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문화제 때 여고생 2명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여대를 나와 로스쿨에 들어간 정소영씨(28·가명)는 모든 게 낯설고 불편하다. “여성이란 걸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있다가 갑자기 남성이 더 많은 집단에 들어오니 목소리를 마음껏 내지 못한다. 여권이 많이 신장됐다고 해도 소수라고 느낀다”고 했다. 그는 ‘검사 힘든데 왜 하려고 해?’ ‘변호사 하기 힘들지 않겠냐’는 말을 듣곤 한다. “남자들에겐 하지 않을 질문이죠. 자기 검열에 빠지곤 해요.”
강은진씨(24·가명)는 대기업 3년차 직장인이다. 강씨는 일상에서 차별을 느낀다. “여자들에겐 중요한 일을 안 시킨다. 같은 팀 남자 후배가 더 인정받는 느낌이다. 그 후배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 회식 때에도 마지막까지 남는다. 퇴사율은 남자들이 더 높은데도 ‘여자들은 뭐라고 하면 운다’느니, ‘그만두면 된다’느니 얘기한다.” 직간접적인 성희롱도 흔하다고 했다.
정부는 기업들에 연 1회 60분 이상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법을 뒀다. “교육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교육 자료는 성희롱 예방보다는 대처에 집중돼 있다. ‘짧은 치마 입으면 타깃이 될 수 있다’ ‘남자 상사와 개인적 시간을 갖지 말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다. 성희롱을 당하면 선배 여직원에게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성차별·불평등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과거보다 많아졌다.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에, 문화와 제도 전반에 공고히 박힌 가부장적·성차별적 사고는 여전히 여성들을 소수자,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내몬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인터넷이나 각종 재현물에는 여성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비하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여자들은 늘 위축돼 있고 눈치 보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고민한다. 실질적·감정적으로 소수자”라고 말한다.
여성이라서 겪는 문제는 공공과 공정, 공평이라는 공화국 핵심 요건에도 어긋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받지 않는다’는 헌법 제11조 속 ‘국민’ 범주에 여성은 온전히 들어 있지 않다. 여성들에게 ‘2016년 대한민국’은 위협과 착취, 투쟁의 공간이다.
■“권력이 모두에게 동등하지 않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는 캐나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가 15명씩 동수인 내각을 출범시켰다. 성별 균형이 화제에 오르자 트뤼도는 “지금은 2015년이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프랑스는 4년 전 내각 절반을 여성으로 임명했고, 이탈리아도 2014년 16명의 장관 중 8명을 여성으로 채웠다. 외무·국방·경제개발·교육·보건 등 요직에 포진했다. 스웨덴(43.6%), 핀란드(42.5%), 아이슬란드(41.3%)도 여성 의원 비율이 절반을 향해 간다. 여성 정치인 비율이 높은 나라는 전반적으로 행복지수와 청렴도, 사회복지 수준이 높다.
대한민국 20대 국회 여성 의원 비율은 17%(300명 중 51명)다. 17개 부처 장관 중 여성은 2명(문화체육관광부와 여성가족부)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 2015’를 보면 한국의 성평등지수는 145개국 중 115위다. 중국(91위)과 인도(108위)는 물론 가나(63위)보다 낮다. 한국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할 때 받는 임금은 남성의 55%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34개국 조사에서도 남녀 임금 격차가 36.7%(2014년 기준)로 가장 높다. OECD 평균은 15.6%다. 한국 남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45분(2009년 기준)으로 조사 대상 OECD 회원국 26곳 중 가장 짧았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227분으로 남성보다 5배 길다. 남녀는 같은 ‘국민’인가?
이나영 교수의 얘기다. “헌법 1조는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데 그 국민 안에 여성은 한 번도 제대로 들어간 적이 없다. 국민은 항상 ‘중산층 이성애자 남성’이다. 더 좁히면 명문 학교를 나온 특정 집단이다. 여성은 늘 소수자, 약자, 주변인으로 존재했다.” 이 교수는 권력관계가 어떻게 차별적 관계를 생산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문단 내 성폭력’ 폭로로 알려진 유명 소설가의 성추행도 권력관계에서 나온 ‘갑질’이었다. 그가 추행한 여성들은 출판사 직원, 방송작가 등 업무 관계에서 약자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다. 그는 “다정함을 표현하고 분위기를 즐겁게 하느라”고 그랬다고 항변한다. 성적 위협은 일상에 퍼져 있다.
가해자들의 욕구는 사회적 지위나 학력과도 무관하다. 여러 ‘명문대’ 남학생들이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동료 여학생을 대상화해 성희롱 발언을 주고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남성 국회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자신의 발언에 웃는 여성 의원에게 “내가 그렇게 좋아?”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던진다.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어떠한 일을 하든 ‘어쨌든 생물학적 여자’라는 시선은 이미 여성혐오사상에 근거한 성차별주의적 의식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여성혐오사상은 여성차별로 이어진다. 이러한 여성혐오나 여성차별은 노골적인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매우 은밀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도 행사되는 것이다.”(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의 페이스북 글)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민주공화국인가
헌법의 민주공화국은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위치에서 차별받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다 같이 행복하게 살자는 뜻을 담고 있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서로를 혐오하며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지난 5월17일 오전 1시20분,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을 거뒀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가해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경찰은 가해자가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입원한 사실을 들어 ‘묻지마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여성혐오 범죄’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강남역 일대에 붙은 피해자 추모 포스트잇 중 일부가 남성혐오 시각을 드러내면서 남녀 간 성대결로 비화됐다.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성우가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를 표방한 페미니즘 사이트 ‘메갈리아’ 티셔츠를 입은 사진으로 항의를 받아 교체된 사건은 혐오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김경희 성신여대 교수의 얘기다. “갈등 해소 방법을 가르치는 게 민주공화국의 핵심이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들면 바로 행동으로 들어간다. 집단행동은 상명하복, 권력지향적 문화에서 나온다. 나와 다르면 내 말을 듣도록 하겠다며 강제적으로 내 의사를 상대방에게 관철하도록 만드는 것이 권력이다.”
■최고지도자가 만든 여성혐오의 낙수효과
사상 첫 여성 대통령 재임 기간 민주공화국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페미니즘도 위협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비판에는 ‘수첩 공주’ ‘여왕 패션’ 같은 생물학적 성을 부각시키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전임 대통령들을 비판할 때 남성성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런 현상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실태가 드러난 후 극대화됐다.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고 최태민 목사에게 의존했고, 정치 입문 후에 최순실씨의 사실상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은 “여성은 주술에 의존하는 나약한 존재” “여성 대통령은 시기상조”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민주공화국’을 기치 중 하나로 내건 민중총궐기(2차) 연단에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강남 아줌마” “병신년” 같은 말이 나왔다. 한국여성민우회는 트위터에 “왜 최순실, 박근혜는 다른 모든 잘못보다 여성이란 점을 부각해 비난받나. 연단 위 여성·청소년·장애인 비하 발언과 그에 박수 치는 이들을 보며 참담함을 느꼈다”는 남슬아씨 발언을 올렸다.
최근 결성한 박하여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은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과거의 대통령들은 남자라서 독재를 하고, 남자라서 4대강을 판 것입니까? 박근혜 대통령 역시 하야해야 하는 이유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국정을 농단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여성민우회는 12일 3차 민중총궐기에 ‘박근혜 퇴진! 여성혐오 퇴장!’을 슬로건으로 걸었다.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집회’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나갔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박근혜 정부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젠더적인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박 대통령을 여왕으로 만들어 조롱하고 풍자하는 과정에서 공화국의 내용을 채워야 할 구체적인 내용들은 사라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미래에 대한 내용은 사라지고 풍자의 쾌락만 남는 것이다. 여성의 권력화에 대한 기대들은 박 대통령에 의해 다 죽고, 오히려 여성 리더십을 정당하게 조롱할 권리가 생겨버렸다. 여성혐오의 낙수효과다.”(권명아 동아대 교수)
■특별취재팀
김종목 이주영 장은교 황경상 김형규 심진용 박광연 이유진 최미랑 최민지 허진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