안에는 인천 유형문화재 3곳이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이 공간이 담고 있는 역사적 가치성은 반드시 보존하여야 한다. 그리고 ‘배다리-우각로’만이 간직하고 있는 정겨움과 은은함도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존하고 이를 활성화시켜야 하는 인천시 문화예술 행정이 ‘배다리-우각로’를 가로지르는 산업도로를 개설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무섭고 우습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국가지정 유형문화재의 경우는 150m, 지방 문화재의 경우 100m 이내에서 건축이나 도로개설공사 등을 규제하고 있다. 인천시 조례에서는 어떻게 규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위법인 문화재 보호법에 크게 벗어난 규정을 정해서는 안된다.

 

 

인천 ‘배다리-우각로’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성-이성진


인천 동구청, 배다리생태놀이시설 간밤에 싹 실어가

     

- 배다리마을 주민들 동구청의 막가파 행정에 공분, 소송 불사 예정

  
 ▲ 동구청은 지난 밤(21일) 주민들이 일부 지켰던 배다리생태놀이시설마저 해체해 모두 실어갔다. 사진제공=배다리마을 주민 

인천 동구청이 지난 21일 주민들이 일부 지켰던 배다리마을 어린이생태놀이시설마저 간밤에 싹 실어가 주민들의 공분이 커지고 있다.

동구청은 어제(21일) 텃밭내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생태시설을 일부 해체해 트럭에 싣고 갔다. 주민들이 막아 일부의 시설은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22일) 아침 주민들은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동구청이 간밤에 일부 남아있던 생태시설을 마저 철거해 싣고가서 시설이 있던 자리만 썰렁하게 패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다리생태놀이터는 주민과 함께 만든 공유지 놀이터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자랑스러워했고 아이들은 그 곳에서 활기찬 에너지를 분출하며 안전하게 놀 수 있었다.

민운기 스페이스빔 대표는 "아이들이 즐겁게 사용할 것을 상상하며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정성들여 함께 만든 놀이시설들이다"면서 "사전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주민 자비로 정성껏 설치한 놀이시설을 해체해 실어간 것은 도로법에도 정면으로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폭도 이렇게까지는 비열하지는 않다"며 "이 시대에 이런 막가파 구청장 행정이 이 도시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그는 이어 "어제도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았다"며 "아이들이 우선이지 않은 야만의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한 놀이터에서 UN이 천명한 어린이 놀권리에 대한 도전으로 알고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배다리마을 주민들은 동구청의 공권력을 이용한 막가파 행정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위를 꾸려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민·형법상 소송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21일 동구청의 해명을 듣기 위해 배다리마을 주민 10여 명이 동구청을 찾아가 두어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도망치듯 구청을 빠져나가는 이흥수 동구청장의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동구는 지난해 11월 아동정책 전담팀 '아동친화도시팀'을 신설하고, 올해 1월 아동친화도시 추진 지방정부협의회에 가입한데 이어 최근 아동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조성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에 이흥수 동구청장은 지난 17일 "어느 도시든 명품 도시가 되려면 먼저 '어린이들이 살기 좋은 도시'가 돼야 한다"며 "아동친화적인 도시환경에서 자란 아동들이 성장해 도시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동구를 만들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연수 기자 ysmh01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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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구청, 배다리마을 생태놀이 시설 없애 '주민 반발'    


- 주민동의 없이 주민 자비로 설치한 배다리마을 시설 파괴행위 규탄

  
 ▲ 동구청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배다리마을 텃밭 내 주민 자비로 만든 어린이 생태시설을 철거하고 트럭에 싣고 있다.사진제공=배다리마을 주민 

인천 동구청이 배다리마을 텃밭에 설치된 어린이 생태놀이 시설 일부를 주민의 동의 없이 해체하고 트럭에 실어가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배다리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21일 오전 9시쯤 인천 동구청 공무원들이 지난해 주민들이 자비로 설치한 텃밭내 어린이 생태놀이 시설을 파괴하고 해체해 트럭에 실어 갔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를 보고 강력하게 항의하고 몸으로 막아서 일부 시설물을 지켰다면서 동구청의 기습적 폭력 행위를 규탄했다.

민운기 스페이스 빔 대표는 "이는 엄연한 사유재산 침해 행위이다"고 못 박고 "지하 산업도로 공유지에 공공의 이용을 위해 만든 시설물을 사전 통보 없이 기습적으로 침탈한 동구청장의 행위는 폭력과 불법 그 자체이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배다리 주민들은 이를 강력 규탄하며, 강도 높은 항의와 더불어 법적 책임까지 물을 것이다"며 "이흥수 구청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집달관 행세를 자처한 관련 공무원들 모두가 공범이다"며 규탄했다.

배다리마을 주민들은 이날 오후 4시경 인천뉴스와의 통화에서 동구청장 비서실장실에서 동구청장의 해명을 요구하며 대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연수 기자 ysmh01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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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예술과 정치의 공통 지평

[문화칼럼] 이소영 / 대구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창조융합학부 조교수

17-02-05 20:28ㅣ 이소영 (sylee5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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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예술이도록 하는 출발점은 무관심이다. 미적 경험은 여타의 개념 규정이나 윤리적 규율, 경향성들이 개입하지 않는 거리두기를 토대로 발생한다. 거리두기는 단절의 경험이다. 거리두기의 단절은 예술의 자유로움을 전제로 한다. 구획된 선들을 따라 가는 삶은 익숙한 감성과 안도감을 주지만, 예기치 않은 풍요로운 감성과의 만남을 제한한다. 미리 주어져 있는 감성을 포획하는 것은 고정되고 경직되고 굳어있는 감성에 안주하는 것이다.

가령 고통의 이미지 속에는 사그라지는 고통의 입자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채 다가올 고통 입자들이 공존한다. 입자들의 격렬한 움직임과 충돌은 새로운 감응의 입자를 탄생시킨다. 그래서 극도의 고통을 표현한 예술작품이 고통을 넘어선 숭고와 성찰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림 속 해박한 미소에서 씁쓸함이나 애잔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345cm, 프라도 미술관>


헐거운 옷에 두 팔을 들어 올린 양민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을 그린 고야(Francisco Goya)는 침략당한 조국, 실패한 시민 봉기로 살육과 학살로 물든 스페인의 현실을 냉소적 인간 드라마로 그려낸 바 있다. 격렬한 붓질이 전하는 피 끓는 분노에서 가슴팍을 내놓은 양민들의 고요한 성스러움을 엿보게 되는 이유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만들고, 우리의 감성을 파열시켜 잠재적 서사나 고밀도의 징후들을 발견하게 하는 예술작품의 매개 역능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 물음을 던지고 개입하며 매개하는 감각체가 예술이다. 이미지의 역능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삶에 접속하고 행위에 개입한다.

예술의 몫은 표현할 수 없는 사건 혹은 존재를 더 민감하게 느끼고, 표현되지 못한 것의 증인이 되고, 인식에 포착된 것들을 끊임없이 창안하는 일에 있다. 규정되거나 명명되지 않았던 사태에 침투하여 그것을 예술로 바꾸는 일, 예술에게 배분되지 않았던 몫을 찾아 틈입하는 일, 그리고 일상에 보이지 않는 편견을 뜯어내는 사건을 포착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고야의 작품은 고도로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정치에 복속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반면 정치와 무관함을 유달리 강조했던 예술의 경우 오히려 정치의 중심에 자리하기도 한다. 그러한 예들은 역사를 통해 자주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예술이 적극적으로 정치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현상하는 정치적 속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삶의 무대는 예술적 공간과 사회·정치적 공간을 감수성이라는 공통감각 위에 재분할, 재배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술이 정치적 행위에 배타적 태도를 고수하려해도 정치성을 담보할 수 밖에 없고, 정치가 변혁을 일구기 위해 창조적인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는 지점에서 예술과 정치는 교차점을 갖는다. 실천의 측면 혹은 해석의 측면 모두에서 예술과 정치는 내밀한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과는 다른 감각을 불러오는 예술, 그 자체로 낯선 대상인 예술은, 세계의 이치를 꿰뚫는 성찰의 크기 만큼 정치적일 수 있다. 동시대 비평의 시각과 냉철함을 담보한 작가적 윤리는 양립 불가능했던 예술과 정치의 만남을 통해 전혀 얘기치 않은 발산을 낳는다.

세계와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는 예술은 자칫 사회, 모순, 질곡, 자본, 권력, 정치, 폭력, 고통과 같은 주제들을 간과하거나 침묵하며 자기만족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자세로 호도될 수 있다. 역으로 사회 참여적 예술은 사회·정치적 조건에 개입과 저항을 시도하여 왜곡과 일그러진 소비사회를 비판하면서 치열한 삶의 태도를 수행으로 옮기지만 자칫 예술 본연의 존재방식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이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베일을 걷어내어 삶 자체와 대면하고자 하면 할수록 예술 바깥으로 구분지어 놓은 영역들과 뒤섞이고 가로지르기에 머뭇거리지 않았음은 수많은 도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사회운동, 대중정치와 같은 사회·정치적 영역도 이념이나 이론, 혹은 정치적인 사안들이 요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 내면의 감수성에 따르고 있었음을 수없이 보아왔다. 위태롭지만 풍요로운 사유의 움직임, 그에 따른 발견이 오늘의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이유이다.



최윤영

 진행  : 국제노동기구보고서를 보면요. 전 세계에서 어른처럼 고된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어린이의 숫자가 2억 명에 달합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남미에서도 가장 심각한 아동 노동현장이라는 맹그로브 숲의 어린이들을 장유진 PD가 취재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위험한 노동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아이들, ILO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4세 미만 일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무려 1억 9,070만 명, 하지만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아동노동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기 힘든 만큼 이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위험한 노동에 동원되고 있다. 맹그로브 숲에서 서식하는 쿠릴조개에도 엘살바도르 어린이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 있다는데... 맹그로브 숲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는 나라전역에서 화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화산이 많은 나라로도 유명한데... 화산재로 비옥해진 농토에서 재배한 품질 좋은 커피와 사탕수수가 엘살바도르의 대표적인 수출품이다. 또 다른 수출품 중 하나는 태평양 연안에서 잡아 올리는 풍부한 해산물, 항구는 만선으로 돌아온 고깃배들로 늘 활기가 넘친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항구주변에는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을 즉석에서 요리해주는 간이식당들이 즐비한데... 다양한 해산물 요리 가운데에서도 엘살바도르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쿠릴이라 불리는 조개로 만든 요리다. 쿠릴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비싼 것은 개당 가격이 우리 돈 3천 원에 달하는 고급 식재료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차로 2시간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한적한 어촌마을 이슬라데멘데스, 이곳은 엘살바도르에서 가장 유명한 쿠릴의 생산지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어야할 평일 아침 9시, 그런데 아이들은 학교가 아닌 선착장에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예닐곱 명씩 무리를 지어 배를 빌려 타고 바다로 나간다. 나룻배를 하루 빌리는 데는 1달러, 주민 대다수가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빈민층인 이곳 아이들에겐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아이들이 탄 작은 배는 약한 파도에도 심하게 흔들려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로워 보였다. 힘들게 노를 저어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맹그로브 숲에 있는 작은 섬, 열대지방 갯벌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는 뿌리를 통해 호흡을 하기 때문에 뿌리의 일부가 땅위로 드러나 줄기와 복잡하게 엉켜 자라게 된다. 그 때문에 빽빽한 맹그로브 나무 사이를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몸집이 작은 아이들 뿐, 아이들은 맹그로브 나무뿌리에 붙어사는 쿠릴조개를 캔다. 하지만 갯벌 깊숙이 숨어 있는 쿠릴조개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수차례 허탕을 친 끝에,


 - 여기 있어요. 여기 저렇게 숨어 있지요. 빼 볼까요? 딱 보면 알아요.


 조개를 캐기 위해선 갯벌 깊숙한 곳까지 파 내려가야 하는데 아이들은 별다른 도구 하나 없이 맨손으로 모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한 어린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작업, 이렇게 맹그로브 숲에서 조개나 게를 잡는 일을 하는 아이들은 이 마을에만 110여 명에 달한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밀물이 들어오는 오후 서너 시까지 강도 높은 노동을 견뎌내고 있었다. 조개를 찾아 더 깊은 숲속으로 이동하는 아이들을 따라가 보았다. 하지만 제작진은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몸이 가벼운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들은 갯벌에 발을 딛기만 해도 무릎까지 빠지는 통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던 것, 또 다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따끔 거렸는데 나무 가시에 찔리고 베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손발도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마르셀로 / 10세  :  이곳에서 일하면 조심해야 돼요. 뱀과 벌레들이 있어요. 이곳에서 다치면 염증이 심하게 생겨 괴로워요.


독충과 독사가 많아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맹그로브 숲, 이로 인해 뱀에 물리거나 조개를 캐다 밀물이 들어오는 데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익사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제작진은 숲에서 일하는 아이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어려 보이는 아이를 만날 수 있었는데... 학교에 가는 대신 매일 이 숲에서 조개를 캐고 있다는 마누엘의 나이는 겨우 9살, 6살 때부터 조개 캐는 일을 시작한 마누엘은 한 번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아이들이 14살까지 의무교육을 받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지만 이곳 아이들은 최소한의 교육기회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누엘의 주머니가 이제 제법 묵직해졌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가 싶었는데 아이가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담배, 9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능숙한 포즈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담배를 왜 피우는 거지?

◎ 마누엘 / 9세  :  벌레를 쫓으려고요.

 - 얼마에 사지?   5센트요.


 아이들이 필터도 없는 독한 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지독하게 들러붙는 모기를 쫓기 위해서였다. 말라리아나 뎅기열 등을 옮기는 모기는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 피우기 시작한 담배에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루 종일 맹그로브 숲에서 잡는 조개는 50여 개, 6시간이 넘도록 힘들게 작업한 것 치고는 그리 많지 않은 양이다. 그만큼 쿠릴을 캐는 일은 쉽지 않다. 어느 덧 밀물로 맹그로브 숲이 잠기는 시간, 동력이 없는 나룻배가 조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 돌아가는 배 위, 아이들은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

◎ 마누엘 / 9세  : 돈이 필요해서요. 이걸 팔아야 돈을 벌수 있어요.


 아이들이 캔 조개와 게는 마을의 한 가게에서 사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힘들게 캐낸 조개를 넘기고 아이들이 받는 돈은 고작 1, 2달러가 전부였다. 도시에서 팔리는 가격에 비하면 아이들이 받는 수입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 마리아  :  이 아이들은 여기에다만 팝니다.

 - 다른 곳에는 팔 수 없나요?  네. 거래처가 따로 있어요.


힘없는 아이들은 부당한 대우에도 달리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세 식구의 가장인 마누엘이 이 일마저 할 수 없게 된다면 당장 생계가 곤란한 상황, 몇 해 전 엄마마저 집을 나간 뒤 아이들끼리만 생활을 하고 있어 마누엘의 벌이가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 크리스티안 / 15세, 마누엘 누나  : 동생이 나가서 일을 해야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러 갈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 일도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세 남매의 끼니를 해결하기엔 모자랄 때가 더 많다.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음식마저 동생에게 나눠주고 마누엘은 또 다시 집을 나섰다.


 - 일하러 갈게  - 수고해.

 

밤에도 일을 해야 하는 마누엘, 그런데 배를 타러 가는 길에 마누엘은 정체모를 알약을 산다.


◎ 마누엘 / 9세  :  잠 없애는 약인데 낚시하면서 잠이 안 오도록 해줍니다.


약은 다름 아닌 각성제였다.


◎ 이사이야  :  사람들이 일하면서 힘이 떨어질 때 이걸 먹으면 기운을 내서 수영을 하던지, 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선 주로 밀물이 들어오는 야간에 고기잡이가 시작된다. 밀물과 함께 마을 바로 앞 바다까지 고깃배가 밀려들어 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부들의 배에 함께 타 조업을 돕고 품삯을 받는다. 마누엘이 연신 그물을 건져 올려 보지만 오늘은 수확이 영 신통치 못하다. 이렇게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 조업시간이 더 길어져 밤을 꼬박 샐 때도 있다고 한다.


 - 언제까지 일하니?

◎ 마누엘 / 9세  : (고기가) 많을 때는 아침 6시까지, 적을 때는 새벽 1시까지요.


고기잡이는 날이 완전히 저문 뒤에도 계속 됐다. 어느 덧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 이른 아침부터 조개잡이에 나섰던 아이들에게 졸음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 잠을 참지 못한 아이들은 준비해온 각성제를 먹기 시작했다. 낮에는 모기를 쫓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밤에는 졸음을 쫓기 위해 각성제까지 먹어야 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아이들, 아이들의 작은 몸이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아올 때까지도 아이들은 여전히 배 위에 있었다.


 - 오늘은 수확이 안 좋아... 자, 마누엘 1달러씩...


아이들 몫은 달랑 1달러짜리 지폐 한 장 뿐, 하지만 이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건 마누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8세 미만 미성년이 인구에 절반이 넘어 노동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엘살바도르에서 아동노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 


◎ 에르난데스 / 플랜 엘살바도르 관계자  : 엘살바도르는 아동인권국제협정에 가입한 국가입니다. 아동인권국제협정에 의해 18세 이하의 아이들은 일 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지만 이 나라의 노동법에 의하면 12세 이상도 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근 병원에선 아픈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는 벌써 몇 달째 심한 기침이 멎지 않아 고통스러웠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병원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니?

◎ 엘가르 / 13세  :  7살 때부터요.

 - 하루에 담배를 얼마나 피우니? 한 20~25개피 피워요.


어린 나이지만 7년 가까이 피워온 담배 때문에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의사는 이곳 의료시설로는 정확한 진단이 불가능해 도시의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 라이 / 엘가르 할머니  : 아빠도 없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아이 엄마가 챙겨주기도 힘들고, 아이 아빠가 그냥 집을 나가버려서요.


아이는 임시처방약만 받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선 또다시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다는 아이,


◎ 올가라모스 / 의사  :  사실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방법이 없습니다. 먹기 위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려면 꼭 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게 이곳 사람들 생각입니다.


그렇게 또다시 맹그로브 숲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들, 도대체 언제쯤 아이들은 이 숲을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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