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권력에 ‘아니다’ 말 못하는 나라, 그래서 우린 길에 나섰다
ㆍ“국민 의견 안 들어주는 국회…우린 왜 대표자를 뽑았을까요?”


김동애·김영곤씨 부부는 비정규직 강사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투쟁을 10년째 진행 중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부근 국민은행 앞 천막은 가장 오래된 농성장이다. ‘자발적 가난과 고난’을 택한 장기 농성자들의 삶은 민주공화국의 부재 또는 위기를 드러낸다. 지난달 27일 아침 출근길 시민들은 농성장 앞에서 팻말을 든 김씨 부부 앞을 무심히 지나갔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김동애·김영곤씨 부부는 비정규직 강사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투쟁을 10년째 진행 중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부근 국민은행 앞 천막은 가장 오래된 농성장이다. ‘자발적 가난과 고난’을 택한 장기 농성자들의 삶은 민주공화국의 부재 또는 위기를 드러낸다. 지난달 27일 아침 출근길 시민들은 농성장 앞에서 팻말을 든 김씨 부부 앞을 무심히 지나갔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은 불평등, 노동 탄압, 특권 세습, 권력 독점, 법치 실종, 부정부패, 대의제 한계 등 ‘민주공화국’의 부재와 위기를 7회에 걸쳐 진단합니다. 지면과 온라인에서 동시에 기획을 진행합니다. 웹·모바일 페이지에 취재팀이 만난 노동자, 장애인, 활동가, 지식인 등 100여명의 육성을 특집으로 싣습니다. 특집 페이지는 시대를 진단하는 아카이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트북 전원이 갑자기 꺼졌다. 남은 배터리 용량은 30%. 유성기업 해고노동자 김선혁씨(39) 말을 받아치던 중이었다. 폭염으로 과열된 탓일까.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 농성장 밖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스마트폰으로 온도를 확인했다. 8월11일 오후 3시 기온은 36도, 체감기온 38.6도. 차량으로 가득한 도로는 초대형 온풍기처럼 열기를 뿜었다. 햇볕이 살갗을 파고드는 날씨에도 천막을 치지 못한다. 구청은 “뼈대가 들어간 천막은 가건물”이라며 ‘철거 대상’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김씨가 가로수 그늘 아래 차린 농성장에서 얼음 조각을 입에 넣고 말했다. “겨울 노숙은 하거든요. 우리끼리 그러죠. 그게 낫다고. 아~ 여름 노숙은 정말 힘들어요.” 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011년 해고 뒤 회사와 법원을 오가며 노숙 투쟁만 2년을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해고 뒤 삶 자체가 억울하고 분한 일의 연속이다. 민주공화국이라면 벌어져선 안될 일들이다. 지난 1월 현대차 협력업체인 유성기업과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 ‘노조 파괴’를 공모한 사실이 확인됐다. 노조는 직장폐쇄와 노조 탄압 배후에 현대기아차가 있다고 여겼다. 5월17일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석 달째인 7월21일 대전고등법원은 유성기업 노동자 2차 해고 무효 판결을 내렸다. 법원 판결은 농성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복직은커녕 누구 하나 사과하지 않았다. 회사는 대화도 거부한다. 

와중에 동료는 세상을 떠났다. 농성장엔 지난 3월17일 자살한 유성기업 노조원 한광호씨의 간이 분향소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동료들은 그가 노조 탄압에 괴로워하다 죽음을 선택했다고 전한다.

노조 파괴는 이어진다. “갑을오토텍 노조 문제도 똑같아요. 컨설팅한 회사 노무사가 창조(컨설팅)에 있던 사람입니다.” 김씨는 기업과 언론, 지식인들이 노조를 탄압하면서 이윤을 내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한참을 생각하다 강정과 밀양, 성주 이야기를 꺼낸다.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면 그만큼 존중해야 하는 거잖아요. 간담회를 얼마나 열었나요? 얘기를 들어봤느냐는 거죠. 왜 권력층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외부세력으로 매도하느냐는 거죠. 이게 과연 민주공화국일까요?”


■길에서 민주공화국을 묻다 

특별취재팀은 지난 8월 서울의 장기 농성장 13곳을 찾았다. 22년 만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다. 노동자가, 농민이, 장애인이 잔뜩 달궈진 거리로 나와 끝 모를 싸움을 이어갔다. ‘자발적인 가난과 고난’을 감당하는 이들은 지금 이 시대의 ‘장기수’ 같아 보였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의미를 물었다. 길에서 더위와 추위와 싸우는 이유가 헌법 제1조의 실현과 직결된다고 여겼다. 농성장에서 ‘민주공화국’을 찾기는 어려웠다. 민주주의, 공화주의, 주권은 부재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법과 원칙’이라는 칼날만 시퍼렇게 번득인다. 농성자들은 추방당한 채 탄압에 시달리고, 무관심에 고통받는다. 생계는 힘들고 위태롭다. 힘에 부친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국민의 죽음 

하이디스 노조 2·3대 지회장을 맡았던 배재형씨는 지난해 5월 세상을 등졌다. “제가 다 책임지고 이렇게 갑니다. 동지들, 끝까지 싸워서 꼭 이겨주세요”라고 유서에 썼다. 사람이 죽고서야 투쟁이 ‘조금’ 알려졌다. 배씨의 죽음 전 해고자들은 “(언론에 나려면) 사람이 하나 죽든가”라는 말을 들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농성장에서 김승배씨(44)가 말한다.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서라면 자본가들은 돈이나 시간이 얼마가 들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김씨는 배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현수막은 이들의 투쟁 이유를 압축해 보여준다. “흑자 정리해고! 우량공장 폐쇄! 특허기술 유출! 무책임한 외국기업 횡포를 정부는 즉각 저지하라!” 처음엔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싸운 지 1년 반이 됐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난 8월 하이디스가 시설관리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이들이 삶으로 복귀할지는 미지수다. 판정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김씨가 스마트폰으로 ‘민주공화국’을 검색하고 말했다. “이런 투쟁에 전혀 관심 없었거든요. 가장으로 아이들 키우는 데만 초점을 맞췄죠. 해고 뒤에 너무 부당하고 불공정한 것을 많이 접했어요. 분명한 건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게 민주주의고, 민주공화국이죠.”

농성장은 밤이면 종종 위험해진다. 취객들이 술병이나 돌멩이를 농성장에 집어 던진다. 농성장에서도 헌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윤효선씨(32)는 위협적인 상황을 보고도 신경 안 쓰는 경찰들이 있다고 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도와주러 안 와요.” 국가는 이들을 ‘국민 생명 보호’의 대상에서 배제한다. 종종 ‘비국민’으로 취급한다.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1)서울 장기 농성장 13곳서 길을 묻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티브로드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농성 천막은 중구 명동 신일빌딩 앞 화단 옆에 있다. 티브로드 최성근 수석부지부장(41), 권석천 부지회장(42)이 8월11일 저녁식사를 하러 천막으로 돌아왔다. 티브로드·세종호텔·사회보장정보원 공동투쟁단의 충무로 시위를 마친 뒤였다. 매연이나 더위는 차라리 견딜 만하다고 했다. “인생이 없다. 젊은 날을 도둑맞은 것 같다.” 비정규직의 삶을 두고 최성근 부지부장이 말했다. 저임금에 근로기준법 미준수가 다반사다. ‘당일 처리’는 온전히 노동자 몫이었다. 자정까지 일해도 콜센터 예약을 감당하지 못했다. 방송 송출선 담당 기술자들은 새벽에도 전화가 오면 뛰어나갔다. 유선방송 설치가 늦었다며 항의하는 고객에게 회사 대신 사과했다. ‘위험의 외주화’에도 무방비로 노출됐다. 별다른 안전장비 없이 전봇대에도 올라갔다. 소비자들은 눈비가 와도 설치해달라고 했다. 회사도 종용했다. 관련 법은 우천 시 전봇대 작업을 금지한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를 들은 순간 한마디로 ‘우리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국은 자본의 나라일 뿐이다. 권 부지회장이 말했다. “자본이 우선되는 사회는 민주공화국이 아니죠. 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대우를 더 잘 받아야 하고, 갑질을 해도 된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거 같아요.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생각을 하는데 아무 말도 없어요. 참 이상하죠.” 최 부지부장은 곰곰이 생각하곤 말을 이었다. “지역 센터장은 자기가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없고 본사가 해줘야 한다고 하는데, 또 본사(원청) 가서 얘기하면 ‘너희와 상관없다’고 해요.” 그에게 민주공화국은 사회·경제·정치 부문의 구조적 잘못을 누군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불평등 투쟁해야 민주공화국 

명동역 10번 출구를 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세종호텔 벽에 기대어 세워진 팻말과 호텔 노조원들의 1인 시위다. 8월18일 고진수 위원장이 서 있었다. 연봉제 확대와 임금 삭감을 통한 정규직 퇴출, 일일근로계약서, 연장수당·주휴수당 미지급 등 사측이 끌어들인 여러 조치를 하나씩 이야기했다. 과장급 직원은 연봉제 대상자가 되고 4년 뒤 임금이 반토막 났다고 한다. ‘노동 탄압의 백화점.’ 고 위원장은 회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헌법 제1조? 네. 잘 알죠. 하도 많이 외치고 듣고 했으니까요. 노래도 있고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만 헌법 제1조는 ‘말’로 익숙할 뿐이다. 민주공화국인가는 회의적이다. “힘 있는 몇몇이 ‘이거 맞지’라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구조가 됐어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요.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을 뿐이죠.” 농성은 고달프다. 생계도 위험하다. 부당함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절망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 거라 생각한다. “구세주가 짠~ 하고 나타나서 바꿔줄 수 있는 건 없어요. 불평등과 부조리에 투쟁해야 바꿀 수 있죠.” 


■연대로 이어진 섬들 

농성장은 언뜻 외딴섬처럼 보인다. 광화문에서, 명동에서, 강남에서 각자의 소리만 외치는 듯하다. 이 섬들은 가늘지만 강고한 ‘연대’라는 이름의 다리로 이어진다. 운동은 연대의 힘으로 확장한다. 세월호 유족이, 유성기업 노조원이 백남기 농민의 농성장을 찾았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반올림 농성에서 공연한다. 농성장 사람들은 참사, 노동, 도박, 장애인 문제를 함께 투쟁할 일로 여긴다.

8월18일 고진수 위원장과 함께 간 곳은 세종호텔에서 5분 거리의 사회보장정보원 집회장이다. 동양시멘트·하이디스·티브로드·하이텍·세종호텔·콜트콜텍 노동자 등 30여명이 모여 있었다. 고 위원장은 2012년 파업 당시 기륭전자·쌍용차·코오롱·재능교육 노동자들이 왔다고 전한다. “150여명의 동지들이 로비를 메웠을 때 굉장히 큰 힘이 됐죠. 이후 다른 투쟁 사업장에 꾸준히 다닙니다.”


■생명줄이 끊겼다 

8월11일 관악구 한남운수 차고지 입구 농성장에서 만난 버스정비 해고노동자 이병삼씨(46)는 노동부의 근로감독관이 사업주들의 잘못을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장도 자주 찾지 않았다고 한다. “법치국가나 3권 분립을 상징하는 저울 있잖아요? (투쟁하면서) 저울이 절대 평평하지 않다는 걸 느낀 겁니다. 검사든, 경찰이든, 판사든 목소리를 들어주는 데가 없더라고요.”

하도 답답해서 들춰본 게 헌법이다. “내가 누군지 처음 생각해본 거죠. 왜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도요.” 노동법, 근로기준법, 취업규칙을 읽었다. 이씨는 자신의 투쟁이 ‘준법투쟁’이라고 확신했다.

민주공화국인가? 이씨는 미숙아로 태어난 조카 이야기를 꺼냈다. 여동생 부부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병원비 내기도 힘들다. “둘이 죽어라 벌어도 빚만 지고 살죠. 팔, 다리, 치아 다 성치 않은데 국가 보조는 한 달 20만~30만원입니다. 큰 병원에 한 번 가면 기본이 몇십만원 넘죠. 이게 개인 잘못인가요?”

이씨의 삶도 망가졌다. 농성 뒤 집을 헐값에 팔았다. 대출과 투쟁기금으로 간신히 살아간다. 생계는 농성자 모두가 겪는 문제다. 농성장을 떠나는 이들도 있고, 계속 싸우는 이들도 있다. 40대 중반 나이. 그는 “생명줄이 끊겨 버렸다”고 말한다.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이 일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배운 정비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마지막 투쟁이라고 각오한다. 그래서 농성장을 더더욱 떠날 수 없다고 했다.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1)서울 장기 농성장 13곳서 길을 묻다

■자라난 아이들, 해고도 이어진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씨(54)가 해고됐을 때 큰아이는 고교 2년생이었다. 그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알바’를 하다 직장인이 됐다. 신협에서 계약직으로 2년 일하다가 해지됐다. 임씨는 “은행은 다 정규직인 줄 알았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8월11일 임씨의 투쟁은 3482일, 여의도 농성은 312일째였다. 임씨가 해고된 뒤 확인한 건 “한국은 독재국가이고 부정부패한 나라”라는 것이다. “권력도 돈으로 좌우되잖아. 돈이면 판사도 사고 검사도 사고 다 사잖아. 해고조건이 법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는데 그걸 다 무시하고….” 한국 땅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건 “너무 힘들고 비참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근 콜텍지회장(51)은 민주공화국의 부재를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지금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다. 축적의 시기’라고 이야기하며 민중들을 착취했잖아요. 여전히 분배는 이루어지지 않고 자본 축적만 이뤄지죠. 민중의 삶은 하나도 나아진 게 없죠.”


■판결도 이행하지 않는 나라 

노동부는 지난해 2월13일 동양시멘트 사내하청업체인 동일산업이 ‘유령회사’이며 하청노동자들은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동양시멘트 소속 정규직 노동자라고 판정했다. 동양시멘트는 노동부 판정에 하청업체와의 계약 해지, 노동자 100여명 해고로 답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이를 부당해고로 판단했지만 동양시멘트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손해배상소송 소장도 보냈다. 23명 조합원에게 매긴 배상금이 총 16억원이나 된다. 

정부와 법원이 가끔 해고 무효와 복직 판정을 내려도 기업은 잘 듣지 않는다. 동양시멘트 해고노동자들이 광화문 미국대사관 뒤편 삼표그룹 본사 건물 입구 앞 천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지난 8월10일 노동자들이 353일째 노숙 농성 중이었다.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데 그게 민주공화국일까요? 헌법대로 한다면 부당해고 판정이 났는데 우리가 노숙 농성을 할 필요가 없죠.” 이재형씨(42)가 말했다. 이씨는 26세이던 2000년 10월 동일산업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임금은 정규직의 40%를 받았다. 회사 식당에선 “하청 주제에 왜 먼저 밥을 먹느냐”는 말을 들었다. 이를 악물고 굴착기와 불도저를 몰았다. 연장근무를 밥 먹듯 했다. 그렇게 일하다 해고됐다. 이씨가 서울에서 싸우는 동안 아내는 삼척에서 돈을 번다. 여섯 살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식당에 나간다. 아내는 남편의 투쟁을 성원한다. 이씨는 아이들에게 “해고된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정치도 대의도 없다 

분수대에서 초등학생들이 뛰어놀았다. 8월8일 낮 기온은 35도. 광화문광장 세월호 유족 단식 농성장 바닥은 물로 흥건했다. 열기를 식히려고 분수대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뿌려놓았다. “광화문광장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닌가 싶어요. 다른 곳에선 호소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세월호 특조위 김형욱 언론팀장이 말했다. 

오후 2시40분쯤 유경근 집행위원장이 단식 농성장에 나왔다. 딸 예은양의 단원고 학생증이 목에 걸려 있었다. “헌법은 그냥 갖다 제일 위에 꽂아놓은 두꺼운 책 정도의 의미일 뿐이죠.” 한참 뜸 들이다 말을 이었다. “헌법은 그 누구라도 어떤 경우라도 함께 지키자고 약속한 기본이고 상식이잖아요. 그것을 무시하는 현실에서 어디에 희망을 걸고 살 수 있을까요?” 

‘정치’도 ‘대의민주주의’도 없다고 유씨가 말한다. 야당은 수시로 말을 바꿨다. “19대 국회 때는 ‘소수 야당이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더니, 시민들이 다수당을 만들어 주니까 ‘국회 법과 절차, 질서를 해칠 수가 없다, 여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게 국회의원의 특성’이라고 하더군요. 그 다음 말이 제일 웃겨요. ‘가족 여러분들이 여론을 만들어 주십시오.’ ” 정세균 국회의장이 한 말이라고 했다. 세월호 이후 참사가 마치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유 위원장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등 참사 때마다 현장을 찾고 있다. 그는 1명이든 300명이든 생명을 계량할 수 없고, 인권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뽑은 정치인들은  

파란색 유리로 덮인 용산화상경마장 건물은 겉만 봐선 ‘도박장’인지 알 수 없었다. 입구에 흰색 유니콘과 황금색 말 조형물이 화상경마장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사람들은 알고 찾아온다. 화상경마장 앞엔 종종 오토바이가 행렬을 이룬다. “생업으로 오토바이를 타는 분들이죠. 현금 만지는 택시기사 분들도 와요. 힘들 게 사는 사람들 주머니 털어가는 거죠.” 

정방 용산화상경마도박장 추방대책위원회 공동대표(46)는 농성 후 헌법을 찾아봤다. “ ‘권력’이라는 단어는 헌법 제1조에만 썼다는 걸 처음 알았죠.”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나왔다. 국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대의민주주의도 작동하지 않았다. 19대 국회 때 용산화상경마장 관련 법안은 16개 상정됐다가 논의 없이 끝났다. 

20대 국회 들어 시민 1500명의 뜻을 모아 입법청원을 제기했다. “일정 숫자 이상의 시민이 입법청원하면 추진해야 합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말해놓고서 국민 요구를 국회가 안 들어주면 헌법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사회는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농림축산위 소속 국회의원들에게서 ‘마사회로부터 농림축산기금을 받기에 이전을 대놓고 찬성하기 곤란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화상경마장 반대는)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 구청장, 시장 등이 해야 되는 거죠. 우리가 반대 운동까지 할 거면 대표자들을 왜 뽑았나 싶어요.” 8월11일 현재 도박장 반대운동은 1198일째였다. 정 대표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영화 <부산행>을 떠올리며 그가 말했다. “ ‘나만 아니면 괜찮아’라는 이기적인 생각,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예우하지 않는 문화가 민주공화국을 위협합니다.” 


■이 외침은 뭘 타전하는 걸까 

광화문역 9번 출입구 왼편에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농성장이 들어섰다. 8월10일 현재 1452일째.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정훈 권익옹호국장(47)이 휠체어를 탄 채 행인들에게 서명을 요청했다. 김 국장이 강조한 건 시설 격리·수용 문제다. 사회는 장애인이 원하는 삶을 인정하지 않고, 지금 ‘민주공화국’은 거대한 시설과도 같다. “집단 격리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권도 민주주의도 없는 상태에서 사는 겁니다. ‘사람들이 중증장애인이면 사회에서 어떻게 사느냐, 격리되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 민주공화국이 맞나 싶죠.” 스웨덴 정부는 1950년대부터 장애인 거주시설을 없애왔다고 했다. “자본주의 잣대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왜 같이 보듬고 살아야 하는지 알리는 게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소리/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소 … 귀뚜루루루 … 보내는 내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김 국장은 가수 안치환의 ‘귀뚜라미’를 떠올리곤 한다. “우리 외침이 사람들에겐 ‘타전’을 한다고 봐요. 언젠가는 사람들 가슴을 울리며 좋은 날을 맞이할 겁니다.”


■정부는 자본을 비호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농성장은 44층 높이의 삼성전자 서초사옥을 배경으로 두고 서 있다. 8월11일은 서초사옥 농성 투쟁 309일째다. 반올림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 등 직업병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들에 대한 사과와 대책을 요구하며 9년째 투쟁 중이다. 농성장엔 삼성전자 직업병 사망자 76명을 상징하는 흰고무신 화분과 추모 ‘솟대’가 보였다.
 농성장에서 만난 이종란 상임활동가는 삼성전자와 자본, 국가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종란 상임활동가는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씨(당시 23세)가 병원 치료를 받을 때 삼성 관계자는 4000만원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말해놓고, 정작 들고온 돈이 500만원이었다고 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평등하게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 이 활동가가 내린 민주공화국 정의다. “노동법에다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마저도 구현되지 않아요. 정부와 공권력은 자본을 철저히 비호합니다.” 야당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삼성 출신 양향자씨가 더민주 공천을 받아 지난 총선에 출마했을 때 사망 사태에 관한 질의서를 보냈다. 답변은 오지 않았다.. 


■삶의 고통을 응축한 농성장에서 

김동애·김영곤씨 부부는 비정규직 강사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투쟁을 10년째 진행 중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국민은행 앞 1.5평 규모의 천막은 대학강사 교원 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다. 8월11일 3262일째였다. 가장 오래된 농성장이다. 김동애씨가 민주공화국에 관한 질문을 듣고 목소리를 높였다. “똑같은 걸 가르치는데 한쪽은 1억원을 받고 한쪽은 교원 신분도 없이 연봉 500만~600만원을 받고. 그게 민주공화국이에요? 논문 대필이 관행이라는 나라가요? 국회도 묵인하는 그런 나라가 어떻게요?” 

전국의 대학 시간강사는 지난해 4월 말 기준 5만9000여명이다. 대부분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고 일한다. 

오랜 투쟁에도 바뀐 게 없다. 지난해 12월 국회는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인정 등 처우 개선을 골자로 한 고등교육법 개정안(일명 시간강사법)을 유예시켰다. 3번째 유예였다.

농성 10년.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교원 지위 회복은 장년에 접어든 두 사람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김동애씨도 자주 이 생각을 한다. 결론은 내린 듯하다. “꼭 해야 되는 일이니까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하는 데까지 하는 거예요.” 

농성은 삶의 고통을 응축한다. 이 장소는 쉬이 감당할 곳이 아니다. 자본은 외면한다. 국가는 추방한다. 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몸은 상해간다. 마음엔 화병이 든다. 사람들은 관심 없다. 투쟁에 지쳐간다. 농성자들은 서로 힘을 주는 ‘연대’와 조그만 ‘관심’으로 이 ‘민주공화국’을 버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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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0051827005&code=940100&s_code=as166#csidx39633f509277d39a04ffde78ba8dc88


주정뱅이 말라깽이 내 젋은 아버지는 38살에 죽었다. 

그 즈음이면 나도 죽었을꺼라 ... 그런 생각을 부러 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나이 즈음이면 한 생이 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마흔을 넘어 살아있다는 게 낯선 날들이 많았다.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결의 삶을 살았으므로 뭔가 다를꺼라 생각했지만

썩 다르진 않았던 모양이다.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랄까?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깬 피터팬처럼  문득 '어른이 되어야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시간속을 부유하며 그러고도 다시 5년을 더 살아있다.


바람도 그물에 걸리더란 걸 알아버리고는

좀 ... 슬퍼졌고,

더 이상 은하수를 볼 수 없는 하늘도 좀 ... 서글펐고,

어느샌가 도道 닦는 소릴 하고 있는 나를 보며 내가 비웃었던 그 나이의 이들이 그렇게 말하게 된 것을 좀 이해하게 되었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며

무기력과 무능력, 무망함에 허무를 과연 바람의 계곡, 그녀처럼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해지고

그런 세상 한 가운데를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지도 궁금해진다.


일단은, 당장은 손과 발을 놀리며 살아야 할 것은 알겠는데

마흔 다섯이 넘고서도 서툰 수족에 짜증이 난다.

그래 일단은 서툰 수족을 놀리는 것 부터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시 녹슬어가는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일지도 모르겠다.

응 ..


“복덕방이라는 게 지금은 생소하지만 예전에는 동네 사랑방이자 소식통이었어요.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기 쉬운 토지거래 등을 중재해주던 역할을 했죠. 그런 일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오가며 고민을 나누기도 하던 공간이었고요. ‘이 문제는 건너 마을 아무개를 찾아가면 해결할 수 있다’ 등의 정보가 모이고 교류하던 곳이지요. 예전에 진짜 그런 역할을 했다고 문헌에 기록돼있습니다. ‘우리동네문화복덕방(이하 문화복덕방)’도 그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동네 소식이 모이고, 동네에서 필요한 것을 내어줄 수 있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요. ‘마담 뚜’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 라정민 우리동네문화복덕방 기획팀장.

라정민(28) 문화복덕방 기획자를 지난 9월 23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만났다. 서구 가좌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화복덕방은 이날 시립박물관에서 ‘소통과 조화,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 동네’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사례를 발표했다.

문광부 지원 사업 ‘시시콜콜’로 시작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시민 문화예술교육 활동 지원 사업인 ‘시시콜콜’로 시작한 문화복덕방은 지난해와 올해 2년 간 지원 사업에 채택됐다.

‘시시콜콜’이란 시간(時)과 장소(市)에 구애받지 않는 교류(call)와 협업(collaboration)을 의미한다. 문화예술활동은 특별한 남의 것이 아닌, 시시콜콜한 일상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할 때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람책’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와 시간을 적어 두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대출을 신청합니다. 반대로도 가능하겠죠. 어떤 이야기가 궁금해 적어두면 그걸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책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궁금한 걸 묻고 답하며 실컷 떠들고 노는 거죠”

휴먼라이브러리인 사람책은 덴마크의 사회활동가 로니 에버겔이 고안한 프로그램이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며 고정관념이나 오해, 편견을 깨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람책 소통 방법론은 세계 70여개 나라로 퍼져나갔다. 사람책은 말 그대로 사람이 책이 돼 자기가 가진 가치와 철학, 삶의 방식을 들려주는 책이다.

“동네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던 차에 사람책을 생각했고, 문화복덕방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람책’을 만나다

  
▲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 세미나실에 마련된 우리동네 문화복덕방.<사진제공·문화복덕방>

문화복덕방은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려고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학교나 시장, 도서관에서 만난 서구 가좌동 주민 468명은 영화 관람ㆍ운동ㆍ여행ㆍ음악 감상 등을 하고 싶어 했다.

“작년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사람책 17개를 진행했어요. 올해 들어서는 6개를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사람책을 중심으로 진행했죠. 사람책은 기본적으로 저희 사무실이 있는 가좌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찾았습니다”

라 씨는 반응이 좋았던 사람책으로 요리사를 꼽았다.

“남인천고등학교 조리과학과를 다니는 친구들이 요리사 사람책을 만났어요. 우리 동네 일식집 사장님과 제빵사, 호텔 셰프를 만났는데 목표가 명확한 친구들이라 관심이 많았죠. 사람책으로 활동하신 분들도 청소년들과 의미 있는 만남이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한번 맺은 사람책 관계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사람책으로 활동한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 찾아갔고, 차 한 잔 마시며 진로를 상담하기도 했다.

“바둑을 두는 사람책이 있었어요. 바둑을 좋아하는 청소년이 생각했던 것보다 동네에 많더라고요. 예전에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주산 배우는 게 유행했듯이 한때 바둑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죠. 아이들이 잘 하더라고요. 올해는 바둑대회를 열어 동네 바둑왕을 뽑아 볼 생각입니다. 청소년리그와 성인리그로 나눠서 운영할 생각인데, 바둑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기제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에는 리그 우승자들의 결승전을 해 바둑왕을 선발할 예정입니다”

어른과 아이들이 하나 되어

  
▲ 우리동네문화복덕방이 추진한 사업 중 하나인 ‘사람책’ 사업. 사람책으로 초청된 요리사가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직업과 경험 등을 이야기해주고 있다.<사진제공·문화복덕방>

대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꼰대’로 생각해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시해 의견을 묵살하는 경우가 많다. 소통의 부재는 관계의 단절을 불러온다. 그러나 문화복덕방 사람책은 어른과 아이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이들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때면, 태도가 좋지 않죠. 원하지 않는 얘기는 들으려하지 않고요. 그런데 원하는 걸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니까 그들의 얘기를 경청합니다. 사람책이 갖고 있는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요. 어른 사람책들도 아이들이 원하는 걸 알고 있고 자신의 말에 집중하니 아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지를 고민하죠”

자연스레 소통하며 하나가 된다. 어른과 아이들이 두터운 관계를 맺기까지에는 동네에 있는 20대 청년들이 큰 역할을 했다. 10여명이 문화복덕방 기획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

  
▲ 우리동네문화복덕방은 9월 23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포럼에서 활동 사례를 소개했다.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는 2011년에 동네 청소년들과 어른들이 함께 만든 공간이다. 가좌동 청소년들의 필요와 어른들의 공감대로 만들어진 ‘느루’는 처음부터 청소년들의 의견과 주도로 만들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 60여명이 ‘청소년 공간 건축학교’에 참여해 공간을 디자인했으며, 매달 청소년 운영위원회를 개최해 ‘느루’의 활동과 계획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한다.

‘느루’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청년들이 되고, ‘느루’가 좋아 모인 청년들이 문화복덕방 활동을 하고 있다. 라정민 씨도 3년 전 ‘느루’에서 ‘이야기책 만들기’ 강사로 참여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느루 자원봉사자들이 문화예술로 동네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이야기책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우리 동네에는 가좌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있는데 인천에서 규모도 크고 잘 유지되고 있는 시장 중 하나죠. 동네 시장의 얘기를 담은 ‘예샘이 시장에 가다’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고, 작년에는 ‘우당탕탕 푸른샘해결단(이하 해결단)’이라는 책을 아이들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해결단에 참가했던 아이들은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해결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였다. 얼마 전 마을잔치를 하는데 해결단 회원들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쓰레기 치우기나 안내, 접수 등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이들 또한 이런 활동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성장한다.

청년들이 살아가는 동네

라 씨는 작년에는 사람책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올해는 사람책을 확장하는 게 목표였다면, 내년에는 청년들이 지역에서 무언가 일을 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세대를 넘나드는 문화복덕방을 만들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워낙 요즘 청년들의 삶 자체가 피폐하잖아요.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죠. 그래도 재밌을 만한 것들을 찾아 계속 시도하고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블루홀(영어: blue hole)은 과거 동굴이나 석회암 동굴과 같은 지형이 어떤 이유로 바다 속으로 수몰되어 얕은 여울에 구멍이 뚫린 듯한 지형이 형성된 것을 뜻한다. 또는 바다 속에서 그 지형을 올려다볼 때의 보이는 경치의 모습을 뜻한다.


블루홀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100~120m나 낮았던 빙하시대에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던 육지가 비와 화학침식을 받고 카르스트 지형이 형성되었다가, 해수면이 상승하여 그대로 바다속에 잠겨버려 형성된것이다.  
그런데, 이런 블루홀은 상상을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꼭 바다에 한 검은 점을 찍어놓은 것처럼, 블랙홀을 상상하게 하는 이 블루홀은, 유네스코에서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이런 블루홀은, 밸리즈, 바하마, 이집트,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있습니다. 그러나, 육지에서 생성된 호수 같은 블루홀은 세노테라고 부른다.

 
그 구조는 수백 킬로미터나 되므로, 다이빙하러 간 다이버들에게는 아름다움을 선사시킬 수 있는 자연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이러한 지형 때문에 해류에 휩쓸리거나 방향을 잃어 사망하는 다이버들도 수도 없이 많.


'그레이트 블루홀'은 벨리즈 해안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블루홀이다. 이 곳은 라이트하우스 리프의 중앙 근처에 있으며, 본토와 벨리즈 시티로부터 70 km (43 mi)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환초지대이다. 구멍은 원의 형태를 띄며 지름 300 m (984 ft)에 깊이 124 m (407 ft)이다.[1] 그레이트 블루홀은 플라이스토세 빙하기 동안 해수면이 매우 낮았을 때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종유석을 분석해보면 153,000년 전과 66,000년 전, 그리고 60,000년 전과 15,000년 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2] 해수면이 다시 상승하자 동굴은 침수되었다.[3] 그레이트 블루홀은 벨리즈 산호초 보호지역에 속해 있으며 유네스코(UNESCO)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스쿠버다이빙으로 인기가 있지만 .. 다이버들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안쪽은 이렇게 생겼다고 하네요..  원의 지름이 100m 정도고 깊이가 130m나 된다고 


위키백과 그레이트블루홀에서

그레이트 블루홀이라는 이름은 영국 다이버이자 작가인 네드(Ned Middleton)가 이 나라에서 6개월을 보낸 후 그레이트 블루홀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이곳의 자연 경관에 반해 그의 저서 《물 밑에서 10년(Ten Years Underwater)》(Immel Publishing 1988, ISBN 0907151434)에서 “호주가 그레이트배리어리프 를 가지자, 벨리즈는 평등하게 그레이트 블루홀을 가졌다.”라 비유했다. 비록 두 장소가 크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동일한 산호초 지형 등 유사한 점이 있어 이런 비유를 했다고 본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다음 저서인 《다이빙 벨리즈(Diving Belize)》에서 더욱 강해졌다.

이웃님들 저는 매일 블루홀을 들여다봅니다너무나아름답고 너무나신비롭기에 저는 이곳 벨리즈에서 물고기잡으면서 땅파서 살고싶습니다 정말 한번쯤 살고싶은 낙원같습니다




중국, 남중국해서 세계 최고 깊이 '블루홀' 발견

깊이 300m로 딘즈 블루홀 보다 앞서 (베이징=연합뉴스) 심재훈 특파원 =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세계에서 가장 깊은 '블루홀(Blue Hole)'을 발견했다. 블루홀은 검푸른 바닷물로 가득 찬 동굴이나 움푹 팬 지형으로, 그동안 바하마의 딘즈 블루홀(깊이 202m)이 가장 깊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23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탐사팀은 최근 남중국해의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사<西沙>군도)에서 깊이 300m에 달하는 블루홀을 찾았다. 이 블루홀은 최근 중국과 베트남에 인접한 파라셀 군도 내에 위치해 있다. 그동안 이 블루홀은 '룽둥(龍洞. 용의 동굴)'으로 알려졌으며 현지인들은 이곳을 남중국해의 '눈'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이 남중국해서 발견한 세계 최고 깊이 블루홀 [신화망 캡처]
중국이 남중국해서 발견한 세계 최고 깊이 블루홀 [신화망 캡처]

탐사팀은 지난해 8월부터 지난 6월까지 수중 탐사 로봇 등 각종 첨단 기기를 투입해 조사한 결과 이 블루홀이 너비 130m, 깊이 300m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이 블루홀 상층부에서 20여 종의 어종과 해양 생물을 발견하는 성과도 거뒀다.


중국 하이난성 산샤시의 쉬즈페이 부시장은 이번 블루홀 발견에 대해 "매우 큰 지리 과학적 발견"이라면서 "지구에 남겨진 자연 유산을 보호할 것"이라고 밝혔다.

블루홀은 빙하기 때 석회암이 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너무 위험해서 경험이 많은 스포츠 다이버들조차도 출입을 금하고 있다.

president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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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성적 활동으로서 문화예술


감성의 힘


문화예술 영역 전반에서 인간의 감성이야말로 억제할 수 없으며 해체할 수 없는 본원적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통해 문화생산 및 비판 능력, 예술적 향수와 비평 능력 등 다양한 문화예술적 유기물이 생성되며 문화예술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독일의 시인 실러에 의하면, 인간이 자연의 힘에 예속된 감각적 단계에서 그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감성적 단계라는 어려운 고비를 넘겨서야 비로소 지적, 윤리적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현존하는 세계의 기초를 '감성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감각이 인간 현실의 확실한 토대라는 데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는 인간의 감성적 활동 전체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계가 감각 세계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감성 안에서 태어나고 감성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본래 '감성적 활동'이란 감각적 세계를 변형시키는 활동 일반을 의미한다. 삶 자체가 감성적 활동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삶의 감성적 활동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행위이다. 그 행위로써 삶은 바꾸는 것이자 바뀐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바꾼다. 감성적 활동으로서 문화예술은 자기 자신을 느끼는 일이자 그 존재의 모든 지점에서 자기 자신을 깨닫는 일이다. 문화예술교육 차원에서 '느끼기'와 '깨닫기'의 감성적 힘은 자기 형성과정의 노력과 관련하여 중요한 부분이 된다.


생물학적, 문화적 몸


고유수용감각은 몸의 경험에 있어 바탕이 되는 중요한 것이다. 물질에 대한 근육감각이나 촉각은 손지식을 형성시킨다.


몸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육의 움직임, 자세, 균형, 접촉에 대한 우리의 감각에 의지한다. 운동선수와 음악가는 동작의 느낌을 상상하고, 물리학자와 미술가는 몸 안에서 전자나 나무의 움직임과 긴장을 감지한다.


음악에서 체험의 감각적 성격은 청각으로 단순화되고 번역되어 작품으로 남게되는 변용과정을 거치게 된다. 피아니스트들은 근육이 음표와 소나타를 기억한다고 말하다. 배우도, 조각가도 몸과 다른 것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요소다.


감성적 체험의 특질


현재 이곳에서의 감성적 체험이 제대로의 경험이라면 활력으로 고양되어 자발적 자기형성에 중요한 체험이 되고도 남는다. 감성적 체험의 특질은 음악에서 두드러진다. “정서의 구조는 음악의 구조와 비슷하다. 음악은 정서가 느끼는 방식으로 소리를 낸다.”(음악학자 판스워스) 세상에 존재하는 감성적 힘에 반응하는 정서에는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체험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 체험들은 개인적인 감정과 감각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와의 활발하고 민첩한 교제를 의미한다. 이때의 감성적 체험은 존재론적 체험을 현재화함으로써 존재에 지속적인 변화를 허락하는 힘의 작용에 대한 경험이다. 이는 인식론적 경험으로서의 미적 체험을 존재론적 체험으로 확장함으로써 그것은 예술의 맹아라고 할 수 있다.


감성적 체험에서 힘의 작용은 초보적인 형식에서조차 미적 경험이라는 유쾌한 지각에 대한 전망을 안고 있다.


존 듀이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형식-그것은 무엇인가가 완벽한 마무리를 성취했을 때 드러나는 궤적의 추상적인 용어인가?”


특히 학습과 관련하여 감성적 체험의 내용적 특질은 재미와 감동 그리고 관심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관심이라는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관심은 어떤 욕구에 의해서 휘몰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능동적인 관심 또는 무엇인가 지향하려는 노력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감성적 체험의 기능적 특질에서 지배적인 관심은 매슬로우가 <존재의 심리학>에서 제안한 감성적 상황에서의 '절정체험'이라는 것에 모아지고 있으며, 더불어 절정체험을 전통 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체험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몬로 비어슬리가 주목한 감성적 체험의 기능적 특질이 제공하는 일곱 가지 효과

1. 긴장을 제거하고 파괴적 충동들을 진전시키는 효과

2. 자아 속에서 야기되는 작은 충동들을 해결하고, 통합 또는 조화의 창조에 도움을 주는 효과

3. 지각과 식별력을 세련화하는 효과

4. 상상력 그리고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는 능력을 개발하는 효과

5. 치료보다 예방으로서 정신 건강에 기여하는 효과

6. 상호 이해와 신뢰를 북돋아주는 효과

7. 인간적인 삶을 위한 이상을 제공하는 효과


2. 문화예술과 교육


문화예술과 자기 생산(형성)


예술의 기원인 시짓기(poiesis)는 인간 사유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짓기의 본능과 건축에의 의지에서 비롯한다. 포이에시스적 예술이론에 따르면, 예술은 기술과 같이 인간의 창작 능력인 동시에 제작하는 능력인 테크네(techne)와 동일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진리로 이끄는 삶의 한 방식으로서의 포이에시스는 '참된 것을 끄집어 앞에 내어놓는 것' 그리고 포이에시스적 삶의 의미란 다름아니라 현실을 의도적으로 뛰어넘고 변형시키는 것, 현실에 없던 새로운 잉여가치를 덧붙이는 것,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와 예술 그리고 자기 생산은 상호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교육이란 객체화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그 존재로 있게 하는 '존재 드러남', '자기 생산성'이라는 원리에서 이해된다.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인간의 힘을 생삭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내면적 활동 상태를 뜻한다.


예술은 표현욕구를 특정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그 과정을 현재화한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자기 이해를 얻게 되므로 이러한 지평에서 문화와 예술이 만나게 된다. 여기서 문화와 예술이 공유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라는 존재론적 지평이며 그 과정이다. 예술은 문화에 대한 체험과 표현을 담고 그것을 재현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문화예술과 존재론적 발달체험


문화예술을 교육영역으로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적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성장과 발달적 관점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세계와 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되어가는 존재론적 발달 성취의 과정, 역동적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영역에서의 문화예술은 인간의 성장과 발달을 도모하는 자기형성과정으로서,특히 삶의 자기 변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발달을 이끌어내는 문화예술교육은 존재론적 체험으로 성취된다. 존재론적 체험을 겪으면서 인간은 왜 사는지,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게 된다. 자연을 변형하고 개조하여 자신의 삶에 맞게 바꾸어나가는 그 이면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지와 의미체험을 바라보게 된다.


예술을 포함하는 광의의 문화는 인간의 존재조건인 것이다. 그런 문화에는 당연히 인간 존재의 자기 실현, 그 존재성이 담겨있다.


인간이 거주하는 실존적 공간을 '장소'(topos, ort, place)라고 부른다. 유독 인간존재만이 시간과 공간에 속한 사이-존재로서 특정한 시공의 '사이' 안에 그때그때 한정된 '장소'에 거주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사람과 물건 사이의 오랜 길들여진 사귐과 마주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성과 역사성을 띤 국지적 공간에서 직접적인 감정적, 정서적 관계의 풍부한 내용을 갖게 된다.


문화적 존재로서 발달적 성향을 지닌 인간은 근본적으로 현실적 세계를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고 그를 향해가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문화는 인간의 정신과 삶의 표현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도록 자기 자신에게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발달적 교육의 관점에서 본 존재론적 문화인 것이다.


문화예술교육과 몸의 발달


다양한 감각이 소통되고 통일되는 것은 순수 지성의 작용이 아니라, 고유한 몸의 종합이며 지각적 종합이다. 이외에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이미 신체의 운동감각적 사고에 대해 강력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운동감각적 사고란 몸의 운동 이미지나 기억된 동작의 측면에서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근래에 들어와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는 저스 <마음의 틀>에서 이와 유사한 운동감각적 사고의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가드너는 “몸은 자신의 지성을 품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생각함으로써 배우지 않고 함으로써 배운다. 즉 배운다는 것은 세계에서 지각하고 행동하는 한 사람의 방식을 변형시키는 '몸 스케마'의 새로운 적응과 이해이다.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우리가 게힘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적 행동은 특수한 언어 게임에서의 규칙들을 그의 '몸 스케마'의 새로운 적응과 이해이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에 의하면 “지속적인 그러나 무의식적인 감각의 흐름이 우리 몸의 동작부위에서 나온다.”라고 한다. 이 감각의 흐름이란 우리가 '제6감' 혹은 비밀의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는 자신의 근육을 살피고, 위치나 긴장상태, 움직임을 끊임없이 재조정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숨어있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각장의 자연구조는 생후 약 4개월경, 지각, 운동 능력이 완전하게 발달함에 따라 유아는 손뻗기와 조작을 통해 사물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유아는 사물이 자리하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며, 바라는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사물을 이용한다.


아동의 고유수용감각은 비고츠키에 따르면, 눈과 손뿐 아니라 말하기의 도움을 받아 발달한다. 실제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고유수용감각이 발달한 아이들은 어떤 것을 배우고 익힐 때 먼저 대상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 대상에 맞게 신체를 숙련시킨다. 그 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신체를 고도로 분화된 방식으로 사용한다. 세계의 의미를 배우는 이런 방법은 모두 몸을 수반한다. 즉 몸의 지각적 능력, 운동 기능, 자세, 표정, 정서와 바람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감각, 몸의 느낌, 촉감 등은 상상력 넘치는 사고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심리학자인 베라 존 스타이너(Vera John Steiner)는 몸을 '사고의 도구'로 보고 있다. 지각은 감관과 홰재적 대상들이 접촉한 결과가 아니라, 지성적 감정적 실천적 활동이자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체는 몸으로 보고 만지고 듣는 육화된 주체이다. 육화된 주체인 우리는 지각의 장 안에서 존재나 현상을 지각하고, 그러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 지각과 함께 산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판 없이는 발전 없다. 비판 없는 성역은 있어서도 안 된다. 우리 교육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판이라는 칼날로 아픔을 느끼더라도 도려내야할 것이 있다면 과감히 결단해야 한다. 교육 사상들은 어느 시대나 있어 왔다. 절대 진리로 군림하는 교육 사상은 없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만능해결사인 교육 사상도 없다.


과거 우리 교육은 행동주의 교육관과 구성주의 교육관으로 점철되어 왔다. 피아제의 인식론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으로 대변되는 단계별 발달교육관을 진리인 것처럼 맹신해 왔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투입-결과라는 기계론적인 입장으로 일관해 왔다. 과거 교육을 담당하는 부처가 '교육인적자원부'였던 적이 있었다. 사람을 자원으로 보는 극히 도구적 관점으로 교육을 생각해 왔다. 부끄러운 과거이다. 모두가 만능해결사라고 생각해 왔던 인식론적 교육관에 지배된 결과였다.


경쟁이 아닌 모두가 함께 하는 교육, 전인적인 발달을 위한 과정을 중요시하는 비고츠키의 교육론은 21세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는 교육 사상이라고 본다.


"발생적 발달의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초등 교육과정은 입시 경쟁적 선행 학습의 식민화에 따른 심각한 발달적 왜곡 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육문제를 총론적으로 다뤄왔던 관행에서 벗어나 초등 교육이라도 해방적 관심에서 교육적 실천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학문 중심 교육과정의 초중등 위계화 체제를 해체해야 한다."(58~59)


수학 도식처럼 단계에 맞는 체제 교육을 탈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전면적 발달을 위해서다. 교육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지적 본성에 따라 얼마든지 또 누구와 함께든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150)


전면적인 발달을 도모하는 학교는 지적인 면만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감각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건강과 생활양식 문제 역시 주목을 받아야 한다. (153)


교육과정은 원래 라틴어 '경주하는 말이 달리는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단위 과정에서 이수해야 할 교과(내용)의 목록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과정은 학교의 지도 아래 학생이 겪는 실제 경험, 문화적 재생산의 도구, 사회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 등으로 다양학 해석된다.(233)


"나는 듣고 잊는다. 나는 보고 기억한다. 나는 참여하고 이해한다" 이 격언은 발달 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사한다.(9)


기존의 심리학은 어린의 발달을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면 비고츠키는 발달의 복잡성을 주장한다. (63) 학생들의 내면적 발달은 공식처럼 진화 단계를 밟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고츠키의 발달 교육 개념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신 분이 한국에서는 이오덕 선생님이라고 하신다.  




"음악이 좋고 사람이 좋아 23년간 버텨냈죠"

신포동 재즈클럽 '버텀라인' 허정선 대표       

2016년 07월 22일 00:05 (금)

▲ 허정선 '버텀라인' 대표

인천 토박이 부평 '음악소녀'
LP 카페 시절 단골손님 인연
친구 대신 맡으며 공연 열어

33살 된 국내 最古 재즈클럽
유명 연주자 즐겨찾는 명소
"늘 순탄치는 않아도 즐거워"


인천에서 음악 하는 멋쟁이들이라면 누구나 거쳐간 재즈클럽 '버텀라인'(Bottom line)이 문 연지 올해로 33주년을 맞았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유명 재즈클럽의 이름을 딴 이곳은 주말이면 재즈 연주가들의 공연과 음악 감상회가 열리고 평일에는 진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마니아들이 모인다.

손님으로 찾았던 버텀라인의 주인이 돼 23년째 운영을 맡고 있는 허정선 대표를 만나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며 아무런 욕심 없이 음악에 대한 애정 하나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음악이 마냥 좋았던 소녀

허정선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다.

인천에서 쭉 살아온 그는 어린 시절을 미군 부대가 있던 부평 2동에서 보냈으며 미국 유니버셜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20대가 되자 문화의 중심지인 신포동에 매일 드나들면서 LP 카페 곳곳을 누볐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버텀라인도 그 시절 매일 찾던 단골 가게 중 하나였다.

"1대 사장님을 거쳐서 제 고등학교 동창이 버텀라인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결혼하면서 미국으로 떠나야 했고 저한테 맡아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시작한 게 어느새 23년이 흘렀네요"

음악 없는 삶을 생각해볼 수 없었던 허 대표에게 사람들과 음악을 듣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은 오랜 꿈이었다. 버텀라인을 맡기 전에 내리교회 근처에서 '소리 창고'라는 LP 카페를 3년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월세, 전기세, 수도세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모를 나이에 막연히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공간을 마련했던 게 신기해요. 직접 페인트칠을 해서 벽을 꾸미고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 막무가내 정신이 지금까지도 있어서 해야겠다 싶으면 무조건하고 보는 경향이 있죠."

그 열정은 버텀라인을 23년간 운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허 대표는 97년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공연을 기획했고 그가 오기 전에는 음악을 틀어주는 LP 카페였던 버텀라인은 이제 유명 재즈 연주자들이 꼭 거쳐가는 재즈클럽이 됐다.

"인천에도 홍대처럼 음악을 듣고 공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공연을 하신 분이 우리나라 재즈 1세대인 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 씨에요. 그분과 13인조 빅밴드가 공연을 펼쳤는데 사람이 꽉 들어찼을 정도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요. 버텀라인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이 공연을 시작으로 당시 재능대학교 재즈음악과 학생들과 인천에서 내노라하는 음악가들이 버텀라인에서 끊임없이 연주를 펼쳤다. 요즘은 유명 재즈 연주가들이 먼저 공연 요청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10월에 열리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프랑스 국민 베이시스트 앙리 텍시 호프(Henri Texier Hpoe)도 버텀라인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외에 유러피안 재즈를 선보이는 띠에리 마이야르 트리오(Thierry Maillard Trio)와 국악평론가 윤중강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하루하루가 버텀라인의 역사

박성건 음악평론가가 집필한 <한국재즈 100년사>에서 버텀라인은 가장 오래된 재즈클럽 중 하나로 소개된다. 1983년 처음 문을 열었고 건물의 역사는 100년이 넘어 가치 있는 근대 건축물로 꼽힌다.

"제가 버텀라인을 인수한 게 1993년도에요. 꾸준히 운영을 하고 있지만 순탄한 건 아니에요. 하루에 손님이 한 팀 넘게 오지 않는 날도 여전히 많고 이 건물을 언젠가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늘 있어요"

허 대표가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은 사람들 때문이다. 신포동과 차이나타운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외부인들이 많이들 온다고 하지만 버텀라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 버텀라인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손님들과 공연을 요청하는 연주자들이 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올해는 33주년이 됐고 내년이면 34주년이지만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버텀라인의 역사에요."

재즈는 겉으로 보기에 자유롭고 즉흥적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나름의 질서와 체계가 잡혀있는 음악이다.

그 틀을 벗어나서는 아름다운 선율이 나올 수 없다. 자유와 질서가 공존하기에 좋은 음악으로 평가된다.

"제 삶도 재즈와 비슷한 것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늘 곁에 두고 살기 때문에 화려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 나름의 기준과 규칙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거예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죠."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인 음악이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지 상상이 안 된다는 허 대표는 버탐라인이 신포동의 역사적 장소로 오래오래 남아주길 바랄 뿐이다.

"얼마 전 미국 맨해튼에 갔었는데 극장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시카고나 오래된 뮤지컬들을 꼭 보고 가요. 버텀라인도 인천에 오면 음악을 듣기 위해 자연스레 찾는 장소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 때는 다른 사람이 버텀라인을 맡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할머니가 돼도 음악을 즐기러 나올 거예요. 아르바이트생으로 써준다면 더 좋겠지만요."


/글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
/사진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사진01> 2012 ⓒ유광식


인천을 안다는 의미, 공간에 스며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다들 의견이 분분하다. 하물며 각자의 몫으로 늘상 숙제가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숙제 하다 만난 곳, 인천 동구 안 만석동 괭이부리말이다. 지도 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인천의 모양 속에서 만석동을 찾아보게 되고 조금씩 거닐게 되었다. 근처 화수·만석부두, 만석동 우체국, 철길, 만석고가, 굴까는 집, 제분공장, 송림변전소, 동일방직, 두산인프라코어 등 큼지막한 구조물들 사이로 쪽방이 닥지닥지 모여 공극을 줄인 모양새로, 낮은 언덕배기 위 빼곡한 허름함에 처음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괭이부리말은 가난한 피난민과 근처 공장노동자가 지붕과 처마까지 쪼개 쓰며 살고 있는 인천의 여러 달동네, 쪽방촌 마을 중 한 곳이다. 군데군데 좁고 깊은 골목 속까지 한 여름, 한 겨울의 모습이 배지 않은 곳이 없다.

한편 아이들과 어르신을 자주 접할 수 있었으며, 잠자리가 선도하는 가을, 길가에 널린 빨간 고추야말로 마음까지 물들이는 새빨간 개운함을 선사한다. 지금까지도 공중화장실이 위치해 있고 화재로 소실된 집도 있으며 굴 까는 천막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곳을 누비는 아이들의 표정만큼은 어둡지 않았던 탓에 공간의 온도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87년 시작된 공부방 역사도 30년이니 어느새 한 세대를 넘겼다. 이 사이 얼마나 많은 굴곡진 사연이 있었을까.

만석동은 오래 전 서울 거주시 모 노래운동단체와 기찻길옆 공부방(기찻길옆 작은학교)의 인연으로 얼떨결에 알게 된 지역이다. 이후에 공부방의 20주년 기념공연(길·동무·꿈 2/ 2007.4.15/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을 보게 되었다. 이리저리 사회전반에 기웃거리며 서성이던 대학교 시절, 몇 군데의 공부방을 접할 수 있었는데 기찻길옆 작은학교는 여느 공부방과는 다소 같은 듯 다르게 느껴졌었다. 매 해 정기공연은 노래와 인형극, 풍물 등 아이들의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재미나게 혹은 조금은 차가이 선보이는 것이었다. 공부방과는 직접적인 연은 잇지 않았으나 공부방이 위치한 만석동을 차분히 기록하는 계기로는 이어졌으니 이것이 인연일까?



< 사진02> 2007 ⓒ유광식


괭이부리말의 정확한 생리는 모르지만 현재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작가의 입장으로서 매 해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설 적에는 가슴이 철썩거린다. 그 길은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좁은데 집 안쪽에 놓이지 못한 가재도구마저 나와 있음이 길이긴 해도 누군가의 삶의 공간이란 생각에 그렇다. 문을 열고 나오는 어르신이 있으면 잠시 멈추기도 해야 하고 굽어진 곳에서는 긴장을 두고 방향을 잡아야 하며 살금살금 시끄럽지 않게도 걸어야 한다. 안쪽 골목에는 비어져 오래된 빈집도 눈에 띈다. 그 실내에는 과거 삶의 진한 투쟁만큼이나 냄새가 시큼하기도 하다. 간혹 새롭게 터를 잡은 고양이 가족이 주인행세를 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빈 이상 건물은 취약해지고 위험해질 것임을 안다. 아이들 주변으로 좋지도 않은 풍경이다.



< 사진03> 2012 ⓒ유광식


<사진04> 2012 ⓒ유광식

2012년 괭이부리말 저층주거지 절반가량이 임대형 보금자리 주택으로 개선되는 사업이 발표되었다. 이후 공사는 급물살을 타고 진행이 되었고 다음해 겨울 지역주민들이 다수 입주·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동구는 옛(가난) 생활체험관(2015.6)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일을 벌이려다 현지 주민과 활동가, 지역 여론에 혼쭐이 나기도 했다. 가난까지 상품화한다는 행태를 주민이 앞장서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례로 사업은 백지화 되었으나 기관장이 사업계획을 진행한 공무원을 칭찬했다는 후일담 기사에 다시 한 번 주무기관은 미움을 받아야 했다. 어느 곳에나 지난 삶의 힘겨운 모습은 수두룩 남아 있다. 힘겨움은 홍보가 아니라 격려가 더 필요할 것이다. 격려의 형태는 다양할 것이고 말이다. 동구 수도국산에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있다. 이곳엔 과거 수도국산 달동네 서민들의 삶의 이야기와 모습들이 재현되어 있으며 지금도 서민들의 평범했지만 끈질긴 삶의 기억을 보존하고 전시하며 교육하고 있다. 또한 아직 더디지만 남구의 토지금고 마을박물관도 눈여겨 볼 곳이다.



                                                  <사진05> 2013 ⓒ유광식

동인천역 남방향 철로변에도 쪽방촌이 한 곳 있다. 작년 이곳의 절반 정도가 철거되고 올해 반듯한 고층(14층) 아파트가 단숨에 솟구쳤다. 당시 중·동구 지역의 전봇대, 가로등에 걸려 나부끼는 현수막 돛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 아파트 광고인 줄은 미처 몰랐다. 동인천역 부근 가장 높은 이 아파트명은 OO행복마을이다. 병들고 가난한 어르신들과 일용노동자들의 작은 삶터가 논의와 대안적 활용의 부재 속에 민간사업자를 끌어들인 나머지 비싼 오피스텔이 들어설 계획에 주민들은 재정착은커녕 힘없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1/2 지역도 말은 못하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을 터이다. 애석하게도 괭이부리말 경우와는 철길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쪽방의 사후 운명이 너무 다르다. 생각해 보면 마을도 행복도 시멘트로 빚어 만드는 시대라는 점이 무척 안타깝고 분노에 피곤하기까지 하다.



                                                    <사진06> 인현동, 2015 ⓒ유광식


우리가 걷는 길은 좁고도 길다고 한다. 가는 도중에 동무 아닌 동무를 만나고 함께 이야기하는 사이 꿈으로 기획된다. 만석동은 누가 봐도 인천의 변두리다. 자주 이슈거리도 되지만 버려짐도 상당하다. 그러나 주민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내왔던 것처럼 끈끈한 공동체 의식으로 무더운 여름 날씨와 혹독한 겨울 기온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지혜를 나눈다. 지켜 본 7년여의 기간 동안 처음 모습은 반쪽이 되었고 이후 남은 반쪽이 어떻게 될런지는 모르겠다. 지난 5월에 잠시 서울의 청계천박물관(기획전시)에 다녀온 적이 있다. 과거 청계천변의 모습과 빈민활동가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박물관 맞은편 청계천 판잣집체험관이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었다. 처음 겉에서 보기에도 때깔 좋은 상품논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음에 괜스레 더운 날씨 탓만 하곤 했다. 굳이 그렇게 조악한 복원격으로 꾸미어 판매상점으로 덧씌우고 있는 상황에 고운 시선을 차마 꺼내 들 수는 없었다. 행여 만석동 괭이부리말도 이런 형태가 되었더라면? 하고 상상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겠지 싶었다.

기찻길옆 작은학교의 정기공연을 2016년 4월에 다시 한 번 찾았다. 공연 장소가 가까운 곳이 아닌 멀리 부평이었지만 뭐 어떠랴. 여전히 삶의 공동체의식을 강조하는 공부방의 운영취지를 아이들 스스로 습득할 수 있게끔 준비된 모습이야말로 감동이었다. 아이들은 공부방에서 삶의 단맛만 맛보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 이면을 살피고 어렵고 고통이 따르는 현장에 직접 찾아가 공부하는 활동이 당분간은 모를지언정 언제인가 자신의 힘겨움을 떠받쳐 위로해주는 시간으로 되돌려질 것이다. 여전히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 사건과 백남기 농민 사건의 경우처럼 이면사회의 인식과 사고는 자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동네도 튼튼해진다.



< 사진07> 2016 ⓒ유광식

<사진08> 2014 ⓒ유광식

언덕배기 따라 사람이 살며 관계를 이루고 협동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분명 갈등도 있었겠고 협력을 약속하며 지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복잡할 것 같은데도 거닐다 보면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어느 정도 마을문화의 무게가 있기에 느껴지는 것일 터이고, 아이들 목소리가 뛰어 다니니 모두가 밝게 살아가는 듯싶다. 만석동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시 상륙지점(Red Beach) 중 한 곳이기도 했다. 그 후 60년도 넘은 오랜 시간동안 대신 어려운 삶들이 진입·정착했고 지금은 그 맛에 웃고 울고 일하는 터전이 되었다. 이웃면 만석비치타운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만석동 괭이부리말이 과거 그리고 지금 우리 삶을 고스란히 비치는 아련하지만 행복한 Beach 로 가꾸어지길 바래어 본다.



                                                      <사진09> 2012 ⓒ유광식


내가 포기한 지점에서 누군가는 시작한다.

22살에 군대가기 전에 수도공사를 따라다녔다.
6개월정도 따라다닌거 같다.
도로나, 아스팔트 중간쯤 땅속으로 수도본관이 지나가는데 우리는 땅을파서 본관에서 수도물을 따내는 일을했다. . ...
새로지은 건물에 수도물을 연결해주는 공사인데 준공에 꼭 필요한 공사라 건물주로부터 대우가 좋았다. (담배를 잘 사준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일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싶었는데 기사아저씨를 빼면 50대 아저씨랑 딸랑 둘이다.
그렇게 6개월동안 아스팔트를 자르고, 오함마로 콩크리트를 깨고, 지겹도록 땅을 팠다.
경기도 땅은 흙이 좋다. 서울땅은 대부분 건축쓰레기가 땅속에 있어서 땅파기가 아주 고약하다.
우리는 참으로 짜장면을 먹었는데 삽질이 얼마나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지 땅을 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거다.
어떤 땅은 정말이지 약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쪽저쪽 다 돌이고 삽이 튕겨져 나온다.
꼬챙이도 들이가지 않고, 땅을 파는게 아니라 땅을 떼어내야되는 땅 그렇게 질긴 땅이있다.
한사람이 삽질을 하다가 지쳐서 나오는게 아니라 머리에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겁이나서 다음삽을 어디로 찔러야될지 마음이 막히는 부분이 생긴다. 그러면 아저씨가 그 좁은 공간으로 들어온다.
내가 포기한지점, 삽을 어디로 찔러야될지 모르겠는 지점에서 아저씨는 다시 시작한다. 담배를 한대 피면서 내가 포기한 지점을 본다.
아저씨는 아저씨 고집대로 또 땅을판다. 그러면서 또 성과도 없이 튕겨져나오는 삽질을 한다.
힘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떨어진다.
이런 땅은 정말 화가난다. 힘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땅팔마음을 떨어뜨리는 땅은 정말 화딱지난다.
우리가 파낸 흙더미 위에서 자연스럽게 짜장면을 올려놓고 먹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우리 짜장면을 보고, 우리가 파다만 땅을 구경한다. 그렇지만 아저씨와 나만 알고있는 이 징그러운 땅에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흥분한 날 아저씨가 말리지만 오함마로 때리고 꼬챙이로 찔러대고, 삽으로 찍는다. 내가, 내마음이 포기한 지점을 찍고, 또 찍는다.
주전자만한 돌맹이가 빠져나오면서 삽이 들어가는 흙이보인다.
그때의 기쁨은 정말 아무나모른다.
그리고 저 깊은 곳에서 삽에 부딪치는 쇠덩어리 소리가 들리면 다 판거다. 밖으로 내가 나오면 아저씨가 담배를 물고 들어간다.
깔깔이를 찾고, 샌들을 채워서 수도본관에 구멍을 뚫는다.
좁은 흙속에서 작업을 마친 아저씨 손은 항상 상처투성이다.
일을 마치면서 밖으로나온 아저씨는 꼭 싸구려 자기담배를 권한다. 친구에게, 전우에게 권하듯이.
독하다. 다섯번빨면 없어지는 싸구려담배지만 받아피운다.
우리는 서로 포기한 지점에서 서로를 위해 싸워준거다.

상처투성이 손에 흉하게 탄 얼굴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한다.
자식들도 부끄러워하는 노가다 인생이다.
강하고 또 강하다. 굵은 근육과 오기가 있다.
흙처럼, 아스팔트처럼 살아간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노가다아저씨들은 모두 이 힘든 노동에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수시로 한계를 만난다.
마음이 막힐때가 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운다.
마음이 포기하는 지점에서 담배를 문다.
이렇게 번돈으로 집에가서 싸운다.
이걸로 어떻게 애들 공부시키냐고.
그러면 또 담배를 문다. 마음이 답답해서 담배를 문다.
더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렇게 일하는 분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며, 쉽게 웃고, 노래부르는걸 좋아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얼마나 사소한것에 서운해하고, 쉽게 우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얼마나 놀고 싶어하는지 쉬고 싶어하는지.


함께 읽어봐야할꺼 같아서 .. 박명균 님의 글을 담았습니다.



‘s 사진이야기 _ 5

해바라기와 여름, 이야기

2016. 7.15() ~ 8.31() / 신포동 <북앤커피> 갤러리룸

문의 010-7389-0857 / rain-o2@hanmail.net

페이스북 www.facebook.com/kang02rain

 

이 전시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매일 오고가는 도원역에서 배다리로 이어지는 창영동 철로변길에 이야기다.

간간히 오가던 2005, 그리고 곧 일상이 되어 지금까지 오고가는 길이다.

기울어진 언덕길 옆에는 인하자원이라는 고물상이 있었고 위험위험한 그 고물상 옆에 허물어진 작은 집터 위에 만들어진 한평공원 <하루, >에 난간과 의자를 만들고 벚나무와 소나무를 심고 작은 화단을 만들어 꽃을 심었다.

파란 하늘과 노란 해바라기, 그 해바라기를 타고 더 높이 올라간 푸른 보라색 나팔꽃과 하얀 달, 그리고 그 둘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전깃줄이 그저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꽃이 지고 씨앗을 맺은 해바라기는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해바라기에 기대 하늘로 올라간 나팔꽃은 철없이 하늘로 하늘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있다.

 

배다리 지역의 십 수 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나의 날들이 가득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꼭 해바라기가 아니어도 좋았다. 어쩌면 달이었을지도 모르고, 나팔꽃, 그 녀석은 거의 늦은 가을 11까지 참 열심히 피기도 한다, -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해바라기였을까?

 

해바라기에 대한 사람들의 감성은 좀 무조건 적인 밝음이거나 무조건적인 호의(好意)’. 꿈이던 사람이던, 사랑이던 어떤 것을 눈을 떼지 않고 지향하는 태도를 해바라기라고도 하고 쌀쌀한 겨울이나 이른 봄에 햇볕받이를 하는 사람들을 해바라기 한다고도 하고 .. 무한 긍정이라던가 무한 밝음에 대해 그런 느낌이다.

 

쑥쑥 자라는 키, 해를 닮은 꽃 모양에 해의 빛을 닮은 노란 꽃잎,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아마도 수백 개의 작은 꽃들이 촘촘히 그리고 참 나란히나란히 줄맞춰 피어있다. 해바라기가 시들어 갈 무렵, 까만색의 수많은 씨앗이 아마도 그 작은 씨앗의 숫자만큼 박혀서 익어간다. - 까맣게 익어가는 걸 보면서 수박씨를 닮았다는 생각을 종종하기도 했다. - 커다란 동그라미에 가득한 넉넉한 씨앗을 보면 기특하달까 장하다는 생각도 들고 .. 누군가 잘라낼 때까지는 참 단단히도 서 있는 줄기며 ..

 

지난해에는 마을사진관 앞에서 그리 크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눈이 내릴 때까지 꽃이 피어서 기특하기도 했고, 지나가는 차에 치여서 꺾어졌음에도 내가 부목을 대어줬더니 기어이 또 잘 살아줬다. 12월 눈이 펑펑 내릴 때 이제는 거둬줘야 할 거 같아서 잘라 한점갤러리에 옮겼다. 그래서 그랬나? 괜스레 애틋하기도 하고 ... 하지만 꽃집에서 산 해바라기는 줄기가 잘 무르고 쉬이 죽어버린다. .. 그렇다는 거고 ..

 

어디나 있을 거 같아 그리 간절하게 갈구해본 적은 없었던 거 같다. 게다가 이 창영동, 배다리 언저리에는 생각보다 많은 해바라기가 피어서 더더욱 그렇기도 할 테고.. 그래도 이 커다랗고 tot노란 꽃잎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높이 있는 그 꽃에 우연이라도 눈이 닿으면 이쁘네.. ’하며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 한 번 건넨다. 하지만 곧 가는 길을 갈 뿐이다.

 

 

언젠가부터 다양한 병증이 도시를 시대를 사람들을 휘감아 흐른다. 남녀노소, 지위고하, 빈부차이를 막론하고 넘쳐나는 병증 -‘스트레스우울감이것들이 개인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끈-관계-을 위협하고 있다. 끊임없이 이 위협을 감당해보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절망보다 허무, 무기력함에 죽거나 미치거나 바보가 되거나 노예가 되거나 ..

 

그래도 그 와중에도 푸른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에 스치우느 별이 보고 싶고, 쭈뼛쭈뻣 대낮에 서성이는 가느란 초승달을 보고 싶고, 무한긍정 무한밝음 무한예쁜 그렇게 믿고 싶은 존재들을 보며 웃어 보고 싶더라.

 

그래서 ~바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무지 더워서 ~여름이다싶기도 했고, 거기에 문득 다른 사람들의 해바라기와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D.J doc’여름이야기도 생각나고, 2013년에 이어 또 뙤약볕 여름 전시다. 왜 사서 고생인거? ..

 

그렇게 나의 다섯 번째 사진이야기_<~바라기~여름, 이야기>가 시작된다.

 

2016711일 월요일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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