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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5) 지배할 뿐 책임지지 않는 권력…여기 시민의 자리는 없다

심진용·장은교·김형규 기자 sim@kyunghyang.com


ㆍ다수에 휩쓸리고 ‘영웅’ 찾는 개인들…거기 공화국은 없다
ㆍ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의 부재

구의역 사고 현장에 ‘민주공화국’은 없었다.<br />사람들은 어쩌다 이런 나라에 살게 되었는가를 묻는다.<br />민주화 이후 30년, 민주공화국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br />지금,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할지 다시 생각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근 기자

구의역 사고 현장에 ‘민주공화국’은 없었다. 사람들은 어쩌다 이런 나라에 살게 되었는가를 묻는다. 민주화 이후 30년, 민주공화국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지금,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할지 다시 생각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근 기자



‘비선 실세’가 대통령 연설문을 건드렸다. 공직 인사와 국정 전반에 관여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던 그 일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가. 지금 이 질문은 사치스럽게 들린다. 


그럼에도 ‘민주공화국’을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폐허 위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집을 새로 지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원초적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홍세화씨(장발장은행장)는 “이번 사태같이 전근대적인 ‘국가의 사유화’가 가능했던 원인과 배경을 살펴야 한다”며 “정부·국회·사법부·검찰·경찰·국정원 등 국가 공적 기관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발판으로 기능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될 것”이라고 짚었다. ‘공적인 것(res publica)’에서 출발하는 민주공화국의 모토와 기반 자체가 무너졌다는 이야기다.


김경희 성신여대 교수는 “민주공화국의 핵심가치라 할 수 있는 법치와 공적 질서는 완전히 부정됐다”며 “한국 사회가 껍데기만 민주공화국일 뿐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이야말로 민주공화국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지난 5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살 김모군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열차에 치여 죽었다. 비정규직 청년의 외롭고 궁한 죽음이었다. 그의 곁에 나라는 없었다. 위험마저 외주화하는 사회에서 사고는 예견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노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빼곡히 달렸다. 


“누가 포스트잇에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썼지요. 영화 <굿윌헌팅>의 한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천재소년 헌팅(맷 데이먼 역)이 삐뚤게 나갈 때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 역)가 몇번이고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고 말하죠.

다들 알아요. 개인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조 문제라는 걸요. 뭐가 문제인지 다 아는데 어떤 대안도, 해결책도 찾지 못하는 게 지금 상황입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는 열악한 근로환경에 19살짜리 아이를 몰아넣고도, 그 상황을 탈출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드러냈죠.”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민주공화국의 붕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구의역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꼽았다. 


국민을 ‘개·돼지’라 부른 교육부 고위 관료는 김군의 죽음이 내 자식 죽음처럼 가슴 아프다는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이 되나”라고 반문했고, “내 자식처럼 가슴 아프다는 얘기는 위선”이라고도 했다.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도전으로 ‘경제불평등’을 꼽은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평등의 고원’이란 개념을 꺼냈다. “자기 자식은 이미 평등의 고원 위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고원 위에 있는 자기들 고위 공무원 사이에서 불평등은 문제가 될 수 있어도, 고원 아래 ‘개·돼지’들과의 평등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한국 사회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죠.”


박찬승 한양대 교수도 “‘한국 사회가 일종의 신분제 사회로 변한 지 오래 아니냐. 그게 현실인데 뭐가 문제냐’는 인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라고 짚었다. 


비정규직 임금은 지난해 기준 정규직 임금의 43%다. 300인 미만 중소규모 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3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체 노동자의 임금 차이는 월 250만원 이상이다. 돈이 신분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동일노동인데도 직군별로 그렇게 임금 격차가 큰 나라는 한국 말고 없다”며 “인간을 직군과 직업으로 보는 세상에서 차별도 당연시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금은 가진 사람이 오만하게 될 수밖에 없는 시대”라며 “아이들까지 무슨 집에 사느냐로 사람을 차등하고, 인간을 위계로 이해한다”고 했다. 

경제불평등과 양극화 국면에서 국가는 제 역할을 방기했다. 무한경쟁을 부추겼다. 그 결과로 나온 불평등을 정당화했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는 그 연원을 1972년에서 찾는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내놓은 해다. “정치적으로는 유신,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 정책이 시작됐죠. 조세·복지에서는 소득세·법인세를 줄이고 간접세에 의존하는 저부담·저복지 정책이 도입됐죠. (유신, 중화학공업, 저부담·저복지) 3가지 요소의 조합이 만들어진 시기죠. 세금 줄여줄 테니 월급 조금 더 받아서 당신 힘으로 먹고살라는 거였죠. 사람들에게 공화나 공생공영 가치를 부정하는 데 인센티브를 주는 시스템이 이 시기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이택광 교수는 “민주공화국의 핵심은 공론이며, 공론은 곧 시민의 목소리를 말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당신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 가진 몇몇이 정책결정 과정을 독점한다. 여론은 수렴하지 않는다. 결과에 책임지지도 않는다.


최장집 교수는 ‘책임성의 실종’을 지적했다. “산업은행 몇 명이 밀실에 둘러앉아 수백조원 규모의 조선산업을 평가하고, 결과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권위주의 시절의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최 교수는 “권력의 선출은 민주적이었을지라도, 운영 방식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며 “그 핵심은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드 배치, 개성공단 철수, 위안부 합의가 그랬다. 세월호 참사 이후 특조위 활동이나 이전 정권 시절의 4대강 사업도 다르지 않다. 권력자의 결정만 있었고, 소통과 책임은 없었다.


박명림 교수는 지난해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두고 “군주의 의사결정처럼 방향을 급전환했다”고 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는 사드 배치를 가리켜 “민주주의의 본질을 부정하는 사례”라고 했다. 비선 실세 파문에 덮인 현실에서 사람들은 선출된 자의 권력남용뿐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자의 국정농단까지 견뎌야 하느냐고 묻는다.



■분노조절 장애 사회, 집단화병의 나라 


민주공화국은 시민들의 참여와 헌신을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해, 한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려면 먼저 시민들에게 그것을 요구할 자격을 갖춰야 한다. 세월호와 구의역, 최순실을 목격한 시민들에게 한국은 무엇으로 그걸 요구할 수 있을까. 


이제껏 나라는 역사와 민족·혈연에 기대어 시민을 동원했다.


곽준혁 중국 중산대 교수는 “민족을 하나의 ‘신화적 운명 공동체’로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에 맹목적 헌신을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전 로마는 달랐다”며 “시민 각자가 로마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를 통해 자신의 시민적 자유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경험적·구체적 확신을 가졌기에, 로마를 위해 헌신했다”고 덧붙였다. 민족과 혈연에 기댄 호소에 젊은이들은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으로 답하고 있다.


김경희 교수는 “유구한 역사에 단군의 후예가 뭐 어쨌다는 거냐. 공화주의 측면에서 애국심이라고 할 때 한 핏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며 “지금 우리가 사는 나라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곽준혁 교수는 “공동체에서 시민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기 자유가 지켜지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받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시민들이 그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공화국에 대한 신뢰가 ‘아모레 델라 파트리아(amore della patria)’, 곧 ‘나라를 사랑하는 것’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나라는 시민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안전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시민의 목소리는 수렴되지 않은 채 그저 흩어질 뿐이다. 권력자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또한 무너졌다. 곽 교수는 “로마 공화정 시민들은 명예를 차지해선 안될 사람이 명예를 차지하고, 능력 없는 이가 자신들을 다스릴 때 불쾌해했다”고 전했다. 지금 한국 시민들도 불쾌하다. 불만스럽다. 절망과 분노가 사회 전반에 감돈다. 

‘분노조절 장애 사회’ ‘집단화병 사태’ ‘원한 사회’…. 경향신문이 기획을 준비하며 만난 이들에게서 나온 표현들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한국 사회를 가리켜 거대한 ‘르상티망(resentiment)’의 사회라고 했다. “시기, 질투, 원한 이런 부정적인 감정의 집합을 가리켜 르상티망이라고 하는데, 지금 한국 사회는 그런 억울함이라든가 분노, 불만이 임계점까지 치솟은 것 같다”는 것이다.



■어쩌다 이런 나라에 살게 되었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나라와 사회가 공통으로 지향할 가치를 숙의·합의하는 과정도 없었다. 그래서 헌법 제1조는 수사에 그칠 뿐이다. 산업화·근대화 목표 아래 경제성장 외에 다른 가치는 없었다.

 

“정부 수립 이후 7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잘 먹고 잘사는 것, 소위 ‘먹고사니즘’ 말고 다른 가치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공동체란 게 무색해질 수밖에 없죠. 지배집단이 사익이나 사적 목적을 가지고 정치공동체를 사유화하기에 딱 좋은 환경입니다.”(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1987년 6월항쟁 당시 성직자와 시민들이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하여’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6월항쟁 당시 성직자와 시민들이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하여’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진 교수는 1987년 민주화의 한계도 지적했다.

박찬승 교수도 “1987년 이전까지는 민주공화국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며 “1987년 이후로도 민주공화국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단 한번도 민주공화국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는 “(1987년에) 단순히 권력구조를 바꾸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권리와 가치가 무엇인지, 이걸 먼저 합의했어야 한다”고 했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빼곡히 매달린 진도 팽목항에서 2014년 5월 한 자원봉사자가 리본에 적힌 사연들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빼곡히 매달린 진도 팽목항에서 2014년 5월 한 자원봉사자가 리본에 적힌 사연들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민주공화국에 대한 신뢰는 사실상 무너졌다.


김상조 교수는 “민주공화국의 내용과 형식을 새로 만들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1987년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지금 한국 사회 논의는 그때와는 달라져야 한다.


경향신문이 만난 이들은 지향점과 제도를 궁리하는 과정이 몇몇 정치인이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우려는 남는다. 시민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나라를 만드는 것은 시민 각 개인의 몫이다. 개인이 각자 가치를 이야기하고 토론·합의하는 과정에서 민주공화국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한국은 개인성이 약하다. 개인의 자유나 존엄에 대한 전통이 없는 나라”라며 “우리는 사상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단 한번도 개인 자율의 존엄함을 다룬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개인이 약하니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진영 논리가 득세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는 “공화는 결국 서로 모여서 조화롭게 간다는 뜻 아니냐. 그런 게 전혀 안된다. 상대 얘기는 안 듣고 자기 말만 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세월호 참사나 국정원 댓글 사건 같은 경우 진보·보수를 떠나서 국가 기능·역할에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데, 어느 순간 진영 문제로 치환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여론에 편승하는 경향도 엿보인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는 “한국 사회를 보면 대화나 담론이 다수나 평균의 생각에 맞춰 형성돼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한국엔 선거 때마다 메시아가 등장한다. 약한 개인은 늘 영웅만 찾는다. “각자도생하다 힘센 영웅이 나타나 상황을 정리해주길 바라는”(이병천 교수) 이들이 민주공화국을 만들 수는 없다.


민주공화국은 각자도생도 아니고, 영웅의 카리스마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이 교수는 “구성원 각자가 자유로운 존재로 삶을 살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공화국은 시민으로부터 


시민 없이 민주공화국도 없다.

 “토머스 제퍼슨 말처럼 정치하는 사람들이 백날 공화주의 얘기해도 시민 사이에 공화주의 기반이 없으면 그저 신기루일 뿐”이라고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지적한다. 여럿이 ‘국가의 부재’뿐 아니라 ‘시민의 부재’까지 아울러 살펴야 한다고 했다.


장덕진 교수는 “민주공화국을 이야기하면서 보통 정치권과 정부에 책임을 묻는데, 과연 시민들은 민주·공화적 가치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윤평중 교수는 “직접적인 권력을 가진 이들이 국가 운영에 가장 큰 책임을 지는 것이 맞지만, 일반 시민들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했다.


“국가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민주시민으로, 공화국 국민으로 요구되는 태도와 책임을 내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시민은 만들어진다. ‘문제는 결국 교육’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병진 교수는 “유치원부터 고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민주공화적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면, 민주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며 “민주공화국이 무엇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비판하고 질문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희 교수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요건을 ‘말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는다.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말할 수 있다는 건 사회 전반에 수평적인 문화가 형성돼 있다는 이야기고, 이건 어릴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배우고 체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교육 내용과 제도도 변해야 한다.


박명림 교수는 “공공성을 회복하고, 민주공화국이 되려면 ‘반값등록금’ 같은 정책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돈 안 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왜 그런가. 박 교수는 “시민을 길러내려면 먼저 내가 공화국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내 돈 내고 좋은 학교 나와서 교수도 되고, 관료도 되고, CEO도 됐는데, 왜 내가 나라에 헌신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온다면 시민성도 길러질 수 없다”는 것이고, “국가가 아닌 개인의 돈으로 교육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돈 버는 사람, 다시 말해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를 양성하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민주공화국의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교육”이라며 “그 핵심은 국가가 교육비를 부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선 실세 게이트가 터지면서 나라 전체가 ‘패닉’이다. 허탈과 절망, 분노와 함께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공화국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애초 민주공화국의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박명림 교수는 ‘민주공화국은 헌법정신의 선언인 동시에 구체적인 구현 과제’라고 했고, 김경희 교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 헌법 조항 또한 늘 현실을 살피고 느슨한 부분이 보이면 조이고 발전시켜나가는 개념’이라고 짚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고 있나, 어쩌다 이런 나라에 살게 되었나, 이제 어떤 나라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위기의 시대, 민주공화국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어진 물음이다.

특별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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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각자도생’ 대한민국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ㆍ국가의 공공성도 ‘힘들 때 기댈 사람 있다’ 응답 비율도 OECD 꼴찌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각자도생’ 대한민국

“한국 사회 생존원리는 각자도생이다.”(장덕진 서울대 교수), “한국인들이 유지할 수 있는 공동체가 없다 보니 각자도생만 생각하게 된다.”(박찬승 한양대 교수) 

여러 지식인들이 민주공화국을 내건 한국 사회의 위기를 표현하는 말로 ‘제각기 살 길을 도모한다’는 뜻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꼽았다. 각자도생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 상실과 공동체 붕괴로 이어진다. 대표적 사례는 세월호 참사다. 300명이 넘게 죽은 참사를 두고 사고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지겹다’ ‘그만하라’는 말이 나왔다. 한 여행객은 심장 발작으로 기절한 택시기사를 버려둔 채 골프여행길을 재촉했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나라에서, 보수세력이 정부수립 70년 중 60년을 집권한 나라에서 각자도생이 만연하고 공동체 유지라는 보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민주공화국의 척박하고 형해화된 현실은 구체적 수치로도 나온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2014년 발표한 ‘이중위험사회의 재난과 공공성’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공공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중에서 꼴찌다. 

보고서는 공공성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로 나눠 살폈다. 공화주의는 공익성(사회·교육·의료 지출 현황과 시민의 공익활동)과 공정성(임금격차와 성별 고용률, 세금의 소득재분배 효과), 민주주의는 공민성(선거절차와 투표율, 법치)과 공개성(언론자유, 정보접근성)으로 구분해 점수를 매겼다. OECD와 유엔, 각국 통계청 자료로 분석한 보고서에서 한국은 칠레를 제외한 33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공화주의(공익성·공정성) 지표가 33위로 꼴찌다. 민주주의 지표에선 공민성 31위, 공개성 29위로 최하위권이다. 4개 항목을 합산한 공공성 지표 평가도 맨 끝에 위치해 있다.

‘국가별 가치관 특성’ 분석에서도 한국은 강한 물질주의 성향과 차이에 대한 낮은 관용도를 보였다. 통상 교육수준이 높거나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탈물질주의 성향과 사회적 관용도가 상승하는 대다수 ‘선진국’들과 반대다. 한국은 고소득·고등교육 수혜 계층에서 물질주의 추구가 더 강했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OECD 사회통합지표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는 각자도생의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은 2015년 OECD 사회통합지표 중 ‘사회적 관계’(사회적 지원망) 부문에서 10점에 0.2점을 받았다.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하거나 기댈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전체의 72.4%로, 조사대상 36개국(OECD 회원국 + 브라질·러시아) 중 가장 낮았다. 전체 평균은 88%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가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전환점이 됐잖아요. 돈과 내 가족 말고는 날 지켜주는 게 없구나 생각하게 됐죠.‘부자 되세요’가 모두의 인사말이 됐어요. 공화주의나 민주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있겠어요.”(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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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4)무능한 정치·비겁한 판결…법 위에 군림하는 ‘피고 대한민국’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ㆍ법정 위에 선 ‘법치국가’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에 비친 태극기(왼쪽 사진). 오른쪽은 같은 날 대법원 앞. ‘2015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1심 형사합의부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한 비율은 66.8%로 2005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에 비친 태극기(왼쪽 사진). 오른쪽은 같은 날 대법원 앞. ‘2015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1심 형사합의부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한 비율은 66.8%로 2005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국가를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 법을 어겼다면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이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국가란 뜻이다. 법은 왜 만들었을까. 민주공화국을 위해서다. 질문이 돌고 도는 것 같지만 그게 핵심이다. 실은 다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다 같이 행복해지려고 ‘민주공화국’을 선택했고 법을 만들었다. 법은 국가가 ‘국민 행복’을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법을 지키지 않은 국가는 피고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피고 대한민국’에게 묻는다.

■책임지지 않는 나라 

지난 9월 한국수자원공사와 농어촌공사의 내부자료가 공개됐다. 이 자료에는 4대강 수질개선에 8000억원, 농업용수공급에 2조원을 투입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내세운 명분은 수질개선이었다. 최소 22조원을 삼킨 4대강은 괴생물체를 토해내는 폐강이 되어가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은 9월12일 “금강과 낙동강에 이어 한강 상류에서도 ‘4급수’에서 서식하는 실지렁이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한강도 더러운 물이 됐다는 징표다. 금강에선 시궁창 깔따구가 나왔다. 낙동강에서 발견된 죽은 물고기 배 속에 기생충이 득실거렸다. 4대강사업 이듬해부터 강물에서 ‘녹조라떼’를 퍼올린 인증샷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달궜다. 올해 4대강 16개 보 운영비는 311억원, 유지보수비용은 151억원이 편성됐다. 4대강사업을 떠맡은 한국수자원공사는 지난해 5조6000억원, 올해 1615억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실패한 사업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비용을 쏟아부어야 할지 추산하기도 힘들다.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4)무능한 정치·비겁한 판결…법 위에 군림하는 ‘피고 대한민국’

4대강사업에서 법치의 실종도 목격한다. 나쁜 정책이 무능한 정치와 비겁한 판결을 만나면 어떤 귀결이 나는지를 4대강사업은 잘 보여준다. 이 사업은 크게 4단계의 과정으로 진행됐다. 1단계, 정부는 정책을 강행한다. 2단계, 다수당이던 여당은 찬성, 야당은 막지 못한다. 3단계, 반대하는 국민은 소송을 제기하지만 법원은 판결을 미루거나 정부 손을 든다. 4단계, 결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는 반대여론이 높은 정책과 국가가 피고인 거의 모든 소송에서 반복된다.

정부 정책 추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민주공화국’다운 방법은 야당이 국회 안에서 설득과 토론으로 정책추진을 무산시키는 것이다. 야당은 그러지 못했다. 두번째는 국민투표로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 국민투표를 발의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명시한다. 반대여론이 높을 때 대통령이 자신이 추진하고 싶은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민들은 소송을 했다. 정부가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가재정법상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비타당성조사를 하지 않았다. 환경영향평가는 부실하게 진행했다. 2009년 11월10일 영산강에서 4대강 공사가 시작되자 보름 뒤 국민소송인단이 소송을 제기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관할 4개 법원에 ‘하천공사시행계획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피고는 한국수자원공사 등 대한민국. 8945명이 원고로 참여했다. 

본안 판단이 나올 때까지 공사를 중지해달라는 가처분 소송도 냈다. 법원은 기각했다. 공사는 소송과 별개로 속도를 내며 진행됐다. 첫 판결은 서울행정법원에서 나왔다. 소송이 시작된 지 1년 후다. 피고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재판부는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일부 부실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은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당시 소송인단을 변론한 김남주 변호사는 “평가가 제대로 됐는지 봐달라고 소송을 냈는데 재판부는 ‘평가서가 있으니 됐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 논리는 다른 3개 법원 1심 판결에서도 거의 인용됐다. 

4대강사업의 법적 문제점을 유일하게 인정한 곳은 2심인 부산고법이다. 재판부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은 것은 국가재정법 위반”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대규모 국책사업인 이 사업은 대부분의 공정이 90% 이상 완료돼 이를 원상회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라며 “뒤늦게 이를 취소한다면 기존에 형성된 법률관계에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공사가 이미 너무 많이 진행돼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공사가 90%나 진행될 때까지 판결을 내리지 않은 것도, 판결이 다 나올 때까지 공사를 일단 멈춰달라고 낸 가처분 소송을 기각한 것도 법원이다. 논리적으로 해괴하게 보이는 이 판결은 ‘사정판결(事情判決)’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사정판결은 원고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사정을 이유로 들어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말한다. 이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후에 대법관이 됐다.

대법원이 최종판결을 내린 것은 공사가 끝난 지 2년 가까이 지난 후였다. 사건번호 ‘2009구합50909(서울행정법원)’는 6년이 지난 2015년 12월10일에서야 마무리됐다. 피고 대한민국의 승리다. 단 한 줄의 소수의견도 남기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내부사정을 잘 아는 한 법조인은 “한 대법관이 이 정도로 중요한 국책사업에 대한 판단은 전원합의체에 넘겨 소수의견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그 대법관이 퇴임할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소부(소재판부)에서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대법원은 4대강사업의 정당성 논란에 가장 진한 마침표를 찍은 행위자가 됐다.

대법원이 사건을 뭉개던 2013년 1월 감사원이 “4대강사업은 총체적 부실”이라고 발표했다. 사업 효과와 경제성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고 사업 이후 수질은 더욱 나빠졌다고 했다. 국민들은 형사소송에 기댔다. 이명박 대통령과 4대강사업을 추진한 공무원 57명을 배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형사고발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2년 동안 쥐고 있다가 지난해 11월에서야 무혐의 처리했다.

시민들은 나쁜 정책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막지 못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야당 위원들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4대강사업의 책임을 묻겠다고 했지만, 최순실 등 ‘비선 실세’의 경악스러운 행위가 국감 이슈를 집어삼켰다. 환경단체들은 4대강 청문회를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www.4river.or.kr)을 벌이고 있다. 

■사법정치시대 

정부와 사법부가 손발을 맞춘 ‘사법정치’는 지금도 목격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에 4대강사업이 있다면, 박근혜 정부에선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있다. 두 정책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의 극렬한 반대에도 정부는 지난해 11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교육부 장관 명의로 발표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지난 14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교육부가 2014년 1월 역사교육지원팀을 구성해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마다 청와대비서관들과 회의했다”며 내부문건을 공개했다. 집권 2년차부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정부는 강행했고 야당은 막지 못했다. 시민들은 다시 법에 기댔다.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도 헌법재판소도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법은 소 접수 후 180일 안에 사건을 선고하도록 돼 있지만, 헌재는 245일이 지나서야 교육부로부터 답변서를 받았을 뿐이다. 교육부는 다음달 국정역사교과서 최종본을 공개하고 내년 3월부터 현장에 적용한다. 교육부는 2016년에만 역사교과서 개발·홍보 비용으로 44억원의 예비비를 책정했다. 시민과 학계가 반대하는 사업을 추진하다보니 홍보비로만 25억원을 지출했다. 

정부정책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 사법부는 국민에겐 위험한 무기이자 대통령에겐 더없이 잘 드는 칼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은정 교수는 저서 <왜 법의 지배인가>에서 “우리나라 법공직자들은 어느 나라의 법관이나 검사들보다도 재량의 범위가 넓다”고 썼다. 박 교수는 “오늘날 사법개입의 확대는 사회생활의 전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진단했다. 

대법원은 2013년 12월 통상임금 범위를 결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을 도입했다. 이 판결은 통상임금을 넓게 보아 노동자들의 권리를 넓혀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을 고려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 사실상 사측 재량권을 넓혔다. 대법원 판결 전 박근혜 대통령은 임금문제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GM 회장에게 “해법을 찾겠다”고 했다. 한 중견 법조인은 “사법부가 판결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자조 섞인 비판이 법조계 내부에서 돈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사법부는 논리와 시간을 무기로 뒷받침하면서 행정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한 부장판사는 “정치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자꾸 법원으로 넘어오는데, 법원에선 정책 타당성이나 결과를 평가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오직 법적 절차를 지켰느냐만 판단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2010년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날치기로 통과됐을 때 헌재는 “투표절차에 문제가 있었지만 결과를 무효로 할 만큼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 ‘결과를 무효로 할 만큼’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무력화된 삼권분립 

경제평론가 이원재씨는 ‘민주공화국의 위기’를 보여준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단독사면을 꼽는다. 2009년 12월 사면심사위는 평창올림픽유치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수천억원대 경제범죄를 저지른 이 회장에 대한 ‘원포인트’ 사면을 단행했다. 이씨는 “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너무나 명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원포인트 사면’은 사법정치 문제와 함께 삼권분립의 실종을 드러낸다. 

지난 21일 경찰은 ‘백남기 농민 추모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방패를 세워 이동로를 차단했다. ‘공권력’이라 부르는 국가의 행위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의미와 곧잘 부딪친다.   정지윤 기자

지난 21일 경찰은 ‘백남기 농민 추모집회’ 참가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방패를 세워 이동로를 차단했다. ‘공권력’이라 부르는 국가의 행위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의미와 곧잘 부딪친다. 정지윤 기자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는 한국의 삼권분립이 상당히 취약하다고 진단한다. 박 교수는 “말만 삼권분립이지 정부의 힘이 제일 막강하고, 대통령이 정당을 통해 국회까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민주공화국의 핵심 운영원리는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 삼권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서로 견제하는 것에 있다. 대한민국의 삼권은 분립된 것일까, 통일되어가는 것일까. 한국은 세계에서 드물게 정부도 입법권을 갖고 있다. 대법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해 입법로비 활동을 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국회에는 판검사가 ‘대관업무’를 위해 공식적으로 상주한다. 대법관에 재직 중이거나 대법관이 안된 고위 법관들은 국무총리, 감사원장 등 정무직으로 쉽게 자리를 옮긴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49명(16.3%)이 법조인 출신이다. 법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법 제정자가 되고, 정부 일원이 된다.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4)무능한 정치·비겁한 판결…법 위에 군림하는 ‘피고 대한민국’

서강대 법대 임지봉 교수는 인사권에 주목한다. 임 교수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대법원장이 대법관 13명, 헌법재판관 3명에 대한 제청권을 갖고 있다. 대법원장만 대통령의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으로 앉혀놓으면 전체 사법부가 따라오게 돼 있다. 이런 구조가 사법부의 관료화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사법부의 ‘나라 걱정’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국가의 위법행위에 배상을 구하는 국가배상사건 추이를 보면 2015년 국민이 승소한 비율은 34.7%에 불과하다. 국민이 패소한 비율은 2010년 36.6%에서 2015년 62.2%로 올랐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피고 대한민국’을 법정에 세워도 사법부가 스스로 국가의 일부라는 속성을 버리지 않으면 국가와의 싸움이라는 심판을 또 다른 이름의 국가에 맡기는 셈이다.

■‘원고 대한민국’이 하는 일 

추석을 앞둔 지난 9월7일 경기도 평택의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김수경씨(54)를 만났다. 그는 2009년 쌍용자동차가 발표한 정리해고자 2646명 중 한 명이다. 1989년 입사한 김씨는 근속 20년 되던 해, 해고통보를 받았다. 1억4000만원을 대출받아 아들과 함께 살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 지 한 달 만에 들은 소식이었다. 매달 81만6000원의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그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 후 7년, 김씨는 보험회사와 상조회사 영업사원, 공사장 일용직, 버섯농장 일 등 투잡, 스리잡을 거치며 버텼다. 빚은 더 늘었지만, 지난해 11월 노사가 복직안에 합의하면서 살길이 열린다고 믿었다. 노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복직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고, 지난 2월 18명이 회사로 돌아갔다.

대량 정리해고, 77일간의 옥쇄파업과 경찰의 대규모 진압작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사한 해직자 28명…. 쌍용차의 상처는 6년 만에 타결된 복직협상으로 치유되고 있을까. 복직합의 후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추가로 복직된 사람은 없다. 148명이 기약 없이 다음 복직을 기다린다. 김씨는 “다들 복직되리라 믿지만 점점 불안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사합의서엔 “복직시킨다”가 아니라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고 돼 있다. 

무급휴직 후 복직한 ㄱ씨는 “회사에서 두 달 교육 받았는데 어떤 간부들도 ‘고생했다’는 위로 한마디 하지 않았다”며 “남아 있던 사람들이 회사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더 열심히 하라”는 말만 했다고 전했다. ㄱ씨는 “회사가 우리 앞에서 ‘산 자들’ 얘기만 하는 것을 보니 속에서 울분이 터졌다”고 말했다. ㄱ씨가 말하는 ‘산 자’란 정리해고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쌍용차 사람들은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김수경씨가 말했다. “직원들이 거의 같은 아파트에 모여 살았는데 한 엘리베이터에서 윗집 아이가 아랫집 아이한테 ‘너희 아빠 죽었다며(너희 아빠 해고됐다며)?’라고 말한 거예요.” ㄱ씨가 실제 죽은 28명을 떠올리며 이어 말했다. “28명이나 죽은 건 돈 때문이 아니에요.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받아서…. 마을이 그렇게 초토화가 된 거죠. ” 

국가는 무엇을 했을까. 국가는 소송을 걸었다. 경찰은 노조의 저항으로 헬기와 기중기가 파손된 것을 두고 노조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복직합의를 선언하면서 노사는 상대에게 제기했던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했지만, 경찰은 소송을 계속하고 있다. ‘원고 대한민국’은 1·2심에서 이겼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해직자들은 경찰에 15억원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줘야 한다. 지연 이자는 하루하루 61만8000원씩 쌓여간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복직될 날만을 기다리는데.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돈을 경찰이 내놓으라고 하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민간기업의 노사 문제에는 우선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원칙이다. 그러나 ‘재산권 보호’ ‘시민 안전’ 등을 이유로 국가는 곧잘 노조 시위 현장에 개입한다. 노조 시위를 툭하면 불법파업으로 매도한다. 파업이 장기화되거나 다른 노조와 연대하면 ‘외부세력 개입’ 또는 ‘종북 세력 난입’으로 낙인찍는다. 노사 합의 뒤에도 파업에 따른 배상을 청구한다. 2009년 미국 쇠고기 수입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시위 후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했지만, 경찰은 이후 시위 참가자와 주최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것이 ‘원고 대한민국’이 잊지 않고 하는 일이다. 

원고 대한민국의 또 다른 얼굴은 검찰이다. 검찰은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고 대척점에 서는 당사자다. 검찰은 2014년 탈북 화교 출신인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혐의로 기소했다. 항소심 도중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증거가 조작된 문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공소를 취하하지 않고 상고했다. 이 사건은 결국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의 끈질긴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간첩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검찰은 유씨를 불법대북송금을 도왔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2010년 같은 사실을 두고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소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4년 만에 유씨를 기소했다. 누가 보아도 ‘보복기소’였다.

지난 9월 항소심(서울고법)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며 검찰이 공소권을 남용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현재 사건을 기소한 것은 통상적이거나 적정한 소추재량권 행사라고 보기 어려운바, 어떠한 의도가 있다고 보여지므로 공소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평가함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검찰은 어떻게 했을까. 상고했다. 느닷없이 간첩으로 몰려 구금됐고, 어렵게 조작된 증거라는 사실이 밝혀져 겨우 간첩혐의를 벗은 유우성씨는 여전히 검찰이 친 거미줄에 얽혀 고통받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군의날 기념식 때 “북한 주민들은 자유로운 남한으로 오라”고 했다. 유우성씨 사건을 기록한 영화 <자백>을 본 또 다른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홍강철씨는 “지금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선 간첩만들기가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피해자들은 권리구제도 스스로 해야 한다. 헌법 28조는 “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으로서 구금되었던 자가 법률이 정하는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무죄판결을 받은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에 정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무죄판결을 받은 지 6개월 이내에 형사보상금을 청구하지 않으면 어떤 보상금도 받을 수 없다. 2015년에만 509억원의 형사보상금이 지급됐다. 검찰이 기소를 잘못해 발생한 최소한의 재판비용이다. 모두 세금이다. 원고 대한민국은 이런 일을 한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의심케 했던 사건의 주인공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더불어민주당 백재현 의원은 “4대강사업과 관련해 1152명이 훈·포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역대 토목공사 관련 최대 규모다. 4대강사업의 진짜 목적으로 의심했던 대형건설사들의 담합비리는 사실로 드러났다. 관련자들은 뒤늦게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았다. 건설사들이 이미 이익을 챙긴 뒤다. 이익과 벌 중 어느 것이 더 남는 장사일까?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과정에서 외압 사실을 밝히고 국정원의 범죄행위를 찾아내 기소한 수사팀 검사들은 좌천되거나 검찰을 떠났다. 반면 국정원간첩조작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은 경징계만 받고 여전히 검사로 근무한다. 검사들이 증거를 조작했다면 ‘범죄자’이고, 조작된 증거라는 것을 모르고 재판부에 제출했다면 ‘무능한 바보’일 것이다. 검사들은 최소한 후자로 보인다. 대선개입사건과 간첩조작사건의 중심인 국정원은 개혁안을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세월호 참사가 터지며 대선개입사건이 여론 관심에서 사라진 뒤 아직까지 아무런 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2009년 용산참사 당시 경찰이 상황파악을 잘못해 과잉진압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수사기록을 공개하지도 않고 버틴 검경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현장에 특공대를 투입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은 20대 국회의원이 됐다. 쌍용차 파업 당시 진압을 지휘한 김정훈 경기청 정보과장은 신임 서울경찰청장이다. 삼성이 검찰 고위관료들에게 뇌물을 상납한 사실을 담은 ‘삼성 X-파일’을 공개·폭로한 노회찬 전 의원은 2013년 불법녹음 파일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정치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녹음파일에 등장한 당사자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더욱 책임 있는 자리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으로서 KBS 보도에 적극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이정현 의원은 여당 대표가 됐다. 총선에서 ‘VIP의 심기’를 운운하며 공천에 개입한 여당 의원들도 의정활동을 계속한다. 검찰은 이들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법도 정의도 무시당하는 시대, 1%들의 생존전략은 ‘버티는 놈이 이긴다’이다.

냉전시대 소련 스파이를 변호하게 된 미국 변호사의 실화를 다룬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 제임스 도노반 변호사(톰 행크스 역)는 피고인의 정보를 건네라는 정보기관 직원의 협박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독일계고 나는 아일랜드계인데 우리가 어떻게 같은 미국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규정 때문이야. 우리가 같은 헌법을 지키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같은 미국인으로 살 수 있는 거라고.”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패닉’의 한가운데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2016년 시민들은 ‘원고 대한민국’, ‘피고 대한민국’과 같은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지키며 사는 걸까. 

▶특별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272100005&code=940100&s_code=as166#csidx3ad6d48fb77f5cfbb0af5196693c58c

[공화국을 묻다-홍세화]"최순실게이트는 대한민국이 사적소유물이라는 점을 오롯이 드러낸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26일자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26일자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 특별취재팀은 지난 7~9월 지식인 40여명과 기획 자문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움 주신 분들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게재 전 보완 과정을 거쳤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대한민국은민주공화국인가 특집페이지 바로가기

홍세화(장발장 은행장)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에 관한 여러 질문을 두고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건 ‘공적인 것’ ‘공공’ ‘공익’이다. 홍세화는 “한국은 민주공화국인 적이 없다. 그러니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며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려는 차원에서도 공화주의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핵심은 공공성”이라고 했다. ‘공적인 것’이고 붕괴하고, 부재하는 한국 상황에서 홍세화는 알베르 카뮈가 공화국 시민을 두고 표현한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도 인용했다. 그는 유약한 야권의 문제도 지적했다. 홍세화를 만난 건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 22일이다. 당시 그는 민주공화국의 요건을 설명하며 우병우 청와대 수석 문제 등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씨 ‘게이트’가 불거진 후 그것에 관한 생각을 추가로 들어 전한다.

-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는 ‘민주공화국’과도 직결되는 듯합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공화국의 어원이 ‘공적인 것(res publica)’임을 강조한 바 있는데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는 대한민국이 ‘사적 소유물’이라는 점을 오롯이 드러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근대국가에서 ‘국가의 사유화’는 박정희 독재체제가 그렇듯이 국가의 물리력과 국민 다수의 동의가 결합되어 이뤄지는데, 이번 사태는 전근대적인 신정국가의 양상이 담겨 있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민주화가 이뤄진 만큼 국가의 물리력과 국민 다수의 동의에 의한 국가의 사유화는 어려워졌는데, 민주화로 약해졌거나 빈 자리를 신정국가의 요소로 채웠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전근대적인 ‘국가의 사유화’가 가능했던 원인과 배경에 정부, 국회, 사법부, 검경찰, 국정원 등 국가의 ‘공적’ 기관들이 거의 모두 사적 이익 추구의 발판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될 것입니다. 가령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까지 또 그 이후의 과정에서도 국가공공성에 의한 견제나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배경에 공당이라기보다 사당에 가까운 새누리당을 비롯하여 강력한 사익추구 집단의 당파성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듯이, 이번 ‘최순실 건’이 오늘 불거지기까지 견제와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도 ‘국가공공성 부재’라는 마찬가지의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도 국가의 공적 기관들(그래서 국민이 위탁한 권력을 갖고 있는)이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그만큼, 양태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국가의 사유화는 계속 상수로 남을 것입니다. 비판의식과 주체적 의식을 가진 시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성숙만이 그들에게 공공성을 갖게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민주공화국의 핵심 요소를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공화국의 내용을 어떻게 같이 담아내는냐가 중요합니다. 민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 개념이 아니죠. 공화주의는 민주주의를 충실히 하려는 것입니다. 공화주의란 구성원들이 공공의 가치를 공유하는 내용을 담은 것인데,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보다 구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퍼블릭(republic)은 로마공화정에서 나온 라틴어인데, 그 어원인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의 뜻이 ‘공적인 것들’(public things)입니다. 로마공화정 시기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 공공성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공공의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게 물 공급이었어요. 로마 시대의 유적 중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 중에 수도교가 있는데, 먼 산에서 맑은 물을 끌어와 시민들에게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물은 세 통로로 가게 되는데, 각각 로마 인민과 귀족 수도관, 대중목욕탕 쪽으로 갔죠. 가뭄이 오면 제일 먼저 귀족한테 가는 물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가 리퍼블릭에 담겨 있죠. 공 개념을 핵심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는 거죠.”

- 민주공화국 기획 준비를 하다 보니, 공화국 개념이 다양하던데요.

“유럽에 있는 동안, 학자들마다 공화국이나 근대공화국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나 살펴본 적이 있어요. 학자마다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보편적인 게 있어요. 첫째 근대 공화국의 주체는 자유로운 시민들이라는 거고요. 둘째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애매하지만 공익을 목표로 하죠. 그리고 수단이 있는데, 바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에요. 이게 근대 공화국에 대한 보편적 개념 규정이죠.”

- 한국은 어떻습니까? 헌법 1조 1항에 그런 보편적 개념·규정이 얼마나 들어있는지요?

“한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왕 대신 대통령을 뽑는 제도’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게 현실이죠. 자유로운 시민들이라는 주체 개념도 비어 있고, 공익이라는 목표도 실종됐고요. 그렇다고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죠. 한국은 그야말로 크로포트킨의 ‘법은 힘센 자의 권리다.’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국가 아닌가요? 전쟁과 분단 때문에 일제 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후과가 지금까지 지속되는 겁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정도가 아니라, 옷을 뒤집어 입은 꼴이죠. 일제 부역세력을 일컬어 ‘사적인 안위와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res privata(사적인 것들)이 res publica(공적인 것들)을 배반했다는 뜻인데, 그런 배반 세력이 이른바 민주공화국의 실제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공공성, 공익의 가치가 설 자리가 애당초 없었던 것이지요.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그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그 뒤 계속하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됩니다. 저는 한국의 이른바 메인스트림(주류)을 관통하는 보편적 성질을 ‘오로지 사익추구’라고 봅니다. 행정부 관료들이나 법조계가 그렇듯이, 국방부문도 일제 만주군이든 일본군이든 일제에 부역한 자들이 국군 장성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죠. 재벌도,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주름잡고 있죠. 사학, 종교계 등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부역세력이 기득권을 계속 창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입니다. 이런 양상이(제헌헌법에서) 민주공화국을 선언한 지 70년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공화국과 전혀 어울리지 않죠.”

철도노조 조합원 및 KTX민영화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7월 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역 앞에서 박근혜 정부 ‘또 민영화 추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철도노조와 KTX민영화 저지 범대위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철도망 구축에 향후 10년간 19.8조원 민간자본 유치’라는 계획은 대국민 약속 위반이자, 재벌특혜라고 했다. 김정근기자

철도노조 조합원 및 KTX민영화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7월 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역 앞에서 박근혜 정부 ‘또 민영화 추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철도노조와 KTX민영화 저지 범대위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철도망 구축에 향후 10년간 19.8조원 민간자본 유치’라는 계획은 대국민 약속 위반이자, 재벌특혜라고 했다. 김정근기자

- 이런 현실에선 민주공화국에 무엇을 품어야 할지요? 

“제일 중요한 건 공공성이죠. 유럽의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것은 사회안전망과 연결되지만, 애당초 공화주의라는 가치와 무관하지 않았죠. 공공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공화주의 틀 속에서 어떤 구체적 공공적 가치를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몰려올 때 유럽에서도 ‘작은 정부론’이 떠올랐죠. 그 핵심과 목적은 공공적인 가치를 공격하려는 거였습니다. 자본이 교육, 사회복지, 건강, 철도 등의 공적 부분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사유화하려고)’ ‘정부를 축소하라’는 논리·주장을 폈죠. 한국의 경우는 공공 부분이 워낙 취약합니다. 교육 부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이미 레스 푸블리카도 지극히 취약한데 그마저 레스 프리바타로 만들려는 겁니다. 민영화란 말을 많이들 쓰죠. 하지만 민영화는 지배이념이 담긴 언어입니다. ‘공기업’의 반대말이 ‘민기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영화, 사유화라고 말해야 옳죠. 인천공항도, KTX도 사유화하고 싶어 하잖아요. 공유, 공공적인 것, 공공성, 공익은 그 개념 자체가 애매한 점이 없지 않지만, 한국에선 그 토대 자체가 비어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일제 부역 세력 말씀하시면서 언론 문제도 지적하셨는데요. 

“언론은 공기(公器)입니다. 공익과 진실을 담아야 하죠. 그런데 철저히 기득권의 무기가 되어버렸어요. 기득권세력들이 사적 이익을 확대 창출하려는 무기로 만든 겁니다.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치경제사회 환경을 만들려고 무기화한 거죠. 가령 한국에서 조중동 신문을 유럽에서 볼 수 있을까요? 우파 신문이라고 하는 르 피가로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럽에선 공공성·공익 개념에 의거해 좌우가 그것을 공유하고 있어요. 공익이라는 부분을 공유하기에 토론도 하곤 하죠. 한국은 완전히 찢어져서 토론도 안돼요. 한쪽은 철저히 사익을 추구하고, 한쪽은 공익을 담으려고 하죠. 이 사이 공유 지점, 겹치는 지점이 없어요. 족벌 언론은 공기 즉 공적 그릇이라는 탈을 쓴 철저한 사익추구집단입니다. 공적 그릇인 신문을 그들이 사적으로 누리는 언론 권력과 족벌 자본을 극대화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그런 집단인 거죠. 언론이라는 공기가 한국의 주류 언론에겐 철저하게 사적인 그릇이 된 것입니다. 사학도, 종교도 국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공동체의 핵심 고갱이로서 공익을 같이 보듬고 할 게 애당초 없는 상황이죠.” 

- 시민사회 부문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결국은 시민의 부재, 시민성의 부재가 문제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대중 쪽을 바라보면, 사유(思惟)하지 않는 교육 문제가 크죠. 주체성·비판성도 부재하죠. 사유하지 않는 교육은 평등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존재를 배반한 의식이 계속 형성되는 것이어서요. 프랑스에선 공화국이나 공화주의를 강조하는 이야기가 많아요. 예컨대, 알베르 카뮈는 정통 좌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가 공화국 시민을 두고 표현한 말이 있어요.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인데요. 프랑스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노동자·농민의 거친 시위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의 연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대혁명이죠. 프랑스에서 근대공화국이 선 게 1792년입니다. 제1공화국 성립 의미로 부각되는 게, 앙시앙레짐이란 신분 질서를 무너뜨린 자유와 평등 이념이고요. 자유와 평등이 질서의 가치 위에 있다는 걸 강조하는 거죠. 또 사회정의가 질서 이념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명제는 논리적 정합성도 갖고 있습니다. 사회정의가 이루어진 곳에서는 기존 질서에 도전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 

홍세화는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의 연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림은 장 피에르 위엘의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홍세화는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의 연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림은 장 피에르 위엘의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 카뮈의 말은 한국에도 대입할 수 있을 듯 한데요. 

“그렇죠. 사회 불의를 극복하려는 약자들의 요구를 법질서 이름으로 억압하죠. 프랑스에서 이야기하는 무질서를 택한다는 게 한국에선 뒤집어져 있습니다. 근대공화국의 시민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유와 평등 이념으로 인간에게 강요된 가장 무서운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고 태어난 게 근대공화국입니다. 당연히 질서에 비해서 사회정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거죠. 어원적 의미도 중요합니다. 중세 신분 질서에선 왕, 귀족, 노예가 뱃속부터 규정됐죠. 이걸 복종시키려면, 당연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배이념 있어야 하죠. 그게 바로 ‘신의 명령’이라는 이념이었죠. 영어로 오더(order)라는 게 명령이면서 또 질서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불어도 마찬가지죠. 사물의 질서이면서 명령이란 뜻입니다. 중세의 신분 질서는 신의 명령에 따라 규정됐다는 거죠. 이게 무너지면서 근대공화국이 탄생한 겁니다. 근대공화국이라면 자유·평등과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되어야 합니다. 한국은 분단 상황 등 현실적 이유를 대겠지만, 법질서가 심할 정도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죠. 안타까운 건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공공성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자유, 평등, 사회정의 이념이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공유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녔을 때를 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학교에서 주로 강조 받은 것은 공공성, 자유, 평등, 사회정의가 아니라 안보, 질서, 국가경쟁력 이념입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다.’ 마르크스의 말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주체적 시민으로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국의 학교는 지금까지 민주공화국의 학교인 적이 없습니다.”

- 한국 정치권에서 공화국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유승민 의원이 민주공화국을 강조하기도 했고요.

“유승민씨가 말 뿐이라도 민주공화국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건 긍정적으로 봅니다. (정치권의 공화국 담론은) 우선 한국의 보수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게 하죠. 한국의 보수는 보수를 참칭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세력이 주류죠. 그 나마 보수의 가치를 인식하는, 보수에 근접한 유승민 같은 이들조차도 사익추구집단에 같이 어울려 있어요. 그들의 입장, 포지션이 다 연결되죠. 극우적 수구세력 속에 소수의 보수가 끼어있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사익추구집단과 보수가 분리되어야 하는데, 분단상황이나 진보세력이 취약한 등의 문제 때문에 분리가 잘 안 됩니다. 친박이니 진박이니 하는 허접한 현실 자체가 새누리당이 애당초 보수하곤 인연이 없다는 걸 스스로 드러내고 있지요.

유럽의 보수세력을 보면 그 뿌리는 프랑스에서 보듯이 공화주의자입니다. 그걸 놓치면 안 됩니다. 이들이 신분제를 무너뜨린 세력이니까요. 시민계급이고요. 프롤레타리아를 견인하고, 연합해 앙시앙레짐을 무너뜨리죠. 결국 부르주와 민주주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를 배반하지만 오늘의 드골주의도 그들의 공화주의 전통과 직접 연결됩니다. 보수세력이라면 보수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민족·국가·가족·전통의 가치이고 보수세력이 보수하겠다고 하는 것인데요, 한국의 보수를 참칭하는 세력은 철저한 사익 추구세력이라 (내세우는 가치를 두고도) 어떠한 논리도 없어요. 미국을 업고 힘도 막강하죠. 유승민 같은 사람이 공화국에 관해 발언하는 건 반가운 일인데, 왜 그 품속에서 하고 있나요. 그들의 힘을 이용하면서요. 결국 그 품에서 일종의 숙주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나마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웃음)” 

- 한국정치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야권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유시민씨도 강조했지만 야성이 없습니다. 사드배치도 그렇고, 세월호참사도 그렇고요. 지금 엉망 아닌가요. 말도 아닌 상황인데, 도대체 싸우는 모습은 안 보이고, 이게 뭔가 싶을 만큼요. 이들이 여당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왜 이렇게 유약할까. 유약함이 내면화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죠. 야성이 보이지 않는 게 일상 세계의 함정에 갇혀서인지, 서로 끼리끼리 만나 허허 하는 상황 때문인 건지…. 총선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 쪼개졌다 해도 다수가 야 3당인데, 우병우 등 어지러울 정도로 나라가 정말 형편 아닌데, ‘이게 아니다’ 하고 총대 메고 제대로 뭔가 하는 걸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들 역시 기득권 세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죠. 그만큼 한국 민중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의식도 없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지나면서, 여당을 경험해본 뒤에 굉장히 물러져 버린 듯합니다. 민중의 현실이 어떤지에 대해 절박함 같은 걸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을 빼면, (의원 간에) 엄청난 비대칭성을 보여줍니다. 그 비대칭은 민중의 구체적 현실과 정치 현실 사이의 비대칭이기도 하죠. 3김 시절 만 해도 자본권력이 국가권력과 평행했거나, 국가권력이 우위에 있던 시절 김대중·김영삼이 보여줬던 야성에 비교되죠. 지금은 그때보다 자본권력은 엄청 더 커졌고, 그런 자본권력에 야권도 깊숙이 포섭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민중의 고통, 절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을 꼽으신다면요. 

“가령 용산참사를 볼까요. 축출과 배제의 정치잖아요. IMF 이후 일방통행 밖에 없었죠. 약자들을 몰아내기만 했죠. ‘축출자본주의’라는 말도 있는데, 축출시켜놓고 계산에 넣지 않는 거죠. 일방적인 현실이 문제입니다. 당연히 노동문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노동현장의 실상은 잘 보이지도 않아요. 이미 축출되어버린 거지요. 노동자들의 구체적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건 민주노총인데, 이들조차도 대기업, 남성 중심이란 한계가 있죠. 재정이 주로 거기서 나오니까…. 취약합니다. 앞으로 더욱 취약해질 위험이 있고요.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떤가요. 근대국가를 낳은 사회계약론이라는 게 가령 토마스 홉스의 ‘만인은 만인의 이리’의 관계에서 서로 불안을 느끼니까 국가에 권력을 위탁하고 그 국가로부터 생명과 안전을 보호받는다는 것 아닙니까. 세월호는 참사 그 자체부터 특조위 등 그 이후의 대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강력한 사익추구집단의 당파성이 근대국가 성립 정신을 부정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용산참사는 민중의 고통, 절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축출과 배제의 정치가 작동했다. 사진은 2014년  I서울 한강로2가 용산참사 현장 담벼락에 꽂힌 희생자 추모 국화꽃. 이상훈 기자

용산참사는 민중의 고통, 절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축출과 배제의 정치가 작동했다. 사진은 2014년 I서울 한강로2가 용산참사 현장 담벼락에 꽂힌 희생자 추모 국화꽃. 이상훈 기자

- 최근 프랑스에선 난민 사태를 두고 ‘공화주의’ 논쟁이 다시 나왔습니다.

“유럽 전반의 문제인데요. 프랑스는 공화주의 가치 속에 이민자들을 통합시키려 해왔습니다. 지금 (이민자나 난민 문제는) 이것이 실패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요. 공화주의 가치는 공교육을 중심으로, 같이 교육 받으면서 공공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죠. 지금 유럽의 이민자 2·3세 문제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토대에 둔 사회통합에 실패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왜 실패했냐? 저도 동의하는 지점인데, 이민자나 사회 하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하는 좌파정당들이 우경화한 걸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아요. 사회 중하층 노동자계급이 좌파정당이 아닌 극우 정당에 표를 주는 건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버림받았거나 배반당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프랑스 사회당은 중하급노동자들보다 대기업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상황이죠. 신자유주의 영향이기도 하고요.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유럽의 전통적인 좌파정당들이 우경화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있을 때는 이념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왼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지요.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각 나라 좌파정당은 집권 전략상 오른쪽으로 갔는데, 그래야 표밭이 늘어나니까요, 이런 흐름에 이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왼쪽으로 견인할 힘이 없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이 ‘제3의 길’이니 ‘신노동당’ 노선을 취했고, 독일의 사민당도 신중도로 우경화되었고, 프랑스 사회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집권은 했으나 과거의 좌파정당은 이미 아니었지요. 유럽의 나라들도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예산이 줄어들고 이민자 2·3세에 대해 사회적으로 통합을 시도한 각 지역 활동이나 도서관 같은 이민자 청소년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적 장소를 위한 예산을 삭감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버려지는 상황이었죠. 전반적으로 유럽 극우세력의 준동과 궤를 같이 합니다. 좌파 정당들이 자기 노선을 지키지 않고, 집권 전략에 따라 우경화한 결과죠. 좌파 정당의 전망 부재, 이념 토대 부재 문제도 있고요.”

- 한국 좌파도 세가 많이 준 듯합니다. 

“새로 시작해야죠. 정치적으로 보면 2004년 민주노동당 득표율 13%로 10석을 했고, 그 뒤로 계속 지리멸렬해가는 과정이죠. 제가 볼 때, 가장 치명적 문제는 지적·윤리적 우월감에 의한 공부 부족입니다. 한국 진보·좌파 세력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로 진보·좌파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선배를 잘못 만나 거기로 들어가는데요.(웃음) 자기가 진보다, 좌파다 하는 지적 우월감에다 ‘내가 노동이나 진보 정치 진영의 열악한 조건에서도 희생적으로 운동하고, 참여한다. 자본주의사회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윤리적 우월감까지 갖고 있어요. 오만한 사람에게는 회의가 없고 회의가 없으면 성숙하지 않지요. 사람 되는 공부를 멈추니까요. 사람 공부도 멈춘데다 지적 우월감 때문에 세상공부도 안 해요. 그게 핵심적 문제에요. 사람 되는 공부도, 세상 공부도 멈춘 진보...자기모순, 자기배반이지요. 한국이 처한 모순이 얼마나 복잡한가요? 세계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모순의 덩어리죠. 분단·민족·젠더·계급·생태·지역 모순 다 있어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영남패권주의 문제도 있죠. 이걸 총체적으로 인식하려면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활동 영역과 전공이 이 모순의 중심이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활동가든 전공자든 자신 활동의 분야가 모든 모순의 정점이고, 이것만 해결하면 다른 게 해결된다는 아전인수가 심해요. 아전인수이다 보니 어떤 경우 근본주의자가 되죠. 예를 들어 사드배치가 문제가 되면, 민족모순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은 모든 게 미국 문제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게 재벌 문제다, 또 어떤 사람은 영남패권주의 때문이다 식으로 하죠. 겸손하지 않아요. 진보가 겸손할 줄 모르니까, 지금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 영남패권주의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글도 쓰셨는데. 

“그 칼럼 쓰고 (저자) 김욱씨한테 또 비판받았네요. (웃음). 각자가 자기 성채 쌓고 있고,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 좀전 말씀하신 ‘사람되는 공부’란 무엇인지요? 

“‘사람된다’는 의미는 자기 전공이나 활동 분야만이 중심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없으면 각자 만들어낸 성채, 진영을 만들어낸 성채를 허물 수 없어요. (진보·좌파가) 얼마 안 되는데 다 찢어져있는 것도 자기 전공·활동이 중심이란 데서 비롯된 거죠. 보수는 이권이 있으면 모입니다. 진보는 이념으로 모이고요. 경향신문도 한겨레도 어려움 많잖아요. 조중동 보는 사람은 ‘나 이제 안 봐!’ 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경향과 한겨레를 구독하는 사람은 소수인데, 이들은 신문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확인하는 즐거움 때문에 봅니다. 그런데 10개 꼭지 중 1~2개 만 자기 생각과 안 맞아도 ‘나 안 봐!’ 이러는 거에요. 창간 주주 중 한겨레 보는 사람 많지 않습니다. 신문 논조가 자신의 생각과 60% 정도만 맞아도 계속 구독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지요. 시민성이 성숙하지 못한 면도 있고요. 진보적이라면 이념에는 투철해도 사람들에게는 유연해야 하는데, 이게 반대로 되어 있어요. ‘가까우니까 부딪힌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먼 사람은 우리 일상에서 만날 일이 없고 실제로 만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부딪힐 일도 없고요. 그래서인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거칠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요. 극복대상보다 경쟁대상에게 더 적대성을 보이고 있는 게 진보의 자화상 아닌가요?”

- 정리 차원에서 다시 묻자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요. 

“워낙 막강하죠. 검찰, 경찰, 사법부, 언론, 국방, 종교, 사학까지. 다 반민주공화국적이죠. 반공공적이고요. 이 세력들이 철저하게 사익 추구를 위해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정치적 지형 자체가 변화하지 않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정치 지형이 바뀌려면, 일단 변혁적 국면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에밀 뒤르켐이 이야기한, 소위 변혁적 국면이 필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국면이 빨리 오면 좋겠네요. 야당엔 야성이 없고 진보 진영 이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민중의 힘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고 각자 자리에서 가능한 실천을 해나가야겠지요.”

-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제도 변화는 무엇일까요. 


“너무 많죠. 예컨대, 독일식 비레대표제부터요. 그리고 기본소득제가 실현되길 바랍니다.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건 교육 문제에요. 생각하는 교육, 사유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을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아닌 신민으로 옭아매고 있는 핵심이 주입식 암기교육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죠. 그러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대학평준화를 해야 하고요. 하나 더 뽑자면 검찰총장 추첨선출제. 한국은 민주공화국인 적이 없어요. 그러니 공화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와 길항 관계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려는 차원에서도 공화주의 의미가 있어야 하고요. 그 핵심은 공공성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271703001&code=940100&s_code=as166#csidx1e851014ad6f7fabc1eed94a439f992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3)비정규직인 나와 부자인 그에게 나라는 평등하지 않다

이주영·장은교·김형규·박광연·최민지 기자 young78@kyunghyang.com


ㆍ붕괴된 공동체…‘각자도생’ 시대
ㆍ의지하지 말라…국가는 ‘가진 자’만을 떠받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김포공항 순환버스 정류장 앞에서 삭발한 청소노동자 손경희씨(51)가 멀리 보이는 공항공사와의 대화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br />이상훈 기자 doolee@kyunghyang.com

비바람이 몰아치는 김포공항 순환버스 정류장 앞에서 삭발한 청소노동자 손경희씨(51)가 멀리 보이는 공항공사와의 대화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doolee@kyunghyang.com

1993년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한국경제에 대해 시장주의 경제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고도성장과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 분배를 동시에 이룬 국가라고 세계은행은 평가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성장률은 연 10%에 육박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때에도 매년 7~8%대의 성장세를 유지했다. 전쟁 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자원도, 기술도 없이 출발한 산업화는 오로지 노동력에 기댔다. 경제가 성장하자 국민소득도 늘어났다. 1961년 100달러도 안됐던 1인당 국민소득은 50여년간 300배 이상 불어났다. 높은 성장률은 고용 증가와 임금 상승의 원동력이 됐다. 특별한 분배 정책이 없어도 초스피드 성장 자체가 어느 정도의 분배를 보장해줬다. 

압축 성장에 대한 경고음이 나온 것은 ‘동아시아의 기적’이라고 평가받던 무렵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는 1994년 “아시아 국가의 경제 성장은 기술 진보 없이 값싼 노동력과 정부 주도의 자본 투입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하며 조만간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3년 뒤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내부 식민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폭염이 한창이던 지난 8월, 대전에서 하루 새 홀로 사는 노인 세 명이 잇따라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은 하나같이 심각하게 부패되거나 잘 먹지 못해 마른 상태였다. 두 달 전 강원도에선 아내가 숨지자 거동을 못하던 70대 남편이 아사 직전 구조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 특권층·중산층이 아니라면 노인으로 산다는 건 징벌에 가깝다. 지난해 1245명이 무연고로 사망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자살과 노인 빈곤율 모두 1위이다. 노인 빈곤율은 49.6%(2013년 기준)로, 노인 절반이 빈곤의 나락에 떨어져 있다.

높은 노인 빈곤율은 낮은 수준의 공적연금과 관련이 깊다. OECD 국가 노인가구는 소득의 59%를 공적연금에서 얻는다. 한국 노인의 소득 대비 공적연금 비중은 16.3%다. 공적연금만 받아선 생활이 안되니 고령자도 일을 놓을 수 없다. 한국 노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31.4%(2013년 기준)로, OECD에서 두 번째로 높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는 고도성장이 빚어낸 샴페인 잔을 일거에 깨뜨렸다. 외형적 확장 외에는 거의 아무런 제도적 정비 없이 달려온 고속 성장의 민낯은 거칠었다. 성장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임금상승률도 급락했다. 성장률 하락은 분배 악화로 이어졌다. 노동 시장도 분절됐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중소기업에 다니다 대기업으로 옮기는 것도, 돈 모아 집을 사는 것도 제법 가능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이런 일은 힘들어졌고 소득 격차가 벌어져 양극화가 심화됐다. 중산층은 와해됐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정부가 뒤로 물러선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결과다. 민주공화국의 위기는 양극화에서 시작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정치적 측면에서는 민주공화국의 틀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지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계층 분화나 양극화가 심화됐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계층 이동이 굉장히 어려워졌고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강하게 굳힐 기회가 됐다. 우리는 신분제 사회로 가고 있다.”(박찬승 한양대 교수) 

‘빈곤노인 기초연금 보장 연대’ 관계자들이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 노인들의 기초연금 수여를 요구하는 도끼 상소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빈곤노인 기초연금 보장 연대’ 관계자들이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 노인들의 기초연금 수여를 요구하는 도끼 상소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정부는 청년 일자리 예산으로 매년 2조원 이상을 쏟아붓지만 청년실업률은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기 바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9.4%를 기록했다. 9월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잠재적 실업자를 고려하면 체감실업률은 2~3배 더 높다. 장관, 국회의원, 법조인 자녀들이 ‘부모 스펙’을 이용해 취업 특혜를 받았다는 소식은 청년들을 절망케 한다.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은 우리로 하여금 민주공화국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 사회현상이다. 나라의 미래를 담당해야 할 젊은이들이 사회를 지옥이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전근대적인 신분주의가 깊게 뿌리내렸다는 현실 인식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현상이다.”(김호기 연세대 교수) 

불평등을 보여주는 통계는 차고 넘친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의 ‘한국의 개인소득 분포: 소득세 자료에 의한 접근’ 논문을 보면 2010년 20세 이상 성인인구 3797만명 중 상위 10%(10분위)는 전체 소득의 48.05%를 가져갔다. 이들의 평균소득은 8085만1000원으로, 전체 소득자 평균소득(1682만5000원)보다 4.81배 많다. 하위 70%(1~7분위)가 갖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8.87%다. 이들이 버는 돈을 다 합쳐도 상위 10%가 버는 돈의 절반도 안된다. 

소득이 한쪽으로 쏠리는 속도도 빠르다. 국회 입법조사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상위 10% 소득 집중도는 44.9%(2012년 기준)로 OECD 회원국 중 미국(47.8%) 다음으로 높다. 1995~2012년 소득 집중도 상승폭도 15.7%포인트에 달해 비교대상 국가 중 가장 높다. 이 속도라면 2020년쯤 미국을 제치고 OECD에서 소득이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될 수 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상용 노동자 중 저임금 노동자(중위 임금소득의 3분의 2 미만을 받는 노동자) 비율도 미국 다음으로 높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보수는 절반밖에 받지 못한다. 삭발식을 치르고서야 언론의 조명을 받은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은 30년간 일해도 시간당 6030원밖에 받지 못했다. 낙하산 인사로 내려온 이들에게 갖은 횡포와 성추행을 당했다. 비정규직이라서, 하청업체 직원이라서 겪은 차별이자 모욕이다. 뇌병변 2급 장애를 앓는 8세 아들을 맡길 데가 없어 화물차에 태우고 다니며 키우다 교통사고로 함께 숨진 일용직 노동자의 소식은 민주공화국에 사는 가난한 자의 삶과 죽음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사고 차량에서는 어린이용 카 시트도 발견되지 않았다.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너무 없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해결책 없이 그대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아 기운이 빠진다. 일을 하면 금전적으로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점점 의욕이 사라지는 것 같다. 내년 계약에 대한 두려움이 벌써부터 밀려온다.”(비정규직 방과후 교사 정모씨)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을 쓴 역사 교사 김육훈씨는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대거 계약직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꾼 것은 국가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며 “국가는 국민 모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때의 조치들은 국가가 견지해야 할 공공성을 크게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저임금을 줄이고 노동자 처우를 개선하려고 도입한 최저임금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년도 법정 최저임금은 시간당 6470원으로 올해보다 440원(7.3%) 인상됐다. 한 달 임금으로 환산하면 135만2230원. 1인 가구의 월평균 생계비(167만3803원)에도 못 미친다.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최저임금도 못 받는 ‘근로자 비율’은 11.8%(2013년 기준)다. OECD 26개국 중 세 번째로 높다.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3)비정규직인 나와 부자인 그에게 나라는 평등하지 않다

■“국가가 곧 기업이 됐다” 

서울 강남구 신사역 인근의 ㄱ감자탕집은 24시간 영업을 한다. 80석 식당의 한 달 매출은 평균 1700만원 정도 되지만 월세 440만원(보증금 5000만원)에 인건비 등을 제하면 주인 부부 손에 쥐어지는 돈은 월 300만~400만원 남짓이다. 주인 ㄴ씨의 얘기다. “강남이라 다른 동네보다 임대료가 높다. 월세 내고 인건비 주면 수입이 안 나오니 손님 한 명이라도 더 받으려고 24시간 한다. 새벽 시간대 손님이 많을 때는 5~6팀, 적을 때에는 1~2팀이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지난 추석 대기업 계열 대형마트들은 ‘추석 당일 정상 영업’을 했다. 명절 당일 영업하는 게 ‘정상’인 나라, 새벽에도 식당 문을 못 닫는 나라. 노동의 가치가 땅값보다도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땀 흘려 노력해도 부의 축적이나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시대엔 부동산 투자가 모든 사람의 로망이 됐다. KB금융연구소의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큰손’들의 재산 절반(52.4%)은 부동산이었다.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이 주로 찾았던 부동산 경매학원은 20대 대학생, 30대 직장인들로 붐빈다.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건물주’라는 답이 나온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풍자하듯이 세입자들의 입지는 취약하다. 저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건 대세가 됐다. 노무현 정부 때 1.66%이던 전셋값 상승률은 박근혜 정부 들어 18.16%로 10배 이상 높아졌다. 전세 비율은 1995년 29.7%에서 2014년 19.6%로 내려간 반면, 월세 비율은 같은 기간 11.9%에서 21.8%로 높아졌다. 이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의도한 방향이다. ‘최경환 경제팀’은 2014년 8월 부동산 대출 규제를 대폭 풀었고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내리며 손발을 맞췄다. 업자들도 “전세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제도”라며 전세 씨말리기에 힘을 보탰다. 이들에게 매달 임대료 대느라 허덕이는 서민들은 안중에 없었다. 

임대소득은 대표적인 불로소득이다. 그런데 세금은 제대로 걷지 않는다. 현행법상 모든 주택임대소득은 원칙적으로 과세대상이지만 예외 조항이 너무 많다. 1주택 소유자는 주택 기준시가가 9억원을 넘지 않으면 아무리 월세를 많이 받아도 과세대상이 아니다. 연간 2000만원까지의 주택임대소득에 대한 과세는 정부가 비과세 특례 기한을 2년 더 연장하면서 내년에도 물 건너갔다. 전세 임대인의 경우 3주택 이상 소유자이고 전세보증금 총액이 3억원 이상인 경우에만 과세대상이 된다. 미국·일본 등에서 주택 수나 가격에 상관없이 임대로 발생한 소득에 모두 과세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부는 매년 세법개정안을 발표하면서도, 이 같은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에는 손을 놓는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부동산은 그 자체로 부의 불평등 문제와 더불어 높은 자본소득(낮은 노동소득)의 문제를 제기한다. 높은 부동산 가격은 두고두고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소득 불평등을 더욱 압박할 것이다.”(이정우 경북대 교수) 

경제활동으로 만들어낸 국가 소득은 가계, 기업, 정부에 분배된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는 가계와 기업에 분배된 소득 비중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가계소득의 몫이 지속적으로 줄어든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1990년부터 2014년까지 국민소득 중 가계소득 비율은 70.1%에서 61.9%로 8.2%포인트 감소한다. 이 기간 기업소득의 비율은 17.0%에서 25.1%로 8.1%포인트 증가했다. 임금·이자·배당과 같이 가계소득으로 분배돼야 할 몫이 줄어들고 기업 몫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서울 도심 속 대표적 달동네인 종로구 창신동에서 지난 14일 오후 한 주민이 옥상에서 키우는 채소에 물을 주러 가고 있다. 뒤쪽엔 고층 아파트촌이 자리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서울 도심 속 대표적 달동네인 종로구 창신동에서 지난 14일 오후 한 주민이 옥상에서 키우는 채소에 물을 주러 가고 있다. 뒤쪽엔 고층 아파트촌이 자리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7·4·7’ 공약(성장률 7%, 국민소득 4만달러, 7대 경제강국)을 내걸고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 주도 성장의 과실이 국민 전체로 확산된다는 ‘낙수 효과’를 믿었다.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고, 노무현 정부 때 도입한 종합부동산세도 부과 기준을 올리고 세율을 낮춰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기업과 자산가들에 대한 감세 조치였다. 

선거 때 재벌 개혁과 양극화 해소를 강조한 정치세력들은 집권 후 친재벌로 돌아섰다. 대통령마다 대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밥을 먹으며 투자와 고용을 당부하는 장면은 익숙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 역시 “규제는 암덩어리”라며 규제완화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강조했다. 기업 이윤은 국가의 유일무이한 목적이 됐다. 

“행정부나 사법부가 예전에는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는 게 문제였다면 지금은 국가권력이 자본의 영향에 좌지우지된다.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인데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하승수 변호사) 

대통령 사면권은 법원 판결을 없던 일로 해버리는 예외적 권한이다. 역대 정부는 때마다 재벌 총수들을 풀어줬다. 명분은 민생·경제 살리기였다. 효과는 없었다. 투자나 고용을 늘리더라도 반짝 이벤트에 그쳤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12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한 명을 위한 ‘원 포인트’ 특사도 단행했다. 이 회장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맡고 있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 법무장관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자”고 말했다.

낙수 효과는 실종됐지만 친재벌 정책은 그대로다. 롯데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한 제2롯데월드 신축은 군 항공기 안전 문제로 장기간 표류했으나 이명박 정부는 활주로 각도를 변경하고 롯데가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줬다. 복지 재정 확충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지만 정부는 ‘증세 불가’ 도그마에 갇혀 있다. 기업들은 수백조원의 유보금을 쌓아 두고도 투자나 임금 인상에는 인색하다. 

경제력 집중은 심화된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재벌에 속한 기업 24곳이 생산한 부가가치는 2011년 94조1000억원에서 2013년 119조원으로 늘었다. 삼성그룹 소속 9개사는 2013년 총 62조8000억원의 부가가치를 생산해 50대 기업이 생산한 부가가치의 37.1%를 차지했다. 범4대 그룹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자산 비중은 2000년 45.8%에서 2012년 말 69.7%로 약 1.5배 늘어났다. 매출액 상위 10대 기업이 각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 15.1%, 일본 22.0%, 프랑스 29.4%, 독일 30.1%이지만 한국은 47.1%에 이른다. 

노동자나 소비자가 희생양이 된 사건에서 개입·조정 책임을 진 정부는 방관자로 전락했다. 생명이 걸린 문제도 외면할 때가 많았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기흥공장에서 2년간 일하던 황유미씨가 급성백혈병으로 스물셋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가 그해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한 뒤 백혈병이 직업병이었음을 인정받기까지 7년3개월이 걸렸다. 정부 집계에서도 사망자가 100명이 넘고 수천명의 피해자를 낳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위해성이 명백해질 때까지도 제조·유통 업체에 대한 제재나 피해자 구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지난달 정기회의에서 채택한 ‘유해물질 및 폐기물 처리 관련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의 한국 방문 보고서’에서 “산재보험 체계와는 별도로, 피해를 구제받아야 할 노동자·피해자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1차적 책임 주체인 정부가 수행한 대책의 수준이 놀랄 만큼 낮다”며 “산재보상 청구인에게 부과된 과도한 입증 책임 때문에 보상을 받기 어려워지는 점을 우려한다”고 적었다. 

“공공성의 표상이자 골간인 국가까지 시장화돼서 국가가 ‘재산관리 국가’로 전락했다. 국가가 형평이나 공공성, 자유, 시민 권리의 보호가 아니라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박명림 연세대 교수) 

■“신계급사회, 계층 이동 사다리를 치우다”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다. 고대 로마처럼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귀족공화국도, 중국처럼 권력이 내각이나 당에 집중된 ‘인민공화국’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삼권 분립과 인권 평등이 보장되는 나라다. 조선왕조 500년, 식민통치 35년이 끝난 뒤 들어선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마침내 공공 가치를 공유하고 균등한 권리를 누리며 주체가 되는 사회가 될 거라고 믿었다.

2016년 대한민국은 다시 봉건사회다. 학벌, 재산, 직업에 따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구분된다. 교육부 고위 관료는 “구의역에서 죽은 아이가 어떻게 내 아이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라고, 계급과 신분을 구분 짓는 엘리트층의 의식체계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자기 자식은 이미 평등의 고원 위로 올라가 있다는 거다. 구의역 노동자의 죽음에 감정이입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아이(구의역 노동자)는 평등의 고원에 올라온 애가 아니라는 거다. 그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부정의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불행하거나 능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이택광 경희대 교수)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139명(46.3%)은 교수·법조인·관료 출신이다. 81명(27%)이 서울대를 나왔고, 141명(47%)이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오고 사회 주류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몇 년 전까지도 국회에서 소수자를 대변했던 농민, 환경미화원 출신은 자취를 감췄다. 20대 국회 신규 재산등록 의원(154명)의 재산은 평균 34억2200여만원, 4명 중 1명은 재산이 20억원이 넘는다.

퇴직한 ‘전관’들에게 노후 걱정은 딴 세상일이다. 최근 5년간 공정위에서 4급 이상 고위직을 지내다 퇴직한 뒤 재취업한 사람 가운데 85%가 대기업이나 로펌행을 택했다(더불어민주당 김해영 의원).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는 공직에서 쌓은 다양한 특별수사 노하우를 ‘거물들’ 변호에 재활용하며 연간 100억원 가까운 소득을 거뒀다. 대기업이나 로펌이 고액 연봉을 주고 고문, 자문위원 등으로 전관들을 영입하는 건 이들의 ‘힘’이 로비 과정에서 통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공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정의다. 그런데 돈 많이 벌고 성공하면 당장 욕을 먹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게 성공한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다. 절차를 무시하고 부패하더라도 돈 많은 것이 존중받는다.”(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본부장) 

과거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교육은 계층 굳히기의 수단이 됐다.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의 ‘세대 간 계층 이동성과 교육의 역할’ 보고서에 따르면 최하위 25% 임금을 받는 아버지로부터 최상위 25% 임금을 받는 아들이 나오는 비율은 18%이지만, 최상위 임금을 받는 아버지로부터 최상위 임금을 받는 아들이 나오는 비율은 36%로 두 배 높다. 과거엔 집안이 가난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부모 경제력에 따른 교육 격차가 커지면서 계층 간 대물림을 공고화한다. 고시제도의 배타성을 보완하려고 도입됐지만 ‘금수저’를 위한 제도가 되어버린 로스쿨이 대표적인 예다. 로스쿨의 1년 등록금은 1600만~1800만원. 고위층 자녀가 로스쿨 졸업 후 취업 과정에서 부모 스펙의 도움을 받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교육 여건이 열악한 지역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서울대가 2005년 도입한 ‘지역균형선발’ 전형은 오히려 서울 학생들에게 유리하다. 올해 지역균형선발 전형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서울 출신 학생은 4명 중 1명꼴이다(더민주 오영훈 의원).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등 사회적 배려자를 위한 전형인 ‘기회균형선발’로 입학한 학생은 2012년 5.8%(195명)에서 올해 2.9%(163명)로 줄었다.

“공화라는 말은 세습 귀족이나 왕이 없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 처해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흙수저론이 나올 정도로 불평등이 심각하다. 교육, 복지, 노동의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특정 계층에 편중된 부분이 있다. 경제적 불평등만이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정치에서 (민중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특별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특집 페이지 주소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6/republic/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182236005&code=940100&s_code=as166#csidx50011336b9d4f41b007f842cc64f2c8

[공화국을 묻다-하승수]“우리의 삶, 우리가 결정해야 민주공화국”

정리|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ㆍ“생활 속에서 우리는 주인으로 살고 있나요? 주어진 대로 살고 있나요?”
ㆍ “자본이 다스리는 과두정을 시민이 지배하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승수 변호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승수 변호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 특별취재팀은 지난 7~9월 지식인 40여명과 기획 자문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움 주신 분들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게재 전 보완 과정을 거쳤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특집 페이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바로가기 



하승수(비례민주주의연대 운영위원·변호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라는 물음에 “우리의 삶과 일상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대한민국은 자본의 눈치를 보는 나라가 됐다고 진단했다. 물과 공기, 먹거리, 에너지 문제마저도 자본권력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선 시민들이 작은 생활단위에서부터 결정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쌓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라는 주제를 던져보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두정이라고 봐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죠. 근본적으로 보면, 재벌, 기득권 정치세력, 행정·사법관료, 기득권 언론들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처럼 원시적이고 비민주적으로 통치를 하는 권력이 일시적으로 튀어나올 수 있기도 하구요. 어떤 나라가 민주공화국인가를 분석해 볼 수 있는 여러 틀이 있는데, 먼저 ‘누가 지배하는가’의 관점이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은 다수의 국민들이 참여해서 공동체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인데 지금 과연 누가 결정하고 누가 지배하고 있죠?

정치시스템 말고 일상 생활에서 한번 생각해보죠. 물이나 공기 등 우리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실제 어떻게 결정되고 있는지, 우리의 의견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생활 속에서 우리는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주어진대로 먹고 살고 있는지요. ‘소비자주권’이라는 말도 하지만 결국 자본의 논리때문에 노동자도 소비자도 다 대상화 될뿐 소외되고 있습니다.

제헌헌법이 실린 대한민국 30년(1948년) 9월 1일자 관보

제헌헌법이 실린 대한민국 30년(1948년) 9월 1일자 관보 

역사적으로 접근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해방 이전 임시정부에서 꿈꾼 대한민국의 모습이 있죠. 가장 잘 나와있는 것은 1948년 제헌헌법입니다. 

제헌헌법 제5조는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해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고 명시했습니다. 

제18조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제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했어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헌법이었던 거죠. 그런 정신만 잘 실현됐어도 지금 우리사회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제헌헌법은 이승만 쪽을 빼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체로 합의했던 공화국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꿈꿨던 공화국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고 변질됐습니까? 

알권리의 실태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는 최소한의 정보를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데 지금 중앙정부는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보 3.0’을 한다는데 ‘정보 1.0’도 안되고 있어요. 시민들이 정보를 찾으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습니까.”

-임시정부에서까지 민주공화국을 꿈꿨는데 지금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저해요인을 꼽아본다면요. 

“행정부나 사법부가 예전에는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는게 문제였다면 지금은 국가권력이 자본의 영향에 좌지우지됩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자본의 영향을 받는 게 심해졌어요. 새만금 토건사업 문제도 토건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정책이 엉망이 된 거에요. 4대강도 마찬가지죠. 국가 의사결정이 자본에 의해서 좌우된 겁니다. 원전문제라든지 이명박 정부 때 대량허가가 난 석탄화력발전소 등등…자본의 이익에 맞춰 에너지와 먹거리 문제까지 결정됩니다. 유통 마켓도 대형 재벌회사가 장악하고 있죠. 우리의 일상, 먹는 것과 전기, 마시는 물까지도 이제는 자본아래 다 넘어가 버리는 현상이 점점 심해졌어요. 

언론의 경우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 15년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자본과 언론의 힘이 커진 것이 민주공화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저해요인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자본의 힘이 가장 강하고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인데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권자와의 거리도 멀잖아요. 거대정당들을 중심으로 시스템이 굴러가니까 견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거죠.

‘민주주의 지수 평가’라는 게 있는데 잘되는 나라는 대체로 다당제 정치구조가 형성되어 있고, 선거제도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다당제 시스템을 하면 정치가 불안정해진다’는 이상하게 왜곡된 논리가 퍼져있어요. 미국이나 한국처럼 거대정당의 양당제로 굴러가는 나라가 더 불안하죠. 그러나 헌법학자, 정치학자들도 출처불명의 논리를 들고 나와 양당 시스템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그 역할을 합니다. 이번 기획에서 잘못 알고 있는 민주주의상식. 왜곡된 점들도 짚어주면 좋겠습니다.“ 

지난 8월 25일 경북 고령 낙동강에 발생한 녹조 위로 물고기 한 마리가 떠다니고 있다. | 이상훈기자

지난 8월 25일 경북 고령 낙동강에 발생한 녹조 위로 물고기 한 마리가 떠다니고 있다. | 이상훈기자

-최근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 더불어민주당의 김부겸 의원 등이 공화국과 공화주의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공화주의 얘기를 하는 것은 좋은데, ‘공화국’ 앞에는 반드시 민주라는 말이 붙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사실상 민주국가가 아니라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 상태인데, 자칫 ‘공화주의’만 강조하면 ‘소수 엘리트가 사회 공공선을 실현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왜곡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이 공동체의 이익이고 가치인지도 시민들이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려질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최근 15년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한·미FTA죠. 우리 주권이 양도되는 조약인데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들어졌어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굉장히 큰 문제에요. FTA는 한번 체결되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지만 체결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의사결정과정에 국민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습니다.

국정원 대선불법개입사건도 그렇습니다. 국가권력이라는 것이 최소한 지켜야 할 기준이나 원칙이 있는데 무너졌어요. 정보기관을 포함해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의 최소한의 중립성이 무너진 사건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라도 민주공화국이 되려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의민주주의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 대의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선거제도는 세계 최악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지난해 2월에 독일식에 가까운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전면개편하자는 제안을 냈습니다. 보수적인 공무원들이 보기에도 한국의 선거제도는 엉망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상대적으로 좋은 선거제도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단계에선 직접민주주의의 경험과 무대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시민들이 작은 생활단위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해야 합니다. 시민들이 결정에 참여하는 경험, 시민들 스스로 공동체의 가치를 찾아내야 하는 거죠. 누가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요. 지자체에서 참여예산제도 등 여러가지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직까진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런 변화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6 총선시민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4월 11일 20대 총선 투표참여를 호소하는 율동을 펼치고 있다. | 정지윤기자

2016 총선시민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4월 11일 20대 총선 투표참여를 호소하는 율동을 펼치고 있다. | 정지윤기자

개헌 얘기할 때 자꾸 권력구조만 말하는데 이제는 지금 하고 있는 대통령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년 중임제를 주장하는 분도 있지만, 4년 중임제란 8년 독재를 할 수 있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 4년 중임제를 하고 있지만, 큰 탈 없이 하고 있는 것은 그 제도가 좋아서가 아니라 국회 권한이 우리보다 세고 연방제를 하면서 주정부 권한이 강하기 때문이에요. 대통령이 나라를 완전히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독재까지는 못가는 거죠. 우리나라는 좀 달라요. 굉장히 위험합니다.


개헌에 대해 자꾸 중앙에서 힘있는 사람들끼리 권력을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만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다른 논의를 해봐야 해요. 우리나라는 국민발안 제도가 없고, 국민투표도 대통령만 발의할 수 있도록 돼있다잖아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국민투표제를 굉장히 폐쇄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원전 문제나 통상정책 문제도, 안전에 관한 문제도 국민들이 참여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국민들은 배제돼있습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했는데 우리나라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시민들의 참여 기회를 여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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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권력이 그 주인을 억압할 때, 국민은 ‘헌법 제1조’ 떠올렸다

황경상·최민지·허진무·박광연·이유진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ㆍ최근 7년간 ‘민주공화국’ 언급 트윗 분석

가끔 그 문장을 꺼내 읽으며 쓰다듬고 싶을 때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헌법 제1조 이야기다. 시민들이 민주공화국을 떠올리는 때는 언제일까. 트위터 사용자가 본격 늘어난 2009년 4월부터 2016년 8월까지 7년4개월 사이 ‘민주공화국’을 한 번이라도 언급한 트윗을 모두 모았다. 맥락 없이 반복 게재된 트윗을 제외한 7639건을 들여다봤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문장이 이렇게나 공허한 문장이었나요?”

가장 처음 등장한 트윗이다.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벌어진 날이다. 시민들은 노제가 끝나도 서울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경찰은 해산작전에 돌입했다. 이 트윗은 당시 경찰을 비판하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한 자릿수에 머물던 ‘민주공화국’ 언급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도 1년 뒤인 2010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즈음이다. 

그해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홍보 포스터에 풍자 의미로 ‘쥐 그림’을 그린 박정수씨에 대한 긴급체포와 구속영장 청구가 알려졌다. 정부는 G20 행사를 앞두고 학생들을 동원했다. 쓰레기 배출까지 자제시켰다. 시민들은 껍데기 민주공화국의 탈을 쓴 ‘왕정’을 떠올렸다. “세계 각지 정상들이 모이니까 이거 하지 마라. 이해할 수 있어. 근데 헌법에 민주공화국이라고 써뒀으면, 제발 미안해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니들 지금 당당한 걸 넘어 아예 명령조잖아!” 당시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대우조선해양 비리 연루 의혹이 제기됐다. “국모가 상처를 받았다.” 황영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의 반응이었다.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될 때 사람들은 헌법을 떠올리며 ‘민주공화국’을 언급했다. 트윗 성격을 분야별로 나누어 보니 ‘정치’(38.1%) 분야가 가장 많았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2011년 6월 ‘민주공화국’ 언급이 처음으로 한 달에 200건을 넘어섰다. 반값등록금 운동이 확산되고,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희망버스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다. 시민들은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의 칼럼을 인용해 트윗했다. “희망버스는 단순히 주변부로 몰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지원 투쟁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삶의 뿌리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민주공화국의 운동이다.” 


11월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우리는 이름만 민주공화국인 국가에 살고 있었다”는 분노가 나왔다. “다수결, 이게 민주공화국인 것”이라며 비준 과정에서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뜨린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의 행위를 비판하면서 비준의 절차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넉 달 뒤인 2012년 3월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민간인 사찰 관련 폭로가 나왔다.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민간인을 감찰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말한 헌법 1조를 무시하고 국가 근본을 흔들어버린 중대 범죄행위다.” 

12월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문재인 후보 지지연설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투표를 안 하면 만주공화국이 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인용 트윗을 올렸다.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의 대선 개입 현장 상황을 조롱하는 “민주공화국 VS 만주공화국 = 잠금 VS 감금”이란 트윗도 나왔다. 똑같은 ‘민주공화국’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재인 : 퍼다주고 평화를 유지하겠다 이정희 : 북한이 원하는 대로 통일을 하겠다 박근혜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선거 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이 불거지면서 ‘민주공화국’은 ‘부정선거’라는 키워드와 함께 꾸준히 거론됐다. 2013년 6월 국정원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이 검찰 기소로 기정사실화하면서 한 달 사이 400건에 육박했다. 역대 최고치였다. “꼭 탱크 몰고 한강다리 건너야 쿠데타인가? 민주공화국, 주권재민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탈취하면 모조리 쿠데타이다. 국정원이 만든 권력, 당연히 쿠데타 정권이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후에도 ‘민주공화국’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이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으며 자신들의 권리를 빌며 얘기한단 말인가.” 그해 12월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면서 언급량은 200건 가까이 뛰었다. “심판대에 선 것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헌재 재판관들이며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다.” 그즈음 정윤회씨의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 사건,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벌어졌다. “‘십상시’ ‘궁중암투’ ‘세습’…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절대 왕정이 통치하는 ‘중세 신분제사회’!” 

2015년 7월, 다시 ‘민주공화국’을 불러낸 것은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였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압박으로 물러나면서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헌법 1조 1항을 대통령에 의해 쫓겨난 새누리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 상상 못했다”는 트윗이 붙었다. 11월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 사건 등으로도 언급량이 늘었다. “정치인이나 정부가 국민의 자격을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민의 자격 따위는 없다. 끊임없이 정부의 자격을 묻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어떤 시민들에게 민주공화국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다. 실현해야 할 가치다. 어떤 시민들에게는 지금 대한민국은 당연히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는 아직 민주공화국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지난 8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건국절 주장 비판 발언도 많은 트윗을 불렀다.


사용자 수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민주공화국’이 점점 더 많이, 더 넓게 호명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빅데이터 분석가인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는 민주공화국 가치가 내년 대선 화두로 계속 떠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민주주의의 급속한 후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사법 정의 실종 등 전방위적 퇴행 속에서 많은 후보들이 헌법적 가치를 박근혜 정부와의 차별화 전략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공화국]“이 정권에선 헌법 조문조차 거짓말 같다” “박 대통령은 왕정국가 공주 캐릭터”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ㆍ트윗 7639개 속 어떤 키워드 있나


경향신문이 취합한 ‘민주공화국’ 언급 7639개 트윗에는 헌법 제1조에 나오는 단어들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 대한민국(1위·3959회), 국민(2위·2113회), 권력(5위·1195회) 등이 그렇고, 헌법(4위·1685회) 자체를 언급한 사람들도 많았다. 헌법 제1조의 조문만을 트윗한 시민들도 이어졌다. “만우절 0시를 즈음해 헌법을 읽어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 정권 아래선 헌법 조문조차 생구라 같다.”

분노가 치밀고, 어이가 없을 때는 헌법 조문으로 ‘이 나라’(40위·151회)의 현실을 돌아봤다. 헌법 제1조 속 단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나라(3위·국가 포함 2004회)였다. “아니 뭔 나라를 되찾자는 것도 아니고 당연한 권리 찾기도 이리 힘들어서야. 이게 민주공화국 맞어?”

시민들은 대통령(8위·828회)의 자격을 물었다. 박근혜 대통령(9위·652회)도 많이 언급됐고 왕(15위·504회)이 85차례, 독재(17위·463회)가 57차례나 함께 쓰였다.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의 반대를 ‘왕정’이라 생각했다. “박근혜씨는 왕정국가의 공주로 보면 나름 매력있는 캐릭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의 대통령감으로는 전혀 아니다. 외계인이 지구생태를 책임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민들의 민주공화국은 거창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투표하는) 국민에게서 나온다.” 선거(6위·투표·투표율 포함 892회)나 대선(29위·238회)으로 민주주의(11위·588회)가 잘 작동한다면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부정(12위·567회)한 선거, 국정원(18위·408회)의 대선 개입은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였다. 투표로만 공화국을 ‘인증’하다보면 이런 주장도 나온다. “2008년 광우병 촛불폭동 때, 종북좌파들이 100일간 수도 서울을 짓밟으며 매일 밤 틀었던 음악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민주공화국이 뭔가? 투표로 자신의 신념을 쟁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받으면 민주공화국에 의문을 품었다. 집회(23위·시위 포함 282회)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경찰(30위·223회)의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질 때 절규처럼 민주공화국을 내뱉었다. 재벌(51위·126회), 삼성(66위·103회), 돈(69위·101회) 등 자본도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체념한 시민들에게 민주공화국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북한(26위·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포함 255회)은 좋은 소재였다. “사람들이 헷갈리나본데, 한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독재하는 나라들은 다 자기가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구. 북한만 봐도 알잖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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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2)“돈이 지배하는 갑·을의 사회…중세 신분제와 뭐가 다른가”


황경상·최민지·허진무·박광연·이유진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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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시민이 말하는 ‘당신들의 민주공화국’


우리 모두는 민주공화국에 산다. 그런데도 일상에서는 잘 느끼지 못한다. 개개인이 맞닥뜨린 삶에서 민주공화국의 원칙은 자주 흩어져 버린다. 무력감을 느낀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이 맞는지’를 되묻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정지윤 기자

우리 모두는 민주공화국에 산다. 그런데도 일상에서는 잘 느끼지 못한다. 개개인이 맞닥뜨린 삶에서 민주공화국의 원칙은 자주 흩어져 버린다. 무력감을 느낀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이 맞는지’를 되묻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정지윤 기자


정선숙씨(49)는 초등학교 방과후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쉽게 말해 비정규직 교사”라고 했다. 매년 3월이 되면 정씨는 ‘360일짜리’ 계약서를 쓴다. 학교가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쓰는 편법이다. 그나마라도 지키면 다행이다. 11월쯤 일방적으로 끝내기도 한다. “그냥 끝입니다 하면 끝이더라고요.” 초등학교 정규 1교시 수업은 40분인데, 방과후교사는 50분을 한다. 시간당 받는 3만원은 20년 전과 같다. 그런데도 정씨는 “철저한 을이라 소리를 낼 수도 없다”고 했다.

겉보기에 분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한꺼풀 벗겨서 각각의 집단 안으로 들어가면 민주공화국 원칙은 작동을 멈춘다. 법은 약자의 눈물을 외면한다. 소수가 권력을 움켜쥐고 돈이 지배하는 사회, “중세 신분제 사회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 대한민국이다. 


■국민이 주인인가, 노예인가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박혀 있다. 국민이 공화국의 ‘진짜 주인’이 되려면 ‘노예’가 아니어야 한다. 김경희 성신여대 교수는 <공화주의>(책세상)에서 “국민이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 주인으로 서려면 적어도 신분·지위·재산 같은 조건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배가 없는 자유가 보장되고 사람이 아닌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공화국의 기본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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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에서 일하는 이민석씨(31·가명)는 “24시간 중 나를 위해서 쓰는 시간이 하루에 한 5시간이 안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5시20분에 출근하고, 퇴근 전 갑자기 일이 던져지거나 상사 눈치가 보여 제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했다. 그런 속에서도 힘이 빠지고 설움이 오래 뭉치는 것은 ‘을 중의 을’이 될 때다. “손님이 막무가내로 욕부터 하니까 직원들이 한 번씩은 다 우는 것 같아요.” 이씨는 “VIP가 오면 정말 영화 속 장면처럼 90도 각도로 인사한다”고 말했다. “완전 계급사회죠. 돈이 곧 권력이 되고, 그게 그냥 신분이 되는 것이죠.” 

취재팀이 만난 시민 40여명은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김세정씨(24·가명)는 회사 안에서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킨다. “수당도 안 주는데 연차도 제대로 못 써요. 하지만 ‘불합리합니다’ ‘고쳐주십시오’ 하고 자유롭게 말 못해요.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 자체도 알려질까 두려워요. 법이 보장하는 내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할 말 못하는 이 사회는 민주공화국이 아니죠.” 제조업체 영업사원인 정형준씨(30·가명)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생각이 없다. 노조를 만들려다 한 방에 ‘훅 가는’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과장님이었죠. 그분이 현재 노조가 어용이라며 복수노조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다 지방 생산직으로 발령받았죠.”


■출발선과 기회가 다른 나라 

취업준비생 송주용씨(27)는 대학 시절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백화점 의류매장 점원, 식품코너에서 고구마 팔기, 보일러 수리공 보조…. 학기 중에도, 방학에도 일했다. 어렵게 졸업의 문턱을 넘었지만, 돌이켜보면 상처투성이다. “반말은 예사고요. 고구마를 봉지에 담는데 장갑 끼지 않은 손이 조금 닿았다고 화를

내며 안 산다고 하기도 하고…. 내가 인격적으로 하등한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죠.” 송씨는 대한민국이 누구나 똑같이 배우고 도전하고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사회라고 했다.

대학원생 김태진씨(28)도 “금수저 친구들의 생활을 보면 마치 다른 나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방학 끝나고 물어보면 흙수저인 애들은 대부분 알바했다고 하고, 집이 여유로운 애들은 외국 갔다왔다고 해요.” 그의 눈에는 한국의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됐고 쉽게 열려 있지도 않다. “선출직 공무원이나 사법·행정 고위관료들이 권력을 다 잡은 것 아닌가요.” 김씨는 “선거도 공탁금이나 선거비용을 보전해 주는 최소 득표율이나 진입 문턱 자체가 너무 높다”며 “이젠 5급 공무원 준비도 경제적 부담이 커 좀 사는 집 애들이 준비도 많이 하고 합격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구성재씨(28·가명)는 보통 오전 7시20분 출근해 오후 9시까지 일한다. 회식도 잦다. 오후 11~12시에 들어가 다음날 오전 5시에 일어나야 한다. 몸의 에너지가 소진된 삶을 생각하면 “토가 나온다”고 했다. “지방에서 서울 올라와 사느라 매달 월세만 50만원 넘게 내는데 언제 집을 마련하고 결혼도 하겠어요.” 그는 “한국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2)“돈이 지배하는 갑·을의 사회…중세 신분제와 뭐가 다른가”


■지배받는 ‘약자의 끝’ 여성 

김세정씨는 회사에서 그만둔 여자 선배들의 이름을 다 외운다. 남자 상사들이 “결혼하면 그만두겠지”라며 입에 달고 다녔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여자는 ‘뻑 하면 울거나 그만두는 존재’들이다. “같이 입사한 동기는 회식 자리에서 ‘결혼하고 그만둘 생각이면 폐 끼치지 말고 당장 그만두라’는 말을 듣고 서럽게 울었다고 해요.” 

담배를 수시로 피우러 나가는 상사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러 가는 여직원을 삐딱하게 본다. 여직원은 분위기나 구색 맞춰 주는 존재로만 남길 바란다. “노래방에서 술 취한 상사가 더듬으려고 한 적도 있죠. 한 입사 여동기는 호텔 나이트클럽 룸에서 춤추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거부했다가 울었어요. 상사가 ‘분위기 정말 못 맞춘다’며 되레 화를 냈다고 해요.” 

서울의 한 여대를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한 전민영씨(28·가명)도 “여성이 소수자인 사회로 나오니 목소리를 마음껏 내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 ‘검사 힘든데 왜 하려고 하냐’는 질문은 늘 여자만 받아요. 자기 검열에 빠지는 것이 요즘 가장 힘들어요.” 가정주부로 살다 2006년부터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영숙씨(49·가명)는 “한국에서 ‘아줌마’로 산다는 것은 무지와의 싸움”이라며 “학교에서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여성이 자기 생각을 말하면 불편해한다”고 주장했다.


■제도를 채울 알맹이가 없다 

공화국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시민적 덕성’이다. 법과 제도가 잘 갖춰져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직장인 손정우씨(26·가명)는 “한국은 하드웨어는 갖춰져 있는데 소프트웨어는 못 따라간다”고 짚었다. “예를 들어 파업을 하잖아요. 노동 3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죠. 근데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는 거예요. 민주공화국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니까 다른 사람들이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하는 것도 배 아파하는 거죠.” 

마키아벨리는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적 덕성이 사라지고 사적 이익만을 챙기는 부패가 만연하는 이유가 불평등 때문이라고 봤다. 권력과 재산을 많이 가진 이들이 법과 제도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사람들은 능력과 자질을 함양하기보다는 부정한 방법에 의탁한다는 것이다. 학원강사 허역씨(52)는 개인을 탓하기 앞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체가 텅 비어버린 거죠. 사회구조 자체가 배려나 공동체 의식을 내세우면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지게 만들어져 있어요.”

제도 그 자체로서 민주공화국에 만족하고 나머지는 개인 노력으로 채워가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학생 최영환씨(24·가명)는 “정권교체까지 가능할 정도로 선거제도가 정착된 한국 사회는 불안정한 면이 있더라도 민주공화국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자영업을 하는 지준성씨(56·가명)는 청년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표현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 사는 곳을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사회라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국회의원들이 자녀들 취업하는 데 야비한 수를 쓴다든가 그런 걸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는 봐요.” 


■일상이 정치·민주주의·공화국이다 

“전 골치 아픈 건 될 수 있으면 안 보려고 해요. 뭐라 그래도 어차피 바뀌는 게 없잖아요. 힘 없는 우리는 짜증만 나니까요. 성완종 사건도 그렇고 뻔한 건데 위에서 다 덮어버리죠. 뭐 할 말 있는 사람들 보니까 다 죽더군요. 무서워요, 아주. 이게 무슨 민주공화국이에요.” 주부 김은숙씨(52)의 말엔 대다수 시민들이 품고 있는 울화가 담겼다. 

대학생 이상목씨(24)는 우리가 받는 교육부터 잘못됐다고 본다. “제가 고3 때 촛불집회가 크게 일어났어요. 그때 정치에 처음 관심을 가졌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제 정신이냐고. 정치를 알아선 안되는 듯이 하다가 성인이 되면 갑자기 너희의 책임과 의무라면서 관심 가지라는 게 너무 이상해요.”

여성학·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씨는 “사람들이 현실정치와 일상정치, 절차적 민주주의와 일상의 민주주의를 나누고 있는데 사실은 이게 분리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이고 현실 정치는 일종의 그림일 뿐”이라며 “근본적으로 정치의 개념을 달리해야 한다”고 짚었다. 겉보기에 민주공화국에선 법과 제도의 틀이 갖춰지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진다. 그러나 취재팀을 만난 대한민국 시민들의 일상에 ‘민주공화국’의 이상은 배어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특집 페이지 주소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6/republic/

■특별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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