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이 배다리에 헌책방을 낸 까닭
[기고] 곽현숙 / 아벨서적 대표


1975년 창영동 11번지에서 '정은서점' 이라는 간판을 달고 서점을 할 때 이웃에는 신창수 할아버님이 운영하는 '글천지서점'이 있었다. 여름이면 '글천지서점' 앞에는 어른들이 막걸리 한 병씩 들고 와서 돗자리를 펴고 둘러앉아 할아버지 중국 추억담을 청해 들으면서 즐겁게 한나절을 보내던 일이 눈에 선하다. 중국에는 황사가 심하고 추워서 차를 마시고 몸에 열을 내는 기름진 음식과 40도가 넘는 술을 먹는다고 했다. 말을 타고 다닌 무용담을 얘기할 땐 듣는 이들을 중국대륙으로 몰고 갔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중국에서 고향인 목포로 갔다가 전쟁 무렵 인천으로 오셨다고 했다. 막상 인천에 왔지만 취직하기가 어렵고 물자가 귀한 터라, 있던 책을 종이로라도 팔려고 장터 한 모퉁이에 펴놓았더니 지나던 이가 "이 책 얼마요?"하고 묻는 말에 힌트를 얻어 책장사를 하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개항 이후 서서히 인천으로 모여들던 사람들은 해방 후부터 부쩍 늘어난다.

예를 들어 오래된 상호를 가진 상점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북,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화 출신이었다. 이렇듯 각 도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농경사회에서 상공업 도시로 변해간 인천의 생태를 여실히 본다.

우리는 해방 전후라든지 전쟁 전후라는 말을 떠나 역사를 말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아침 소설가 박태원 선생 아들 박재영 선생이 메일로 보내 온 글속에는 "전쟁을 지나면서 3~4개월 사이에 아버지는 북으로 어머니는 감옥으로. 큰집 식구 따라 피난길에 짚 새끼로 만든 망태를 메고 눈 비탈 산길에 솔방울을 땔감으로 주우려고 갔던 혹독한 고통이 하얀 눈을 보면 떠오른다."라고 쓰여 있다. 박재영 선생은 칠십세다.

칠팔십대 어른들 증언을 들으면, 일제말엽 곡식은 가져가고 콩깻묵( 콩기름을 짜고 걸러진 무거리. 일본사람이 쓴 전쟁 고발적 소설 '인간의 조건'에서도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식량에서 콩깻묵이 나온다.)으로 식량을 배급받아 먹었다고 한다. 적의 전쟁에 착취당하는 공포의 시간을 지나 해방된 나라 경제사정의 어려움은 해방의 기쁨으로만 이겨 갔을 뿐이었다.

출판사정도 그랬다. 1945년 이후 1950년 사이에 나온 책 중에는 거칠거칠한 마분지에 인쇄한 책들을 볼 수 있다. 책 출판이 어려웠음을 책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개항과 함께 인천은 대부분 외국인 거주지였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해방 후 일본인이 1946년까지 물러갔고,  적산가옥(나라에 적이 갖고 있던 집)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은 시장과 고물상으로 들어왔다.

전쟁 전 서울 책방의 역사를 보더라도 고서점이 새 책방보다 많았다.

박경리 선생께서 배다리 시장에 들어선 1948년도 사정 또한 다르지 않다. 선생 소설 속에는 '가난해진 어른이 고물상에서 사 입은 작은 듯한 신사복'이 등장한다.

책을 보기 위해 수업도 빠져 가면서 읽었다는 선생께서 종이로 취급되어 고물상에 쌓여 있는 책을 보고 얼마나 흥분하셨을까? 사고 또 사도 계속 들어오는 책값을 다 감당할 수 없어 작은 가게를 물색해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 나누는 일이 시작됐을 책방을 상상해 본다.

20대 중반의 지성인이며 그 시대에 월급을 받는 관료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열정으로 쌓여가는 책을 다시 고물상에 파는 게 아니라 책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팔아서 순환하는 방법으로 책장사를 선택하셨다고 본다.

장사는 서로 가치를 교환하는 소중한 행위이다. 많은 사람을 조금은 가깝게 스쳐 보는 일이며 자신의 내성을 들추어 보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박경리 선생께서 20대에 책방을 하셨다는 것은 여러 면으로 자산을 축적한 시간라고 생각한다. 헌책방의 경우 그 시대 책뿐 아니라 당시대에 볼 수 없던 책들도 넘나든다. 책을 좋아하는 책방지기라면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쁨에 책방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토지문화관에 갔을 때 김영주 이사장이 전해준 박경리 선생 말씀 속에도 들어가 있다

"책을 분류하다가 희귀한 책을 만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책을 읽고, 집에 가져와서도 밤새 읽었다." 여기서 희귀한 책이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나, 책으로 만들어졌으나 그 시대에 통용되지 않아서, 혹은 당대 금서여서 일반인은 구하기 힘든 책을 말함이다. 독서 열정을 몸으로 실현한 독서력과 책방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고서점 경영에서 책을 다루는 노동과 많은 사람을 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일의 소득은 경제보다 더 큰 이익에 있다. 작은 공간에서 세계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익이 있으며, 책을 자유롭게 순환시키는 역사의 광장이다. 수없이 버려지는 책들. 그래도 헌책방을 통해서 자료들이 보존되며 국익을 담당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 일은 책장사가 그 의미를 알든 모르든 놓여진 사실이다.

아벨서점에 한 두 달에 한 번씩 들르는 능허대와 인천신문 참성단 주필이셨던 오광철 주필한테 박경리 선생이 책방을 하셨던 시기 책방 모습을 듣는다.

내동 쪽에 새 책 서점과 경동 고개 넘어서 새 책방 '소피아서점'이 있었고, 경동 목욕탕 근처에 인천고 서명원 선생이 하던 '문범서점'에는 일본책이 많이 있었다. 새 책도 함께한 고서점이었다고 한다. 중앙시장 쪽에도 서너 집 있었는데 고서점으로 주로 일본책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상상도 안 가지만 그때는 일본어권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글보다 일본글에 익숙한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경리 선생께서도 한글을 확실하게 배우기 위해 남편이 세종대 전신인 사범대를 보내셨다고 했다.

젊은 날, 책에 대한 박경리 선생 열정과 헌책방 경영은 삶과 독서를 하나로 꿰어낸 멋진 예술작품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몸의 수고를 맘껏 부려 성실을 끌어낸 젊은 아낙의 용기, 책과 삶이 하나라고 손에서 호미를 끝까지 놓지 않으며 능동적 생명의 희망을 본으로 보여준 어른이었다.

어느 날 호미를 들고 밭을 매는 박경리 선생 등 뒤에 인사하려고 서 있는 사위 김지하 선생에게 "자네 손에 호미 들어 본 적 있나?"라고 묻는 소리에 당혹스러워 "아니요" 라고 대답하면서 진땀을 흘렸다고, 김지하 선생께서 말씀하셨다고 문학관 해설사가 사담 중에 말했다.

오늘도 박경리 문학공원 문학관 해설에서는 인천 동구 금곡동에서 헌책방을 하셨다고 해설한다. 일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 배다리에서 살던 시간이었다고 선생께서 말씀한 회고담을 문학관에 갔을 때와 배다리에 답사를 왔을 때도 밝힌다. 배다리에 사셨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남편 김행도씨와 따님 김영주, 그리고 배다리에서 낳은 아드님 김철수, 따듯한 가족과 어머님의 든든한 보호 아래 책을 맘껏 만져보고 읽을 수 있었던 행복을 말씀하셨음을 읽어 본다.

박경리 선생 작품 시장과 전장에 나오는 시장모습을 상기하면서 "혹시 책방이 중앙시장 쪽에 있지 않았을까?" 추리해 본다. 사셨던 자택 주소는 금곡동 59번지였다는데, 금곡동에서 헌책방을 하셨다는 해설사 말 그대로라면 더욱 그러하다.

데미안헤르만 헤세 저 첫 번째 『데미안』을 읽었던 것이 중학교 때였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은 책이었지만 단지 글자만 읽었다는 생각만 남았었다. 두 번째 『데미안』을 다시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나만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책을 잡았었는데 그 때조차 『데미안』의 줄거리조차 남지 않았다. 유명...
출처 : 꾸마이 책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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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위기]‘진보의 재구성’ 때 풀고가야 할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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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디어다음] 국회/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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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한기 기자]

"올레에서 중요한 건 생태관광(eco-tourism)보다 힐링(healing)이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자연경관'보다 '치유'를 더 강조한다. 제주올레 구상 단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다. 자연생태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환경이라고 한다면, 치유는 그러한 조건을 활용해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켜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 이사장이 입에 달고 사는 '올레 정신(spirit)'과도 일맥상통한다. 올레는 단순히 빼어난 자연경관을 즐기는데 머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길을 걷고 느끼며 새롭게 거듭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다.





지난 2월 29일부터 3월 3일까지 사가현 다케오, 오이타현 오쿠분고,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이와지마, 가고시마현 이부스키 등 4곳의 규슈올레 코스가 문을 열었다. 사진은 다케오 코스.

ⓒ 이한구

이러한 올레 철학은 '연대'에서도 드러난다. 제주올레는 다른 나라와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 2010년부터 스위스 레만 호수 와인길, 영국 내셔널 트레일인 코츠월드 웨이, 캐나다 브루스 트레일 구간 등과 '우정의 길' 협약을 맺었다. 각자의 길을 존중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는 방식을 찾는다. 개방하되 강요하지 않으며, 서로의 장점이 상대방에게 스며들도록 천천히 기다려주는 느림의 미학은 국제 연대에도 녹아있다.

그런 점에 비춰볼 때, 지난해 8월 체결한 일본 규슈(九州)올레와의 업무 제휴는 독특한 연대 방식이다. '올레'라는 이름을 쓰도록 허용했다. 업무 제휴비 100만 엔(약 1400만 원)이 건네졌고, 매년 계약이 갱신된다. 사실상 '올레' 브랜드를 수출하고, 노하우를 전수한 것이다.

지난 2월 29일부터 3월 3일까지 사가현 다케오 코스, 오이타현 오쿠분고 코스,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이와지마 코스, 가고시마현 이부스키 코스 등 4곳의 규슈올레가 문을 열었다. 업무 제휴 7개월만이다. 기획 단계부터 코스 선정 및 수정 작업, 개장 행사까지 제주올레가 함께 했다.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 문화 수출에 가깝다. 규슈올레는 이런 친숙함 때문에 초기부터 한국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다케오 코스에 있는 수령 3000년 이상된 녹나무. 둘레 20m인 이 나무 안은 다다미 12장(6평)을 깔 수 있을만큼 넓은 공간이다. 일본 사람들은 파워 스팟(power spot)으로 좋은 기운을 받는 영험한 장소로 여긴다.

ⓒ 이한구





일본 규슈 사가현 다케오 코스의 다케오(武雄)신사 옆 대나무 숲길. 이 부근에 수령 3000년 이상된, '지구의 안테나'라 불리는 녹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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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이 제주올레에 '러브콜'을 보낸 까닭

1년 전인 지난해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을 강타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발생했다. 후쿠시마에서 북규슈 후쿠오카까지는 약 1000km. 서울~후쿠시마의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같은 일본이라는 인식 탓에 잘 나가던 규슈 관광은 직격탄을 맞았다. 일본정부관광국에 따르면, 2010년 244만 명이었던 한국 관광객이 2011년 166만 명으로 크게 줄었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대지진 직후에는 규슈조차 한국 관광객이 사실상 '제로'였다.

대지진 직전만 해도 규슈는 조만간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날인 3월 12일에 일본철도공사(JR)의 규슈 신칸센이 개통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신칸센은 북규슈 후쿠오카와 남규슈 가고시마 서부를 종(縱)으로 연결하는 고속 철도다. 신칸센 개통은 규슈 관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또한 대지진이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갔다.

규슈는 '반전 카드'가 필요했다. 새로운 관광객을 늘리는 일보다, 빠져나간 관광객의 발길을 되돌리는 일이 더욱 어려운 법이다. 2007년부터 건강과 여유를 생각하는 질 높은 여행이라는 컨셉트의 '로하스(LOHAS) 규슈' 사업을 벌여왔지만, 발상의 대전환이 요구됐다. 대지진의 여파가 진정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새로운 여행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했다.

그때 눈에 띈 것이 '제주올레'였다. 생태관광을 넘어 치유여행으로, 제주 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꾼 올레는 둘도 없는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규슈관광추진기구의 이유미씨는 "규슈는 올레가 만들어지기 전 제주처럼 2박3일이면 끝나는 여행으로 인식돼 왔다"며 "올레가 바꿔놓은 제주 관광의 변화를 보고 새로운 해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점 찍고 이동하는 '빠른 여행'에서 벗어나, 선으로 움직이는 '느린 여행'이 주는 묘한 매력에 빠져든 것이다.





오이타(大分)현 오쿠분고 코스는 분고오노(豊後大野)시의 작고 소박한 무인 기차역인 JR 아사지(朝地)역에서 출발한다. 앙증맞은 노란색 두 칸짜리 기차가 이 역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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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타(大分)현 오쿠분고 코스의 오카 산성터(岡城跡). 유명한 작곡가였던 타키 렌타로의 노래 < 황성의 달 > 이 오카 산성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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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올레의 역설', 편안한 관광에서 불편한 여행으로

"마을을 지날 때는 집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기 / 사유재산 촬영할 때 사전 동의 구하기 / 먹고 쓰다 남긴 쓰레기는 꼭 챙겨가기 / 과일 껍질 길가에 버리지 않기 / 농작물에 손대지 말기 / 길가의 꽃과 나뭇가지 꺽지 말기 / 가축과 야생동물 괴롭히지 말기 / 산 정상에서 소리치지 않기 / 간세 위에 올라타지 말기 / 정해진 길로 다니기 / 놀멍 쉬멍 여유롭게 즐기며 걷기 / 올레꾼과 주민에게 정다운 미소와 눈인사 건네기." 규슈올레 팸플릿에 쓰여진 '올레 에티켓'이다. 지켜야 할 일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많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10~20km의 길을 스스로 걸어야 한다. 안내자도 없다. 제주 조랑말을 상징하는 표식 '간세'와 '리본'이 유일한 가이드다. 지금까지의 여행이 눈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올레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올레는 불편 투성이다. 그런데도 기꺼이 불편한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늘고 있다. 편한 관광을 밀어낸 불편한 여행 신드롬, 그게 '올레의 역설'이다.

지난달 28일 한·일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서명숙 이사장은 "규슈올레가 한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고도성장과 아스팔트 문화에 지친 일본인들에게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찌든 언론인 생활을 접고 떠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2007년 제주올레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가 길에서 얻었던 위안을 나누었다. 무엇보다 규슈올레에 전해주고 싶은 게 스스로 몸을 움직여 정신을 맑게 하는 '올레 정신'이었다.

규슈올레가 '안티 공구리'로 대변되는 제주올레의 길 철학을 처음부터 쉽게 이해한 건 아니었다. 다케오 코스는 걷기 편하게 하려다보니 정작 아스팔트 중심으로 길을 내 여러 차례 코스를 수정·보완했다. 다케오시 관광협회의 시라하마 사무국장은 "올레 정신을 살리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한다. 아마쿠사 이와지마 코스는 제주올레쪽과의 논의 과정에서 시작점과 종점이 모두 바뀌었다.

정도 차만 있을 뿐 다른 코스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규슈올레는 다듬어졌다. 아스팔트 도로보다는 흙길이, 편안한 큰 길보다는 불편한 작은 길이 늘어났다. 대신 일상 생활에서 보고 듣지 못했던 자연과 지역문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차를 타고 가거나, 큰 길로 걸었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규슈의 속살이 차츰 드러난 것이다. 이는 제주올레 탐사팀과 디자이너, 핵심 간부들이 번갈아 오가며 '잔소리에 가까운' 조언을 아끼지 않은 탓이다. 서 이사장이 "자연만 일본 것이지, 명칭과 시스템을 전부 수출했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마모토(態本)현 아마쿠사(天草)·이와지마(維和島) 코스의 소또우라 해안가. 제주올레와 가장 닮은 코스로 평가받는다.

ⓒ 이한구





구마모토 현 아마쿠사·이와지마 코스의 소또우라 해안가.

ⓒ 이한구

[#3] 규슈올레를 만든 수봉이들, 여행의 개념을 바꾸다

제주올레 7코스 시작점인 외돌개에서 3.9km 걸어가면 '수봉로'가 나온다. 이 길은 올레꾼들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자연생태길이다. 수봉로는 세번째 코스 개척 시기인 2007년 12월, 올레지기인 김수봉씨가 염소가 다니던 길에 직접 삽과 곡괭이만으로 계단과 길을 만들어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이런 까닭에 '수봉이'는 올레꾼들 사이에서 제주올레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이름 자체가 '헌신적인 올레지기'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규슈올레 각 코스에도 그런 '수봉이'들의 땀과 노력이 배어있다. 서명숙 이사장은 규슈올레 4개 코스 개장 축하 만찬 행사장에서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해당 코스 '수봉이'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런 수봉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규슈올레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서 이사장의 생각이다.규슈관광추진기구해외유치추진부의 모치마스 차장과 이유미씨가 규슈올레 전체 기획·진행의 수봉이였다면, 아래 소개하는 사람들은 직접 길을 냈던 각 코스의 수봉이였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이렇게 많은 '보물'이 있었다는 게 새로운 발견이어서 감동했다." 다케오 코스의 '수봉이'인 미조카미 마사카츠(56·다케오시 관광과)씨는 맨 처음 올레 길을 교사인 아내와 함께 걸었다. 규슈관광추진기구나 제주올레 팀에게 선 보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다. 다케오 코스가 만들어지면서, 그동안 사람 통행이 없었던 산악유보도와 시라이와운동 공원 뒷길 등이 새로 태어났다. 이케노우치 호수 뒷편 산길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돼 나뭇가지로 거미줄을 헤치며 탐사했다. 그는 상급자 코스만 10차례 이상 오갔다. '올레 시장'이 되고 싶다는 다케오 시장의 격려도 미조카미씨에게 큰 힘이 됐다.

"느리게 걷는 것, 순수하게 감동하는 것, 평화로운 마음이 되는 것." 오쿠분고 코스의 '수봉이'인 나오야마 타카시(48·오이타현 관광과)씨가 꼽은 '올레 정신'이다. 그는 지난해 8월 제주올레와 규슈관광추진기구의 업무 제휴 협약식에 자비로 참가할 정도로 초기부터 관심이 많았다. 지리학과 출신인 나오야마씨는 올레 길을 내면서 20여 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찾은 길도 있었다. 또다른 오쿠분고 수봉이인 나가요시 토시미츠(53·분고오노시 관광협회)씨는 "일본도 대부분 포장 도로여서 자연의 흙길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한다. 그는 올레 길이 무엇보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산과 바다가 만나고, 정상에서 다도해 풍광을 볼 수 있어 제주올레 팀이 가장 제주올레다운 길이라고 평가했던 게 아마쿠사 이와지마 코스다. 처음에는 접근성이 불편해 규슈관광추진기구에서 난색을 표했던 곳이기도 하다. 코스도 아마쿠사시가 처음 제안했던 섬에서 다른 섬으로 바뀌었다. 이 곳의 '수봉이'인 스기모토 겐이치(39·아마쿠사시로 관광협회)는 무엇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 자연과 주민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코스가 만들어진 게 기뻤다. 또다른 '수봉이'인 니시가마 유우야(가미아마쿠사시 관광과)씨는 개장 행사가 열린 다음날이 결혼식이었는데도, 결혼 준비보다는 올레 길 개장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런 탓에 결혼 준비를 걱정하는 여자친구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는 이 올레 길이 아마쿠사풍 여행의 상징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걷고 싶었던 길을 올레 코스에 넣을 수 없어, 또다른 길을 찾아야 할 때 가장 어려웠다." 이부스키 코스의 '수봉이'인 하마다 케이시(32·가고시마현 관광과)씨는 규슈올레 수봉이들 가운데 가장 어리다. 제주올레를 체험한 탓에 올레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하마다씨는 주말도 반납하며 길을 찾고,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며 발로 뛰어다녔다. 또다른 '수봉이'인 츠루타 시게타카(이부스키시 관광과)씨는 "올레꾼들이 가이몬다케나 나가사키바나 같은 이부스키의 풍요로운 자연을 맛봤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츠마의 후지산'으로 불리는 가이몬다케(해발 922m)는 신기하게도 이부스키 올레 길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나가사키바나는 한국의 땅끝마을처럼 규슈 최남단에 위치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가고시마(鹿兒島)현의 이부스키(指宿) 코스. 나가사키바나의 검은색모래 해변이 일품이다.

ⓒ 이한구





가고시마현의 이부스키 코스는 JR 최남단 역인 니시오야마(西大山)에서 출발한다. 이른 봄에 노란 유채꽃이 만발했다.

ⓒ 이한구

[#4] 제주올레가 바꾼 여행 지도, 규슈올레도 가능할까

"아마쿠사 시에서 2만5000명을 데리고 제주올레에 가겠습니다. 그러면 답례로 제주올레에서는 25만명을 아마쿠사로 보내주세요." 지난 3월 1일 제주올레팀, 한국 취재진과의 만찬 자리에서 가와바타 유유기(40) 가미아마쿠사 시장이 던진 말에 웃음보가 터졌다. 혈기방장한 젊은 시장의 과장된 말이지만, 뼈 있는 농담이었다. 이틀 전, 한일 공동 기자회견장에서는 '올레라는 명칭에 대한 일본 내 반감은 없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규슈관광추진기구의 오오에 히데오 본부장은 "올레는 브랜드 가치가 충분하고 한국 관광객들도 (규슈올레를 보면) 제주올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인들은 외래어를 잘 쓰는 게 특기"라고 받아 넘겼다.

이처럼 규슈올레 길을 낸 4개 코스의 지자체 관계자와 관광협회 임원들은 모두, '올레'가 침체된 규슈 관광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특히나 제주올레에 익숙한 한국 여행객들이 규슈올레에 찾아와주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규슈를 찾는 외국 관광객 가운데 한국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체된 규슈 관광의 터닝포인트를 한국에서 찾으려고 노력중이다.

이런 절박함이 규슈올레를 만든 동력이 됐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한국 관광객들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면, 자칫 규슈올레가 제주올레의 형식만 본뜬 유사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서명숙 이사장이 "외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지친 일본인들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며 "도쿄나 교토에 사는 사람들이 세컨드 라이프를 규슈에서 보내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레의 정신과 가치는 공유하되, 규슈올레만의 색깔과 매력을 가꿔나가야 한다는 게 제주올레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조언이다.

제주올레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는 각 코스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제 한두 코스만 더 개발되면, 섬 전체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는 완결된 '통 올레'가 완성된다. 땅 크기가 남한의 절반 가량되는 규슈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코스 시·종점에는 걷기 여행의 피로를 풀어줄 온천들이 많다는 건 규슈올레의 매력 포인트다. 그리고 수령 3000년 이상된 녹나무, 아마쿠사시로 같은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의 스토리텔링은 규슈올레 여행에 활력소를 제공해줄 것으로 보인다.

서명숙 이사장은 "올레 길에는 좌우가 없다"고 했지만, 올레 길에는 국경도 없었다. 그렇기에 제주올레가 규슈올레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는 '길의 연대'이자 '길의 진화'다. 올레지기가 만들고, 올레꾼들이 걷는 올레 길은 아날로그 방식인데도 불구하고, 디지털 시대의 '집단지성'이 녹아 있다. 끊임없이 수정·보완되고, 매일 걸어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올레 폐인들은 '아름다운 중독'에 빠진다고 고백한다. 규슈올레는 이미 그 늪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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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진의 향연-지구상상전
 
‘지금-여기’만 찍을 수 있는 속성 벗어나 생각의 날개
   컴퓨터 합성까지…그저 눈으로만 보고 멋대로 즐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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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10번, ⓒ지아코모 코스타

    

 2일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된 <현대사진의 향연-지구상상전>(한겨레신문사·환경재단 공동주최)은 현대작가 10인이 상상한 지구와 자연과 인간을 다루고 있다. 알다시피 사진은 그림과 달라 ‘상상’할 수가 없는 매체다. 카메라 앞에 펼쳐져 있는 동시대 시공간의 대상만 찍을 수 있는 것이 사진이므로 미래에 벌어질 일, 과거에 지나간 일들은 기록할 수가 없다.
 이번 <지구상상전>은 그러한 사진의 속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노골적으로 상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상상의 세계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펼쳐지는 무대이기도 하며 과거의 일이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지나가버린 상황을 자유롭게 재연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10명의 작가는 저마다 다른 작가적인 정신세계로 나름의 다른 상상력을 선보인다. 전체적으로 봐서 이번 전시는 아이들이 환영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어른들도 아이들의 시선에서 본다면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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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주의 새, ⓒ아르노 라파엘 밍킨넨


 
 환경-예술-치유 세 주제
 
  전시는 크게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구를 뜻하는 영어 단어 ‘E ART H‘를 해체하여 각각의 부분을 재구성했다. 그 처음은 E에서 파생한 환경(environmental)이다. 닉 브랜트, 조이스 테네슨 등이 등장한다. 아프리카에서만 사진을 찍는 닉 브랜트는 야생동물을 찍으면서도 망원렌즈를 쓰지 않는다. 그는 가까이 가야 동물들의 개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인물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해보라. 30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인물의 영혼을 담아내길 기대할 순 없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전시장의 초반부에서 대형으로 인화된 코끼리, 기린, 사자 등을 보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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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앞의 사자,  ⓒ닉 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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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느, ⓒ조이스 테네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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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23, ⓒ루드 반 엠펠

 


 둘째는 ART, 말 그대로 예술적 사진들이다. 카메라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컴퓨터를 통해 합성을 했고 그 덕에 디지털아트의 자유분방함이 뛰어다니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존 고토, 지아코모 코스타, 데이비드 트라우트리마스가 맡고 있다. 존 고토는 디지털아트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그림 같은 사진’들의 도움을 받아 미래의 동화를 그려냈다. 이번에 선보이는 <플러드스케이프>시리즈는 홍수가 주제다. 자연재해에 대한 인간의 행동양식과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감독들이 대형재난영화를 통해 미래를 걱정하는 것과 같아 보인다.
 마지막은 H에서 따온 치유(healing of the earth)다. 환경오염의 현장도 보여주고 오염을 극복하려는 실천, 대안을 제시한다. 피포 누엔-두이, 데이비드 마이셀 등의 풍경사진이 겉으로는 아름답다. 그러나 작가들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불편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외형적인 아름다움으로 미래를 극복, 치유하고 싶어 했음을 이해하겠다.
 
 아픈 지구, 어쩌면 좋을까
 
 그러나 이 전시는 사진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들어선 안 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미술이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사진전도 그 내용과 정면으로 마주서서 속속들이 파악하려고 들면 땀이 나고 눈과 귀와 다리가 아플 것이다. 그러니 이번 전시의 감상 포인트는 전시의 제목처럼 상상력이다. 눈에 보이는대로 보고 멋대로 상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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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프로젝트 21번, ⓒ데이비드 마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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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에서 승선하다, ⓒ존 고토


 다만 열 명의 작가들이 하나같이 지구의 환경과 미래를 걱정하면서 작업을 했다는 것, 한 가지만 새겨두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지구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사진이 상상한 지구’를 보고 나서 미래에 대한 해법을 어린이들만의 순수한 상상력으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열 명 작가들의 바람이다. 에티오피아와 몽골에 나무 보내기운동, 초록색이 들어간 의상을 입은 입장객은 반값으로 할인해주는 환경의 날(6월 5일) 이벤트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부대행사가 전시장에서 펼쳐진다.   전시는 8월 10일까지 열린다.
 곽윤섭기자 kwak1027@hani.co.kr

 

 

 

 

 

출처 : 오재진
글쓴이 : 오재진 나무 원글보기
메모 :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_ 안철수 교수 편

2010/06/14/ tvN

 

백지연(이후 백)한 사람이 평생 이루기 어려운 여러 가지를 혼자서 이뤄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하거나 쫓아가는 것에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분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늘 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 분을 좋아합니다. 오늘 초대 손님은 안철수 씨입니다. 제가 소개를 하면서 ‘안철수 씨’ 이랬던 건 호칭이 너무 많으셔서요. 뭐라고 불리 울 때 제일 편하세요?

 

 

안철수(이후 안)가 편한 것보다는 불러 주시는 분이 편한 호칭이 저도 듣기에 참 편한 것 같고요. 예를 들면 지금 제가 가진 호칭들이 카이스트 교수라든지 포스코 이사회 의장,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것들을 다 하나로 관통하는 흐름이라고 할까요. 제가 하는 일은 ‘CLO’입니다. Chief Learning Officer.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 일. 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요.

 

백 편의상 가르치시는 직업을 좋아하시니까 ‘교수’라는 직함을 부르는 게 이 시간에는 낫겠네요.

 

안 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백 요즘에 워낙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소위 말하는 SNS(Social Network Service)라고 하는 이것을 대부분 많이 쓰고 관심이 많잖아요 역시 그쪽에 대해서 관심 많고 연구 많이 하시죠?

 

안 요즘 보면 그런 것들이 예전에는 그냥 웹 기능 중의 하나였었는데요 지금은 그런 것들이 점점 더 플랫폼화 되고 있어요 무슨 뜻이냐면 마치 ‘아이폰’ 같은 것들이 그냥 전화만 쓰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여러 가지 어플리케이션들을 쓸 수 있고요 여기에 다른 업체들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그것을 개방함으로써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지죠 그런 게 아마 앞으로 향후 10년 정도는 큰 흐름이 아닌가 그런 것에 대비해야 우리나라도 여러 가지 앞으로 나아가는데 물리적인 방해를 받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백 우리나라 휴대전화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아직은 높은 편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놔두면 위험할 것이라고 보시나요?

 

안 네, 제가 처음 애플 ‘아이폰’이 한국에 상륙했을 때 대기업 임원분들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많은 분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면 ‘아이폰’ 같은 것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좀 더 사용하기 편하고 좀 더 예쁘게 디자인이 되고 좀 더 기능이 많아서 그런 것이니까 이런 것들만 잘 보강하면 우리가 다시 한 번 이겨 볼 수 있지 않겠냐 그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그 말씀을 듣고 오히려 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 기계와 기계만 보고 비교해 보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겠는데 사실은 그게 여러 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자기가 스스로 나서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콘텐츠를 제공해주고 그런 생태계를 만든 게 진정한 힘이거든요 그런데 생태계는 안 만들고 기계만 만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인 거죠

 

 

 

백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IT산업 쪽에서는 앞을 내다보는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태어나서 제일 욕을 많이 먹었을 때 그때 기억나세요?

 

안 1999년이니까 만 11년 전인데요 벤처 성공 확률이 낮은 법인데 우리나라는 100% 성공을 한다고 하니 이게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경제신문을 봤어요 그런데 신문에 어떤 기사가 있었느냐 하면 ‘코스닥에 상장된 KTF의 시가총액이 거래소의 SKT를 뛰어넘었다’ 그때 제가 확신을 했죠 이건 정말 거품의 증거라고 확신을 했어요 그래서 저랑 친한 기자와 인터뷰를 했어요 지금 거품이 심각한데 이런 일들이 바뀌지 않으면 내년에는 2000년이 되면 3가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했어요 첫 번째로는 벤처기업에 잘못 투자해서 자금을 날린 투자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고 두 번째로는 벤처기업가 중에서 금융사범들이 생길 것이고 세 번째는 코스닥은 하락 곡선을 그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고요 그런데 그 신문에 대문짝처럼 보도된 날 제 평생 제일 고생했죠, 아침부터.

 

백 그때 기사제목이 그렇게 나지 않았나요? ‘한국의 벤처 95%는 망한다’ 다 벤처에 투자할 때인데 국가적으로도 밀고.

 

안 네, 그래서 전화를 받는데요 벤처기업 사장이랍니다. 그런데 그 전날까지 자기 회사에 투자하기로 했던 투자자가 있었는데 제 인터뷰 기사를 보더니 투자하기를 철회했대요 그래서 저보고 물어내라고 그런 사람도 있고요 또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욕하는 거죠 5분 내내 욕을 하고 전화를 끊어요 정말 한국말로 이렇게 다양하게 욕을 할 수 있구나 그것도 알 수 있었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참 서운하더라고요 단기적인 시각으로 그렇게 제 발언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곡해를 하시니까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백 1888년에 났던 기사제목 기억나세요?

 

안 글쎄요, 아마도 ‘의사가 백신 만들었다(?)’ 이런 식의 가벼운 사회 난이니까요 가십성으로 났던 거 같습니다.

 

백 그렇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백신이었잖아요?

 

안 결국은 제 운명도 바꾸고 직업도 바꾼 그런 일이 됐었죠

 

백 그런데 의사로 계시다가 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이 보이셨을까요?

 

안 제가 했던 일이 아마도 연구 쪽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기계 자체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기계를 만지면 좀 더 잘할 수 있을 줄 알고 이제 연구 파트로 가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컴퓨터도 접하고 공부하게 됐고요 그래서 컴퓨터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도 제가 의학 연구에 다른 쟁쟁한 연구자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뭔가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남들이 못 가지는 특기 하나는 가져야 하겠다’ 그런데 그게 제가 취미로 하던 ‘좋아하던 컴퓨터를 활용하면 좀 더 잘 할 수 있겠지’ 그게 계기가 됐던 건데요 그 생각이 결국은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죠)

 

 

백 안철수 교수께서는 실패는 해보셨나요?

 

안 의대를 그만 두고요 그러니까 의사를 그만 두고 사업을 할 때 처음부터 참 힘들었죠 그래서 4년 동안을 매달 월급 줄 걱정 하면서 살았는데요 안철수연구소가 지금도 월급날이 25일인데 그 25일에 월급을 주고 나면 월초가 되면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월급 줄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고생고생해서 월급을 만들어 놓고 나면 또 다시 월초가 되고요 그래서 그 때는 4년 내내 들었던 생각이 제발 한달 만이라도 두 달치 월급을 모아서 그 다음 달 월초엔 고민을 안 해봤으면 좋겠다 그 때를 떠올려보면 공포스러워요

 

백 공포스러우세요?

 

안 그런 것들이 4년 내내 계속됐다고 생각해보시면 아마 아실 수 있을 텐데요

 

백 공포스럽죠, 액수도 많고요

 

안 예, 그리고 회사 만들고 2년째인가요 어느 날 이렇게 회계장부 검사를 했어요 제가 했던 일이 회사 작을 때는 CEO가 모든 일을 세부적으로 다해야 됩니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직원들 다 퇴근한 다음에 전표 가지고 10원 한 장이라도 틀리지 않을까 계속 검산 하는 게 제 일이었거든요 밤 8시, 9시 정도에 정신없이 계산기 두드리다가 갑자기 ‘내가 뭐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백 이 좋은 머리를 그 단순 노동에 쓰셨다는거죠?

 

안 그런데 꼭 해야 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이제 4년 동안 계속 했다고 상상을 해보시면 충분히 실패라는 것에 대해서 같이 이렇게 안고 살았던 셈이죠

 

 

백 후회도 하셨나요?

 

안 제가 감정소비하는 후회는 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비교도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그나마 좀 더 버틸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 그러면 회사를 차리셔서 4년 동안은 ‘월급을 어떻게 하나’ 걱정을 계속 하시다가 어떤 것이 전기(轉機)가 됐을까요? 다시 흑자로 돌아서고?

 

안 1999년 4월 26일 날, CIH 바이러스라는 게 아침 9시에 컴퓨터를 켜는 사람의 컴퓨터를 전부 망가뜨렸어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추정인데 30만 대에서 50만 대 정도의 컴퓨터가 동시에 망가졌거든요

 

백 그때 컴퓨터가 많지도 않을 때죠?

 

안 네, 많지도 않았을 때인데요 그러면서 그전까지는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이라는 게 선택사항이었던 거죠 그러던 게 이 사건이 한 번 터지니까 피해가 너무 심각해서 도저히 그냥 놔둘 수가 없게 된 거죠 그러면서 필수품이 되었어요 그래서 한 단계 올라섰어요 그러니까 경영학적으로 보면 시장의 크기가 엄청나게 갑자기 급성장하게 된 거죠

 

 

 

백 그것이 계기가 돼서 그때부터는 월급 걱정 안 하셨나요?

 

안 네, 월급 걱정은 안 하게 됐고요 그런데 나름대로 성장하면 성장하는 대로 그게 또 기회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위기의 시작일 수도 있거든요

 

백 그때는 어떻게 대처하셨어요? ‘아, 이것 잘 된다... 그런데 나한테 위기구나’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안 그건 우선은 시장이 커졌을 때부터 위기라고 생각을 했었던 게요 1년에 시장 크기가 4배나 커졌어요 4배면 얼마입니까? 300%거든요 그러니까 거의 평소에 100배 이상 커지게 되면 그건 뭐냐면 더는 기회가 아니고요 그전까지 1, 2, 3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준비된 순서대로 등수가 새롭게 매겨져요 그렇게 되면 그전까지 아무리 작은 데서라도 1위하고 있던 데는 1위 뺏길 굉장히 위험한 순간인 거죠

 

 

백 그런 위기와 여러 가지 굴곡을 거치셔서 직원들 300명, 매출 400억 이즈음에 ‘우리 회사가 잘 됩니다’라고 기자회견을 하는 줄 알았더니 거기서 대표이사에 물러난다고 깜짝 발표하신 거잖아요 또 그 결정을 하실 때는 왜 그러셨어요?

 

안 주위를 둘러보니까 작게는 소프트웨어업계 또 크게는 벤처나 중소기업들이 초토화되기 시작할 때가 아마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계속 힘들어하고 새로운 좋은 기업이 생기지도 않고 젊은 사람들이 새롭게 도전하지도 않고 패배감에 젖어 있고 그런 모습들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제가 그때까지 가졌던 경험이나 지식을 이용해서 이런 산업전반적인 성공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이 그 다음 날부터 매일 생각이 나요 잊히지가 않아서요 계속 고민을 하다가 이게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백 그런데 결정을 하실 때 그러면 항상 이런 고민을 하시나요? 나만 위한 일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일?

 

안 그것도 있고요 또 의미 있는 일 또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일인데요 죽고 나면 제가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제가 있음으로써 여러 가지 사람들의 삶이나 생각이나 어떤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으면 제가 그냥 덧없이 사라지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그래서 제가 없을 때와 비교해서 존재했다가 사라진 이후에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라든지 제도라든지 또는 제가 쓴 책이라든지 만든 조직이라든지가 여전히 존재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면 그게 제가 살았다 없어지는 어떤 값어치가 있겠다는 생각이죠 그래서 제가 죽을 때 이 인생을 성공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런 흔적들일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흔적을 남기는 게 제 모든 판단 기준의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백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정의하는 성공은 이 땅에 와서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하실 수 있잖아요 특히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으세요? 어떤 걸 변화시키고 싶으세요?

 

안 제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가 책이거든요 글을 쓰다 보면 그런 유혹에 많이 빠지죠 그 순간에 자기 이해타산에 맞춰서 글을 쓴다거나 또는 자기가 그 순간에 좀 더 멋있게 보이는 그런 걸로 글을 쓸 수도 있는데요 만약에 그렇다 보면 정말로 부끄러운 사람이 되겠더라고요 사람은 죽어도 글은 남기 때문에 그게 그 당시에는 좋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중엔 굉장히 부끄러워지겠다 그래서 거창하게 말씀드리면 글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써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항상 글을 쓸 때는 저는 그렇게 쓰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는 책이 가장 흔적을 잘 남길 수 있는 그런 것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백 나중에 전업작가 선언하시는 건 아니시죠?

 

안 전업작가를 할 생각은 없고요 그렇게 필력이 좋지도 않습니다

 

백 사람은 그 사람의 선택과 행동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쓰시는 글 또한 내가 선택해서 실제행동으로 보여준 것만 쓰신다는 원칙이 있으실 것 같아요?

 

안 네, 그렇습니다 제가 수업시간에 학생들한테 이야기하는 것 중에 그런 게 있어요 성공한 사람들의 책을 읽을 때는 조심하라고 하거든요 성공하신 분 중에 어떤 경우는 그분이 아주 젊을 때나 어릴 때 별 생각 없이 했던 선택들을 나중에 성공한 다음에 오히려 거기에 합리화를 하고 의미부여를 해서 멋있게 포장을 하게 돼요 그런 경우에 젊은 사람들이 그 책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하다 보면 그게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한테는 성공한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는 그런 점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백 잘나가는 의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시고 또 아주 잘 나가는 회사의 CEO이셨다가 또 확 그만두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서 유학을 가고 이 결정을 보고 또 많은 사람이 “나도, 나도, 나도” 그러진 않겠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다면 나의 선택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얻으라고 말씀해 주고 싶으세요?

 

안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나에게 있어서 성공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사회에서 그냥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돈을 많이 벌거나, 지위가 높거나, 권력을 가지거나 그게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성공은 아니거든요

 

백 네, 절대 아니죠

 

자기에게 솔직해지면 그런 것들이 보이게 되고요 그러면 정말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겉모습이 아니고 그런 행동을 했을 때의 어떤 생각의 흐름, 고민 그런 것들을 참조하시는 게 더 좋은 선택을 하실 수가 있겠죠

 

백 ‘성공했다’라고 느끼신 적 한 번도 없으시죠?

 

안 예, 그게 저는 과정 중인 사람이지 않습니까? 아직도 전 현재진행형이고요 성공이라는 것을 과정 중에 평가받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면 그 사람 나름대로 평가를 할 수 있는데 저는 아직도 과정 중이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Ahn

 

백 어렸을 때도 그렇게 열심히 하셨어요?

 

안 사실은 제가 기본적으로는 게을러지기 굉장히 쉬운 사람이고요 잠도 많아서 자명종 안 켜면 지금도 20시간도 잘 수 있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제가 저를 잘 못 믿게 돼서요 제가 쓰는 수법이 어떤 것들이 있느냐면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려면 최첨단 기술이 매달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그걸 익혀야 하거든요 그럼 공부할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썼던 방법이 잡지사에 전화해요 그러고 나서 이런 기술이 새롭게 개발이 된 게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글을 쓰겠다고 해요 그러면 잡지사에서는 그런 글을 지금까지 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좋다고 하고 원고마감까지 주죠 그런데 문제는 제가 거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요 그런데 마감을 받았으니까 저는 책임감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러다 보면 마감해 놓고는 무산시키면 안 되니까 잠을 더 줄이든지 틈틈이 시간을 내서 그걸 만들죠 그래서 잡지사에 글을 주고 나면 정말 죽을 고생을 하지만 결국은 그 분야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 알게 되거든요

 

 

 

 

백 지금 의대 시절만 말씀하신 것 같은데 초, 중, 고등학교 때는 어땠어요?

 

안 제가 초, 중,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중간 정도 밖에 못하는 공부는 그렇게 잘 못했죠. 60∼70명 정도 됐으니까 아마 30등 정도 했을 거예요

 

백 중학교 때는요?

 

안 중학교 때는 반에서 5등 정도?

 

백 고등학교 때는요?

 

안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2등 정도 하다가 고3 때 처음 반에서 1등, 전교 1등 해봤고요

 

백 그렇게 성적이 올라가는 비결은 뭔가요?

 

안 그게 아마 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공부보다 책 읽는 게 좋아서요 끊임없이 책만 보고 살았거든요 활자중독증이라고 지금은 생각이 드는데 책에 나오는 글자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그래서 책에 나오는 내용뿐만 아니라 거기에 나오는 페이지 숫자 뒤에 있는 전가 발행 연월일까지 다 보면 ‘이 책 한 권을 제 머릿속에 다 읽었다’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약간 집착을 했던 편인데요 읽는 게 참 좋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책을 읽었고요 그리고 또 책을 읽는 방법도 저도 몰랐는데 약간은 달랐더라고요 저는 줄거리는 관심이 없고요 주인공의 심리상태 그러니까 ‘저 사람은 저 상황에서 왜 저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할까?’ 안타깝잖아요 어떤 불행한 주인공들 보면 그래서 나름대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저 사람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백 그게 언제부터 책을 그런 방법으로 읽으셨던 것 같아요?

 

안 글을 깨우치면서부터요

 

백 어렸을 때부터요?

 

안 아마 초등학교 2학년 정도부터인가요? 아마 그 때부터 읽었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평소에는 과학전집 20권짜리 위인전이라든지 그런 책들 많이 봤었고요 그래서 그런 것들 보면서 길을 가면서도 읽고 목욕하면서도 읽고 그랬는데요

 

 

백 ‘돌아보면 우리 어머님, 아버님께서 나를 이렇게 키워주셨던 게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큰 뿌리가 된 거 같다’라든지 ‘역할을 하신 것 같다’라는 건 어떤 거세요?

 

안 아버님께서 직접 저한테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하신 건 굉장히 드물고요 그나마 기억나는 몇 가지가 책을 많이 읽으셨고요 그 다음에 또 제가 어렸을 때인데요 신문에 아버님이 조그맣게 기사가 났어요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까 저희 집 앞으로 신문배달 소년이 자동차 사고를 당했대요 아주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아버님께서 치료해주신 다음에 치료비를 이제 내려고 하는데 오히려 야단치고 신문배달 하는 애가 무슨 돈이 있냐고 이렇게 돌려보내셨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미담으로 신문에 났었던 기억이 나고요 그 다음에 이제 아버님께서 50세가 넘으셨는데요 그때 전문의 시험을 쳐서 합격하셨어요 그래서 ‘아, 나이가 들어도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구나’ 그런 것들도 아마 알게 모르게 저한테 영향이 됐었던 거 같습니다

 

백 어머님은 어떤 본을 보여주셨나요?

 

안 어머님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하시는 편이죠 세상에서 자기만 생각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을 많이 배려해라, 그런 말씀들 그리고 또 교만함에 대한 경계 그래서 제가 신문에 나고 했을 때도 교만해지지 말라고 항상 그러시고 또 굉장한 자리들을 제안 받고 할 때도 그게 제가 있을 만한 곳은 안 된다 못 된다, 그런 말씀들 그 다음에 사람들 입에 많이 그렇게 오르내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세요

 

백 그러면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안철수 교수처럼 내 자녀를 키우고 싶다고 하시거나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한테는 한 마디로 “이것만 해”라고 하면 독서인가요?

 

독서보다는요 정말로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부모가 이해하려는 노력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이해하려면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가족관계라는 게 태생적으로 연결이 돼 있으니까 그냥 이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도 하나의 인간관계고요 가까운 관계면 오히려 시간을 더 많이 써야 하더라고요

 

백 따님을 키울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안 가능하면 시간을 많이 쓰려고 노력을 했고요 사실은 운이 좋았던 면도 있죠 제가 늦은 나이에 여러 가지로 생각해서 공부를 하기로 했던 건데요 그런데 그 나이 때가 마침 저희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이럴 때라서 같이 이제 항상 도서관에서 만나서 공부하고 항상 이렇게 옆에서 주말에도 같이 도서관에 다니고 끼고 살았던 것 같아요

 

백 영화 같은 이야기에요, 얼마나 좋아요 같이 수험생활을 하신 거군요?

 

안 네. 그리고 그때 또 제 아내도 법대 학생이니까 3명이 같이 다닌 셈이죠

 

백 2년을요?

 

안 네. 그런 생활들이 2년, 3년 정도 됐던 것 같아요

 

백 보통은 따님한테 어떤 걸 가장 우선순위로 하라고 가르치세요?

 

안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그래요 왜냐면 이제 저희 아이가 지금 여름 방학 지나면 대학교 4학년이 돼요 졸업반이 되는데요 그러다 보니 이제 앞으로 어떤 쪽으로 대학원 내지는 전공을 택할 건지 고민이 많을 때거든요 그럴 때 제가 원하는 걸 이야기하지 않고요 오히려 본인이 정말로 어떤 게 자기에게 맞는 선택인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거든요 그런 선택만 하면 “어떤 선택이든지 저는 좋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매일매일 일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한 건 그것 같아요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급한 일들은 눈에 닥치니까 빨리빨리 해야 될 것 같고 중요한 일일수록 멀리 떨어져 있는 일들이 많다 보니 하루하루 그냥 지나가게 되는데요 그럼 결국은 나중에 놓고 보면 급한 일들은 다했지만 중요한 일들은 하나도 못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중요한 일들을 시간 계획을 세워서 먼저 하고 그 다음에 급한 일을 해라” 그러면 중요한 일들이 조금이라도 진도가 나가게 되거든요

 

 

백 지금 많이 조언해 주신 것 중에 공통적으로 “나 자신을 알라”라는 얘기를 많이 하시거든요 “너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실 때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언을 하면 많은 사람이 못 찾는 것 같아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요 제가 가르치는 방식이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지식 전달은 독학해도 되거든요 깨달을 기회를 많이 주는 게 제 목표에요 그래서 사실은 깨달아야 생각이 달라지고요 생각이 달라져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법이고요 행동으로 옮겨야 운명이 바뀌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교수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많이 주는 거죠 그런데 깨달음은 학생의 몫이에요 저는 그 기회를 줄 뿐이고요

 

백 결국 그것도 다 본인들이 찾아내고 고민 많이 하고 깊이 성찰하고 해야 할 부분이네요 많은 질문이 올라왔어요 그래서 제가 여쭤보는 것 말고 어떤 궁금증이 있는지 저희가 질문을 받았거든요 몇 가지만 볼까요?

 

 

<시민 질문 1> 사업이면 사업, 연구면 연구 뭐하나 실수 하나 없는 완벽한 분이신 것 같아요 교수님께서는 콤플렉스 같은 건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안 솔직히 콤플렉스가 많은 편이기도 해요 네, 그런 것들이 뭐냐면 저한테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니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의 비교거든요 그러다 보니 남 탓을 잘 못해요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는 결국은 저 자신부터 돌아보고 내 안의 어떤 것들에 거기서 고칠 부분이 있는지 그런 것들을 찾다 보니 기본적으로 사는 게 좀 고달프죠

백 정말 고달프시겠어요? 그러면 다퉈보지도 않으셨을 것 같아요? 싸움이라는 것...?

안 네, 싸움은 거의 (안 해요) 싸우거나 남에게 화내기보다 저한테 화를 많이 내는 편이죠

백 나한테 화낼 때는 어떻게 내세요?

안 부끄러운 얘긴데 샤워할 때 갑자기 그 생각이 들면 고함 한 번 지르기도 하고요 목욕탕에서 물을 틀어놓고 고함지르면 남들이 못들을 것 같아서요

백 고함도 작게 치실 것 같은데요?

안 작게 쳤기를 바랍니다

 

 

<시민 질문 2> 일하고 공부하시느라 자유 시간이 전혀 없는 것 같이 보이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하세요?

 

안 저 같으면 거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는 게 영화를 보는 것이고요

백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안 저는 좀 따뜻하고 잔잔한 영화들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헤어스프레이>라든지 <주노>라든지 좋아하고요 SF도 참 좋아하는 편이고요

백 영화? 극장에 가셔서?

안 극장에 갈 때도 있고요 토요일 날 아침 일찍 상영하는 경우 같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없으니까.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사는 게 조금 불편하더라고요 제가 사람들이 알아보는 걸 즐길 수 있으면 참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 하나하나가 저한테는 좀 고통스러워요

백 사람들이 알아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밖에 나가시면?

안 예전에는 긴가민가 의심하셨던 것 같은데요 작년에 어떤 예능 프로그램 나온 다음에는 보자마자 확신에 차서 그냥 오시더라고요

백 불편하세요?

안 네, 제가 불편해요 아직도 내성적이고요 사실은 방송 출현도 저한테 20년이 넘었는데도 익숙하지도 않고요 성격은 안 바뀌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불편하죠

 

<시민 질문 3> 성공한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무상으로 줄 수 있을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솔직히 모아두신 재산이 좀 있지 않으신가요?

 

안 제가 안연구소 창업한 이래로 직원들에게 주식을 증여한 이후에는 주식을 거의 팔아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월급만 받고 살았던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자산 가치로 치면 안연구소 주식 가격으로 치면 제가 생각해도 대단히 많기는 한데요 그건 제 재산이라고 생각을 안 하다 보니 그냥 일반전문직들 월급 받는 것과 똑같이 살고 있는 거죠

백 네, 저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별로 없다? 주식은 있으나?

안 일반 전문직들이 그렇게 씀씀이가 헤프지 않고 열심히 모아 놓은 그 정도입니다

 

백 많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뤄내고 싶어 하고 자신이 이루는 것에 대해서 성공의 개념이 무엇이든 성공하고 싶다고 생각하잖아요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안 가장 필요한 건 우선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한 관점에서 우선 자기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고 그리고 또 이제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면 도대체 자기가 어떤 걸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고요 왜 그런 말씀을 하냐면 흔히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요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게 틀리거든요 예를 들면 마이클 조던이 농구선수였다가 자기가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메이저리그의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 야구 쪽으로 갔어요 그런데 결국은 마이너리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그만두고 농구로 돌아온 것이거든요 그런 유명한 사람조차도 자기가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걸 혼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건 금방 생각이 떠오르는데요 뭘 잘하는지는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에 거의 10,000가지 정도 일이나 직업이 있다고 한다면 그중에서 실제로 자기가 직접 해볼 수 있는 건 10개가 안되고요 나머지 9,990개는 그냥 자기 편견과 선입관으로 나누는 거죠 이건 나한테 맞을 거야, 이건 나한테 안 맞을 거야 이런 식으로 나누고 그냥 놓고 마는데요

 

백 실제는 부딪쳐보시고 하셨어요?

 

안 실제로 부딪쳐봐야 알 수 있다는 게 저도 경영에서 대해서 서른 넘어서 직접 부딪쳐 보게 됐는데요 그전까지는 많은 사람이 저한테 그 말을 했죠 저는 다른 건 몰라도 경영은 절대로 안 맞는다

 

백 의사 하실 때요?

 

안 네. 의사 할 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열심히 살다 보니까 경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접했고요 그래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다 보니 남들만큼은 할 수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젊었을 때는 가급적이면 한 번씩 자기에게 기회를 주는 한 번씩은 시도를 해보면서 자기에게 안 맞을 것으로 생각했던 분야인데 자기에게 맞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반대로 자기에게 맞는 분야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나한테 안 맞는구나 그걸 또 발견할 수도 있고요 그런 것 같습니다.

 

 

백 젊었을 때는 기회를 많이 주라고 말씀하셨는데 언제까지 도전할 수 있을까요?

 

안 제가 사회적인 모임들에 많이 가는데요 그때 보니까 70대 되신 어르신이 60대 되신 어르신께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당신 나이면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늦을 때라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70대 되신 분들이 60대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을 하신다면 그건 80대 때 70대를 봐도 마찬가지 일 테고요 영원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백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힘들다는 의대 공부를 십수 년을 하고서 다른 컴퓨터 쪽에 와 계시면 “의대에서의 그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스스로 그런 면에서 “나는 비효율적이었다”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시간이 의미가 있었고 그때 열심히 하다 보니까 보이신 건가요?

 

안 네, 그래서 어떤 분들이 저한테 덕담하시기를 만약에 의대를 안 가고 경영대나 공대를 갔으면 좀 더 빨리 회사를 일으켜서 훨씬 더 큰 성공을 이루었지 않겠냐고 그렇게 덕담을 해주시는데요 제가 생각해 보니까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의대를 나왔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라도 했지 의대를 안 갔으면 지금 반도 못했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제가 여러 분야를 해보고 MBA도 해봤지만, 의대만큼 공부량이 많은 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책임감들이 저절로 길러지게 되고요 그리고 또 빠르게 변하는 그런 상황에서 공부하는 습관들, 그리고 또 어떻게 하면 나에게 기회를 준 사회에 학생 신분이지만 내가 받은 일부라도 돌려줄 수 있을까 그래서 의대에 다닐 때 봉사활동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면서 그런 사회를 생각하는 마음가짐 그런 것도 의대를 다니면서 제 나름대로 가지게 됐던 그런 생각들이고요 그러다 보면 다른 분야로 옮기면 의대에서 쌓았던 전문 지식은 다 잊히는데요 의대에서 배웠던 그런 삶의 태도들은 고스란히 남아서 그대로 가게 되더라고요

 

 

백 그러면 안철수 교수를 본받고 싶은 많은 분들은 결국 우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안 불평은 자기 인생을 좀 먹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상황에 대해서 사실은 불평할 수도 있는데요 그런데 불평만 하고 있다 보면 자기 인생만 낭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평하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하든지 또는 아예 그것을 탈피해서 자기 인생을 바꾸는 결정을 하던지 그 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불평을 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서 자기가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거나 또는 아예 자기 운명을 바꾸는 선택을 하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백 아주 중요한 얘기 해주셨는데요 아까 저희 프로그램이 ‘안철수, 성공을 말하다’ 이렇게 했더니 성공에 대한 것을 굉장히 경계하셨기 때문에 ‘안철수 교수를 말하다’ 이런다면 나 스스로 ‘나는 누구다’라고 간단히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어요?

 

안 글쎄요, 그게 지금 받은 질문 중에 가장 어려운 질문인 것 같은데요 제가 누구라고 정의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글쎄요, 저는 어쨌든 기회를 얻고 지금 현재 한국 땅에서 살고 있는 한 사람인 거고요 그리고 기왕에 이렇게 제 의식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 마당에서는 조금이라도 죽기 전에 제가 살았던 흔적을 남겨서 그냥 있었다가 사라지고 있으나 없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 거죠

 

백 그 ‘흔적’ 이야기를 많이 하셨거든요 나중에 훗날 누군가가 안철수 교수님 책을 찾을 때 그 흔적의 검색어를 뭐로 찾으면 좋을까요?

 

안 글쎄요, ‘흔적’이라는 단어도 좋겠고요 ‘별 먼지’라는 단어도 좋겠고요 또는 ‘영혼’이라는 단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은 단어들

 

백 정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이걸 부탁하고 싶어요 꼭 10대, 20대, 30대도 아니고요 모든 연령을 초월해야 할 것 같은데 같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신 말이 있다면요?

 

안 우선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자기 나름대로 인생에서 성공의 정의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것들을 찾으라고 노력하시라는 그런 말씀 드리고 싶고요 두 번째로는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조정래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 하셨거든요 자기가 노력을 한 게 자기 스스로 감동하게 할 정도가 되어야 그게 정말로 노력하는 것이라는 그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설령 4일 중의 2일을 허비했더라도 남은 2일만 가지고도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그거면 사실 되거든요 세 번째로는 어떤 나름대로 목표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 같아요 목표라는 게 꼭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이 방향성을 설정하게 되고 갈등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백 네, 알겠습니다. 안철수 교수께서는 인터뷰 내내 ‘성공’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셨거든요 제가 인터뷰를 통해서 많이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많은 분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건 ‘이 사람들은 인생의 방향성이 다르다’라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오늘 그 뱡항성을 또 한 번 확인한 것 같아서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고요 우리 안철수 교수께서 20여 년 동안 변함없이 대한민국의 사랑을 받으셨던 이유가 스스로 20여 년 동안 변함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랬다는..

 

안 발전성이 없는 사람이죠

 

백 아닙니다 항상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은 채로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흔적을 남겨 가실지 저희도 기대하고 성원하겠습니다. Ahn

 

 

"'21세기 노예' 해방 투쟁, 함께 해줘요"
[비정규직 희망버스③] 7월 22~23일 광화문으로…비정규직 연대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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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 22일은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불법파견이므로 현대차 정규직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7월 1일에도 대법원은 타이어를 포장하는 금호타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이므로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는 대법원 판결 이행을 거부하고 있으며, 지난 해 11월 15일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25일간의 점거파업을 이유로 104명 해고, 1091명 징계, 162억 손해배상 청구 등 최대 규모의 징계를 했다.

대법원 판결 1주년을 맞아 현대, 기아, 한국지엠, 쌍용, 현대하이스코 등 10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7월 18일부터 5박 6일간의 희망버스 전국투어에 나선다. 전국 10개 도시 12개 공장을 찾아 희망의 씨앗을 전달한다.

마지막날인 7월 23일에는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로 모여 아름다운 연대의 힘으로 절망의 현실을 넘어 희망의 일터, 희망의 사회를 찾아 나선다. 왜 이들이 희망을 찾아 떠나는지 비정규직 대표 사업장 노동자들의 글을 잇따라 싣는다. <편집자 주>

                                                  * * *

'희망 버스'의 뿌리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시오.”

핸드폰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받고, 또 다른 공장을 떠돌고, 다시 핸드폰으로 해고당했던 노동자들.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면서, 훨씬 힘들고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을 받아야 했던 가슴 아픈 노동자들의 이름. 비정규직!

우리는 더 이상 노예도 아니고, 일회용 종이컵도 아니다. 우리도 사람이고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지난 10년 동안 전국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을 해왔다. 그 결과 우리의 투쟁은 해도 해도 너무한 절망 사회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펴왔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1895일간만에 정규직화를 쟁취하고, 동희오토와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천일을 넘는 싸움 끝에 공장으로 돌아가게 됐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싸움은 2010년 7월 22일 현대자동차와 올해 7월 1일 금호타이어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대법원 판결을 끌어냈다.

   
  ▲기륭전자 투쟁 모습. 굴삭기 위에 시인 송경동이 올라가 있다. 

우리 시대 민주와 변혁의 새로운 희망을 깨우고 있는 ‘희망 버스'의 뿌리에도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녹아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고공농성과 94일의 단식농성은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을 넘어 다양한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이 울림이 실천으로 움직였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 기륭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면서 일상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 갖고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모색해 보자며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를 통해 희망버스의 기본 정신인 자율, 희생과 헌신, 발품손품정신을 다진 것이다.

 

자율, 희생과 헌신, 발품손품 정신

그리고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7월 18일 ‘정규직 0명 공장’인 현대모비스를 시작으로 ‘비정규직 없는 공장 만들기 희망버스’ 5박 6일 전국 순회를 시작했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만든 희망버스를 아래로 확산하기 위해서, 우리의 희망이 한 지역 한 공장 한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이고 전 사회적이며 전체 민중의 문제임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비정규직 희망버스’를 탔다.

1996~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과 1998년 IMF 구제금융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잉태했다. 기업별노조를 넘어선 산별노조와 진보정치가 희망을 심어주었다면, 정리해고와 파견노동이 절망을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그 후 십년이 조금 넘은 지금 희망은 희미하거나 비틀거리고, 절망은 사회를 빈곤과 차별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리해고를 수용한 민주노총은 역사적 죄인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에게 아무 잘못 없이 해고를 수용하라는 노예 제도의 도입이었다.

정리해고를 통해 우리는 졸지에 수백 년간 투쟁으로 만들어 온 “잘못 없이 잘릴 이유가 없다”는 사회적 권리를 반납했다. 법이 있어도 요구하고 싸우지 않으면 권리를 빼앗는 것이 자본의 세상인데 권리 자체를 반납한 이들에게 자본의 온정이나 법적 보호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리해고가 도입된 초기에는 부도, 적자 등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해고를 했다. 당시 논리는 "다 같이 그냥 죽을래?", "일부가 조금 희생하더라도 회사를 살려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다시 구제할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의 논리도 없이 회사가 흑자여도 구조조정, 해외 이전 등을 이유로 해고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회사가 어려워서도 아니고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 정리해고를 하는 것이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윤을 위해 정리해고

더욱 기막힌 것은 정리해고와 함께 파견노동이 도입된 것이다. 해고된 사람들의 갈 길이 파견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라는 것은 그때 이미 확정됐다. 그리고 무수한 피눈물이 무수한 비극이 우리 사회를 폭격했다.

상시 노동, 정규 노동의 반대말이 임시 또는 비정규일 텐데 생산 현장에서 상시와 정규노동이 사라져가는 상황, 정리해고라는 두려움 속에 정규직이라는 이름에 매달리며 연대를 포기하는 노동,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에 분노하지만 나만이라도 살자는 체념과 배반의 노동이 판을 쳤다.

‘사람, 대의, 헌신, 의리, 연대, 더불어 함께’ 라는 인간의 언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돈, 이기, 경쟁, 눈치, 배제, 배타’라는 노예의 언어들이 자리 잡았다. 그 사이에 전 사회는 소수 재벌만 살고 전 민중이 죽는 단군 이래 최대의 빈부격차와 차별사회가 만들어졌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는 그래서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한 두 줄기 가지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빈곤과 차별의 뿌리가 되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77일 파업은 정리해고의 야만성, 정리해고의 반생명성을 우리 사회에 제기했다. 왜 정리해고가 없어져야 하는지 세상에 알리는데 15명의 생명을 저 세상에 바쳐야 했다.

 

정리해고의 ‘반생명성’을 알리기 위해 바쳐진 생명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라는 열사의 피눈물이 있는데도 10년에 걸쳐 두 번의 정리해고를 당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철폐라는 근본적 해결 없이는 평생 불안정한 노예노동을 감수해야 함을 보여 준다.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의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있고 나라도 산다고 말하던 이들이, 값싼 노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기 위해 자행되는 정리해고와 그 빈자리를 채우는 비정규직 노동은 어느새 100% 비정규직 공장이라는 괴물을 보편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정리해고가 있는 한 일자리 창출은 거짓이다. 일할수록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이 만들어 내는 이윤은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을 만들 뿐이다. 열심히 일을 할수록 자기 일자리를 줄이는 어리석은 노동을 끝내지 않는 한 어떤 해결도 다 거짓이다.

실태가 이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근본적 해결을 위한 노력은 고사하고 쉼 없이 비정규 파견노동을 확대하려 하고, 폐차지원금, 법인세 감면, 고환율정책으로 수조원의 세금을 재벌들의 곳간에 쏟아 부을 뿐이다.

그 결과 정몽구 회장도 아니고 그의 아들 정의선이,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이 작년 한해 주식 배당금으로 사내하청 노동자 수만 년의 임금을 한 번에 가져가도 도덕적 문제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명박이 만든 재벌의 세상

우리가 희망버스를 타고 전국 순회를 하는 것은 나쁜 일자리를 없애고 좋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자는 것이며, 정리해고 ‧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7월 18일 ‘비정규직 없는 공장 만들기 희망버스’는 현대모비스를 출발하여 현대차 울산공장, STX조선, 광양 포스코,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 금호타이어, 현대차 전주와 아산공장, 기아차 화성공장과 쌍용차 평택공장, 시그네틱스 안산공장 등을 돌면서 각 지역의 시민들과 함께 하는 촛불문화제를 진행한다.

7월 22일은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임을 대법원이 확인해준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정몽구 회장은 아직도 외면하고 있지만 우리는 시민들과 함께 신나게 불법파견 노동의 정규직화는 물론 모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의 중심, 지배의 중심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돈 중심의 세상을 깨기 위해, 신자유주의 재벌 정권에 대한 발랄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 촛불의 중심, 양심과 민주주의의 상징 광화문으로 간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신나고 통쾌하게 시대의 어둠을 걷어 내려고 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저 높은 하늘에서 채소를 키우는 마음으로 우리 시대 어둠의 심장을 뚫고 생명과 해방의 씨앗을 심고 있다. 그 씨앗을 품은 우리의 싸움은 모든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가슴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광화문에서 확인하려고 한다.

 

연대의 마당에 당신을 초대하며

신나게 연대하는 우리는 다양한 하나다.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초대한다. 정규직 노동자, 학생, 시민 모든 분들을 참여와 연대의 마당으로 초대한다. 김진숙과 85호 크레인이 만든 희망의 불씨를 함께 나누고 퍼뜨리는 행복의 장터에서 만나자.

대학등록금이 없는 학교, 비정규직이 없는 공장, 정리해고가 없는 세상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연대의 따스한 손길을 내밀고, 함께 비를 맞으며, 광화문 광장에서 청계천 개울에서 함께 어루어져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22일 오후 7시에는 <등록금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문화제가 열린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2시에는 서울시청 앞이나 청계천에서 '비정규직 없는 공장 만들기 결의대회'를 열 예정이다. 7월 22~23일 광화문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2011년 07월 19일 (화) 10:38:31 김소연 /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금속 비정규투쟁 본부 webmaster

"사랑한다고? 그럼 돈을 줘봐"
[진보, 야!] 한 '열정 노동자'의 가난한 삶과 각성 & 계좌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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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술가. 나는 솔직히 그런 말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은 지금도 약간은 그런 마인드가 있다. 굶어죽어도 글 쓰고 그림 그릴 거라고(노래는 배고프면 못 하니까 패스), 누구한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정해진 운명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불쌍하지만 불행하지 않는 삶

그래서 나는 얼마 전 시나리오 작가가 죽을 때조차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감히 그녀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녀 자신이 불행하지만은 안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억지로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어서 살 수 없었을 거라고. 단지 그녀 자신이 글을 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그녀의 삶은 배고픈 불행과 글 쓰는 행복을 동시에 움켜쥐고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행복했을 거라고 말이다. 주변에서는 이런 내 말을 듣고는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너가 당해봐."라고 했지만 이미 나도 배고프고 있다.

몇 개월 전 공동으로 책을 쓸 기회가 주어져 인터뷰어가 된 나는 동갑의 연극배우 지망생 박다정(가명, 27세)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인터뷰하면서 자꾸만 나의 낙천적인 가난한 예술가의 마인드를 보게 되었는데 그녀도 나와 비슷하게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난 연극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 보수는 0원이지만 난 정말 좋아.”라며 지금은 부모님한테 얹혀살고 있지만 지금 연극을 해서 너무 좋고 계속 열심히 해 볼 거라고.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낮에는 번역 일을, 밤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정말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밤을 새우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낮에 하는 번역 일과는 만족도를 비교할 수가 없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누가 내게 매달 60만원만 준다면

한 달에 육십만 원 정도만, 누군가 나를 꾸준히 지원해준다고 하면, 하루 밥 한 끼만 먹더라도 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지하방에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설 생각이었다. 작업 환경? 그런 조건은 꿈도 꾸지 않았다. 단지 나를 흥분시키는 그 하얀 종이와 붓, 물감만 있으면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그때 나를 보고 같이 살던 친동생이 한 마디 했다. “폐인.” 맞다. 원래 예술에 빠진 사람들은 미쳤다. 그 먹는 거 좋아하던 내가 식음을 전폐할 만큼. 예술은 어떤 점에서 중독이고, 예술가는 어떤 점에서 폐인이다. 박다정 씨도 나도 우리는 ‘다 필요 없다’는 정신으로 ‘예술한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몇 개월 뒤, 나는 내가 요가 강사로 일하고 있던 요가원의 원장에게서 "벽화를 그려 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분명 내가 맡은 업무 외의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제안이었지만, 그것도 보수로 ‘오만 원’이라는 무려 아크릴 물감 12색 한 세트와 제일 싼 아크릴 붓 4종 세트를 겨우 살 수 있는 '거금'을 줄 거라고 했지만,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그것도 “정말요?”라며 화색이 도는 말투로.

평소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알고 있던 원장이 아마도 싼 값에 그럭저럭 괜찮은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제안한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원장은 원장대로 싼 값에 그림을 얻는 이익을 보며 서로 윈-윈이라고 생각했다.

연속 6시간을 내리 서서 그림을 그리다보니 다 그리고 나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진이 빠져 정신이 혼미한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다며 스스로 만족해했다.

 

열정의 바보들을 어떻게 구하지?

내가 인터뷰한 연극 지망생 역시 무대 위에 오르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서 그녀와 나는 돈도 한 푼 주지 않는 일에 이렇게 종일 ‘자발적으로’ 고생을 해가며 달려드는 걸까. 우리가 만든 가치는 정말 그렇게 하잘 것 없는 것일까. 누가 보기만 해도 우리가 감사해야 할 만큼? 우리 자신 하나만 겨우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인 걸까. 아니, 우리 같은 예술가는 아예 돈에는 관심 없다고, 그저 발 빼고 깨끗하고 순수한 예술 놀이에만 집중하면 그만인 걸까?

문득 이렇게 살다가 어느 볕 좋은 날 조용히 지하 방에서 굶어죽는 그녀와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건 정말 우리가 바라던 아름다운 예술가의 삶이었을까?

“아니!”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서 한윤형은 그녀와 나 같은, 열정을 가진 문화 예술가들, 즉 ‘열정 노동자’들에게서 열정을 빌미로 노동 가치를 착취하는 세태에 대해 비판한다. 너무도 많은 열정 노동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고. 그리고 정작 그녀와 나 같은 당사자들은 이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더러 그렇게라도 우리에게 기회가 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이 바보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인터넷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열정 노동가가 있다. 인터넷을 켜면 검색 창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이름을 쳐보고 검색 결과가 몇 건이라도 나오면 감격하고 흥분하는 변태스러운 취미를 가진 나는 어느 날 검색창에 ‘장 미셸 바스키아’라는 화가를 검색했다. 운명처럼 나온 딱 한 블로그, 거기서 나는 장 미셸 바스키아 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자기 작품을 만들고 있는 미술가 ‘최재훈(가명, 29세)’씨를 알게 된 거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작품. 

그의 작품은 어스름한 새벽에 듣는 에디트 삐아프, 그 깨알 같은 감성이 살아있는 노래만큼이나 나를 전율케 했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그녀의 콘서트를, 그게 얼마든 꼭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의 작품 옆에 작은 클릭 버튼이, 그러니까 기부하기 버튼 같은 게 있었다면 나는 당장에 꾹 찍어 눌렀을 거다.

그리고 당시 내가 밤을 새워가며 번역을 해서 벌었던 돈의 1/5 정도를 그의 통장으로 당장 계좌이체 시켰을 거다. 거짓말이 아니다. 돈을 쓰고도 아깝지 않은 것, 오히려 돈 이까짓 거 더 많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순간이 바로 이럴 때가 아닐까 싶었다.

 

어느 가난한 시인의 서포터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던 랭보를 따라 불온한 나라 프랑스로 날아 가버린 시인 강성주(가명, 28) 씨는 학창시절 블로그에 자작시를 꾸준히 올리다가 정말 운 좋게도 그에게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주는 서포터들을 만났다. 총 다섯 명의 시 애호가들이 매달 후원금조로 정기적으로 10만 원씩 강성주씨에게 돈을 보내준 것이다.

강성주씨가 나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며 자기 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나보다, 그래서 정말 돈을 보내주고 있는 거 같다, 그래서 자기는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거다, 자기 인생에서 정말 굶어죽을까봐 자존심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라며, 생전처음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얘기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나는 이런 일도 있구나, 저런 시를 좋아하다니 참 해괴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 일을 떠올리며 ‘아차!’ 싶다. 이과 출신이라서인지 시인 치고는 드물게 계산이 빠르던 이 강성주씨가 당시 자기 블로그에다 후원계좌번호와 연락처를 적어 놓았던 게 떠오른 거다. 와우, 아주 잘한 거다. 그냥 혼자 작품을 만들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쓸쓸히 굶어 죽으면 안 된다. 배우 박다정, 화가 최재훈, 화가 아사희. 우리 셋도 강성주처럼 우리 활동을 남기고 알리고 또 후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내 글을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면 신한 110-250-742551. 여기로 입금하기를 바란다. 감동은 돈을 초월한 게 아니라, 돈을 ‘포월’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프고 계속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내가 글을 못 쓰고 돈을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못하도록, 내가 글만 쓰다가 굶어죽지 않도록, 돈을 보내라. 아니면 음식을 보내도 괜찮겠다. 그런 의미에서 주소도 가르쳐주겠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366-8번지 301호다.

내친 김에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에게 주기에도 모자란 돈을, 좋아하지도 않는 엉뚱한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단도리'를 잘 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최저생계비용 지원을

   
  ▲필자

문득 얼마 전에 내가 낸 피 같은 세금을 김문수 같은 사람이 썼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니 분노가 치밀어서 그렇다. 김문수가 내가 좋아하는 회전 초밥집을 데려간다고 해도 계속 싫어할 정도로 그 인간이 싫은데 내가 김문수 입으로 들어갈 초밥을 사는데 돈을 보태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국회의원들 월급을 최저임금으로 고정하고 대신 예술가들,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최저생계비용을 지원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어떤 놀고먹는 게으른 예술가가 있다고 해도, 저기 양복 빼입고 사실은 놀고먹으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 입만 번드르르한 저 인간들한테 주는 것보다는 그래도 훨씬 덜 아까울 거 같다.

                                                    * * *

* 이번 주부터 새로운 필자 아사희(필명)가 [진보, 야!] 필진에 합류합니다. 그는 현재 요가 강사이며, '자칭 소설가, 작사가, 일러스트레이터 & 래퍼'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2011년 07월 11일 (월) 09:05:15

"내가 김태희보다 인기 없는 이유는 바로..."
[마들연구소 특강] '날라리 외부세력' 김여진씨의 '이유 있는 사회참여'
11.04.13 10:57 ㅣ최종 업데이트 11.04.13 16:32 이선필 (thebasis3)

  
'무조건 행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는 배우 김여진
ⓒ 류석
김여진
"최진실씨는 모든 연예인들의 워너비(되고 싶은 대상)였어요. 그런 분이 자살했어요. 연기자로 최고였지만 마음이 아파 제대로 먹지도 못했죠. 우리가 뭔가 되면, 무언가 가지면 행복할 거다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분명히 있어요. 사람들은 문제가 있으면 풀어야 한다 생각하죠.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할까요? 두려워서죠. 찍힐까봐 밉보일까봐…."

 

12일 오후 7시 30분. 사단법인 마들연구소 명사초청 특강에 나선 영화배우 김여진씨는 삶을 바라보는 남다른 태도로 눈길을 끌었다.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이유와 소신도 분명했다. 그에게 '개념찬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행복하다는 것은 무언가에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것"

 

김여진씨에게 '행복'은 실마리이자 열쇳말이었다. '무조건 행복'이라는 강연 제목처럼 행복이란 단어는 김씨에겐 하나의 가치관이자 삶의 이유이기도 했다.

 

"투쟁이란 걸 하기 위해선 항상 세상에 화가 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했어요. 그때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느낌이었죠."

 

대학생 시절 철거촌에서 공부방 교사로 봉사하고 철거 현장에 머물며 전전긍긍했던 그 시절을 김씨는 "행복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서서히 잃었던 때"라고 표현했다. 또한 "학생운동을 그만두고 우연히 시작했던 연극배우 생활도 행복감을 주었지만 이후 유명세를 타면서 점차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 대중들 반응에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이 모두가 자기 중심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어떤 아이들은 정말 하루를 1달러로 살아가는데 전 사람들이 못 알아봐 준다는 사실에 아파하고 있었죠. 남의 아픔과 내 아픔의 간극을 느꼈던 순간이었어요. 그때 스스로가 참 형편없어 보이더라고요."

 

긴급구호활동을 하러 간 인도에서 김씨는 "타인과 함께 나누는 행복이 더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직접 4일간 굶으면서 '아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한 그에게 더 이상 남들이 자신을 못 알아 봐준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비집고 들어설 수 없었다.

 

"행복해 보이는 삶을 원하세요? 행복한 삶을 원하세요? 행복하다는 것은 무언가에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재미와 의미가 있어야 해요. 재미있으면서도 허탈하지 않은 것. 세상에 잘 쓰이고 있는 것. 내가 아닌 너, 그리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득이 되는 일을 했을 때 좋아지는 것이죠."

 

마냥 분노에 차 있지도 않고 동시에 자신만을 위한 기쁨이 아닌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 김씨는 이날 특강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이다.  

 

노회찬 전 대표 "<100분 토론>이 훌륭한 토론자를 배출한 것 같다"

 

"KBS, MBC 토론프로그램 최다 출연자로서 저보다 토론 잘하는 사람 딱 한 명 봤는데 그게 김여진씨입니다. 연극 작품을 700번 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다 알고 있는 거죠. 김여진 선생의 발언은 문제의식과 신념, 실천경험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겁니다. 본인만 똑똑하면 되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동받아야 의미있는 건데 <100 토론>이 훌륭한 토론자를 배출한 것 같습니다."

 

현재 마들연구소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가 MBC <100분토론>에 패널로 출연한 김여진씨를 치켜세우자 청중들의 박수소리가 나왔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여진씨. 청중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직후였다.
ⓒ 류석
김여진

약 250여 명의 시민들이 모인 이날 강연에서는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홍대 사태를 비롯해 지금까지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김여진씨를 걱정하는 질문에서부터 방송 연예계 문제점을 묻는 질문, 주변 연예인과 친분 정도를 묻는 것까지 다양했다.

 

'사회적 발언을 하고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시기하는 사람도 있고 찍혀서 일 못하는 거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에 김씨는 "솔직히 유명해지긴 한 것 같다"고 시원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대로 사는 게 즐거워 보여야 동료들도 자기검열 안 하고 서로 터놓고 말할 수 있다"며 "그렇기에 앞으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고 답했다. 청중들이 박수로 화답하자 그는 "힘들면 좀 쉬었다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노회찬 전 대표가 "김제동씨는 프로그램 하차 후에 더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하자 김씨는 "김제동씨의 토크콘서트처럼 활로가 막혔을 때 다른 길로 가면 된다"며 "오히려 그럴 때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맞장구쳤다. 그러면서 "20대들이 무한 경쟁 체제에서 전전긍긍하느니 새로운 분야에서 1인자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연사가 연사인 만큼 청중들의 관심도 연예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사회참여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한 청중이 "대중문화계에서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들이 침묵하는 현상이 있다"고 지적하자 김씨는 '김태희 비유'를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입장이 있어요. 그 안에서 누구나 최선을 다해 사는 거죠. 그 사람의 수준, 성품, 취향 그게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 자리에서 하고 있는 게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세상은 옳고 그름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요. 힘에 따라 움직이죠. 그리고 그 힘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직접 비교해볼까요? 제가 왜 김태희씨보다 인기가 없을까요? 여러분들이 김태희씨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죠. 이명박 대통령은 누가 뽑았나요? 우리가 뽑았잖아요. 뭐가 어찌됐든 우리 마음 안에 돈에 애착하는 가치가 다른 것보다 컸기 때문이에요. 그게 힘이에요. 내 안에 어떤 마음이 큰 가의 문제죠. 욕할 필요 없어요. '나는 이게 맞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야죠.

 

배우는 공인이 아니예요. 세금 먹고 살지 않으니까요. 여러분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거 얼마나 실천하나요? 같이 하고 싶으면 같이 하고 싶은 방법 생각하면 되요. 강요는 민주적인 게 아닙니다."

 

'공감 김여진', 트위터에 빠진 이들

 

이날 강연을 들은 청중들은 강연이 예정된 시간보다 길어졌음에도 대부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인터넷 공지를 통해 강연장을 찾았다는 김경미씨는 "개념찬 김여진씨가 아니라 공감을 만드는 김여진씨라고 생각한다"며 "단번에 인기인으로 오른 게 아니라 인생을 겪으며 하나하나 내공을 쌓은 분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김여진씨 강연회를 찾은 시민들. 이날 약 250여 명이 모였다.
ⓒ 이선필
김여진

특히 강연장 한쪽에선 김씨의 말을 그대로 트위터에 생중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간히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지난 1월 홍익대 청소·경비 노동자 해고 사태 당시 김씨와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다녔던 '날라리 외부세력' 회원들은 휴대폰을 통해 강연 내용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외부세력'들의 모금운동을 처음 제안했다고 밝힌 이민우씨는 "강연이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는데 트위터를 통해 내용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를 비롯한 '날라리 외부세력' 회원들은 홍대 사태를 계기로 지금까지도 트위터 등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 해고 노동자들을 돕기 위한 '우당탕탕 바자회'와 '조선일보 광고게제 운동' 등이 바로 이들의 작품이었다.

 

김씨도 트위터를 활발히 사용하는 걸로 유명하다. 홍익대 사태의 현장 분위기를 접했던 것도 트위터를 통해서였다. 또한 사태 해결 후에도 줄곧 사회문제에 '소신발언'을 해왔다. 최근엔 이른바 맷값 폭행으로 재판을 받은 최철원씨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되자 "사법부가 '여론재판'의 권위를 인정했다"며 비판했다. 

 

한편 지난 2008년부터 시작된 마들연구소의 명사특강은 이번 김씨의 강연으로 32번째를 맞이했다. 박규님 마들연구소 운영실장은 "(이런 강연들은) 지역의 문화수준을 높이고자 기획한 것이다"라며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노원이라는 지역이 좀 외지지 않은가?"라고 되묻던 박 실장은 "강연을 진행하면 할수록 지역주민들은 (연구소의 행사와 기획에) 상당히 우호적이고 믿을 만하다고 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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