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사진관 <다행 多行+幸> & 갤러리 카페 <한.점으로부터>

<강‘s 겨우살이 사진강좌 및 사진공부>

- 이 강좌는 공간 <마을사진관_다행>과 <갤러리 카페_ 한.점으로부터> 유지를 위한 월세와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설되었음.

 사진에 관한 다양한 것-사진, 사진기, 사진책, 포토샵 등 강이 사진을 갖고 해왔던 20여년의 내용을 수렴하여 이야기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이 될거임.
 이 겨울에 ‘사진에 관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분, 뭐든 배워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가능.
 전문용어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용하지 않고 진행할 예정. 강사도 참여자를 선택할 수 있음. 당신도 나도 모두 평등한 관계-갑이니 을이니 없슴.
 
-장소 : 인천 동구 우각로 11 1층
-기간 : 3개월. 일단 2015년 12월 ~ 2016. 2월로 예정하고 있음. 개인별로 계획 가능.
-시간 : 주 1회 강좌, 2회 어울려 공부. 나머지 시간에 사진관과 갤러리 공간 자유이용권이 주어짐. 단, 난방비는 1/n.
-강좌비 : 월 30만원 / 인원 : 3인~5인. (협의 가능)
-준비물 : 디지털 카메라로 할 것임. 아! 그리고 미안한데 개인 사진기는 있어야 할 듯, 없으면 사는 거 도와줌. 자기만의 사진책 한 권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슴. 공부하면서 만드는 방법도 생각 중. 필름카메라는 가르쳐줄 수 있으나 암실이 없으므로 참고 바람. 아는 분이 아직 필름 현상소 운영하므로 소개시켜드림.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수.  

-여건 : 사진관과 갤러리 카페 공간, PC는 한 대, 와이파이 됨. 조명 있음. 사진전용 프린터 3대(1대 수리 예정), 주별 인화지 4*6 14장, 5*7 7장, A4 4장, A3 1장, super A3 1장, 전용지 20장. 출력 실습 포함됨. (해당 주간에 다 뽑아야함. 누적없슴)

-결과물 : 전시회 하고, 사진책 만들고, 액자 만들고, 인쇄물 디자인 하고, 블로그나 SNS 등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디지털 책 만들고, 실제 책도 만들꺼임.  

-수료자는 이후 3개월간 다행&한점 자유이용권이 주어질 예정(양도 불가). 한점갤러리에서 개인전 1회. 

-모집조건 : 하고 싶은 사진 영역, 사진으로 해보고 싶은 것 등등 포함하여 생각해보고 신청하면 됨. 이 겨울 무엇인가 하나는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 저 인간은 어떻게 사나 궁금한 사람. 마을과 사진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사람. 사진 책 한 권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 지인에게 사진으로 선물하고 싶은 사람. 어쨌든 사진 잘! 찍고 싶은 사람. 핸펀 카메라는 본인-강-이 잘 못 찍지만 찍는 방법이나 이런 거 도와줄 수 있음.

-기대효과 : 본 강의와 공부를 함께 수료한 사람은 사진에 대해 뭔가 이야기 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이 듬. 물론 모든 과정에는 개인차는 있음.

-기타 : 분명한 목표는 분명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음. 아무 목표 없으면 더 방대한 결과가 있거나 아무 결과도 없을 수 있음. 역시 개인차 있음. 냉정한 평가 잘 해줌. 상처받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됨. 서로의 성장을 위한 강좌와 공부이므로 ...

문의 연락처 010-7389-0857
전자우편 rain-o2@hanmail.net

골든 인디 컬렉션, 김목인의 한 다발 시선으로 본 세상풍경(part1)

김목인 피쳐사진 18

2014년은 영기를 머금은 청마(靑馬)의 해이다. 말띠 사람들은 안정적인 것보다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것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유머가 넘치고 열정이 넘치는 매력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에 항상 사람이 북적거린다고 한다. 그런 특성이 딱 들어맞는 말띠 뮤지션이 있다. 화려한 가창력을 구사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소소한 일상을 다양한 자신의 시각으로 노래를 이야기하는 1978년 말띠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이다.

지금 서울 홍대 앞 상상마당에서는 제 7회 레이블 마켓이 열리고 있다. 지난 1월 5일 그곳에서 열린 김목인, 강아솔, 빅베이비드라어버, 빅포니 등 일렉트릭 뮤즈 소속 뮤지션들의 쇼케이스 공연에 다녀왔다. 지난해 정규 2집 ‘한 다발의 시선’을 발표해 평단의 극찬을 이끌어낸 김목인의 공연과 피쳐사진 촬영에다 인터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하기 위해서다. 김목인의 음악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일상을 이야기하듯 들려주는 따뜻한 언어와 다채로운 소리가 빛나는 노래로 대중과 소통하는 독특한 뮤지션이다. 그래서 공연을 앞두고 진행한 그의 피쳐사진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홍대 주차장 인근 도로에서 촬영했다. 그의 음악적 화두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http://player.uniqube.tv/Logging/ArticleViewTracking/tenasia/203479/tenasia.hankyung.com/1/0

김목인 상상마당 레이블 마켓 쇼케이스공연6
직 접 만나본 김목인은 자신의 노래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은꼴이었다. 진지함과 더불어 공연에 함께 출연하는 일렉트릭 뮤즈 소속사 식구들과 시종 웃음을 머금고 대화하는 유쾌하고 인간적인 성품은 따뜻함이 담겨있는 노래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공연 후 여성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인터뷰는 홍대 앞 복합문화공간 커먼인블루에서 3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평범치 않은 음악여정을 걸어온지라 흥미로운 사연이 많았기 때문. 명문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인디음악 신에 진입한 뮤지션인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말띠 해를 맞아 앞서 언급한 말띠의 특징과 본인의 실제 성품이 얼마나 들어맞는지 궁금했다. “반반인 것 같아요. 솔직히 올해가 말띠 해인 줄도 몰랐습니다.(웃음) 어릴 때부터 여자아이가 말띠면 기가 세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도 말띠들은 성격은 좋은 데 자기주장이 강하고 기들이 쎈 것 같습니다. 저는 스스로 체계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말띠에다 혈액형도 B형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외골수로 보더군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동갑내기 말띠들을 한동안 볼 일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많이 만나게 되더군요.”

김목인 피쳐사진21 레이블 마켓에서 음반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모습
김 목인 음악의 매력은 담백함과 더불어 어수룩함이 아닐지. 노래는 스윙풍의 경쾌함이 담겨 있지만 감정의 기복이 없어 다소 심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은 한결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상의 스케치하듯 들려주는 그의 노래는 은근 중독성이 강하다. 잘난 척 하는 화려한 수사도 의미가 모호한 중의적인 단어들을 늘어놓지도 않는 그의 담담한 이야기는 놀랍게도 청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단순 명료한 쉬운 가사는 문학성까지 느껴진다. 2002년 우연하게 참여한 컴필레이션 음반 ‘안녕하세요 카바레 사운드입니다’에서 ‘가정용피아노를 위한 프로젝트’로 음악생활을 시작한 김목인은 2004년 4인조 혼성밴드 캐비넷 싱얼롱즈를 결성해 솔로 데뷔 직전인 2010년까지 활동했고, 현재 솔로와 더불어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의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김목인은 충청북도 충주에서 고등학교 미술교사이면서 서양화가였던 아버지와 미술교습소를 운영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1978년 12월 26일 태어났다. 그림을 그리다 만난 부모님은 악기연주나 노래를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그의 집안에는 아버지가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이 늘 흘러나왔다. 2살 무렵부터 김목인은 헤드폰을 끼고 LP를 가지고 노는 걸 무척이나 좋아해 사진까지 남아 있다. 정규 1집 재킷에 기타를 치는 음악가의 모습을 부감으로 그린 그림은 김목인이 직접 그린 작품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3살 아래 여동생이 사놓은 서태지나 넥스트 같은 가요음반을 듣긴 했지만 제가 찾아서 듣지는 않았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술교습소에서 지내 그림은 친숙하고 약간은 잘 그린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화가의 꿈은 없었습니다.”(김목인)

김목인 2살때 집에서 헤드폰 끼고 노는 모습 1979년 10월

1979년 10월 김목인 두 살 때

김목인은 초등학교 시절, 충주지역 사생대회에 나가 무수하게 입상을 했고 음악 콩쿨대회에서도 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상을 많이 받아 어릴 때 잘난 척하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사실 아버지가 사생대회 심시위원이었습니다.(웃음) 저는 호기심이 많아 남의 집에 가면 서랍 안이 궁금해 다 꺼내보는 특이한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조립하는 장난감을 좋아해 그림보다는 과학자나 이공계 쪽이 적성이 맞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음악은 충주 시내가 작아 악기를 배울 곳도 별로 없었는데 어머니가 배워보라 해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까지 동네 피아노학원에서 띄엄띄엄 배웠습니다. 당시 충주시내 우륵문화제 어린이 사생 음악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는데 당시 피아노 치는 남자아이가 없어 남자 피아노 선생님이 전공을 하라고 했는데 관심이 없어 싫다고 했습니다.(웃음)”(김목인) (part2로 계속)

김목인 피쳐사진 32 길거리에서 만난 후배가수 빅포니와 담소

골든 인디 컬렉션, 김목인의 한 다발 시선으로 본 세상풍경(part2)

김목인 피쳐사진22

(part1에서 계속) 어린 시절 김목인은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음악과 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 그는 음악적으로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반항적이지도 않고 뭐하고 지냈는지는 모를 가장 별 볼일 없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김목인) 당시 그는 보통 아이들만큼도 음악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라디오 음악프로그램도 듣지 않았던 이이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아버지께서 영화 부베의 연인, 엘비라 마디간 같은 어른 세대가 좋아하는 영화음악 악보를 시내에서 사와 손님들이 오면 늘 쳐보라 해서 너무 싫었습니다.”(김목인)

영화음악을 듣다보니 중3때 자연스럽게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이공계 과목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충주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문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다. “당시 수학, 과학은 잘했고 국어와 영어는 못하는 편이었는데 완전히 취향이 변했습니다. 처음으로 장래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더군요. 사실 구체적으로 영화감독이란 직업을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막연하게 첸카이거의 ‘패왕별희’와 레오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시 영화포스터를 열심히 모으기도 했습니다.”(김목인)http://player.uniqube.tv/Logging/ArticleViewTracking/tenasia/203491/tenasia.hankyung.com/1/0

김목인 상상마당 레이블 마켓 쇼케이스공연11
음 악을 싫어했던 그가 노래를 찾아서 듣게 된 것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부터. 초중고를 같이 다녔던 친한 친구 이성호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은 공무원인 그 친구는 지금도 제 음반이 나오면 열심히 듣고 평가할 정도로 늘 제 음악이 궁금한 죽마고우입니다. 당시 성호의 형이 음악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 형이 서울로 가면서 듣던 음악 테이프를 방안에 두고 갔는데 친구가 들어보라 해 도어즈 같은 오울드 록밴드들의 음반을 참 열심히 들었습니다.”(김목인) 자연스럽게 록음악을 좋아하게 된 그는 도어즈의 음악을 커버하고 싶어 처음으로 연주를 어떻게 하는 건지 관심이 생겨났다.

“사춘기 때 아버지가 고상한 클래식 음악과 영화음악, 연주음악만 들으시는 것이 왠지 고상하게 보이려하는 것 같아 싫었습니다. 제가 음악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냐면 고2때 너바나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요즘 밴드로 알고 들었는데 리드보컬 커트 코베인이 죽은 지 한 참 된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가수는 노래를 숨을 쉬지 않고 이어서 부르는 게 굉장히 신기했습니다.”(김목인) 고2때 친구 이성호가 학교축제 때 팀 이름도 없이 “스쿨밴드를 만들어 공연을 한다.”고 했다. 같이 해보고 싶은 마음에 합류했다.

김목인 피쳐사진 3
이 성호는 건반, 김목인은 피아노 연주가 가능했지만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을 치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기타가 없어도 가능한 익스트림의 ‘웬 아이 퍼스트 키스드 유(When I First Kissed You)’를 연습해 학교 축제에 나갔다. “학교 음악실에서 7팀이 일종의 오디션 격인 예선을 치렀습니다. 둘이서 건반을 치며 팝송을 노래하니 아이들이 재즈를 한다고 놀라워하더군요. 저희가 나갈 축제는 학교의 어학경연대회였는데 영어노래를 했던지라 뽑혔던 것 같아요.”(김목인) 베이스, 보컬, 키보드 2개 등 총 5명이 선발되었다.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던 김목인은 노래를 부를 줄은 알았지만 가요를 전혀 듣지 않아 아는 노래가 없었다. “다른 멤버들은 자기들이 다들 노래를 잘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카피곡만 불렀는데 녹음해둔 테이프를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려 아쉽네요.”(김목인)

직업적으로 밴드 활동이나 뮤지션이 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밴드에서 악기를 어떻게 나눠서 연주하는지 궁금했다. “음악적인 호기심은 많았습니다. 재즈나 레드 제플린 같은 하드록 음악을 피아노로 쳐보고 싶어 시내에서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들었습니다. 록음악 역사에서 거론되는 밴드들을 책에서 알게 되면 음악이 궁금하면 다 찾아서 들었던 것 같아요.”(김목인) 충주역 쪽에는 충주 유일의 합주실 ‘퓨즈’에서 지역의 헤비메탈 밴드멤버들이 레슨을 해 구경을 갔단다. “충주에 있는 대학 록 동아리 형들이 결성한 ‘포세이돈’ 같은 밴드가 있어 교류를 했습니다. 요즘 활동하는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과 임병학이 고향 후배들입니다. 당시 1살 아래 조웅은 잘 몰랐고 3살 아래 임병학은 여동생의 동네친구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두 사람은 저보다 충주에서 음악 하는 사람들과 교류가 많았을 겁니다.”(김목인)

김목인 피쳐사진 93 공연 전 대기실에서 파안대소하는 김민규 대표 강아솔 빅베이비드라이더 일릭트릭 뮤즈 식구들

공연 전 대기실에서 파안대소하는 빅베이비드라이버, 김목인, 김민규 일렉트릭뮤즈 대표, 강아솔(왼쪽부터)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김목인은 영화 쪽 일을 하고 싶어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지만 학교에서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충주고는 공부만 시켰습니다. 선생님들도 ‘너희 라이벌은 강릉고다, 입시에서 강고를 이겨야 한다’고 했던지라 원하는 대학과 과를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2때 선생님과 부모님이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영화에 관심이 많은 걸 아시고 실망이 크셨습니다. 집안에서 처음으로 공부하는 학자가 나올 줄로 아신지라 씁쓸해 하시더군요. 걱정은 하셨지만 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선생님들과 삼촌들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면 방송PD하다가 영화도 할 수 있다고 저를 설득해 넘어갔습니다.”(김목인)(part3로 계속)

김목인 피쳐사진 39

 

골든 인디 컬렉션, 김목인의 한 다발 시선으로 본 세상풍경(part3)

김목인 피쳐사진 91

(part3에서 계속)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김목인은 학교 선생님과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연극영화과 진학을 포기했다. 1997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간 그는 영화와 음악 동아리 선택을 놓고 고민하다 영화를 공부하는 ‘시각매체’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고등학교 시절, 헤비메탈 밴드들이 충주 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기에 구경을 갔는데 레드 제플린으로 시작해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로 끝나는 짬뽕 스타일이더군요. 그때 자신 있으면 무대에 올라와 연주해라 했을 때 저희 밴드 멤버들이 올라가려고 했었죠.(웃음) 저는 음악보다는 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았습니다.”(김목인)

당시는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이 활성화되기 이전의 아날로그 시절이었다. 영화 동아리에 가입한 김목인은 2학년 때까지 8mm 비디오촬영을 열정적으로 했지만 편집 시설이 없어 완성작을 내지는 못했다. “그때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영화연출과 연기 자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관심 있는 걸 찍고 붙이면 영화가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계 같아 열심히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그냥 친구들이 공연하는 걸 찍었죠. 그리고 홍대 쪽에 영화 수집하는 분이 운영했던 영화공간 ‘빛’에 들락거리며 영화역사에 나오는 영화들을 보고 비평하는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동대문에 있었던 독립영화협회 사무실에서 사용료를 내고 편집기를 사용했지만 작업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면서 체계적인 실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김목인)http://player.uniqube.tv/Logging/ArticleViewTracking/tenasia/206286/tenasia.hankyung.com/1/0

김목인 상상마당 레이블 마켓 쇼케이스공연13
2 학년을 마치고 영화실무 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아보기 위해 휴학을 한 그는 학교 선배가 운영한 청소년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영화잡지 ‘시네21’에 소개된 ‘필름in’의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고 16mm 필름 촬영 워크샵에 참여했다. “영화라는 게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일단 혼자가 아닌 집단 작업이고 프레임 안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후반 작업이란 걸 알게 되면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수강생들이 각자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찍기로 해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는데 제 작품이 채택되지 못해 그냥 스탭으로 일하려니 영 재미가 없더군요.”(김목인)

영화 쪽으로 빨리 재능을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마음이 조급했다. 여름쯤에 영장이 나와 입대를 했다. 군 복무 중이었던 그해 말,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제대 후, 2001년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영화 쪽에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시네21’ 잡지에서 평론하는 동아리 선배, 친구들을 통해 비평작업을 해보려 영화비평공모전에도 출품했지만 당선되지는 못했다. “뭔가 해볼까 하는 생각에 학교 앞에 있던 사회과학 서적을 파는 서점에 갔는데 크라잉넛의 노래가 들어있는 아우어내이션 같은 인디음반을 팔더군요. 홍대 앞에 뭐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그러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제1회 프린지 페스티발 독립예술제 공연에서 ‘새봄에 핀 딸기꽃’과 ‘갱톨릭’이란 인디밴드의 공연을 처음 보았습니다. 부산출신인 ‘새봄에 핀 딸기꽃’의 여성보컬은 지금 복합문화공간 무대륙의 사장님이세요.”(김목인)

김목인 피쳐사진 48
인 디밴드의 공연을 본 후, 김목인은 세션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재즈피아노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컴퓨터로 영화 편집 작업을 시작한 그는 피아노와 기타 소리를 비디오에 더빙하는 작업에 흥미를 가졌다. 홈레코딩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하게 인디레이블 카바레 사운드 홈페이지에서 5주년 기념앨범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았다. 지미 헨드릭스 같은 록 음악을 피아노로 조금 연주해 캠코더로 녹음한 데모 CD를 만들어 보냈다. “기성곡 연주가 아니라 자작곡을 보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영화를 하면서 작품을 여러 번 보냈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던지라 신이 나더군요.”(김목인)

그때까지 김목인은 창작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곧바로 낙원상가에서 17만원짜리 키보드를 구입했다. 병실에 오래 입원해 꿈과 희망이 없는 환자의 모습을 생각하며 피아노를 반복적으로 친 창작 연주곡을 만들어 다시 보냈다. 덜컥 채택이 되었다. 바로 카바레 사운드 5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장기입원환자의 꿈’이다. 팀 이름이 필요하니 빨리 지으라는 재촉에 ‘가정용피아노를 위한 프로젝트’로 급하게 정했다. “가사 없이 연주만 했는데 곡에 대한 피드백이 조금 있었지만 사람들은 제 연주인지는 잘 모를 겁니다. 그땐 밴드들이 피아노에는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카바레사운드 작업실에 피아노가 없어 이성문 형과 충주 고향 집에 내러가 녹음을 했습니다. 형이 제 방에 있는 테이프 진열장을 보고 음악을 꽤 듣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김목인)

김목인 상상마당 레이블 마켓 쇼케이스공연15
본 격적으로 음악을 해보고 싶어 집에 있는 기타를 가지고 올라왔다. 2001년 5월. 당시 카바레 사운드에서 일했던 김민규(현 소속사 일렉트릭 뮤즈 대표)가 망원역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처음으로 작업실에서 밴드의 합주 모습을 구경했다. “갑자기 전문가들을 만났다 생각하니 당황스러웠지만 저를 써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때 제가 건반을 친다고 하니까 밴드 ‘오 브라더스’ 멤버들이 피아노로 로큰롤 곡도 치냐고 묻더군요. 뭔가 해보고 싶어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해 ‘오 브라더스’ 라이브 때 가끔 세션으로 피아노를 치게 되었습니다.”(김목인)(part4로 계속)
 

 

골든 인디 컬렉션, 김목인의 한 다발 시선으로 본 세상풍경(part4)

김목인 피쳐사진 71

(part3에서 계속) 쌈지와 월드컵 경기장 지하철 역 구내에서 진행된 카바레 사운드 5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한 그는 밴드와 합주를 하면서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레이블에선 한동안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홍대에서 음악 하는 친구들에 관심을 가지고 공연을 보려 다니기 시작했다. 2001년 시민단체 ‘문화연대’에서 다큐영상 찍는 스태프로 참여한 그는 집회나 토론회를 기록했다. ‘문화캠프’라는 여름캠프를 촬영하러 갔다 ‘퍼포먼스 반지하’란 모임을 알게 되면서 외부활동 많아졌다. 모임은 퍼포먼스에 대한 철학이 강력했다. 자연스럽게 연기론, 인생을 표현하는 방식을 위한 워크숍에도 참여하면서 김목인은 가사쓰기와 스토리텔링에 대한 공부를 심도 깊게 하게 되었다. 그 모임은 이후 4인조 혼성그룹 케비넷 싱어롱스의 멤버들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번 맛을 본 음악에 대한 갈증이 생겼지만 아무 연락이 없어 김민규가 리더로 활동하는 혼성듀엣 플라스틱 피플 공연에 찾아가기도 했다. “나중에 민규 형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앨범작업에 참여하는 세션이 아니라 카바레사운드에서 직원을 뽑는데 관심이 있냐고 하더군요. 무조건 관심이 있다고 했죠.(웃음)”(김목인) 2003년 여름 카바레 사운드에 취직하면서 대학을 그만 두는 중대 결심을 했다. “어머니가 막연하게 아들이 창작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실을 아셨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당시 작은 것이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르는 분야에서 일하면서 배우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김목인)http://player.uniqube.tv/Logging/ArticleViewTracking/tenasia/206303/tenasia.hankyung.com/1/0

케비넷 싱얼롱즈 2006년 높빛어린이세상 덕양어울림놀이 공연후

케비넷 싱얼롱즈 2006년 높빛어린이세상 덕양어울림놀이 공연(사진제공 일렉트릭뮤즈)

카바레사운드에서 제작, 홍보 쪽 일을 시작한 그는 케비넷 싱어롱즈 멤버가 될 친구들과 합주를 하면서 2004년 정식으로 밴드를 결성했다. 처음 자작곡을 연주하는 밴드라기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멤버들이 모인 이름도 없는 아마추어 같은 밴드였다. “가끔 데모도 만들었는데 멤버들이 인디레이블에서 일하고 있으니 관심 많은 친구들은 저희를 거의 전문가인줄로 알았죠.(웃음)다. 가끔 데모도 만들었는데 멤버들이 인디레이블에서 일하고 있으니 관심이 많았다. 처음 4인조로 시작했는데 창작 작업을 바로 시작하진 않았고 저는 플라스틱 피플의 건반 세션으로 한동안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건반을 치시지만 초창기 플라스틱 피플에선 윤주미 씨가 드럼을 치면서 보컬까지 했었습니다.”(김목인)

케비넷 싱어롱즈 멤버들은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버스킹 문화를 알게 되면서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연주를 하면서 악기조합에 변화를 주는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창작을 시작한 것은 친구들의 캐릭터를 재미삼아 노래로 만들어보면서부터. “2003년에 처음 노래를 만들었는데 간단하게 친구들 이야기를 담은 포크송 같은 ‘모닝담배 블루스’입니다. 녹음 한 적은 없습니다. 그 다음 만든 노래는 2004년 겨울에 카바레사운드에서 캐럴앨범을 제작했을 때 성문형이 만들어 해보라해 멤버들이 공동 작업으로 습작처럼 만든 ‘어느 밴드의 캐럴송’입니다. 정식으로 녹음을 하면서 ‘케비넷 싱어롱즈’라고 밴드명도 지었습니다. 저희가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본 어떤 아저씨가 니들 보니 옛날 싱어롱하던 때가 생각나 재미있다고 말해주더군요.”(김목인)

케니넷 싱얼롱즈 2005년 달리는놀이터 공연 원산도행 배에서

케니넷 싱얼롱즈 2005년 달리는놀이터 공연 원산도행 배에서(사진제공 일렉트릭뮤즈)

처음 멜로디가 쉬운 러시아 민요나 팝송 같은 이런 저런 커버 곡을 짬뽕처럼 노래했던 이들은 자작곡을 만들면서 2005년 디지털 음원으로 ‘노래는 멀리 날아가리’를 발표했고 광복60년 기념 문화사업교류로 사할린에도 방문했다. 2006년 자작곡들로 구성된 정규 1집 ‘리틀 팬페어(LITTLE FANFARE)’를 발표했다. 멤버 모두 그림을 그렸지만 앨범 재킷을 장식한 그림은 김목인의 그림으로 채택되었다. 길거리 음악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가득한 앨범에는 방안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부터 다 함께 부르는 노래까지 마치 내 이야기로 느껴지는 무려 15곡이 수록되었다.

케비넷 싱얼롱즈는 인디 신에서도 겉도는 독특한 밴드로 지방에 까지 입소문을 타면서 특히 영화제에 많이 초대를 받았다. “음악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친구들이라 여기저기에 일거리가 연결되었습니다. 저희는 마인드는 프로가 아니었지만 공연수익으로 생활을 했을 정도로 프로처럼 활동하면서 여러 공연 기획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분방한 밴드였지만 레이블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어 스트레스도 많았습니다.”(김목인) 유럽여행을 떠났던 2007년 고향 후배들인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 임병학이 회사로 데모를 보내와 만났고 2008년에는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 멤버들과도 만났다.

김목인 상상마당 레이블 마켓 쇼케이스공연12
친 구들 모임 같은 자유로운 스타일로 밴드를 운영했기에 멤버들은 음악적인 욕심이 없었다. 당연 활동은 제한적이었고 점차 멤버간의 연주 실력에도 편차가 나기 시작했다. 2010년 카바레 사운드를 그만둘 때까지 밴드활동은 병행되었다. “일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회사이면서 음악인들의 공동체인 작업실인지라 경계가 불분명했어요. 활발하게 밴드를 한 것도 아니었고. 창단멤버로 아코디언를 연주하며 보컬도 했던 여성 멤버 차지은은 마지막까지 남았던 친구입니다. 특이하게 뭘 해보자는 건 아니었고 둘이 하니까 함께 낭독을 해보기도 했죠. 1집에 나레이션을 넣은 것은 그 연장선상입니다.”(김목인) (part5로 계속)

 

 

 

골든 인디 컬렉션, 김목인의 한 다발 본 세상풍경(part5)

김목인 피쳐사진 86

(PART4에서 계속) 혼성밴드 케비넷 싱어롱즈는 1집 발표 이후, 팬클럽이 생겨났을 정도로 예상치 못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멤버 대부분은 음악이 본업이 아니었기에 활동이 부진했다. 이에 멤버들은 진지하게 음악 작업을 했던 김목인에게 솔로 활동을 권유했다. 천성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김목인은 밴드에서 독립해 솔로 뮤지션이 되려는 마음이 없었다. “밴드 활동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활동이 뜸하니 새로 만든 노래가 쌓여 가는데 발표를 못해 답답했습니다.”(김목인)

인디레이블 카바레 사운드에서 5년 정도 일하는 도중에 그를 음악 신으로 인도했던 김민규가 자신의 레이블 ‘일렉트릭 뮤즈’를 창립하며 회사를 나갔다. 2010년 김목인도 퇴사를 했다. 케비넷 싱얼롱즈의 활동이 지지부진했지만 김목인은 곧바로 솔로 데뷔를 꿈꾸지 않았다. 여성멤버 차지은과 듀엣활동을 간간히 했던 그는 다른 멤버 스캥크와 함께 홈레코딩을 시도했지만 무산이 되면서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 “활동을 쉬고 있을 때, 민규 형이 가끔 건반 세션을 해달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솔로 앨범을 제안했을 때, 솔직히 레이블 일에 질려 있어 고민을 좀 했습니다. 결국 비즈니스로 이어지겠지만 그래도 민규형은 내 곡을 성심성의껏 들어줄 거라는 신뢰가 있어 녹음이 잘 되는 쪽으로 생각하고 해보자는 말에 결국 솔로 데뷔앨범 제작을 결심했습니다.”(김목인)http://player.uniqube.tv/Logging/ArticleViewTracking/tenasia/209125/tenasia.hankyung.com/1/0

김목인 벨로주 공연

2011년 솔로 1집 녹음에 들어가기 전 김목인은 여러 가지 자기 검열 과정을 거쳤다. 밴드활동이 중단되어 혼자 홈레코딩을 하는 상황에서 단순히 이것저것 노래하기보다는 이왕이면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새로운 스타일로 가보고 싶었다. “밴드 때는 멤버들이 제 곡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노래마다 어떤 감성인지에 대해 전달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악가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중간자적 입장에서 음악에 대한 입장이나 주변의 반응들을 제 시선으로 솔직하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김목인)

연주에 신경을 많이 썼던 밴드 앨범과는 달리 솔로 데뷔앨범은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음악적 방향을 잡고 데모 제작에 들어갔다. 노래마다 제목을 붙이면서 제작이 끝나갈 무렵에 케비넷 싱어롱즈 1집에서 시도했던 내레이션 곡을 하나 넣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자신의 제안을 김민규 대표가 100% 수용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고집이 강한 민규 형은 트랙순서, 악기구성에 아이디어가 참 많아요. 앨범 두 장을 함께 작업하면서 편곡은 제가 많이 했지만 트랙순서와 믹스, 마스터링은 형에게 맡기는 편입니다. 10곡을 들어본 형이 내레이션 곡을 1번 트랙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솔직히 저는 1번 트랙을 그저 평범한 팝이라 생각했는데 제 앨범은 구현동화에 가깝기에 그 느낌이 잘 살아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습니다.”(김목인)

김목인 피쳐사진 59
1 번 트랙은 바로 김목인 정규 1집 ‘음악가 자신의 노래’에 수록된 ‘음악가, 음악가란 직업은 무엇인가?’다. 김민규 대표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같은 질문에 줄기차게 다른 대답을 제시하는 자문자답 형식인 이 곡은 솔직히 노래라기 보단 이야기에 가깝다. 그의 재치 넘치는 화법에는 기본적으로 음악가라는 직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녹아 있다. 2011년 발표한 그의 솔로 1집은 동료 음악가들의 감탄을 불러내며 ‘음악가의 음악가’라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영미권 음악을 들으면서 감정이 파도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루 리드나 앤디워홀처럼 연극적인 것을 좋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습니다.”(김목인)

‘음악가 자신의 노래’라는 앨범 타이틀은 시인 월트 휘트먼의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와 비슷한 의미로 김목인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모두의 이야기로 흘러든다. 1집 녹음은 그의 충주 고향집에서 첫 레코딩 때 연주했던 가정용 피아노와 클래식기타 연주와 주변 소음까지 자연스럽게 포용하는 자연스런 음향을 담아냈다. 케비넷싱어롱즈,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동료 음악인(더블베이스 이동준, 집시스윙기타 이호석, 아코디언 박혜리, 바이올린 조윤정, 드럼 장희원, 하모니카 허세정, 코러스 황진영, 윤주미)들이 세션에 우정 참여했다. “2008년부터 집시 앤 피쉬 오케스트라 멤버로 활동하면서 집시 스윙기타리스트인 장고 라인하트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집에서 저보다 연주를 잘하는 분들과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낙원상가에서 기타 제작을 했던 노상백사장님이 운영하는 카페 ‘홍대 물고기’에서 음악적 교류를 많이 했던 덕분입니다. 하림형이 중심적 인물이고 아코디언 연주하는 바드의 박혜리도 그렇게 알게 되었습니다.”(김목인)

김목인 피쳐사진 74
수 록곡들은 각기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이와의 사연(꿈의 가로수길), 바쁘냐고 묻는 음악가의 이야기(일주일에게), 문을 닫는 단골 카페에 바치는 뮤지컬의 수록곡(뮤즈가 다녀가다), 음악 신에 대해 거는 말(씬),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이야기’란 영화를 보고 쓴 이야기(글렌 굴드), 음악가란 직업의 특수성에 대한 생각(음악가의 밭) 등 세상과 자신의 일상을 명민하게 스케치한 그의 가사들은 제법 문학성까지 느껴질 정도로 정겹다.(part6로 계속)

 

 

골든 인디 컬렉션, 김목인의 한 다발 시선으로 본 세상풍경(part6)

김목인 벨로주 공연21

(PART5에서 계속) 김목인의 따뜻한 노래는 그의 분신이다. 그는 주변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해주고 무엇보다 확실하게 웃어주는 리액션으로 친근감을 주는 뮤지션이다. 실제로 만나본 김목인은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거나 꾸미려 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도 인간미 넘치는 그와 붕어빵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편안하고 재치 넘치는 가사, 감성을 파고드는 밝고 경쾌한 스윙풍의 선율, 다양한 악기들의 적절한 편곡과 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는 오직 그만이 구사하는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특별한 가락이다.

1집을 발표한 후 활발한 활동에다 2012년 결혼까지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2집 준비에 들어갔다. 2집은 콘셉트를 정하지 않아 1집보다 자신감이 붙었지만 노래 제목을 정하고 앨범의 통일성을 찾는 과정이 힘들었다. 2013년 ‘한 다발의 시선’이란 타이틀로 각기 다른 시공간 속에서 바라 본 12가지 세상 이야기로 꾸민 2집을 발표했다. 네이버 ‘이주의 발견’에 선정되며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포크에서 집시 스윙, 보사노바, 클래시컬한 시도까지 다양한 장르음악은 이번에도 동료 음악가들의 참여로 근사하게 갈무리되었다. 예술가 지망생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방 풍경과 느낌을 노래한 ‘지망생’부터 쓸쓸한 겨울 이미지를 담은 ‘흑백사진’까지 독백 같은 그의 노랫말은 더욱 쉽게 청자의 귀를 파고든다. 특히 전작에 비해 멜로디가 강화되었고 일상 속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통일된 앨범으로 만드는 그의 음악적 능력도 한결 진화했다.

김목인 피쳐사진 60
2 집도 스윙재즈 같은 빈티지 풍의 나른한 사운드가 여전하다. 음폭의 고저가 없는 담담한 김목인의 목소리는 마치 뮤지컬처럼 다채롭게 리듬을 타니 기분 좋은 중독성까지 발휘한다. “곡을 꾸준히 쓰고 싶지만 창작 작업은 현실적으로 힘든지라 앨범 발표 기간은 2년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아쉬움은 있지만 앨범 작업하면서 늘 공부가 됩니다. 2집에선 음악적으로 다른 걸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인위적으로 스타일을 바꾸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변한 관심대상에 집중했습니다. 솔직히 2집까지는 곡을 만들 때, 작곡 기법보다는 가사에 어울리는 편곡을 하는 정도였습니다.”(김목인)

빈티지 풍의 나른한 사운드에다 음폭의 고저가 없는 김목인의 목소리가 마치 뮤지컬을 구현하는 것 같은 2집은 중독성 가득한 음악선물을 ‘한 다발’ 받은 것 같다. 김목인의 음악은 치밀하게 곡의 흐름을 치밀하게 계산한 깔끔하고 세련된 웰메이드 음악과는 거리가 있다. 편안하고 꾸밈이 없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음악적으로 평범하고 심심해 보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랑과 혼성듀엣으로 부른 ‘불편한 식탁’ 같은 근사한 노래가 있지만 솔직히 수록된 12곡 중에는 임팩트가 강한 특별히 튀는 곡은 없다. 문제는 모든 수록곡을 다시 듣고 싶어 안날이 날 정도로 뺄 곡도 없다는 점이다.

김목인 피쳐사진 82
김 목인은 2집을 만들면서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 보였고 사람들의 말은 더욱 격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시기는 분석하고 논쟁하기엔 좋지만 차분하게 노래를 만들기엔 적절치 않다. 그러니까 노래로 만들 수 있는 사건이나 떠오르는 말들은 많았지만 그는 노래를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음악은 뭔가 말하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의 감동으로 제게 점점 다가옵니다. 앨범에 직접적으로 담겨있지는 않지만 방에서 피아노로 좋아하는 곡들을 연습하다 좋은 순간이 있으면 그 분위기를 작품에 옮겨보려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2집은 음악이 지닌 그런 깊은 결에 좀 더 집중해보고 싶은 생각과 여전히 뭔가 기발한 걸 들려주고 싶은 생각 사이를 오가며 작업한 결과물입니다.”

지난 1월 19일 홍대 앞 라이브클럽 벨로주에서 열린 ‘새해의 포크 공연’에서 김목인은 콘트라베이스를 동원해 한층 깊이 있는 소리를 구현했다. 여성싱어송라이터 빅베이비드라이버와 혼성듀엣으로 들려준 ‘사려 깊은 밤’도 참 좋았다. 이는 예전에 많이 듣지 않았던 클래식 음악을 요즘 즐겨 들으며 생긴 그의 음악적 변화다. “클래식은 작품을 해석하는 영역이 광범위한 것 같아요. 영역은 다르지만 저는 음악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음악은 이야기가 중심이기에 주변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작곡자로서 새로운 것을 써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클래식은 참 섬세한데 제 곡은 멜로디와 이야기가 나오면 땡인 것 같아요. 밴드시절에도 멤버들이 편곡을 할지 몰라 파트를 주먹구구로 적어주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면 어수선해 아쉬웠습니다. 여력이 되면 리듬이나 질감보다 화성 쪽으로 어떻게 다른 시도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김목인)

page

김목인 데뷔앨범 안녕하세요 카바레사운드입니다(2002), CHRISMAS MEETS CAVARE SOUND(2004), 캐비넷 싱얼롱즈 1집 Little Fanfare(2006), 김목인 1집 음악가 자신의 노래(2011), 김목인+빅베이비 드라이버 싱글 사려깊은 밤(2012), 김목인 2집 한다발의 시선(2013)

김목인은 평범한 삶의 시공간을 자신의 시각으로 스케치한 이야기로 대중과 소통하는 싱어송라이터다. 순박한 어쿠스틱 사운드에 일상의 언어로 채색한 그의 노래는 사실 평범하고 어눌한 구석도 있다. 하지만 화려한 가창력이 없이도 청자를 몰입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놀라운 힘이 그에겐 있다. 편안하게 들려주는 그의 세상살이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마법 같은 경험은 이제 클래식으로 채색된 한 차원 다른 고급스런 멜로디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3집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인천_도시, 영희의 고향이야기 - 5

 

부평연와의 간략한 역사와 벽돌공장 노동자들의 삶

-김규문씨와 인터뷰를 통해 듣다!

 

김규문. 1965년, 20살이 되던 해 서울 영등포에서 부개동으로 내려와 88년 5월까지 24년 일하고, 지금까지 벽돌말 사람들과 친목계를 하며 부평에 살고 계신 김규문씨와의 인터뷰를 하며 벽돌공장 역사와 마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공장에 관련한 다양한 이야길 해 주셨고, 그 내용을 정리했다. 

 

 

공장앞에서 .. 김규문씨.

 

 

 

부평연와는 어떻게 생긴거예요.

 

최성순. 일본 회사 소사일을 보다가 일본군들이 철수하면서 적산물-공장포함 약 38천평 소유. 어디가 자기땅인지도 모를 정도로 넓었다-로 받음. 벽돌을 굽기 위해서 연탄이 필요해서 연탄장사를 하던 이종수씨를 불러들임. 돈이 있던 사람이 아니라 일본놈들이 주안서 연탄을 받아 썼는데 (벽돌을 굽기위한)연탄을 받아놓은 상태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퇴직금으로 연탄으로 줌. 그래서 쌓아놓은 연탄을 다 팔아먹었는데 쌓아놓은 연탄 아래가 평지인줄 알았는데 파도 파도 계속 연탄이 나오는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고운 연탄이 아니라 투닥투다 튀는 연탄 .. 곡수라 하는데 .. 이것이 타고 나면 그 가루가 밑으로 떨어지는데 그건 이미 타버렸기 때문에 팔 수도 없는데 그것을 다시 흙과 섞어서 손으로 뭉쳐 말려서 팔았다. 화력은 세지 않아도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많이 사서 썻다.(양성연씨_ 루핑공장에서 겨울에 일 없을때 가서 그걸 상차-차에 싫어주면서 얻어오곤 했다.)

 

부평연화합자주식회가 상무-이혁재.동인천에서 철물점을 크게하고 있었는데 현찰이 많았고, 사장-최성순은 땅과 공장을 갖고 있었고, 이종수-연탄을 대서 합자해서 벽돌공장을 차렸다. 기본 재산가가 아녔기 때문에 일은 많고, ??는 큰데 노상 돈이 없어 벌벌했다.

 

언젠가 70년대 중반인가는 그 넓은 마당에 깔았던 벽돌까지 다 팔아서 돈을 엄청 벌었다. (허태동씨_맞어, 언제 한 번 그 마당이 텅 비었더러구. 그때... 나쁜 벽돌도 많이 만들고 그랬지 ... 양성연씨_ 그래, 그때 벽돌 파동 날  때 한번 있었지)

 

그런데도 왜 망했냐면 사장들이 상주하지 않고 주안 본사에만 있었단말이야. 그런데 그 밑에 일하는사람이 몇 천장 팔아도 몇 백장 팔았다며 보고를 하니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돈을 벌었지. 근로자들은 12달에서 7개월 일하고 5개월 일했으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벗어날 수없는거야. (양성연_노깡도 똑같았어. 겨울에 가불해서 먹고, 여름내 갚아가며 살았지.. 가불을 했으니 나갈수도 없고) 흙 만지는 사람들 똑같았어 .. 그때는 정말 고생들 많이 했지.

 

그 고생하고 있었으니 새마을운동이다 하며 먹고살게 해준건 박정희가 잘했어. (양성연씨_외국 갔다와서 경부고속도로 뚫은거 아냐..)월남도 우리나라에서 군인을 수출해갖고 그걸루 .. 월남 갔다온 사람들이 월급이 문제가 아니고 미국 원조물들을 갔다온 당사자들 한테 줘야하는데 안주고  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뚫은거야 .. 한국에 있으면 무조건 가야했는데 월남 갔다가 죽은 사람한테만 보상을 많이해주고 갔다 살아 온 사람은 보상이 없었다. 그거 가지고 개발한거야.

(... 네 분이서 월남 파병과 2명 밖에 잘 수 없는 작은 집, 보리 한 말 가지고 열흘을 살았다는 이야기, 지역감정은 종철이가 만들었다.. 등 .. 당시의 열악한 도시 서민들이 생활을 이야기하셨슴 .. 강)

 

당시 벽돌 공장 사진은 벽돌 나온거 이거 하나 뿐. 송신소 철탑에 올라가서 찍음.

 

월급이 따로 없었다. 흙 벽돌을 찍어내는 만큼 돈을 받았다고 한다. 10개 찍으면 만원, 5개 찍으면 오천원. 그런건데 그게 일종의 도제다.

 

 

돈을 많이 벌때도 있었는데 한 번 잘 벌면 3년 동안은 불경기었다.

(강_그렇게 불경기면 어떻게 해요?)중간에 시마이를 한다. 그러면 근로자들은 죽거나 살거나 회사가 돈이 없는걸 어떻게 하냐. 대물을 할 수 없다. 회사가 돈을 벌든 안벌든 요즘엔 으쌰으쌰 하면 다 받아주지 않나. 그러나 그때는 으쌰 할 수가 없다. 조금 싫은 소리만 해도 해고를 시켜버렸다. (강_아..그때는 마음대로 해고 했어요?) 그렇지, 그땐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엎드려서 "살려주십쇼" 해야했어. 근로자는 아무 힘이 없었지.

 

88년 5월에 나오면서 벽돌공장 노조를 맨 먼저 만들어줬다.

나는 축산을 하기때문에 사료를 저렴하게 사기 위해서 사업자등록증을 냈거든. (그래서 기록을 잘 해놨지.) 그런데 그때 회사에서는 이중장부를 써서 깜짝 놀란거야. 퇴직금 안주면 세무서에 가서 이중장부 신고하겠다 했지. 월금 3만원 줬는데 2만원 줬다고 쓰고 나머지는 탈세를 한거야. 나도 월급 주고 받은거 다 써놨거든. 그 기록을 보여주며 협박을 했지. 그래서 나는 퇴직금을 받았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1원 한 장 못받고 나왔거든. 억울하잖아 .. 그래서 (내가 노조를 만들어주고 나왔지.) .. 그래서 (사업주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지.

여의도에 전국금속노조연맹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었어. (그때는 벽돌공장이 금속노조에 속해있었어요?) 그때는 요업쪽은 다 금속쪽이었어.그 사무실에 가서 설립을 했지. 그때 노조를 만들어놓으니까 조금씩 으쌰으쌰도 하고 ...

 

그때는 상여금이라고 있었어.월급을 받는게 아니고 하루종일 .. 시간도 노임도 결정되지 않았어. 일본말로 하면 우께도르, .. 라고 하지. 일 하는데로 받는거야. 10개 만들면 만원 받고, 5개 만들면 오천원 받고 하는 식이지. 자기 능력껏 .. 그걸 상여금이라고 했다. 그래서 퇴직금이 없어. (강_월급도 없고? .. 그렇게 받고 어떻게 살아요?)  ..  이 즈음 네 어르신들이 한참 도제식 일과 상여금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 중략 ..

 

사람이 살고 죽는거에 지금은 여러가지 이유를 만들어서 편하게 만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하나 죽는 게 파리 한마리 죽는 것과 똑같애. 어디 법에 하소 할 때가 전혀 없었어. 일하다 다치면 처음 한 번만 치료비의 반을 줘. 처음에만 .. 그러고 나서  몸이 낫지 않으면 그냥 해고야. 그만두라 하는거지. (강_ 계속 치료해야 하는데 치료비도 안주고 해고요?) 전혀 없지 ..

그런 세상을 .... 살았어. 그런 세상을 살아오다가 .. 지금은 참 좋은 시절이지 ...

 

 

그러면 언제 부평연와-벽돌공장이 문을 닫은거예요? 우리집은 94년 즈음에 나온 거 같은데 ..  

나오기 전에 벽돌공장 마당에 운전면허학원이 있었는데 ..

 

 망한 게 아니고 자동차 운전면허학원(삼원)으로 전환을 한거야. 벽돌공장은 문을 닫고 .. 나중에 상동에 보상이 나오면서 .. 벽돌은 그만 만들게 되고, 삼원자동차운전면허학원으로 전환한거지.  93년쯤 생긴거야. 

 

  ...여기에서 언제 문을 닫고, 언제 자동차 학원이 생기고 .. 하는 것이 서로의 의견이 분분했다. 일괄로 모두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상 받고 나갈때마나 집을 부수는 방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각자의 기억이 좀 달랐다. 집단적인 저항이 없었던 건 보상을 충분히 준 마지막 개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또 1대 1로 해결을 하며 집을 없앤것_허태동. 양성연씨가 자동차면허를 그 학원에서 따려다가 다 못따고 나왔다고 하셨는데 그 년도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셨는데 95-6년으로 알고 계셨다.

 

  그리고 98년 상동이 개발되면서 바뀌었는데 부평연와쪽은 조금 늦게 개발된게 2000년 즈음이다. 벽돌연와사택은 벽돌공장과 같이 98년에 모두 비워졌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삼원자동차 학원은 벽돌공장 앞마당을 세를 준거고, 그 학원이 잘 되자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뒷마당을 사서 한독 자동차 학원을 차렸고, 앞마당은 부평연와에서 계속운영했다. 자동차 면허학원도 부평쪽은 허가가 나지 않았고 부천쪽만 허가가 나와서 공장의 반쪽에만 면허학원이 두개가 있었다고 한다.

 

 

흙산은 언제 없어졌어요? 있는거 보고 나왔는데 ..

 

흙산은 자동자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있었어. 개발할 때까지 남아있어는데 벽돌은 안찍으니까 .. 그냥 그 흙이 그냥 있었던거지. 그래서 개발사에서 그 흙산을 샀어. 저지대가 많았으니까 그걸 평평하게 만들어야 하잖아. (강. 맞아요. 공씨 할아버지내 집이랑 밭있는 끄트머리에 3미터 넘는 높이 차이가 있었고, 그 아래서는 논농사를 지었잖아요.)

 

(양성연씨_그걸 부평연와에서 다 파먹은거야. 부평연와에서 ..)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부평연와에서) 경인천철 밑에서부터 해마다 내 년에 땅을 팔 자리면다 싶으면 오늘 부터 토주들이랑 계약을 해. 그래서 (흙을) 파 먹어. 그려면 새땅이 되니까 토질이 좋잖아. 그러면 농사 지을 사람한테 팔아. 옆에 땅 높이가 높은 땅은 논농사를 짓는데 물이 다 빠져버려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잖아. 그러면 토주들이 공장에 팔고, 공장은 그 땅을 사서 흙을 파서 쓰고, 그 땅을 또 농사 지을 사람한테 팔고 .. 그러면 흙은 공짜로 오는거야. 그렇게 하다보니까 여기(경인전철 밑에서)부터 파다보니 .. 동아기업 앞까지 다 파먹은거지.

 

나중에 국가에서 흙을 파는 것에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기가 왔지. 흙을 파고 매립-원상복귀를 해야하는데 당시에는 연탄재가 많이 나왔거든. 그래서 그 연탄재를 돈을 받고 받아서 그 땅을 매립해서 팔았지. 그런데 4-5년간은 그 땅에 작물이 자라지 않는거야. 농사도 안되고, .. 그런 사람들을 요즘에는 보호해주지만 그땐 그런게 없었거든  토주들이 농사를 못짓고 동아기업에 팔은거야. 공장하기엔 딱 좋은거야. 비가 많이와도 물이 다 빠지고 .. 단단하고 .. 동아기업(자동차 부품 만들던 공장)이 싸게 사서 들어왔지.

 

신상리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땅-흙을 파먹은 자리-오른쪽 저지대에서는 오랜동안 농사를 지었고, 왼쪽에는 동아기업 외에도 공장이 많이 들어섰는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란 걸 이제야 알았다. 부평연와에서 흙을 파기위해 땅을 샀는데 이 땅을 깊에 파서 쓰곤 했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는 깊은 웅덩이가 많았던 기억이 있다. 시화오빠도 그런데서 친구들과 수영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흙을 쓰고 거기를 연탄재로 매립하고 그 땅을 팔았는데 거기서 일 하던 간부들이 많이샀다. 비싸져서 일반인들은 사지 못했다고 한다. _강.

 

 

그럼 그렇게 땅 팔면서 부평연와도 돈을 많이 벌지 않았어요?

 

돈을 많이 벌었어도 회사측도 7개월은 일하고 5개월을 쉬니 실제적으로 돈을 벌었다고 할 수 없지. 게다가 사장들이 부평 본사에서 행정만 보지 여기 공장에는 남들이 있었던거지. 그러니 10차 팔고도 7차 팔았다고 보고해도 모르는 거지. 그때 돈 번 사람들은 벼락부자로 잘 먹고 살았거든. 자기 대에서는 잘먹고 살았는데 자식들 커서 대학졸업하고 사업하고 하면서 다 날려먹었지.

 

오흥근씨가 그때 떼돈을 벌었지. 오흥근씨가 나보다 2년 늦게 왔는데 부평연와 전부랑 고종사촌간이야. 전무 엄마가 오흥근 고모야. 오흥근이가 총각때 와서 많이 고생했지. 아무래도 친척이니까 그 일을 해서 돈을 벌게 된거지... 이러면서  오흥근씨에 대한 다양한 애피소드가 나왔다. 가방만 매고 올라와서 돈을 많이 벌었다며 자랑하고 교회를 지었다며 자랑하고 그러면서도 동네 사람에게 밥 한끼 사지 않고 자랑만 해서 인심을 좀 잃었다는 말도 .. 장사하다 마누라가 힘들어 해서 시골에 있던 동생(오대근)을 데려와  연탄가게를 하게 했는데 형 덕분에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자기가 고생해서 번거라는 알아야 한다며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며 가족사로 이어졌다.

 

 

 

몇 마디 질문을 하면 수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의 삶은 그렇게 촘촘히 각자의 삶을 살고, 그것들이 어우려서 역사라는 수를 놓는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슬프고 가끔은 기쁜 삶들이 어우러진다. 부평연와 벽돌공장의 이야기는 더 촘촘히 수 놓아질 수도 .. 이것이 거의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커다란 벽돌공장이 있던 작은 마을의 역사에 설긴 수가 놓여지고 있다.

 

 

 

 

 

 

그 시절 벽돌공장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

부평연와 벽돌공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로 김규문씨(72세)의 이야기를 모아 기록했다. 툭툭 끊어지는 기억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는데 20살에 부개동으로 와서 지금까지 부평연돠 벽돌공장 사람들과 그 주변 주민들과 만튼 친목계모임을 이끌어오시면서 공장과 관련된 가장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계셨다. 이 이야기는 그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아내 되시는 분과 그곳에서 일하셨던 분들이 주신 사진 등으로 당시의 벽돌공장 모습을 그나마 그려볼 수 있다.

-----------------

20살에 서울서 부평연와로 일하러 오신 분은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군대에 가기 싫었단다. 60년대는 살벌했단다. 일을 하려면 신분증-신원을 확인하는데 이런 공장에서는 신분증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공장이 불이나 망하게 되고, 곧 영장이 나왔는데 도망치듯 친구들과 같이 내려왔다. 이런 공장은 말하자면 당시 범죄자 소굴이었던 샘이다.

일년에 7개월 일하고 5개월을 사는데 월급도 없이 상여금으로 살았다. 상여금이 뭐냐면 월급에 덧붙혀 주는 보너스가 아니라 그때그때 일당치기로 일을 하는데 하루일당 500원이었다. 거기에 공장 주인들이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에 세금내며 적는 장부와 주인들에게 보고하는 장부가 달랐다고 했다. 조금 더 만든 벽돌을 팔아 개인임금으로 먹는데 이것을 상여금이라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6시까지 일했다. 비오고 눈오고 추우면 벽돌일은 할 수 없었다. 돈을 제때 다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떠날 수도 없었다. 사택이라고 집도 주었기 때문에 나머지 계절에는 공장과 상관없이 온갖 잡일을 하며 버텼다. 일하다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가야 했다. 사고가 나서 병신이 되도 치료비 한 푼 못받고 그대로 쫒겨났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사람들도 다 당연한 것을 생각했다.

부천쪽 상동에 흙을 3-4미터 파서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다. 땅을 사서 땅을 파고, 깊어져서 물이 잘 모이니까 논농사가 잘 되었다. 다시 얼마간의 땅을 사서 흙을 파서 쓰고 다시 그 땅을 농자 지을 사람들에게 팔고 그랬다. 흙만 쓰고 팔았다. 나중에 흙을 파서 쓰는 것도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그 전까지는 마음데로 파서 썼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웅덩이가 많았다. 글쓴이는 동생과 함께 마을 흙웅덩이 빠져 익사할뻔 했던 기억이 있다.

88년에 노조 만드는 걸 도왔다. 나(김규문씨)는 이미 퇴직금을 받아 먼저 나왔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이 쫒겨나게 생긴거다. 그래서 당시 금속노조(당시에 요업같은 것도 모두 금속노조로 포함되었다.) 사무실에 가서 가입했고, 이 사람들이 결국 그거라도 해서 얼마간의 퇴직금이라도 받고 공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90년대 재개발이 결정된 마을의 토지보상은 후했다고 한다. 가난한 마을에서 그만큼의 보상을 받기가 어려웠기때문에 후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별다른 싸움 없이 다들 마을을 떠났고, 사람들이 나가면 그집은 즉시 부숴졌다고 했다.

98년도 이전에 폐업을 했고, 98년 토지와 건물등의 배상을 받고 완전히 문을 닫은 후 운전면허시험장이 들어왔다. 보상을 받으며 사택에 살던 사람들은 나왔고, 사택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아파트가 동중학교 뒤에 있는 백영아파트다.



재개발로 사라진, 그 마을과 공장

인천 최초의 공장 '부평연와'

옛날에 '부평연와'라는 벽돌공장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공장으로 인천 최초의 공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는 부평이나 그 일대에 벽돌공장이 좀 더 생겼었나 봅니다. 인터넷이나 시청, 구청, 국토지리정보원, 부평역사박물관등에 관련 자료나 지도, 사진 등을 찾아보는데 내용이 적고, 맞지 않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반, 재개발로 그 마을의 흔적은 부평동중학교, 부평여중학교와 일부 길을 제외하면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00년대 초 동중학교 입구이자 부개역 입구에 살면서 동네 한 바퀴 돌며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네.'하는 생각뿐이었지만 몇 년 전 산책길에 만난 붉은 벽 - 부평 동중학교  외벽을 보며 여기에 전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무심히 했습니다.

 

 


어쩌면 고향이었던 그 마을 이야기

왠 벽돌공장이냐구요? 제가 그 '부평연와'가 이던 벽돌막 마을-부개동이었다가 부개 2동이 되었다가 이제 3동인 그 어디에서 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거든요. 20대 초중반 나이에 지금의 부개주공아파트 단지로 재개발이 되면서 그 마을이 사라졌습니다. 논과 밭, 작은 공장과 작은 집들이 있던 그 곳에는 이제 거대한 아파트들이 내려앉았습니다.

아무 저항도 없이 우리는 왜 그 마을을 떠났을까? 그곳에 살아가던 많은 분들은 이제 어디에서 무얼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곳에서 어울렸던 동무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가? 경일이 오빠, 순실이, 지연이, 선녀, 광일이 오빠, 용구 ...

이제 도시 한 가운데가 된 그 마을은 도시의 외곽이었습니다. 논과 밭도 많았고, 공장도 많았습니다. 단순히 벽돌공장에 다닌던 사람만 살았던 건 아니었거든요. 배추꽃 피던, 냉이 캐던 그 붉은 밭의 포실포실 보드라운 흙이 저는 아직도 기억에 선 합니다. 송사리 잡겠다고 갔던 웅덩이에서 시커먼 거머리에 놀라 엉엉 울면 누군가 풀잎으로 떼어주던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이면 논에 잔뜩 쌓아놓은 볏짚더미에서 아랫쪽 볏짚을 빼내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옹이종기 모여 앉았던 기억도 납니다.

벽돌공장이나 노깡공장 가마는 벽돌이나 노깡을 굽고 난 온기가 남아잇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 안에서도 꽤 많이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비를 피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찰흙을 가져오라면 그 공장 흙반죽을 퍼 갔는데 모래가 좀 섞여 있는 것이 늘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마을 어르신들의 부음을 들으며

십 수년 전 부터 그 마을 어르신들의 부음을 어머니를 통해 전해듣고 있습니다. 대부분 암이거나 더러는 교통사고였던거 같습니다. 올 해 76세 되신 (호적상은 44년생 일제로는 40년생) 어머니는 지인의 부음을 전해들은 날이면 " **가 죽었단다. 암 걸렸다더니 ... **엄마 알지? .. 참 착했는데 .. " 하시며 돌아가신 분의 인품이라던가 그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산다더라. 누구는 어떻다더라, ... 마을이 사라지고 흩어진 분들은 30-40년 이어온 친목계모임을 통해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식사하시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시기도 하고, 부평시장인근에서 장사를 계속하고 계신 어머니 가게를 참새 방앗간 삼아 들러가시기에 소식이 머무릅니다. 

 

어머니도 아프시고, 그 옛 어르신들 주름살이 깊어지니 당신들 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 마을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작년 겨울 옛 마을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다는 오빠와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개인의 가족사?

그것은 한 시대의 역사다.

 

사람이, 그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시간'과 '공간'들이 바로 역사라는 생각, 한사람 한사람의 역사가 모여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은 마을공동체활동, 공동체 문화예술활동을 하며 굳어진 저의 역사관입니다.

 

역사속에서 수 많은 민중의 역사를 몇 퍼센트 되지 않는 이들의 글 속에서 자간과 행간을 읽어가며 찾아내야하는 것이 저는 좀 억울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역사도 그렇게 쓰여지겠다는 생각에 화도 났습니다.

 

'내 손으로 기록하겠다.' 제 사진이 예술이나 작품이라는 이름에 붙히지 않고, 그저 이 시대와 공간, 사람들의 '기록'인 이유입니다. 손가락에 인대가 늘어나고, 부딪혀서 찌그러져가는 카메라를 손에 붙히고 사는 이유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라는 말 .. 한 생을 살아간, 내 삶을 책으로 쓰면 몇 권인지 모른다는 우리 엄마들의 말 .. '그렇게 찍으면 몇 장은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 

 

 '도시 - 인천, 영희의 고향 이야기'는 그래서, 그렇게 그 곳- 사라진 마을에 살았던 우리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을 시작합니다. 

 

 

옛 흔적을 수 백년을 이어가는 유럽의 도시들처럼

미래들에게 고향, 인천을 전해줄 수 있을까?

 

도시는 고향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없을까? 고향은 무엇일까? 인천에는 어떤 사람들이 왜 모여살고 있을까? 중학교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지역 역사를 배우는 경우도 없었고, 어떤 선생님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만 그래도 내가 사는 도시가 궁금했습니다. 궁금증을 풀 방법도 마땅히 몰랐기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

 

제 2의 고향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부터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린 조카들에게는 당연히 고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향과 살았던 적 있던 곳에 대한 괴리를 발견하며 고향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굳이 유럽의 옛 건물이 있는 도시를 생각한 건, 배다리에서 옛 도시의 조각을 살려내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 김정후 박사의 영향입니다. 보도블럭 하나를 바꿔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그곳이 도시를 지속시키는 방식, 옛  것들 그저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새로 쌓아올리는 새마을 운동처럼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내 머릿속에 있는 그 마을 풍경을 생각하며 전통과 역사를 잇고, 변화, 지속시키는  성숙한 시민은, 도시는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라진 그 마을의 이야기,

아직 거기에 있는 당신의 마을 이야기가 인천의 역사입니다.

 

인천의 한 귀퉁이, 이제는 사라진 그 마을에 살았던, 아직 그곳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 인천의 역사 한 조각을 써내려갑니다. 그들로 인해, 저에겐 도시, 인천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젠 지금, 제 이웃으로 살아가는 당신들의 역사가 있어 저에게 인천이 의미가 있습니다. 너무 옛날 이야기 아니어도 내가 아는 당신의 역사가 인천의 역사입니다. 한 번 들려주세요.

 

 

rain-o2@hanmail.net

010-7389-0857

 

 

 

 

 

 

 

 

 

 

 

'영희의 고향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평연와와 벽돌공장 노동자들의 삶  (0) 2015.10.23

 

지난 9/15-16 오후 3시에 삼산주공 1단지와 갈산주공 2단지에서는 흥겨운 음악소리가 가득 퍼졌다. 삼산미술교실과 시화 동아리의 전시회를 겸한 마을잔치로, 삼산어린이집 어린이들과 갈산 2단지 어르신 합창단이 공연을 하고, 15일 삼산동에서는 다문화 음식 체험과 에너지 절약 체험이 있었다고 한다. 



'임대단지 주민예술체험마당 <얼쑤>'는 사회적기업_'인천자바르떼'가 '주택관리공단 삼산1단지 갈산2단지 관리사무소'와 함께 '삼산&갈산 종합사회복지관', 아이다 마을, 인천소비자연맹, (사)한국기후변화학회, 삼산YWCA어린이집, 갈산어르신합창단이 협찬하여 함께 자리를 마련했는데 관리사무소와 사회복지관이 함께 어울려 준비한 자리는 전국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16일 갈산주공 2단지에서 진행된 전시와 행사를 둘러봤다.

타고있던 전동자가 간석에서 갑자기 멈췄는데 크레인이 철로위로 넘어져 단전되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연락이 뒤늦게 전해졌고, 택시를 타고 갔으나 30여분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부평공업고등학교 뒷편의 임대아파트와 굴포천이 이어진 곳은 풍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줬고, 멀리서부터 섹소폰 소리와 뽕짝 노래가 들려왔고, 나무 그늘에서 많은 분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공연을 기다리는 예술인들도 흥겹게 즐기고 있었다.

 

공연은 팝콘 한 봉지, 음료수 하나 손에들고 봐야하는 법 ^^

 

'삼산, 사람을 만나다'는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 장애를 가진 분들 중에서 원하는 분들을 모아 미술교실수업을 진행했고, 그 수업 결과물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자리였다

 

그림들이 놀라웠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 어르신들마다 다양한 방식으료 표현하셨는데 마음에 많이 들어왔다.

 

어르신들이 그림 옆에서 즐겁게 공연을 보신다. 연신 어깨를 들썩이며, 웃으시고, 박수를 치신다. 괜스레 마음이 뿌듯했다.

 

공연장 옆에 마련된 전시장

 

한 어머니께서는 이 그림을 보며 눈물이 펑펑 났다고 했다. 그림은 창 밖에서 바라본, 담배 피우는 이의 뒷모습을 연필로 그린 작품이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눈부시고 따가왔따. 

공연장 의자보다 아파트와 나무그늘에서 많은 분들이 즐겼다.

 

'예전전통국악예술단'에서 다양한 경기민요와 함께 어른들의 흥을 돋구웠는데 흥을 즐기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함께 어울렸다

 

촬영하는 내가 마음 뿌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성의있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능숙하고 애정어린 진행과 성의있고, 열의에 찬 공연자들의 태도가 느껴진 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들 흥겹게 즐기셔서 사진을 찍는 내내 필자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만나지고 있다.

 

풍물패 '타투'는 태평소와 더불어 전통 풍물과 잽이들의 개인놀음이 묘기에 가까운 놀음을 전하며 놀라움과 거움을 주었다.

 

참 고맙고 멋진 놀음에 이어 어르신들도 흥겨움을 나눴다.

 

 

 

"어르신들이 정말정말 즐겁게 즐기셨답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그런 맘이 절로들었다. 지역 주민과 단체, 관에서 함께 소툥하여 마련한 잔치가 정말 풍성하고 넉넉하고 즐거웠다. 돌아가는 길에 보니 주변 아파트 단지 주민들도 많이 구경하고 있었다.  

 

마음의 벽을 허무는 일은 모두의 마음이 모아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문화는 마음과 마음이 모여,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문화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2015 열우물 마을축제-열정’이 지난 토요일 12시부터 7시까지 십정동 옛 신덕촌에서 우물고사, 물푸기 덕담, 노래자랑, 공연, 부스, 먹거리 마당 등이 마련된 마믈잔치다. 오랜동안 마을주민이 자체적을 행사를 해 오다가 재개발 등의 이유로 명맥이 끊겼는데 지난 2009년부터 마을 주민과 지역단체들이 살려내여 6년째 진행해오고 있다. 

 

 

나는 이 곳-열우물, 신덕촌에는 처음이라 길을 헤맸다. 인터넷에는 신덕촌이 나오지도 않는다. 컴퓨터로 다 보고 대략 짐작하고 나왔는데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었다. 열우물 - 십정1동은 생각보다 넓었고, 고개 하나, 길 하나를 두고 있을 뿐인데 동암역부터 걸어 주민센터에서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일단 십정 4거리로 가기로 하고 이리저리 헤맸는데 교회앞에 현수막을 찾고, 겨우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달동네였다. 이곳저곳 그려진 벽화로 가까와졌다는 걸 알았다. 계단은 길게 높게 유난히 눈부신 하늘로 향하고, 낡고 오래된 집들, 좁은 골목과 골목들 .. 어디서 보았더라? .. 다른듯 익숙한 골목 .. 송림동, 이제는 아파트가 들어선 철탑이 있던 그 동네와도 닮았다. 물론 언덕 하나 있던 송림동 보다는 산을 끼고 있는 이곳은 훨씬 넓었다.  

 

 

 

행사장 입구에는 참새방앗간 떡매치기가 끝났고, 남은 떡을 팔고 계셨다. 떡매친 떡이 몇 봉지 안남았다고 해서 넙죽 사서 일하는 분들과 나눠먹었다. 떡을 좋아하진 않지만 오랜만에 나눠먹는 잔치떡은 맛났다.

 

 

거리미술 작업실에서는 어르신들의 수업 습작들이 전시중이었다.

 

햇살을 피해 먹거리 장터는 건물 뒤에 마련되고, 여러가지 공연들이 진행되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체험부스도 있고, 옛날놀잇감도 있고, 주전부리 장터며, 수 놓기를 배우신 분들의 작품 전시와 씨앗나눔도 있었다.

 

 

 

문화재단에서 진행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아 작은 집에서 전시를 하고, 책도 만들었다는데 책은 보이지 않았다. 전시장 앞 우물가에서는 두레박으로 물을 떠 올리는 체험중이다. 물을 푸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도 한다.

아가씨도 와서 소원을 빌어, 소원 많게 생겼는데 .. 하신다. 헐~ 딱히 개인적인 소원은 없다. 그저 민주주의가 더이상 후퇴하지 말고, 더이상 가난하고 힘든 이들이 고통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 뭐 그런 .. 소원이라면 소원, 결국 나도 물을 퍼 올렸고, 우물 이야기를 듣느라 소원 비는 건 까먹었다.

.

  십정동 .. 우물이 열개인가 물으니 우물이 많았다는 의미란다. 지금은 4개가 남아있다고 했다

 

 

언덕위에서 할머니들이 내려다보고 계시길래 그길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언덕 위, 골목 골목에까지 노랫소리, 음악소리가 흘렀지만 천막 때문에 행사장이 가려져서 언덕위에서는 잘 볼 수 없었는데 어르신들은 자리를 떠나실 줄 몰랐다.

 

그 길로 나는 벽화들을 따라 마을을 둘러봤다. 하늘은 예쁘게 푸르렀고, 화분이며 작은 텃밭들인 눈부셨고, 이 언덕위의 풍경이 궁금해 행사장에서 퍼지는 음악소리와 행사 진행을 들으며 골목길을 누볐다. 잔치보다 마을이 좀 더 궁금했다.

 

 

 

 

 

 

 

 

 

 

 

 

 

 

 

 

 

 

 

 

 

 

 

 

그렇게 고개고개 골목골목을 둘러 보고 내려오니 무대 뒤였다. 그제야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파서 쉴겸 국수와 순대, 부추전을 주문했는데 달랑 5천원이다. 넉넉히 퍼주신 국수에 김치만 먹었는데 배가 불러 나머지는 싸가지고 왔다. 

무대 옆에 있는 탁자에 앉아 국수를 먹으면서 들으니 십정동 아시안게임경기장 자리에는 과수원이 아니라 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구나 .. 논이 있었구나. ' 국수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들은 너무너무 즐겁다고, 좋다고 하신다. 어르신들은 느긋하게 앉아 공연을 즐기시고 .. 외지인보다 주민이 더 많은 자리, 그래야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돌아나오는 길, 방앗간 어머니의 웃음이 즐겁다.

 

 

지난 토요일 오후 3시, 부평아트센타 앞마당에서 도시농부 시민축제가 펼쳐지고 있었다. 

배다리 '나비날다 책방' 참여하게 되서 겸사겸사 둘러보았다. 나비네 책방은 생태, 환경, 인권, 느리게 사는 삶 등의 주제로 <인문학 서점 풀무질>의 새책과 <아벨서점>에서 농업과 관련된 헌책을 준비해주셔서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흙이며 풀과 나무, 씨앗과 열매들이 가득한 생기 가득 건강한 느낌이 편하고 즐거웠다. 다양한 주제의 책속에 이야기들이 그 마당 가득 펼쳐진 느낌,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토종씨앗 전시.


꼬마 농군들의 다양한 작물들이 예뻣다. 부스를 열자마자 저 둥글고 큰 호박들은 팔렸다고 한다.  빨간 고추는 어른 손으로 세 줌에 천원 .. 다양한 작물들이 키워져서 상위에 올랐다.

꼬마농부가 키운 수수와 결명자, 호박, 수세미를 샀는데 가지와 토마토를 덤으로 받았다. 

 

신선한 우리 채소 사세요~~

 

직접 농사지은 쌀과 작물들, 그리고 된장, 고추장, 간장 등도 직접  농사지은 콩과 고추등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나비날다 책방 책 부스

생태텃밭 협동조합에서는 가을배추 모종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다양한 작물들도 전시되고,

목화  탐스러운 솜뭉치가 열렸다.

 

토종씨앗 전시도 있었다.

 

닭장이라니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직접 먹이를 주며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직접 만든 달걀꾸러미!  다양한 체험으로 아이들 손에 생명들이 가득하다.

 

 

 

 

<채소모종심기 부스>심어서 키워 잎을 따서 차로 먹는 모종을 직접 심어서 가져갈 수 있다. 자활지원센터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도 판매하고, 모종도 나눠주셨다.

 

 

 

생태공예품들도 생각보다 다양하고 멋졌다.

 

 

우리농산물들이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추석 명절에 쓸 것들을 사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문화 가족들이 낯선 작물들을 이용한 음식 나눔도 하고 있었다.

우리 이웃나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채소 모종도 팔고 있었다.

제주 유기농 청귤로 만든 청귤청으로 음료도 팔고, 직접 구입해서 담가볼 수도 있다.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진행자는 엿을 잘라주며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도 해줬다. 엿은 공짜!!

 

<꼬마농군 부스> 어린이들이 엄마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가지 작물들을 키웠다고 한다. 그렇게 거둔 작물들을 갖고 나와 팔고 있었다. 못생긴 작물들이 정겹고 사랑스러웠다.  .

 

<흙놀이 체험부스 흙은 아니지만 도시 아이들이 흙이나 거름 등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흙에 대한 친화력을 갖도록 준비했다고 한다. 

 

도시에서 탈곡기에 키도 써보고, 절구질에 맷돌까지 돌려보는 일은 신기한 일이다. 옛날식 탈곡기는 도시에서 자란 우리들에게도 신기한 물건이다.

 

짚풀공예는 아이고 어른이고 다들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행사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쉴 틈 없이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 만들었어요~~

 

도시 한 가운데서 땅 없이도 키워볼 수 있는 제품들도 선을 보였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동놀이, 사물놀이에 이어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마무리도 좋았다.

마무리 대동놀이에서 보여진 멋진 상모 돌리기

 

 

3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게 진행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삭막한 도시에 넉넉한 인심도 느꼈고, 스스로 키운 작물을 팔고, 그것으로 만드는 다양한 우리 먹거리를 소개하고, 도시에서 농사짓는 다양한 방법도 알아보고, 무엇보다 자연을 매개로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가 너무 좋았다.

 

다만 1회용품-비닐봉지, 컵, 접시, 나무젓가락 등- 사용하는것이 좀 불편했다. 물론 운영팀에서 전무 모아서 분리 수거를 했지만 다른 행사들과는 그래도 좀 더 수준있는 자리인 만큼 시민 스스로 1회용품 사용에 대한 고민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인 만큼 많은 고민을 통해 더 나아질 내년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라이카 D-LUX4


 

센서 : 유효화소수 1,010만 화소 1/1.63“ CCD

렌즈 : 24-60mm(35mm 환산), f2.0-f2.8 

LCD : 46만 화소 3인치 LCD

크기 : 108.7×59.5×27.1mm

무게 : 228g

수입사 : 반도카메라(www.bandocamera.co.kr)

글사진 한동훈<월간사진 2008 12월호>

까만색 바디에 붙어있는 작은 빨간색 라이카 로고만으로도 이 카메라를 손에 넣고 싶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같은 성능을 가진 같은 카메라이면서도 가격은 절반에 불과한 파나소닉의 LX-3를 보면서도 갖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D-LUX4에겐 단박에 마음을 뺏겨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D-LUX4는 라이카이니까. D-LUX4는 여러 가지 매력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우선 24mm에서 시작하는 라이카 광각 줌 렌즈가 첫 번째. 24mm에 이르는 광각 렌즈이지만 비구면 렌즈를 많이 사용해 최대 광각에서의 형태 왜곡을 크게 줄였다. 수평 수직의 선을 포함한 건물을 촬영하더라도 24mm의 광각이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안정적이다. 24mm에서 시작한 화각은 60mm까지 움직인다. 모든 콤팩트 카메라들이 줌 배율을 높이려고 할 때 라이카는 오히려 줌 배율을 낮췄다. 광각과 표준 화각을 선호하는 스냅 사진가를 위한 렌즈 설계로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주밍 클로즈업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 렌즈 밝기가 최대 광각에서 f2.0, 최대 망원에서 f2.8로 매우 밝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작은 디지털 콤팩트 카메라지만 오랫동안 이어온 라이카 렌즈의 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유효화소수 1,010만 화소의 1/1.63인치의 CCD를 사용한다. 다른 브랜드의 상위기종에 비해 화소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지만 센서의 크기는 조금 큰 편.


고감도 촬영에서 조금이나마 좋은 성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본기를 갖추었다. 최고 감도는 ISO3200까지 설정이 가능하다. 여느 콤팩트 카메라처럼 ISO800 수준에서 노이즈가 증가하지만 동급 제품보다는 그래도 괜찮은 노이즈 억제력을 보여준다.



 


24-60mm의 매력적인 화각을 지원하는 라이카 렌즈 그리고 다양한 수동 기능과 매력적인 인터페이스. 무엇보다도 라이카라는 것.


120만원대에 이르는 가격은 ‘아무리 라이카지만’이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밝은 렌즈와 더불어 센서를 손떨림에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떨리지 않은 상태를 유지시켜주는 흔들림 보정기능은 실내 촬영의 성공률을 높여주는 중요한 포인트. D-LUX4의 흔들림 보정기능은 3스텝의 느린 스피드에서도 떨림을 억제시켜준다.


D-LUX4는 최고급 콤팩트 카메라답게 다양한 수동 촬영기능을 지원한다. 수동 노출, 셔터 우선, 조리개 우선 모드는 물론이고 2개의 사용자 설정 모드도 갖추고 있다. 얼굴을 자동으로 인식해 얼굴에 노출과 초점의 기준을 맞춰주는 얼굴인식 기능을 지원한다. 특히 라이카의 RF 카메라를 사용하는 프로사진가의 노출 노하우를 반영한 스냅샷 모드는 M 시리즈의 느낌을 디지털에서도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한다. RAW 파일도 지원하며 전용 외장 플래시와 외장 뷰파인더를 쓸 수 있다.


뒷면에 있는 46만 화소의 3인치 LCD의 화질은 무난한 편. 4:3 포맷에서 최대 해상도를 사용하는 D-LUX4는 3:2 포맷에서 약 950만 화소의 이미지를, 16:9 포맷에서 약 900만 화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포맷 변화에 비해서는 화소의 감소가 적은 편. 이는 센서의 면적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센서와 렌즈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포맷은 렌즈 위에 마련된 스위치로 촬영하는 도중 언제라도 간편하게 변경할 수 있다. 동영상 기능도 탁월해 16:9 포맷의 1280×720(24p)의 HD급 영상 촬영이 가능하다. FULL HD급은 아니더라도 콤팩트 카메라 중에서는 빠지지 않는 동영상 기능이다. 여러 가지 기능을 통합 조작하는 조이스틱을 비롯한 인터페이스가 정밀하게 짜여져 있어 자주 사용하는 기능은 손쉽게 접근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전문가용 콤팩트 카메라로 손색없는 기종이다. 라이카의 이름을 달지 않았더라도 탁월한 렌즈 성능과 전문가를 위한 다양한 기능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