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만 몰라요, 그네 시소 미끄럼틀 모래밭 없어도 신나는데

오미환 입력 2017.06.10.


[다른 생활 탐구] 17. 놀이터를 놀이터답게

“한국의 놀이터는 어리석음 그 자체다. 왜 어디를 가나 똑같은가. 여름 날씨는 더운데 놀이기구는 왜 다 플라스틱이고 그늘은 왜 없나. 중앙에 비슷비슷한 놀이기구 하나가 떡하니 들어서 있던데, 이런 놀이터는 아이들보다 엄마들을 위한 공간일 뿐이다.”

독일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는 2014년 한국에 처음 와서 놀이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바보 같다’, 심지어 ‘감옥 같다’고 했다. 획일적인 놀이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나왔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파주출판도시 보리출판사 사옥 앞에 생긴 밧줄과 그물 놀이터. 어른들이 이틀간 워크숍을 하면서 직접 만들어 설치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195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산업화ㆍ규격화한 놀이터를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면서 그대로 베낀 결과라고 지적한다. 놀이터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아 온 적정기술과 기술놀이 교육연구가 김성원씨는 “한국의 놀이터는 미국어린이놀이터협회의 로비로 전후 일본 놀이터에 적용되기 시작한 ‘4S’를 그대로 모방했다”고 설명한다. 4S는 그네(Swing), 시소(Seesaw), 미끄럼틀(Slide), 모래밭(Sandbox)을 가리킨다. 한국의 4S놀이터는 1960년대 처음 등장해 지금까지 놀이터의 표준처럼 통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좀 더 창조적이고 개성있는 놀이터를 만들고 있다.


美 놀이터를 日거쳐 그대로 베껴

60년대부터 획일적 놀이터 고착

서구선 사회운동과 맞물려 변화

자연주의 모험놀이터 등 활발

어린이들이 설계 감리 참여한

순천 ‘기적의 놀이터’ 등

최근 우리도 “바꿔보자” 움직임


5월 27, 28일 파주출판도시 보리출판사에서 열린 놀이터 제작 워크숍은 어른 20여 명이 참여해 밧줄과 그물로 놀이터를 만들었다. 야외 데크에 설치한 기둥 구조물에 밧줄을 걸고 그물을 엮어 만든 그네와 정글짐, 나무에 매단 외줄 원반 그네는 놀러 온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김성원씨와 숲밧줄놀이 강사 김창호씨가 이끈 이 워크숍은 숲이 없는 도시 놀이터에 밧줄과 그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터를 제안하고 매듭법 등 필요한 기술과 관련 규정, 놀이기구를 소개했다. 추상적으로 놀이터의 중요성이나 원칙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실현 방안과 기술을 다룬 것이 이번 워크숍의 특징이다.


김성원씨는 “지금 한국에는 놀이 담론만 있고 놀이터와 놀이기구에 대한 담론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놀이와 놀이터, 놀이기구를 충분히 이해하는 전문가나 놀이터 디자이너가 별로 없는 것도 아쉽다”고 덧붙였다. 요즘 국내에서 유행하는 모험놀이터만 해도 ‘위험하지만 안전하게’라는 막연한 원칙만 있고 구체적 실현 기술과 구성 방법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산업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획일적 놀이터는 사회 인프라 분야의 적폐”라고 비판하면서 “시민사회와 예술가들이 참여해 창조적인 놀이터를 만들 수 있도록 안전을 이유로 창의를 막는 행정 관행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을놀이터, 한뼘 놀이터, 게릴라 놀이터 만들기를 사회적 일자리로 만들자”는 제안도 내놨다.

덴마크 아르후스 도서관ㆍ시민센터의 놀이터 중 일부. 이 놀이터를 만든 놀이터 디자인 기업 몬스트룸은 41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목수, 제작자로 이뤄져 있다. www.monstrum.dk

좋은 놀이터를 만들려면 조경 전문가, 건축가, 디자이너, 어린이, 어린이 전문가, 놀이터 전문가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덴마크의 놀이터 디자인 기업 몬스트룸은 41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목수, 제작자들이 함께한다. 몬스트룸이 만드는 놀이터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고, 아이들에게 상상과 도전을 통해 영감을 불어넣는 것을 가장 중시한다.


60년 전 4S시대에 멈춘 놀이터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서울문화재단이 시작한 ‘문화가 있는 놀이터’는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놀이터를 아이와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놀이터 디자인를 공모해 놀이터 모델을 개발하고 놀이기구를 비롯한 놀이터 외형을 바꾸고 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기업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협력한 이 실험은 놀이터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퍼뜨리는 씨앗이 됐다. 낡고 오래된 놀이터 300개를 리모델링한 서울시의 ‘상상어린이공원’ 프로젝트, LH공사의 친환경 놀이터 리모델링, 환경부 사업인 생태놀이터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나타난 이런 시도는 놀이터 디자인이 어린이의 정서를 고려해 다양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주로 형태에 치중하는 한계도 있다. 최근에는 생태, 친환경, 공동체, 주민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지자체의 놀이터 사업 중 요즘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순천의 기적의 놀이터다. 어린이들이 설계와 감리에 참여하고 전문가와 행정이 협력해 만드는 기적의 놀이터는 지난해 처음 선보였고 올해 5월 두 번째가 개장했다. 2020년까지 10개로 늘릴 계획이다. 틀에 박힌 붕어빵 놀이기구가 없고, 언덕과 비탈 같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스스로 몸을 돌보며 ‘건강한 위험’을 마주치는 놀이터를 지향하고 있다. 수원시도 올해부터 어린이가 직접 만드는 놀이터 사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디자인하는 이런 놀이터를 올해 5개 만들 계획이다.

6월 3일 서울 하자센터에 놀러온 아이들이 종이 상자로 만든 터널. 놀이기구가 있어야만 놀이터는 아니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가 2015년 시작한 ‘움직이는 창의놀이터’는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을 하다가 놀이의 중요성을 절감한 작가들의 놀이터와 놀이 제안 활동이다. 하루 동안 생겼다 사라지는 이 반짝놀이터는 그동안 시민청, 서울광장, 서울혁신파크에서 선보였고, 올해는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에서 ‘놀이터가 미끄덩’이라는 이름으로 판을 벌였다. 잔디밭 비탈에서 물에 젖은 비닐 미끄럼 타기, 깡통 신발 신고 걷기, 커다란 고무통에 쑥 들어가 데굴데굴 굴러가기 등 여느 놀이터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미끄덩 놀이터에서 펼쳐졌다.


놀이터는 자연이 사라진 산업도시의 산물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놀이터가 따로 없었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놀았고 자연은 가장 훌륭한 놀이터였다. 산업화로 집과 일터가 분리되면서 어른들이 일하러 간 사이 방치된 채 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다치는 사고가 많아지자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게 놀이터다.

올해 어린이날 어린이대공원 팝업놀이터에 등장한 고무통 놀이. 데굴데굴 굴리면 빙글빙글 돈다.

서구에서 놀이터의 역사는 160년쯤 됐다. 놀이터의 변화는 사회운동과 맞물려 있다. 예컨대 전후 등장한 숲놀이터의 뿌리는1930년대 자연주의 놀이 운동이다. 1943년 나치 치하 덴마크 코펜하겐에 처음 나타난 모험놀이터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68혁명의 열기를 타고 전 유럽에 퍼졌다. 놀이터 구성, 놀이기구 제작과 설치, 놀이 선택권까지 전부 아이들에게 맡기는 게 모험놀이터의 본래 모습이다. 이런 맥락과 정신은 빠진 채 어른들이 만들어서 제공하는 체험 공간을 과연 모험놀이터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네덜란드 흐로닝엔의 목수 축제에서는 250명의 10~15세 아이들이 톱과 망치, 목재 팔레트로 나흘 만에 모험 공원과 아지트를 만들었다. ‘플레이파크’로 불리는 일본의 모험놀이터가 무허가촌이나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것도 완전한 자유의 결과다. 거기서 아이들은 불 피우고 구덩이 파고 나무에 오르고 기지를 만들고 댐을 짓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논다. 플레이파크는 1979년 도쿄 하네기공원에 처음 생긴 이래 일본 전역에 모험놀이터 만들기 시민단체가 400개를 헤아릴 만큼 널리 퍼졌다.


건축가, 예술가, 교육자 등이 참여해 전후 다양한 발상과 시도가 넘치던 세계의 놀이터 디자인은 1980년대 들어 위기를 맞는다. 안전 관련 법과 규제는 놀이터 시공업자와 놀이기구 업자들을 위한 표준이 되어 놀이기구의 획일화로 나타났다. 2000년대 들어 상업화한 놀이터에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과 예술가들이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다. 잘 놀아야 잘 자란다. 아이들은 놀면서 공간을 탐색하고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른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요즘 한국 아이들은 놀 시간도 장소도 함께 놀 친구도 없다. 아무 목적 없는 즐거움 자체여야 할 놀이를 창의력 발달에 중요하다며 생산성을 따지고, 놀이 체험 프로그램에 보내고, 키즈카페 같은 상업 공간에서 돈 내고 소비하게 하는 어른들의 강박은 놀이라는 ‘알리바이’를 구성할 뿐이다. 놀이터도 마찬가지다. 어른들 생각대로 만든 ‘알리바이 놀이터’가 많다. 이제는 놀이터다운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돌려줄 때다.

글ㆍ사진=오미환기자 mhoh@hankookilbo.com(mailto:mhoh@hankookilbo.com)



인천화도진도서관 강의노트 2016.11.01

 

죽산 조봉암과 근현대사

 

1.죽산 조봉암은 누구인가

1)한국 근현대사의 풍운아 - 1899년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한미한 농가 출생 - 보통학교 졸업 - 군청 사환, 임시 고원, 대서소 보조원 YMCA 중학부세이소쿠영어학교주오대. 독서와 토론 - 진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 뛰어난 강연술, 그리고 탁월한 사회기(司會技)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

 

2)독립운동가, 건국공로자 = 강화 31만세 옥살이 -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 최선의 길 판단 - 조선공산당 창당주역 - 상하이 망명 투쟁 중 체포당해 7년간 복역 - 815 광복 후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입안

 

3)세계 최고수준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 농민들에 희망 안겨줘 혁명포기 - 나라 전체가 공산화 막는 원인 -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 자녀교육 집중 - 뒷날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

 

4)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지내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차점 낙선 거물 정치인- 젊은 날 조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 전향 뒤 원죄 -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 국가변란과 간첩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 -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 현대사의 축소판

 

5)1959731 오전 11시 서울형무소 - 아침에 따님과 조카 면회거부 발길 돌려 - 바로 전날 오후 재재심 기각 - 1030- 마지막 술한잔도 거부당하고 처형 - 청중 한 분이 낭독

 

2.죽산 조봉암의 생애 요약

1)출생과 소년시절

*강화정신--고려 때 삼별초 저항-조선시대 병자호란 저항-조선말기 병인양요 운요호사건 신미양요-이동휘 진위대장과 잠두교회-1907년 진위대원 봉기-군청 뒤의 견자산 진위대 진지 보창학교

*1889년 강화에서 출생

*총명하나 공부 안 하는 아이였으나 학급회 토론과 주산에 탁월

*유찬식 조광원 조구원 정경창과 죽마고우로 교유(갈홍기는 나이 차가 많음)

*잠두교회에 나감.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군청사환 임시고원으로 일함

 

2)31만세운동과 청년시절

*읍내거리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다가 김이옥을 만남-6천명 모인 31만세운동에 참가 구속

*혹독한 고문당하고 서대문감옥에 갇힘--이가순과 민족적 각성

*YMCA 중학부에 다님--이상재 선생--동급생 인천 박남칠을 만남

*대동단사건으로 다시 평양경찰서에 구속--21.7 석방 후 일본 유학길

*4명의 친구와 동숙 엿장수 고학 세이소쿠영어학교 주오대학 정경과 김찬의 영향으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서적 탐닉 독서와 토론에 고학생동우회와 흑도회 가명을 朴鐵丸으로

*1922.8 귀국해서 청년논객으로 등장 22.11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출국 모스크바 담판에 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폐결핵으로 중퇴 귀국

3)조선공산당(조공) 창당과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

*코민테른이 조공 창당 예비작업으로 김재봉과 김찬 침투시킴--조봉암의 가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상하이 트로이카의 석방 합류 급진전-신흥청년동맹 전국순회강연 선풍적 인기-조선일보 기자-최고의 논객-인천에서의 결산강연 24.4.19 -사회운동 후배 김조이와 결혼

*1925.4.17. 조공 창당(1차공산당/김재봉당) - 승인 얻으려 밀사로 모스크바행

*임무 완수하고 공산대학 실링 21명 받아냄--아우 조용암 아내 김조이 소년시절 친구 정경창

*조공1차당 붕괴 상하이에서 투쟁(여운형이 죽산의 멘토)--25.5 만주 밀행 조공만주총국 조직--610만세사건 주도--2차당 붕괴 25.11

*27.1 사랑하면서도 헤어졌던 김이옥이 상하이로 와서 동거 딸 호정을 낳음 28.9--동지들의 비난 경제적 곤경 위상 약화됨--공금 전용 시비--정윤교 사건--이 무렵에 양이섭을 수하에 둠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윤봉길 의거--안창호 여운형 현정건 피체, 양이섭 피체, 반제동맹 주도--32.12 체포되어 압송--7년 징역 선고 신의주형무소 수감--김이옥 귀국 뒤 죽음--딸은 친척에 의해 인천으로

*전향 회유 정책 1년 감형 출옥 39.7

 

4)출옥 후 인천 정착과 유휴의 세월

*친척 조준묵과 YMCA 시절 동급생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 이승엽 등 미곡상 업계 인물들 인연, 부자가 된 정수근

*박남칠 등이 비강업조합 만들어줌--사무실은 서경정(내동) 건어물 거리에

*김조이와 재결합 부평으 셋집

*처가식구들이 인천으로 옴--처남들이 사업 도와줌--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

*긴 유휴기간을 보냄-조공 조직과 멀어지고

*일제와 묵시적 타협선--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두 가지--흥아신춘 광고와 국방헌금 사건

*45.1 결국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

 

5)광복 후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영광과 굴레

*45.8.15 여운형이 필동 헌병대 감방문 열어줌--내가 건준 만드니 인천을 장악하라--석방되어 인천으로

*집앞에 기다리는 청년들과 보안대 조직 치안장악 8.16 --건준 조직 8.18

*부활된 조공 동지들의 거부로 소외됨

*인천 민전을 조직, 그러나 박헌영이 비난 반조운동 충고와 자기반성 서신 CIC에 압수당함

*결국 공산당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의 공작으로 연행 전향성명 내고 공산당을 떠남 46.6.23--<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전국을 크게 흔듦

*우파와 결합 단독정부안 받아들임

*48.5 제헌의회 출마 당선--국회로 가서 무소속 그룹 통합 통합 통합 무소속 의원 85명의 대표로 떠오름--헌법기초위원이 됨--평등지권 주장 발언 이승만이 주목

*48.7. 초대농림부장관-농지개혁법 주도--신속한 토지 균등성 확보성공--농민들 장악

*국회부의장 탁월한 사회 솜씨--625전쟁으로 국회문서 피난 아내 납북

*부산임시수도에서 발췌개헌안 협조--이승만 한계 드러냄

*52.8.5 2대대통령 출마 70만표

*그후 야인이 되어 도정궁 칩거--호헌동지회의 요청으로 재등장

*55.12 진보당 구상하며 떠오름--서상일과 경쟁, 신익희와 단일후보 협상중 신익희 급서 단독후보 216만표 획득 56.5.15

*56.11진보당 창당 -- 여러차례 위기--장택상 벼룩에 굴레를 씌울 사람인데

*58.1 결국 서울시경 TF팀에 의해 함정에 걸려듦--양이섭이준 돈이 북한 공작금이라고--1심 인정하지 않아 52심 사형 대법원 파기자판 사형선고

*조호정의 탄원서

*죽산의 유언--사형당해도 애국심은 변합없어

*59.7.31 재심기각 17시간만에 처형

*총독부령 120호와 장례식과 비문 없는 비석

*왜 처형당했는가--분단을 정권연장에 이용

*미국의 태도--양다리 걸치기

 

6)53년만에 무죄선고 햇볕으로

*05.2.5 과거사 정리 진실화해위원회 설치--05.11 위원회 재심권유

*12. 11.1 대법원 무죄선고

*네 자녀들 형극의 길--외아들 규호가 걸어온 길/조호정 여사가 걸어온 길

 

 

3.[조봉암평전]에서 넓히려 한 지평

1)출생지 등

*2012년 가을 조사위원회 구성 강화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혹은 남산대로 정해진 과정

*김이옥의 호적 찾아냄 김이옥의 야학과 여성 운동

*동생 조용암의 존재 드러냄

 

2)인천 현대사 확충

*강화독립투쟁을 한국 독립운동사와 연결-조광원 유찬식 조구원 조용암 김이옥 부각시키기

*인천현대사를 한국사회주의운동사 맥락과 연결

*죽산이 일제강점기 어떻게 미곡상업계 인물들과 교유했는가

*광복 후 어떻게 전향을 하고 어떻게 조직해서 떠올랐는가 -- 인천의 명망가 신태범 박사 -- 재정후원자들 심계택 김수현 함효영 배인철 이필상 등

*어떻게 판세를 역전해 당선되었는가--하상훈, 이성민, 김성국, 임홍제와 겨뤄

 

3)인간적 풍모

*세 따님과 아드님에게서 들은 인간적 풍모--영화

*그를 사랑한 네 여성 이야기

 

4.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1)흥아신춘 광고와 휼병금 문제와 국가유공 수훈의 유보

2)419당시 김일성 주석의 발언을 기록한 푸자노프의 저널 공개

3)새얼재단의 동상건립운동과 맹목적인 안티조봉암 인사들

 

4. 실현하지 못한 죽산의 꿈 평등과 정의의 사회

1)죽산이 추구한 진보의 개념

<창당대회 개회사>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발기취지문> 우리는 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 강령>

(1)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종합적인 연차 경제계획

(3)민주우방과 제휴 민주세력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4)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5)노동자 권리 보장,

죽산이 처음 사용한 진보의 진정한 의미==책임정치 - 수탈없는 정의로운 경제 - 평화통일 흔히 3가지를 말하지만 강령에는 교육도 있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반세기 동안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금 고스란히 우리 정치의 주요담론이 되어 있다 - 놀라운 선견성 -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5. 죽산이 안았던 원제와 숙명의 고리

1)조공 창당 멤버,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이 인정한 핵심 광복 후 전향 결국 조공 창당 멤버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 막혀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본인의 인생은 모순 속에 함몰

2)3대대통령 선거 216만표 농지개혁의 결과 농민들의 지지 +무력 북진통일 독재 거부 민심 + 새로운 정치 이념 제시 충분한 정당성

3)남한 정권의 실력자이면서 제3세계, 사회민주주의 추구 공산당이었다는 과거를 원죄처럼 뒤집어 씌워 사사건건 빨갱이로 몰려 장택상의 벼룩의 굴레론 그러나 결국 서울시경의 정권의 함정에 빠져 쓰러져 분단모순의 상황 민중은 속으로만 울어

4)남북의 첨예한 대립 속에 정권은 분단모순을 이용 - 죽산에 대한 사법살인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50년이 걸림

5)올림픽, 월드컵 개최 세계 10위권 경제 - 소련붕괴 동유럽 블록 붕괴 국가의 자신감 진실화해위원회 발족 대법원 재심 무죄선고 국가 양심과 國格 회복

6)그러나 독립유공 서훈은 유보되고 있고 아직도 남은 맹목적인 안티 조봉암 그룹

 

6. 죽산이 뿌린 씨앗과 오늘

1)죽산의 진보와 현재 한국의 진보

*국가 발전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의 날개가 움직여야 - 그러나 한국 진보는 분단모순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 공산주의는 용납 안 되고 제3의 길이 가능한데 백범 김구와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성숙 박건웅 등 설 자리 잃어 -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나라 갈망 - 분단 모순 속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죽산은 제3의 길 신념대로 밀고가다가 쓰러짐 - 타협과 포용과 관용이 있었다 해방 조국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 - 그런데도 간첩으로 몰려 죽어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지켜보기 안타깝다 - 죽산과 함께 했던 늙은 진보당원들 - “죽산과 우리의 진보와 오늘의 진보는 다르다/임정치 경제민주화 평화통일이었다./ 오늘의 진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말로만 하는 입 진보다

*오늘의 진보 국민의 지지 10%도 안돼. <한겨레> 서평 - ‘넘사벽이다’ - 왜 그런가? - 현실정치를 무조건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고 냉소적이다 - 죽산처럼 온 몸으로 뛰어들어 대안세력으로서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데 입으로만 한다 - 종북 진보를 자처한다 - 변증법에서 말하는 진정성을 갖고 민중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2)죽산이 남긴 씨앗 키우기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잘 사는 나라 - 남북의 대회로써 평화통일을 이루기 - 네덜란드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국가유공 수훈의 관철 - 진정한 복권은 국가양심의 회복

 

 

#낭독텍스트 -죽산의 최후 (이원규, [조봉암평전], 2013, 한길사)

그 날, 죽산은 아침부터 감방에서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독서를 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길은 밀도가 깊은 철학서적에 푹 빠지는 것이 제일이었다. 아침에 창가로 와서 관식에 있는 콩알 몇 개를 얻어먹고 날아갔던 산비둘기가 이내 다시 돌아와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울었다.

오전 1030, 간수부장과 간수 한 사람이 와서 감방 문을 열었다. 그들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죽산은 처형이구나 생각했다. 그 순간 간수부장이 말했다.

선생님, 가시지요. 집행입니다.”

죽산은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막 태어났을 때의 인간처럼 머릿속이 순수하게 깨끗해지며 내가 착하게 살았는가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한번도 안 입고 아껴둔 새 모시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산뜻하게 빗어 넘기고 하얀색 새 고무신을 신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내밀어 형무관이 내미는 수갑과 포승을 받았다. 곧바로 옥사를 빠져나와 교수형을 집행하는 사형장을 향해 걸었다. 한여름 땡볕이 내려쬐는데 통행로 옆에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는 꽃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도 꽃이 피는군. 그런데 향기가 없어.”

15평 쯤 되는 목조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곳, 그러나 그곳이 죽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그 곁을 지나는 순간 죽산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60년 평생을 돌아보기에도 부족할 만큼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을 것을 알았는데도 왜 그걸 안 했을까. 국회 본회의 사회를 보던 순간, 대학생 교복을 입은 채 엿보따리를 들고 엿을 팔러 다니던 도쿄 거리, 고향 강화 염하의 칙칙한 바닷물, 농지개혁법을 기초하는 부하직원들을 격려하는 순간들이 마치 환등기 사진이 바뀌듯 바뀌어갔다. 왜 추억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환하게 웃는 큰딸 호정, 그리고 어린 세 자식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있어라. 아들딸들아. 형무관들이 가볍게 등을 밀어 그는 목조건물로 들어섰다.

닫아놓은 커튼 사이로 올가미가 보이는데 반대편에는 십여 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고 검사, 형무소장, 보안과장, 목사, 형무관들이 앉아 있었다.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다.

본적 인천시 도원동 12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충현동 산45번지, 성명 조봉암, 나이 육십일 세, 맞습니까.”

. 맞습니다.”

다음은 인상(人相)조사였다. 신장, 체중, 얼굴빛, 머리숱,쉼표* 전체적 체형 등을 확인하는 절차, 형무관은 가장 분명한 인상인 마디가 잘라져 없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확인했다.

임석검사가 집행을 선언하자 집행관이 다가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

죽산은 곧 숨이 끊어질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골고루 잘 살려고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죄를 짓고 가니 미안한 뿐이오.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느냐 물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곧바로 교수대로 옮겨졌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몸 전체에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죽산은 임석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부탁했다.

목사는 성경을 펴들고 누가복음23장을 읽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집행관 중의 하나였던 고중렬(高重烈) 교도관은 20052신동아인터뷰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윽고 두 손과 무릎, 두 발이 포승줄에 묶인 조봉암 선생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한 교도관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 밧줄에 매달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숨이 끊어졌지만 30분도 넘게 매달아뒀다.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죽산 조봉암은 간첩 누명을 쓰고 이렇듯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나라 헌정사상 첫 사법살인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1895년 여성전용예배당 건축기념사진-한국 최초의 자립예배당(우각로)

 

1918년 영화여학교 헤스 교장 송별기념사진

 

1920년대 창영초등학교 건물

 

1923년 영화여자보통학교 개교식 사진

  

1939년 인천지방 교역자 기도회 기념사진(갬블의 집)

 

1938년 창영교회 예배당 착공기념사진

 

1890년대 우각로 일대 전경사진

 

경인철도개통식

 

기공식

 

 

 

인천 ‘배다리-우각로’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성

 


                                                         이성진

1, 인천 ‘배다리-우각로’ 문화 공간이 갖는 의미성과 현실 문제

 


인천의 근대역사는 ‘개항장’중심의 역사만 있고 ‘개항장’ 밖(변두리)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천이란 도시가 개항장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개항장은 중심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인천의 전통 구심지(관교동)는 개항의 위력 앞에 그 위상을 잃어 버렸다.

1899년 11월 개통한 제물포-노량진 간의 경인철도는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하도록 만들었다. 철도는 전통 도시들을 해체하거나 무력화하는 동시에 식민도시를 개발하는데 아주 유효한 것이었다. 식민지배에 방해가 되는 전통도시를 해체하고 일제가 개발한 식민도시가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였다. 인천도 마찬가지였다. 철도를 중심으로 인천의 문화와 역사가 재편되는 진통을 겪었다. 다시 말하면 부평도호부를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권은 부평역을 중심으로 새로 형성된 공업단지와 상업지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문학산 아래 인천도호부는 인천역, 축현역을 중심으로 하는 개항장에 그 자리를 빼앗겼다. 인천은 경인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역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이식문화 지역(중구 북성동, 관동, 항동, 송월동, 중앙동, 송학동, 신생동), 이식문화와 전통문화 공존지역(신포동, 용동, 내동, 경동, 전동)이 형성되었고, 북부지역은 조선인 이주민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으로 비교적 전통문화가 온존해 있는 변두리 문화지역(금곡동, 창영동, 송림동, 화수동, 만석동)이 형성되었다.

현재 인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훼손된 인천 근대 주류문화였던 개항장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자장면의 원조 공화춘 복원사업, 일본 지계의 일본인 가옥 복원, 인천근대건축전시관, 만국공원 복원 사업 등으로 추진하였거나 계획을 하고 있다. 중국인거리의 공자상 건립, 중국인 거리 입구의 패루, 북성동 동사무소 건축을 비롯하여 최근 중구청 앞 일본지계의 일본인 가옥과 같은 사이비 이식문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데 반해 한쪽으로 청라지구경제자육구역과 송도신도시를 연결하는 산업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인천 근대 변두리문화의 중심지이자 아직도 인천 근대 변두리문화의 흔적이 온존해 있는 ‘배다리-우각로’를 마구 훼손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배다리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배다리는 배다리’라고 말한다. 배다리라는 지명 자체가 자연스럽다. 배다리 시장 입구와 송현초등학교 일대까지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있어 이곳을 자연스럽게 ‘배다리’라고 불렀다. 배다리 지명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배다리 문화도 자연스럽다. 배다리 시장도 일제 때 인천으로 일자리를 찾아 온 조선인 노동자들에 의해 형성 된 공간이다. 한국 전쟁 후 피난민들이 고작 옷가지와 양은솥, 과일 따위 등을 내다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확장되었다. 또한 배다리 헌책방거리도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서민들이 책을 팔고 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 배다리-우각로 도로를 살펴보면 배다리-우각로의 ‘자연스러움’의 백미를 만끽할 수 있다. 최초의 경인도로인 ‘배다리-우각로’는 도시의 직선 도로에 맛들인 우리에게 옛 길의 맛스럼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시작하여 알렌별장(현 예루살렘교회) 앞길까지 우각리(쇠뿔고개)의 특성인 쇠뿔 모양이 그대로 살린 도로이다. 그리고 ‘배다리-우각로’를 걷다가 옆길로 들어가면 바로 골목길이다. 구불구불 미로처럼 복잡하지만 결국 한 길에서 만나는 한국 전통 골목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배다리-우각로’는 인위성보다는 자연성이 그대로 배어있는 곳이다. 이곳을 다녀보면 회색 콘크리트로 도배되어 있는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정겨움과 은은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조차도 ‘이상한 동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면 주사가 심한 사람이 이곳에 이사와 매일 술을 마시고 온 동네를 다니며 주사를 부렸다고 한다. 1년 후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집에 들어와서도 조용히 잠을 청할 정도로 변했다고 한다. 이것은 ‘배다리-우각로’ 문화가 갖는 동네의 개방성과 연결성에 연유한다. 그것이 바로 ‘배다리-우각리’가 살아있는 동네임을 말해 준다.

 이런 ‘배다리-우각로’ 살아있는 동네를 송도신도시-청라경제특구 산업도로가 가로질러 잘려나게 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개항장 중심의 역사에 함몰되어 있어 이곳의 사라진 이식문화를 복원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한 쪽에서는 인천 근대 전통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배다리-우각로’지역을 훼손하는 계획을 거침없이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수인선의 사례를 통해서 10년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 손익만 추구하여 폐쇄하였다가 다시 몇 수 십배의 비용을 들여 복원하는 우를 범하였듯이 ‘배다리-우각로’에서도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2. 인천 근대 역사 공간으로서 ‘배다리-우각로’

 


1) 인천 근대교육, 3.1만세운동 산실 ‘배다리-우각로’

 


배다리-우각로는 인천 근대교육의 산실로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인 영화초등학교와 인천 최초의 공립초등학교인 창영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영화초등학교는 존스선교사 부부가 1892년 4월에 세운 매일학교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초등교육기관이다. 남녀학교가 따로 운영하다가 1970년 남학교인 영화국민학교가 폐교되면서 여학교인 샛별초등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영화초등학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화초등학교가 배출한 인물은 한국 최초의 여대생 김애리시, 최초의 여성박사 김활란, 이화학당 이사장 서은숙, 이화여대 사범대학장 김애마, 이화여대 음대학장 김영의. 영화배우 황정순,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등이 있다. 또한 1916년 영화초등학교 안에 인천 최초로 인천지역 조선아동 교육을 위한 영화유치원을 개원하여 인천 지역민에게 유아교육에 관한 관심과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11년 9월 건축한 존스기념관은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성을 인정받고 있다.

1904년 한말 애국지사 정재홍이 우각리에 천기의숙(인명의숙 전신)을 설립하였다. 인천 신상협회․미상협회 등을 비롯한 인천지역 유력 사업가들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모금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또한 학부에서 사립학교 대신 공립학교 설립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는 의미로 ‘의무학교’ 설립도 추진하였다. 지역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통하여 의무학교를 크게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7년 조선 아동을 위한 인천 최초의 공립초등교육기관인 창영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1919년 3월6일 창영초등학교 3 ․ 4학년이 주축이 되어 동맹휴업을 하여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하고 4일간 등교를 거부하였다. 일본 경찰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만세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교직원에게 정보보고를 요구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월7일부터 인천지역에서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자 이에 대한 항의로 3월8일 밤 9시 창영초등학교에 4명의 학생(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이 나타난 학교 2층에 올라가 전화선을 자르고 전화기를 박살냈다. 이 일로 김진명은 1년6개월, 이만용과 박철준은 태형 90대, 손창신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창영초등학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이후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학생과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 개항장 주변 조선인상점의 철시항의.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창영초등학교는 인천지역의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학교로 발전하였다. 한국 미술사학자 고유섭, 대법원장 조진만,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 국회 부의장 김은하, 좌익운동가인 이승엽 등이 있다. 현재 1921년 건축한 본관 교사는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성을 보존하고 있다.

 


2)한국철도의 발원지 ‘우각역’

 


1899년 제물포-노량진간 경인선이 개통으로 한국 근대 철도가 시작되었다. 1897년 3월 미국인 모오스가 구한국 정부로부터 경인선철도 부설권을 따내 경인철도 기공식을 우각리에서

가졌다. 2년 6개월이 지난 후 개항의 최후 상징인 기차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350명의 노동자를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기술문제로 인하여 공사 진척은 지연되고 자본력이 없는 모오스는 결국 일본인에게 100만 달러에  매각하였다. 원래 노선인 우각역을 거쳐 독각다리(숭의로타리 서쪽 부근)를 경유하여 사동(인천여상 남쪽)에 종착역을 세우는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지주들의 강력한 반발로 우각역(현 도원역)을 거쳐 축현역(현 동인천역)을 지나서 종착역인 하인천역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도원역 근처 근린공원에 한국철도의 시원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다.

3)한국기독교 신학의 근원지 ‘에즈베리’ 예배당

 


‘배다리-우각로’는 한국 기독교 신학의 근원지이다. 1897년 미북감리회 선교사 조원시(존스)는 한국 서지방(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연안 등)선교를 위한 선교기지를 세웠다. 1895년 멕시코 은달러로 600달러를 들어 우각리 38번지와 42번지 일대를 매수하였고 1897년 7월  뉴욕주 감리교 감독인 휴즈목사의 재정지원을 받아 벽돌조 1층 건물인 에즈베리 목사관을 건축하였다. 에즈베리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러목사의 지시로 미국 파송된 최초의 감리교선교사이다. 선교사 조원시는 미국 최초로 감리교를 선교한 에즈베리 목사처럼 기독교의 불모지인 한국 서지방을 선교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명명이었다. 그 이전에는 한국최초의 자립예배당이 세워진 곳이다. 에즈베리 목사관을 통해서 인천, 강화, 황해도 연안, 남양, 부평, 부천, 영종 등지로 교세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후 남녀선교사 기숙사를 우각리 40, 42번지 일대에 건축하여 미국인 선교사 숙소 뿐만 아니라 인천, 부평, 부천, 연안, 강화, 남양 등 도서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이곳의 성경교육을 통해 각 지역의 선교를 확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우각리 에즈베리 선교기지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00년 우각리에서 한국최초의 신학월간지인 ‘신학월보’가 발행되었다는 것이다. 발행인은 조원시로 순한글로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신학 지식과 종교론을 소개한 신학잡지였다. 서울 냉골에 협성신학교가 세워지기 전 한국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정립하였던 역사적 공간이다.

 


4)인천노동운동의 산실 ‘배다리-우각로

 


인천은 일제가 경제적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먼저 일본인 자본가들이 들어와 공장을 세운 곳이다. 조선인 노동자를 채용하여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으로 노동을 착취하였다. 이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찾는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대 배다리(당시 금곡리)에 조선인촌주식회사(전 파카디리극장)가 있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성냥 제조공장으로 전국 보급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촌주식회사 금곡리 공장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 지배인의 잔악한 노동착취에 분노하여 1921년 3월 21일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 150명이 지배인 배척선언을 하며 동매파업을 하였다. 이것이 인천 지역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조선인 노동자 파업은 1923년 가등정미소 노동자의 동맹 파업의 계기되었다. 계속하여 1926년 4월 임금인하를 강요하는 회사의 부당한 방침에 대하여 남녀 및 소년 직공 200여명이 동맹파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개입으로 2일 만에 파업을 철회하였다. 1931년 8월 여직공 170여명이 임금을 인하하려는 회사의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로 동맹파업을 진행하였다. 남직공도 작업이 불가능하자 회사 측이 굴복하여 종전대호 1월70전의 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1932년 이승엽, 김삼룡이 주도한 적색노조 운동이 확산되면서 조선인촌주식회사 직공360명이 임금인상,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하였다.

 


3. 맺는 말

 


 배다리-우각로는 개항장과 더불어 인천근현대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소이다. 경인도로로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가는 길인 동시에 인천의 근대교육, 기독교, 노동운동의 산실이다. 힘없는 민중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 민족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저항을 하였던 개항장이 주는 역사적 장소보다도 더 값진 인천 지역 민중의 역사적 의지가 담긴 장소이다.

‘배다리-우각로’를 가로지르는 산업도로 개설공사는 길이 갖는 순기능인 연결성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역기능인 단절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배다리-우각로’는 개항기에 서울-제물포를 연결하는 길의 순기능인 연결성의 역할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의 의도적 방해로 우각로 선교기지인 남선교사 기숙사(현 인천 세무서)와 여선교사 기숙사 사이 소방도로를 개통함으로 이전의 선교기지가 갖고 있던  연결된 공간성이 상실되고 별개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길이 갖는 역기능인 단절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배다리-우각로’ 안에는 인천 유형문화재 3곳이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이 공간이 담고 있는 역사적 가치성은 반드시 보존하여야 한다. 그리고 ‘배다리-우각로’만이 간직하고 있는 정겨움과 은은함도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존하고 이를 활성화시켜야 하는 인천시 문화예술 행정이 ‘배다리-우각로’를 가로지르는 산업도로를 개설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무섭고 우습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국가지정 유형문화재의 경우는 150m, 지방 문화재의 경우 100m 이내에서 건축이나 도로개설공사 등을 규제하고 있다. 인천시 조례에서는 어떻게 규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위법인 문화재 보호법에 크게 벗어난 규정을 정해서는 안된다.

 

 

인천 ‘배다리-우각로’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성-이성진


인천 동구청, 배다리생태놀이시설 간밤에 싹 실어가

     

- 배다리마을 주민들 동구청의 막가파 행정에 공분, 소송 불사 예정

  
 ▲ 동구청은 지난 밤(21일) 주민들이 일부 지켰던 배다리생태놀이시설마저 해체해 모두 실어갔다. 사진제공=배다리마을 주민 

인천 동구청이 지난 21일 주민들이 일부 지켰던 배다리마을 어린이생태놀이시설마저 간밤에 싹 실어가 주민들의 공분이 커지고 있다.

동구청은 어제(21일) 텃밭내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생태시설을 일부 해체해 트럭에 싣고 갔다. 주민들이 막아 일부의 시설은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22일) 아침 주민들은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동구청이 간밤에 일부 남아있던 생태시설을 마저 철거해 싣고가서 시설이 있던 자리만 썰렁하게 패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다리생태놀이터는 주민과 함께 만든 공유지 놀이터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자랑스러워했고 아이들은 그 곳에서 활기찬 에너지를 분출하며 안전하게 놀 수 있었다.

민운기 스페이스빔 대표는 "아이들이 즐겁게 사용할 것을 상상하며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정성들여 함께 만든 놀이시설들이다"면서 "사전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주민 자비로 정성껏 설치한 놀이시설을 해체해 실어간 것은 도로법에도 정면으로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폭도 이렇게까지는 비열하지는 않다"며 "이 시대에 이런 막가파 구청장 행정이 이 도시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그는 이어 "어제도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았다"며 "아이들이 우선이지 않은 야만의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한 놀이터에서 UN이 천명한 어린이 놀권리에 대한 도전으로 알고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배다리마을 주민들은 동구청의 공권력을 이용한 막가파 행정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위를 꾸려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민·형법상 소송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21일 동구청의 해명을 듣기 위해 배다리마을 주민 10여 명이 동구청을 찾아가 두어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도망치듯 구청을 빠져나가는 이흥수 동구청장의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동구는 지난해 11월 아동정책 전담팀 '아동친화도시팀'을 신설하고, 올해 1월 아동친화도시 추진 지방정부협의회에 가입한데 이어 최근 아동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조성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에 이흥수 동구청장은 지난 17일 "어느 도시든 명품 도시가 되려면 먼저 '어린이들이 살기 좋은 도시'가 돼야 한다"며 "아동친화적인 도시환경에서 자란 아동들이 성장해 도시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동구를 만들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연수 기자 ysmh01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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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구청, 배다리마을 생태놀이 시설 없애 '주민 반발'    


- 주민동의 없이 주민 자비로 설치한 배다리마을 시설 파괴행위 규탄

  
 ▲ 동구청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배다리마을 텃밭 내 주민 자비로 만든 어린이 생태시설을 철거하고 트럭에 싣고 있다.사진제공=배다리마을 주민 

인천 동구청이 배다리마을 텃밭에 설치된 어린이 생태놀이 시설 일부를 주민의 동의 없이 해체하고 트럭에 실어가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배다리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21일 오전 9시쯤 인천 동구청 공무원들이 지난해 주민들이 자비로 설치한 텃밭내 어린이 생태놀이 시설을 파괴하고 해체해 트럭에 실어 갔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를 보고 강력하게 항의하고 몸으로 막아서 일부 시설물을 지켰다면서 동구청의 기습적 폭력 행위를 규탄했다.

민운기 스페이스 빔 대표는 "이는 엄연한 사유재산 침해 행위이다"고 못 박고 "지하 산업도로 공유지에 공공의 이용을 위해 만든 시설물을 사전 통보 없이 기습적으로 침탈한 동구청장의 행위는 폭력과 불법 그 자체이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배다리 주민들은 이를 강력 규탄하며, 강도 높은 항의와 더불어 법적 책임까지 물을 것이다"며 "이흥수 구청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집달관 행세를 자처한 관련 공무원들 모두가 공범이다"며 규탄했다.

배다리마을 주민들은 이날 오후 4시경 인천뉴스와의 통화에서 동구청장 비서실장실에서 동구청장의 해명을 요구하며 대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연수 기자 ysmh0104@gmail.com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배다리 우각로 근대문화길 조성사업,

전면재검토 되었나?


지난 4/12일(수), 동구 금창송 주민센터 2층 회의실에서 금창동 주민, 건축물 소유자, 상인 등을 대상으로 동구청 관광개발과의 '배다리 우각로 근대문화길 조성사업' 설명회가 있었다.

사업설명은 총 사업비 1,400백만원를 가지고 배다리 일대를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취지로 ' 관광개발과/ 배다리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도시건축과/ 가로변 건축물 파사드 경관개선사업', '도시건설과/ 근대역사문화로 조성'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와 전문연구기관인 (사)문화다움이 지난해 하반기 동구 '금창동 일대' 배다리 지역에서 실시했던 문화영향평가에서 이미 '사업의 전면 재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라는 평가를 받은 상황이다. (=>관련기사 "동구 '근대문화마을조성' 계획 전면 재검토 해야" http://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36924&m_no=1&sec=4)



동구청, 문화영향평가는 규정대로 진행했을 뿐

그 연구결과를 반영하거나 따르라는 규정이 없다.


동구청은 이것을 반영한 계획이라고 설명했으나 한 구청 관계자는 '그냥 문화영향평가가 규정에 있으니 진행되었을 뿐이지 꼭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고 말해 이 평가를 반영, 수정한 계획은 아니라는 것을 비췄다.

설명회를 들은 한 주민은 "기존에 연구원들이 지역에서 설문지를 갖고 다니며 물어봤을때와 내용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뭐가 반영됐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한 주민은 " 사업비가 나온 상태니 이흥수 구청장이 하라면 해야하는 상황에 원하는 주민을 대상으로만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과다." 라며 반발했다.



주민설명회, 정확한 정보는 어디가고

부동산 10배 올라간다? 증명할 수 없는 정보흘려


 정확한 정보가 이해될 수 있도록 설명되어야 하는데  설명회를 들은 한 주민은 '파샤드'에 대한 이해를 잘못해 " 낡은 것을 고쳐주고 수리해주는 것"으로 오해를 해 "왜 못하게 하느냐?"며 다른 주민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유재산인 개인의 집수리는 직접해야하며, 간판 및 도색, 기와지붕형태의 파샤드 외벽을 세워 근대건축물 모양을 흉내만 내는 것인데 개인 건축물 개보수에 비용을 대 주는 것으로 오해하는데도 추가적인 설명이나 오해를 풀어주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어진 동구청측 설명은 "타지역의 예를 들며, 파샤들을 잘 해 놓고 관광지역이 되면 집값이 10배로 뛰어 부동산 이익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좋은 일인양 설명해 참여한 주민들의 항의를 듣기도 했다. 

 일부 주민들은 수요일 오후 3시에 주민설명회면 누가 참여하느냐며 이런식의 진행은 참여하지 말란소리랍며 항의했고, 이에 '화를 내며 사업비 반납하면 그만, 오히려 너희들이 손해"라는 식의 으름장을 놓으며 퇴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파행적으로 진행된 설명회에 대해 "배다리 우각로 근대문화길 조성 속도낸다"는 보도자료를 배포, 마치 주민들이 모두 찬성하고 함께하는 관광개발인양 이야기를 해 일부 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주민설명회, 구색맞추기가 아니라 의견을 듣는 자리가 되야

2012년 동구청은 '철로변 걷고싶은 길'을 조성한다며 주민의견을 반영해 만들겠다고 해 놓고 주민설명회를 여러번 가진 바 있다.


하지만 주민설명회만 진행하고 이 과정에 제안한 주민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고, 애초 지정된 사업체의 계획대로 조성되어 주민들의 반발을 받은 바 있다 .


다양한 지자체나 기업, 건설사 등이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지역의 문제들에 대해 주민설명회를 가져왔과 또 가지고 있으나 주민들의 의견을 듣기만 하고 반영하지 않거나 자신들의 계획만 일방적으로 설명하고 끝내버리는 그간의 관행으로 주민설명회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지도 않은 채 질의 응답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끝내버리는 태도를 보이고, 구청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일방행정의 구태를 다시 드러내 주민들의 항의가 이어졌던것. 


 배다리 우각로 지역에서 실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이 그들이 살아가는데 의미있고 필요한 일을 진행해야 하고, 그런 삶을 잘 모르는 공무원들은 오히려 충분히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민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흥수 구청장이 들어선 이후 자꾸 주민들을 내몰고 사업체들의 이익만 대변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지역민들의 항의를 받고 심지어 이흥수 구청장에 대한 주민소환운동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지방자치', 주민이 주인인 시대

공무원들의 계획이 아니라 지역민의 의견을 반영해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구청의 의도를 충분히 설명한 후 주민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차분히 다듬어 진행한 '배다리 생태공원'은 주민과 구청 모두 함께 어울리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관련기사'배다리 마을공터, 민·관이 함께 여는 새봄' =>http://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37064&m_no=2&sec=2)   


"백 중에 하나의 신뢰를 다시 쌓은" 좋은 사례로 배다리 생태공원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다양한 노력들이 공무원들 사이에서 정확이 나눠져야 한다.


19억5천만 원의 예산은 그냥 어디에서 떨어진 나랏돈이 아니라 주민들이 낸 세금으로 이뤄진 돈이다. 잠시의 겉치장을 위해 쓰일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 구청장이나 시장이 자신들의 치적을 억지로 만드는데 쓰여지면 안된다는 주민의 말을 귀하게 들어야 한다.


기획/칼럼


예술과 정치의 공통 지평

[문화칼럼] 이소영 / 대구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창조융합학부 조교수

17-02-05 20:28ㅣ 이소영 (sylee5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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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예술이도록 하는 출발점은 무관심이다. 미적 경험은 여타의 개념 규정이나 윤리적 규율, 경향성들이 개입하지 않는 거리두기를 토대로 발생한다. 거리두기는 단절의 경험이다. 거리두기의 단절은 예술의 자유로움을 전제로 한다. 구획된 선들을 따라 가는 삶은 익숙한 감성과 안도감을 주지만, 예기치 않은 풍요로운 감성과의 만남을 제한한다. 미리 주어져 있는 감성을 포획하는 것은 고정되고 경직되고 굳어있는 감성에 안주하는 것이다.

가령 고통의 이미지 속에는 사그라지는 고통의 입자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채 다가올 고통 입자들이 공존한다. 입자들의 격렬한 움직임과 충돌은 새로운 감응의 입자를 탄생시킨다. 그래서 극도의 고통을 표현한 예술작품이 고통을 넘어선 숭고와 성찰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림 속 해박한 미소에서 씁쓸함이나 애잔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345cm, 프라도 미술관>


헐거운 옷에 두 팔을 들어 올린 양민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을 그린 고야(Francisco Goya)는 침략당한 조국, 실패한 시민 봉기로 살육과 학살로 물든 스페인의 현실을 냉소적 인간 드라마로 그려낸 바 있다. 격렬한 붓질이 전하는 피 끓는 분노에서 가슴팍을 내놓은 양민들의 고요한 성스러움을 엿보게 되는 이유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만들고, 우리의 감성을 파열시켜 잠재적 서사나 고밀도의 징후들을 발견하게 하는 예술작품의 매개 역능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 물음을 던지고 개입하며 매개하는 감각체가 예술이다. 이미지의 역능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삶에 접속하고 행위에 개입한다.

예술의 몫은 표현할 수 없는 사건 혹은 존재를 더 민감하게 느끼고, 표현되지 못한 것의 증인이 되고, 인식에 포착된 것들을 끊임없이 창안하는 일에 있다. 규정되거나 명명되지 않았던 사태에 침투하여 그것을 예술로 바꾸는 일, 예술에게 배분되지 않았던 몫을 찾아 틈입하는 일, 그리고 일상에 보이지 않는 편견을 뜯어내는 사건을 포착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고야의 작품은 고도로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정치에 복속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반면 정치와 무관함을 유달리 강조했던 예술의 경우 오히려 정치의 중심에 자리하기도 한다. 그러한 예들은 역사를 통해 자주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예술이 적극적으로 정치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현상하는 정치적 속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삶의 무대는 예술적 공간과 사회·정치적 공간을 감수성이라는 공통감각 위에 재분할, 재배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술이 정치적 행위에 배타적 태도를 고수하려해도 정치성을 담보할 수 밖에 없고, 정치가 변혁을 일구기 위해 창조적인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는 지점에서 예술과 정치는 교차점을 갖는다. 실천의 측면 혹은 해석의 측면 모두에서 예술과 정치는 내밀한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과는 다른 감각을 불러오는 예술, 그 자체로 낯선 대상인 예술은, 세계의 이치를 꿰뚫는 성찰의 크기 만큼 정치적일 수 있다. 동시대 비평의 시각과 냉철함을 담보한 작가적 윤리는 양립 불가능했던 예술과 정치의 만남을 통해 전혀 얘기치 않은 발산을 낳는다.

세계와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는 예술은 자칫 사회, 모순, 질곡, 자본, 권력, 정치, 폭력, 고통과 같은 주제들을 간과하거나 침묵하며 자기만족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자세로 호도될 수 있다. 역으로 사회 참여적 예술은 사회·정치적 조건에 개입과 저항을 시도하여 왜곡과 일그러진 소비사회를 비판하면서 치열한 삶의 태도를 수행으로 옮기지만 자칫 예술 본연의 존재방식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이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베일을 걷어내어 삶 자체와 대면하고자 하면 할수록 예술 바깥으로 구분지어 놓은 영역들과 뒤섞이고 가로지르기에 머뭇거리지 않았음은 수많은 도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사회운동, 대중정치와 같은 사회·정치적 영역도 이념이나 이론, 혹은 정치적인 사안들이 요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 내면의 감수성에 따르고 있었음을 수없이 보아왔다. 위태롭지만 풍요로운 사유의 움직임, 그에 따른 발견이 오늘의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이유이다.



엘살바도르 그녀와 함께 온 커피
배다리 작은카페에서 <엘살바도르 커피와 뿌뿌사 Day>




@작은 카페를 가득 채운 엘살바도르 유학생들과 조은숙씨,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온 그녀의 아들 안중현씨와 엘살바도르 코이카 봉사자로 활동하다가 돌아온 캐빈 김철중씨, 그리고 그들의 페루 친구 재키

'엘살바도르(이하 "엘살")와 함께 배다리에 온 그녀' 때문에 엘살바도르 커피 주문한 이야기는 했었죠? (->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36496&m_no=3&sec=1) <인천in 2.7일자 보도>

커피콩이 떨어져갈 즈음 새 원두를 주문하려는데 그녀가 생각나서 엘살 원두를 주문하고 '한.점으로부터 _ 2월의 커피'로 정했다고 했더니 엘살 유학생들과 함께 엘살 전통 음식 '뿌뿌사'를 만들어 어려운 엘살 친구들을 후원하려고 하는데 괞찮겠느나며 의견을 물으셨어요. "당연히 좋죠!"


그렇게 즉흥적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엘살바도르 커피& 뿌뿌사 ㅡday'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어요. 겨우내 적잖이 썰렁했던 배다리 작은 갤러리 카페 <한.점으로부터(이하 '한점')>이 새로운 사람들로 복작복작 하겠다 싶어 기다려졌어요.  



@ 소박하게 엘살 국기를  꽃화분에 꽂고, 안내문을 붙히고, 에스뺘뇰 음악을 틀고, 엘살의 중요한 건축물 그림도 걸었어요. 



@엘살을 상징하는 그림을 걸고, 전통 문양을 수 놓은 가방과 전통의상을 걸고, 꽃화분에 작은 엘살 국기를 꽂아 자리를 마련했어요. 작은 탁자 세 개에 갤러리 공간이 꽉 채워졌어요.

그간 따뜻했던 날씨가 갑자기 차가워진 토요일( 2/18) 이른 아침, 조은숙씨와 안중현씨가 음식만들 재료와 주방기구, 아침을 거르고 오고있는 엘살 유학생들을 위한 먹거리를 가지고 먼저 도착했어요. 커피를 한 잔 내려마시며 어떻게 진행할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꽃을 준비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지인분께 연락을 해 꽃 화분을 주문하셨네요. 작은 탁자 세 개에 꽃화분을 올리고, 엘살 국기와 그림, 전통 복을 걸고, 뿌뿌사를 굽고 커피를 내릴 탁자를 세팅하니 그럭저럭 공간정리가 됐네요.

그러는 사이 '마호'가 이태원에서 구입한 '뿌뿌사" 재료- 마사(옥수수가루)와 직접 준비한 삶아 으깬 팥을 들고 카페문을 열었고, 이어 세종시에서 새벽길을 나선 쥴리아니(쥴리)와 인하대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며 한국어 공부중인 파티마, 그리고 고려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디아나와 생물공학을 공부하고 있는 재키도 도착했습니다. 

한 명씩 도착할때마다 반가움과 애정 가득한 웃음과 인사, 포옹이 넘쳐났죠. 이렇게 어린 그녀들도 그들끼리 만날 기회가 적으니 오랜만의 만남에 수다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어요. 스페인어 대화와 웃음으로 채워진 카페는 잔치 분위기가 물씬 났어요~


에스빠뇰라의 대화 웃음소리 가득
뿌뿌사 굽는 냄새 폴폴


"뿌뿌사"는 우리의 밥과 같은 엘살바도르 국민들의 주식입니다. 옥수수가루를 반죽하고 그 안에 모짜렐라 치즈에 다진 돼지고기, 야채, 삶아 으깬 팥 등을 소로 넣어 철판에 굽는 것으로 우리나라 호떡을 굽는 것과 비슷해요. 여기에 우리나라 김치와 같이 곁들이는 것이 "꾸르띠도"인데 이번에는 준비하지 못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꼭!


뿌뿌사에 들어가는 소는 형편에 따라 소의 재료가 달라지고, 소를 넣지 못하기도 한데요. 짭짜름한 치즈를 기반으로 다른 자극적인 양념이 들어가지 않아 고소하고 건강한 맛이 납니다. 호박을 잘 먹지 않는 저도 맛있게 먹게 되더라구요.

엘살 유학생들에게 자주 해먹냐 물어보니 그녀들도 고향에서 밥처럼 먹던 뿌뿌사를 해먹을 기회가 거의 없다는군요. 맘껏 뿌뿌사를 맛보는 모습에 괜히 제가 다 뿌듯하더라구요.



@즐거운 대화가 끊이질 않았어요~귀가 따가울 정도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우리나라 여고생들 같더라구요.

?
@옥수수가루 '마사'에 물을 넣어 반죽하고, 모짜렐라 치즈에 잘개 썬호박, 삶아 으깬 팥을 섞어 각각의 소를 만들고, 반죽에 소를 넣어 손을 동그랗게 편 후, 기름을 얇게 바르고  약한 불에서 서서히 굽습니다.

@뿌뿌사는 기름없이 구운 호떡처럼 생겼습니다.


엘살은 적도에 가까워서 늘 여름인 나라여서 늘 창문이 열려있죠. 그곳에서는 넓은 철판에 구워낸데요. 작은 카페에서 구우니 고소하고 매캐한 뿌뿌사 굽는 연기가 가득했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쉼없이 뿌뿌사를 구웠어요.




먼 길 찾아와준 손님들

갑작스레 여러가지 꽃화분을 주문하고 바로 배달을 부탁하니 다른 배달을 미루고 달려와준 화원 어르신이 커피와 뿌뿌사를 개시해주셨고, 엘살바도르에서 활동했던 코이카 시니어들도 따뜻한 마음과 애정으로 방문하셔서 이야기르 나누셨어요. 


산살바도르(엘살 수도) 시청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던 코이카 청년 캐빈, 김철중씨가 온다니 아가씨들의 기대와 환호가 끊이질 않았구요, 조은숙씨가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 동문이 과 그녀가 활동하고 있는 합창단 동료들이 역시 이 곳을 찾아주셨고, 한.점의 '이방인들'(프랑스어로 이방인을 강독하고 있는 모임 이름) 회원인 수님도 따님과 함께 들러 엘살 노래와 인사도 배우셨죠.


엘살에서 커피농장을 하는 분도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한점으로 직행하셔서 커피와 뿌뿌사를 드시고, 어여쁜 엘살의 그녀들을 격려해 주셨구요. 


조은숙님은 엘살에서도 그나라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계속해 오셧고, 한국에서도 같은 활동을 지속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녀가 가진 엘살에 대한 애졍이 사람들에게 퍼진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엘살의 어린이들을 돕는 활동도 지속하고 계셔요. 후원에 관심있으신 분은 요기로 => 마누엘 사랑 cafe.daum.net/love.manuel 


@ 쥴리에게 스페인어 인삿말도 배우고, 우리의 아리랑과도 같은 엘살 노래도 함께 배웠습니다.


고소하고 달콤한 커피향이 매력적인
엘살바도르 커피를 소개합니다.




중앙아메리카(중미)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사이에 위치한 엘살바도르는 1840년대에 커피가 유입되어 18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중미의 다른 나라들처럼 비옥한 화산지대와 이상적인 기후조건으로 커피 재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일자리의 25%가 커피관련 산업이구요 커피콩 수확기인 12월~2월 사이에는 80%에 이른다고 하네요. 2월이니 한참 바쁘게 마지막 커피를 따고 있겠네요.


엘살바도르(El Salvador) 커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덜 유명하지만 품질이 우수한 편으로 주로 아라비카종을 재배하는데 대규모 공장보다 농장이나 협동조합 중심으로 재배되어 희소가치가 높고, 로스터(커피콩을 굽는 전문가)의 손맛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고 해요.

"엘살바도르 커피"라고 했더니 도착한 유학생들은 어느 농장꺼냐며 제일 먼저 묻습니다. 아직 거기까지는... 저는 그냥 엘살바도르만 보고 샀거든요. 다만 제 테스팅 의견을 소개하자면 고소하고 달콤한 향도 매혹적이고, 얕은 신맛에 균형잡힌 맛으로 좋았습니다.

엘살바도르에서 커피농장을 하시는 지인이 드르셨는데 정작 그곳에서는 잘 몰랐던 맛을 여기와서 알게되었다니 왠지 뿌듯하더라구요. 엘살바도르 친구들도 맛보고 참 좋아해서 괜히 우쭐했다니까요.


2월, 어느 멋진 날

작은 카페에서 즐긴 축제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 엘살바도르에서 활동하며 애정을 담았던 코이카 봉사자들, 새로운 나라의 기운이 이곳에 깃들었다며 즐거웠다는 시인, 처음 맛본 엘살바도르 커피의 맛과 향에 반한 사람들, 낯선 음식을 맛보며 즐거워 했던 방문객들이 하루종일 끊이지 않았던 하루였습니다.

쥴리(전주대 대학원에서 한국어 전공) - "한점 갤러리 카페에서 '엘살바도르의 날'에 참석했던 기회가 많이 좋습니다. 동기들과 함께 뿌뿌사를 만들면서 좋은 경험이 받고 많은 이야기도 나눠서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 보냈습니다. 특히 강작가님을 덕분에 맛있는 엘살 커피를 마시며 참석하신 분들에게 엘살의 문화, 언어도 가르칠 수 있어서 많이 기뻤습니다. 나중에 또다시 이와 같은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에게 엘살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티마(인하대 어학원) - "엘살을 많이 사랑해줘서 감사합니다."

김태희(안양에서 오신 손님) - " 향기로운 엘살바도르 커피향이 가득한 경험이 즐거웠고, 고소한 뿌뿌사도 너무 맛있고 좋았어요. 생동감 넘치고 따듯한 느낌의 자리에 초대해줘서 감사해요"

엘살에서 활동하시다 오신 분들은 "오랜만에 맛본 뿌뿌사가 너무 반갑다."고도 하고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너무 뜻 깊다."는 인사를 전해주셨습니다.



@귀기하기 전에 오늘을 축제를 함께한 친구들과 기념촬영!!

고향인듯 고향아닌
고향같은 엘살바도르


누구에게나 삶과 죽음이 50대 50이라는 위험한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죽음의 기억이 일상을 스치고 있는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 살아있음에 감사할 시간도 없이 고된 노동과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범죄에 내몰리는 아이들의 삶이 일상인 나라, 정부가 아무 힘도 쓰지 못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간절히 그립고 그리운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때 그곳으로 가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돌아온 청년 중현씨에겐 경쟁에 내몰려 살아가는 한국의 청년들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위험과 자유가 공존했던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던 중현군은 엘살바도르에서 "한국의 니 또래들은 공부에 붙잡혀 하고 싶은 것 해보지도 못하고 다람쥐 챗바퀴 같은 삶을 살고 있어 .. 넌 얼마나 행복한건데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오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엘살바도르에서 살았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며 청년에게는 그야말로 '고향인듯 고향아닌 고향같은' 엘살바도르였습니다.

오랜만에 엘살 친구들을 만난 중현씨는 한없이 밝고 수다스럽고 즐겁고 유쾌해 보였습니다. 오랜만이라고 했습니다. 엘살의 자신과 한국의 자신은 좀 다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직은 한국과 또래들이 낯설다고도 했습니다.


눈앞에서 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던, 아버지의 공장 주변에서 갱단의 위협을 받아야했던, 8년여 청소년기를 보내고 귀국한 한국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보하는 모습에 마냥 신기하기만 한, 그러나 경쟁에 갖혀 자신의 모습을 편하게 들어내지 못하는 또래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이 청년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까요?"


인권(인간답게 존중받고 살아갈 권리)은

  그래서 어느 나라나 사회에만 속하지 않아.
  우리 세월호 희생자들과 같은 이들이 그렇고,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어간 그대 친구들도 그렇고 ..
  이민자들을 배격하고, 난민을 막고, 전챙을 일으키는 지금의 시대, 그래도 우리는
  누구나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면서도 그 믿음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지. "


돌아가는 전동차 안에서 감히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는 .. 죽음에 대한 깊은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이 있어 지금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한 청년을 보았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날, 시즌2>를 기대하세요!! 


차갑지만 투명했던 그 토요일에 만났던 살아있는 그녀들이 눈부셨고, 그렇게 만나는 시간을 더 만들어보자는 제안도 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계속 하고 싶다는 의사도 확인했습니다. 뿌뿌사와 함께 먹을 꾸르띠도가 없어 아쉬워 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함께 준비해서 정기적으로 자리를 가져보자는 의견도 나오구요.

배다리 갤러리카페 <한.점으로부터>에서 늦겨울 날씨에 진행한 <엘살바도르 커피& 뿌뿌사 ㅡDay>는 호기심 어린 방문객들과 정감 넘치는 에스빠뇰라들의 대화, 향기로운 커피향과 고소한 뿌뿌사 냄새에 한겨울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보다 활짝 문을 열고,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께요. 우리도 힘들지만 더 힘든 사람들과 마음과 정성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려운 상황에도 씩씩한 청년들, 지인이 여는 작은 행사에 기꺼이 마음과 현금을 들고 오신 분들 덕에 멋진 하루였습니다.

엘살바도르 커피와 뿌뿌사 시즌 2가 궁금하신 분들은 페이스북 페이지 <갤러리카페 한.점으로부터>에서 그 소식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 문의 010-7389-0857





최윤영

 진행  : 국제노동기구보고서를 보면요. 전 세계에서 어른처럼 고된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어린이의 숫자가 2억 명에 달합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남미에서도 가장 심각한 아동 노동현장이라는 맹그로브 숲의 어린이들을 장유진 PD가 취재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위험한 노동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아이들, ILO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4세 미만 일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무려 1억 9,070만 명, 하지만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아동노동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기 힘든 만큼 이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위험한 노동에 동원되고 있다. 맹그로브 숲에서 서식하는 쿠릴조개에도 엘살바도르 어린이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 있다는데... 맹그로브 숲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는 나라전역에서 화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화산이 많은 나라로도 유명한데... 화산재로 비옥해진 농토에서 재배한 품질 좋은 커피와 사탕수수가 엘살바도르의 대표적인 수출품이다. 또 다른 수출품 중 하나는 태평양 연안에서 잡아 올리는 풍부한 해산물, 항구는 만선으로 돌아온 고깃배들로 늘 활기가 넘친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항구주변에는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을 즉석에서 요리해주는 간이식당들이 즐비한데... 다양한 해산물 요리 가운데에서도 엘살바도르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쿠릴이라 불리는 조개로 만든 요리다. 쿠릴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비싼 것은 개당 가격이 우리 돈 3천 원에 달하는 고급 식재료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차로 2시간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한적한 어촌마을 이슬라데멘데스, 이곳은 엘살바도르에서 가장 유명한 쿠릴의 생산지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어야할 평일 아침 9시, 그런데 아이들은 학교가 아닌 선착장에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예닐곱 명씩 무리를 지어 배를 빌려 타고 바다로 나간다. 나룻배를 하루 빌리는 데는 1달러, 주민 대다수가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빈민층인 이곳 아이들에겐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아이들이 탄 작은 배는 약한 파도에도 심하게 흔들려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로워 보였다. 힘들게 노를 저어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맹그로브 숲에 있는 작은 섬, 열대지방 갯벌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는 뿌리를 통해 호흡을 하기 때문에 뿌리의 일부가 땅위로 드러나 줄기와 복잡하게 엉켜 자라게 된다. 그 때문에 빽빽한 맹그로브 나무 사이를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몸집이 작은 아이들 뿐, 아이들은 맹그로브 나무뿌리에 붙어사는 쿠릴조개를 캔다. 하지만 갯벌 깊숙이 숨어 있는 쿠릴조개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수차례 허탕을 친 끝에,


 - 여기 있어요. 여기 저렇게 숨어 있지요. 빼 볼까요? 딱 보면 알아요.


 조개를 캐기 위해선 갯벌 깊숙한 곳까지 파 내려가야 하는데 아이들은 별다른 도구 하나 없이 맨손으로 모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한 어린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작업, 이렇게 맹그로브 숲에서 조개나 게를 잡는 일을 하는 아이들은 이 마을에만 110여 명에 달한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밀물이 들어오는 오후 서너 시까지 강도 높은 노동을 견뎌내고 있었다. 조개를 찾아 더 깊은 숲속으로 이동하는 아이들을 따라가 보았다. 하지만 제작진은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몸이 가벼운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들은 갯벌에 발을 딛기만 해도 무릎까지 빠지는 통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던 것, 또 다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따끔 거렸는데 나무 가시에 찔리고 베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손발도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마르셀로 / 10세  :  이곳에서 일하면 조심해야 돼요. 뱀과 벌레들이 있어요. 이곳에서 다치면 염증이 심하게 생겨 괴로워요.


독충과 독사가 많아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맹그로브 숲, 이로 인해 뱀에 물리거나 조개를 캐다 밀물이 들어오는 데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익사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제작진은 숲에서 일하는 아이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어려 보이는 아이를 만날 수 있었는데... 학교에 가는 대신 매일 이 숲에서 조개를 캐고 있다는 마누엘의 나이는 겨우 9살, 6살 때부터 조개 캐는 일을 시작한 마누엘은 한 번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아이들이 14살까지 의무교육을 받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지만 이곳 아이들은 최소한의 교육기회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누엘의 주머니가 이제 제법 묵직해졌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가 싶었는데 아이가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담배, 9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능숙한 포즈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담배를 왜 피우는 거지?

◎ 마누엘 / 9세  :  벌레를 쫓으려고요.

 - 얼마에 사지?   5센트요.


 아이들이 필터도 없는 독한 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지독하게 들러붙는 모기를 쫓기 위해서였다. 말라리아나 뎅기열 등을 옮기는 모기는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 피우기 시작한 담배에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루 종일 맹그로브 숲에서 잡는 조개는 50여 개, 6시간이 넘도록 힘들게 작업한 것 치고는 그리 많지 않은 양이다. 그만큼 쿠릴을 캐는 일은 쉽지 않다. 어느 덧 밀물로 맹그로브 숲이 잠기는 시간, 동력이 없는 나룻배가 조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 돌아가는 배 위, 아이들은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

◎ 마누엘 / 9세  : 돈이 필요해서요. 이걸 팔아야 돈을 벌수 있어요.


 아이들이 캔 조개와 게는 마을의 한 가게에서 사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힘들게 캐낸 조개를 넘기고 아이들이 받는 돈은 고작 1, 2달러가 전부였다. 도시에서 팔리는 가격에 비하면 아이들이 받는 수입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 마리아  :  이 아이들은 여기에다만 팝니다.

 - 다른 곳에는 팔 수 없나요?  네. 거래처가 따로 있어요.


힘없는 아이들은 부당한 대우에도 달리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세 식구의 가장인 마누엘이 이 일마저 할 수 없게 된다면 당장 생계가 곤란한 상황, 몇 해 전 엄마마저 집을 나간 뒤 아이들끼리만 생활을 하고 있어 마누엘의 벌이가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 크리스티안 / 15세, 마누엘 누나  : 동생이 나가서 일을 해야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러 갈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 일도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세 남매의 끼니를 해결하기엔 모자랄 때가 더 많다.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음식마저 동생에게 나눠주고 마누엘은 또 다시 집을 나섰다.


 - 일하러 갈게  - 수고해.

 

밤에도 일을 해야 하는 마누엘, 그런데 배를 타러 가는 길에 마누엘은 정체모를 알약을 산다.


◎ 마누엘 / 9세  :  잠 없애는 약인데 낚시하면서 잠이 안 오도록 해줍니다.


약은 다름 아닌 각성제였다.


◎ 이사이야  :  사람들이 일하면서 힘이 떨어질 때 이걸 먹으면 기운을 내서 수영을 하던지, 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선 주로 밀물이 들어오는 야간에 고기잡이가 시작된다. 밀물과 함께 마을 바로 앞 바다까지 고깃배가 밀려들어 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부들의 배에 함께 타 조업을 돕고 품삯을 받는다. 마누엘이 연신 그물을 건져 올려 보지만 오늘은 수확이 영 신통치 못하다. 이렇게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 조업시간이 더 길어져 밤을 꼬박 샐 때도 있다고 한다.


 - 언제까지 일하니?

◎ 마누엘 / 9세  : (고기가) 많을 때는 아침 6시까지, 적을 때는 새벽 1시까지요.


고기잡이는 날이 완전히 저문 뒤에도 계속 됐다. 어느 덧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 이른 아침부터 조개잡이에 나섰던 아이들에게 졸음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 잠을 참지 못한 아이들은 준비해온 각성제를 먹기 시작했다. 낮에는 모기를 쫓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밤에는 졸음을 쫓기 위해 각성제까지 먹어야 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아이들, 아이들의 작은 몸이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아올 때까지도 아이들은 여전히 배 위에 있었다.


 - 오늘은 수확이 안 좋아... 자, 마누엘 1달러씩...


아이들 몫은 달랑 1달러짜리 지폐 한 장 뿐, 하지만 이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건 마누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8세 미만 미성년이 인구에 절반이 넘어 노동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엘살바도르에서 아동노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 


◎ 에르난데스 / 플랜 엘살바도르 관계자  : 엘살바도르는 아동인권국제협정에 가입한 국가입니다. 아동인권국제협정에 의해 18세 이하의 아이들은 일 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지만 이 나라의 노동법에 의하면 12세 이상도 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근 병원에선 아픈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는 벌써 몇 달째 심한 기침이 멎지 않아 고통스러웠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병원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니?

◎ 엘가르 / 13세  :  7살 때부터요.

 - 하루에 담배를 얼마나 피우니? 한 20~25개피 피워요.


어린 나이지만 7년 가까이 피워온 담배 때문에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의사는 이곳 의료시설로는 정확한 진단이 불가능해 도시의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 라이 / 엘가르 할머니  : 아빠도 없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아이 엄마가 챙겨주기도 힘들고, 아이 아빠가 그냥 집을 나가버려서요.


아이는 임시처방약만 받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선 또다시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다는 아이,


◎ 올가라모스 / 의사  :  사실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방법이 없습니다. 먹기 위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려면 꼭 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게 이곳 사람들 생각입니다.


그렇게 또다시 맹그로브 숲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들, 도대체 언제쯤 아이들은 이 숲을 벗어날 수 있을까.

 

 

 


도깨비
요약 민간신앙에서 믿어지고 있는 초자연적 존재 중의 하나.

도채비·독각귀(獨脚鬼)·독갑이[狐魅]·허주(虛主)·허체(虛體)·망량(魍魎)·영감(제주도)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 여러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삼국시대도 이미 도깨비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인간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성을 보이고 있으나 인간을 살해할 만큼 악독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불도깨비·거인도깨비 등과 같이 가시적인 도깨비와 형체는 보이지 않고 사발 깨지는 소리, 말발굽소리, 기왓장 깨지는 소리와 같이 비가시적인 도깨비가 있다. 형체가 있는 도깨비의 모습은 머리를 산발하고 다닌다든지,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껑충껑충 뛰어다닌다든지, 키가 커서 하늘까지 닿고 머리가 구름 위에 솟아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하나밖에 없는 다리는 옻칠한 것같이 검으며, 키가 너무 커서 옷을 못 해 입고 백지로 가릴 곳만 가리고 있다고도 한다. ≪포박자 抱朴子≫에도 도깨비는 발이 하나밖에 없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도깨비의 발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고대부터 동양에 널리 퍼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도깨비가 발이 하나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민담이 전한다.

옛날 한 젊은이가 장에 갔다오는 길에 도깨비를 만났다. 도깨비는 젊은이에게 씨름을 하자고 청하였고 젊은이는 도깨비와 여러 번 씨름을 해서 이겼다. 도깨비는 계속해서 대들었지만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젊은이는 다리를 감아 쉽게 넘어뜨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도깨비의 성(性)은 구분되지 않으나 제주도의 도깨비신의 신화인 <영감본풀이>에 의하면 서울 허정승의 일곱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머리를 산발한 도깨비는 남성도깨비로서, 성질이 거친 경우가 많으며 대개 산길이나 들길에서 마주치게 된다. 또한, 민간에서는 음력 정월 14일 밤과 상원날 밤에 도깨비불을 보아 그해 농사의 흉년과 풍년을 점치기도 한다.

도깨비들이 불을 켜고 왕래한다는 그날 밤에 도깨비불이 동에서 서로 가면 풍년이고 서에서 동으로 가면 흉년의 징조라고 해석한다. 이때 도깨비는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으나 걸음이 빨라서 넓은 들을 순식간에 건너간다. 도깨비는 변화무쌍하고 신출귀몰해서 형체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다. 어린이·거인·노인·총각·처녀 등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며, 차일(遮日)도깨비는 차일처럼 넓게 생겼는데, 하늘에서 사람의 머리 위를 덮어씌운다고 한다.

불을 켜고 다니는 등불도깨비, 굴러다니는 달걀도깨비, 멍석도깨비, 홑이불도깨비 등과 같이 그 모양과 생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영혼이 변해서 되는 귀신과는 달리, 도깨비는 나무·돌 등의 자연물이 변해서 되고 산과 들에서 흔히 나타난다. 또한, 도깨비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도깨비의 종류도 달라지게 된다.
도깨비는 자연물이나 사람이 쓰던 물건이 변하여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밤길을 가다가 도깨비가 나타나 심술을 부리기에 칡덩굴로 묶어놓고 다음날 가보았더니 헌 빗자루 하나가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나, 나그네가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깨어보니 부지깽이 하나를 안고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예화이다.

장계이(張繼弛)의 ≪해동잡록 海東雜錄≫에 의하면 도깨비는 산과 바다의 음령(陰靈)한 기운이며, 풀·나무·흙·돌의 정기가 변해서 된 것이라 한다. 옛 문헌에 망량은 물도깨비·산도깨비·목석괴(木石怪)를 가리킨 것이고, 양매(魎魅)는 다리가 하나인 도깨비, 이매(魑魅)는 산속의 이기(異氣)에서 생긴 도깨비를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이, 도깨비는 한편으로는 자연물이 변해서 되는 경우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사용하던 것이 변해서 되는 경우가 있는데, 후자의 예는 빗자루와 부지깽이 이외에도 짚신·절굿공이·체·키·솥, 깨어진 그릇, 방석 등과 같이 사람의 손때가 묻은 것과 여성의 혈액이 묻었던 것이 대부분이어서, 시골에서는 그러한 물건은 불에 태우는 일이 많다.

도깨비가 사는 곳은 일정하지가 않으나, 들판·산길·계곡·절간이나 헌 집 등에 흔히 나타나고 있으므로 거처도 그러한 곳이라고 여겨진다. 도깨비는 음기(陰氣)의 영이고 음귀라고 불리고 있는 만큼, 음침하고 그늘진 곳에 거처하고 있다가 사람이 좀처럼 내왕하지 않는 곳이나 야음에 나타난다. 어쩌다 장날 장터 복판에 나타나는 수도 있으나 그러한 일은 매우 드물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온 영감 이야기는 산 속에 있는 헌 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골짜기가 깊고 숲이 우거져 있으며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서 나타난 도깨비 이야기와 수백 년 묵은 고목이나 거대한 바위, 절벽 아래에서 나타난 도깨비 이야기가 많다.

특히, 큰 나무는 귀중(鬼衆)이 모이는 곳으로 되어 있어, 거목의 죽은 가지는 베지도 않고 아궁이에 때지도 않는다. 사용하지 않는 우물에도 흔히 도깨비가 모이며,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광야나 덤불 숲도 도깨비의 거처가 된다.

도깨비는 음귀인 까닭에 어두운 때나 밤에 주로 나타난다. 낮이라 하여도 궂은비가 부슬부슬 내려 어두컴컴한 때 나타나기 때문에, 속담에 ‘도깨비 놀기 좋은 날이다.’, ‘김서방 올 것 같은 날이다.’라는 뜻은 궂은 날을 가리킨다. 도깨비가 아는 사람의 성은 김서방 밖에 없기 때문에 도깨비를 ‘김서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비오거나 안개낀 날과 같이 궂은 날과 야음에 주로 활동하다가 새벽이 되어 닭이 울면 활동을 멈추고 사라진다. 닭의 울음은 날이 밝아온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도깨비뿐만 아니라 모든 음귀들이 밝은 것을 피하는 것이다.

도깨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심술궂은 장난을 매우 즐긴다는 점이다. 예컨대, 장에 갔다오는 사람에게 씨름을 청하여 하나뿐인 다리 때문에 자꾸 져도 끈질기게 덤비는 이야기라든지, 잔치가 벌어진 어느 집에 나타나 솥뚜껑을 솥 안에 우그러뜨리고 황소를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는 도깨비의 심술됨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꾀가 없고 미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깨비의 미련함을 이용하여 재물을 얻거나 이득을 보기도 한다. 혹 때문에 노래를 잘 한다 하여 보물방망이를 혹과 바꾼 이야기, 도토리를 깨물어 나는 소리를 집 무너지는 소리인 줄 알고 도망친 도깨비 이야기, 한번 돈을 꾸어주었더니 매일 저녁 꾼 돈을 가져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예화이다.

셋째, 꾼 돈 갚은 도깨비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미련함과 건망증이 심한 도깨비이지만 빌린 돈을 갚을 줄 아는 윤리성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도깨비가 실수를 깨닫고 화가 나서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함으로써 심술을 부리려고 하였지만, 영악한 인간에게 또 속아넘어가는 순진함을 지니고 있다.

넷째, 노래와 춤을 즐기고 놀이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영감 이야기’에서처럼 흥겨운 가무를 즐기며, 씨름과 놀이에 끈질기게 몰두한다. 이밖에도 제주도의 경우, 도깨비신인 영감은 돼지고기나 수수범벅, 그리고 소주 등을 즐겨 먹으며, 또한 해녀나 과부 등 미녀를 좋아하여 같이 살자고 따라붙어 병을 주거나 밤에 몰래 여자방을 드나들기도 한다.

이 신의 범접으로 병이 났을 때 치료를 위한 굿으로 ‘영감놀이’를 행하는데, 이때 제상에는 영감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는다. 이와 같이, 도깨비도 인간과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어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며, 특히 기쁘고 즐거운 일에 몰두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도깨비는 변화무쌍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체가 될 수도 있고,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서 초인간적인 괴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기도 하고 청상과부로 변하여 소복을 입고 나타나는 등 여러 형체로 변한다. 그래서 도깨비는 한가지 모습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일정한 형태로 묘사할 수가 없다.

때로는 투명체가 되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는데, 도깨비감투나 등거리를 얻어 착용하면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도깨비의 등거리를 얻어 입고 시장에 드나들면서 물건을 집어가고 돈도 가져오는 등 재미를 보았는데, 사람들은 물건이 저절로 없어지고 돈이 없어진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등거리를 얻어 입은 사람은 계속 심술궂은 장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인파 속을 지나치면서 그만 등거리를 태우게 되어 빨간 헝겊으로 기운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은 잡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예화이다. 또한, ‘도깨비방망이 이야기’에서처럼 도깨비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련해줄 수 있는 신통력이나 그러한 물건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의 <비형설화 鼻荊說話>는 도깨비의 초인간적 능력을 잘 나타내어주는 것으로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도깨비 이야기이다. 신라 진평왕 때 비형은 도깨비의 두목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에 큰 다리를 놓아 다리이름을 귀교(鬼橋)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연못을 평지로 만들고 육지를 바다로 만드는 능력도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도깨비 대동강 건너듯’이라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큰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간다고도 한다. 경상북도 청송군에서는 도깨비다리라고 하는 돌다리가 냇가에 걸려 있는데, 물이 넘치기만 하면 무너질 듯이 보이지만 홍수가 나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도깨비들이 나타나 떠내려가고 있는 다리를 밤새 제자리로 원상복구해 놓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이러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도깨비는 제주도의 경우 신격화되어 집안의 수호신인 ‘일월조상’, 어선의 선신(船神), 대장간의 신, 그리고 마을의 당신(堂神)으로 모셔져 수호신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도깨비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살아 있어서 물질적 욕구충족의 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러 다른 민족이 제각기 설정하고 있는 초자연적 존재와 유사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성격을 지닌 도깨비를 산출한 것은 한국인 사유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도깨비는 귀신처럼 악독하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결국에는 원만한 해결과 권선징악이 보장된 바탕 아래서 밉지 않은 심술을 부릴 뿐이다.

도깨비가 지닌 초자연적 신통력은 결국 인간에게 유익하게 이용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루고 있지 못한 소원을 성취하고 싶은 생각, 가령 돈을 벌고 싶고 큰 권력을 잡고 싶고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싶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의하지 않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도깨비를 믿음으로써 부분적으로 그러한 욕망과 소원을 충족시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깨비신앙은 이러한 일반적 기능 이외 한민족의 사고방식과 인생관·우주관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의 도깨비」(임석재·진홍섭·임동권·이부영, 『국립민속박물관총서』 1, 열화당, 1981)
  • 「한국의 도깨비 연구」(김종대, 국학자료원, 1994)
  • 『朝鮮の鬼神』(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29)
  • 「도깨비고」(임동권, 『한국민속학논고』, 집문당, 1971)
  • 「한국도깨비담의 형성·변화와 구조에 관한 연구」(강은해, 서강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5)

출처  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비폭력이란 평화 상태가 아니라

분노를 명확하고도 효과적으로 만드는 사회·정치투쟁,
즉 세심하게 세공된 ‘엿 먹어라’다.
– 주디스 버틀러

 

 

 

 

1.

 

처음에는 촛불집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촛불집회에 요구되는 비폭력, 질서, 평화라는 가치에 대해, 온건하게 변한 시위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뭔가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을 말할 생각이었다. 나는 1983년생으로 촛불세대라(는 것이 있다면) 부를 만한 위치에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스무살이었고 그해 효순이, 미선이를 위한 최초의 촛불집회가 있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광장에 나갔고 2008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차벽이 설치되었을 때도 광장에 있었다. 그날 나와 친구들은 광화문에서 종로로 행진했고 길바닥에 앉아 술을 마셨으며 먹고 마신 술과 안주는 깨끗하게 치웠다. 그리고 몇해 지나 대통령으로 박근혜가 뽑혔다. 함께 시위를 했던 친구들은 하려고 했던 일을 포기하고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고 대부분 취업에 성공해 돈을 벌지만 시간은 없고 스트레스는 많아 번 돈의 대부분을 해외여행이나 취미, 쇼핑에 탕진하는 삶을 사는 중이다.

 

아무튼 나와 친구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한국은 가망 없다’ ‘다시 태어나야 해’ 같은 것으로 소위 ‘헬조선’이라는 거다. 헬조선인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이 글의 주제에 국한해 다시 말하면, 우리는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에 나갔고(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으며(나는 다른 사람을 지지했다), 촛불집회라는 감동적인 시위문화를 만들었고(나는 물대포도 맞을 뻔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을 증오하게 됐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왜 우리는 일관되게 희망을 찾지 못할까. 왜 우리는 만성적인 피로감과 패배감을 느낄까. 물론 이러한 희망 없음에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과장은 ‘88만원세대’라는 말과 비슷한데, 나는 이 용어가 유행할 당시 정말 다들 88만원만 벌고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생각보다 돈을 잘 벌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능력이 있나?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중요한 건 88만원보다 잘 번다고 조금이라도 행복에 가까워지거나 하지 않는다는 거다. 큐브 세대라는 말도 그렇다. 나는 비록 큐브에 살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집을 얻었다. 은행에서 갖은 굴욕을 당하고 전세에 교통이 불편한 곳이긴 하지만 어쨌든 집을 얻었다. 희망 없음을 상징하는 ‘3포세대’인 우리가 집도 얻고 결혼도 하고 매년 해외여행도 간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망한 느낌이고 한국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만 해도 이십대에는 상상도 못할 가격의 옷을 사고(지난주에는 무려 19만원짜리 바지를 샀다) 도서관에 가기 귀찮아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주문할 정도로 믿지 못할 부를 누리며 그럭저럭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뭔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기 힘든 걸까. 특히 이런 경향은 사회, 정치 문제에서 더 심한데 우리는 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기한 채 해외여행과 각종 취미, 소비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어쨌든 그렇다고 마냥 우울하게 살 순 없지 않나. 친구는 플레이스테이션4를 샀고 ‘MLB더쇼’라는 게임에 빠졌다. 그는 말했다. 내 캐릭터 이름은 테리 이글턴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얘기는 새로운 문화를 만든 촛불세대라는 이들이 만성적인 패배감에 시달린다는 소리고 촛불은 우리 내면에 결국 안 된다, 박근혜를 우리가 안 뽑아도 윗분들이 뽑으니 되더라 따위의 생각만 남겼다는 소리다. 흔히 하는 얘기처럼 4·19세대나 6월 민주항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승리의 경험을 갖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패배의 경험만을 갖고 있다는 거. 우리는 촛불을 손에 들고 용산참사와 세월호사건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는 거. 그런데 4·19세대는 박정희 다음에 전두환이 집권했는데 어떻게 승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6월 민주항쟁이 끝나고 노태우가 집권했는데 승리?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런 역사의 흐름과 전체적인 무의식에 대해선 그만 얘기하자. 한 세대가 패배감을 갖는다, 승리감을 갖는다는 얘기는 흥미롭지만 추상적이고 별 소득이 없다. 그것보다 우리의 에너지는 어디로 분산되는가, 우리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우리가 만들어낸 변화가 ‘개망함’으로 귀결되는 모습만이 정말 우리에게 남은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나는 촛불시위를 함께 만든 세대지만 패배감만 느꼈고 결국 이런 평화시위가 무력감만을 남긴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전 세대의 시위문화에 대해 알지 못했고 우리가 만들어낸 시위는 다른 것이었으며 그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새로운 형태의 시위가 시작된 지 겨우 10년이 조금 넘은 상황에서의 생각일 뿐이다. 바뀐 시위문화, 바뀐 시위의 언어와 방식이 그냥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 연장되고 지속되고 변화하면서 뭔가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앞으로 또 반기문이 뽑히고 은행에 빚독촉을 당하고 삼성이 권력승계를 하는 등 망함의 순간이 계속될지도 모르지만, 시위에 대해, 패배감이라는 세대감에 대해 비관하는 게 정말 옳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언론에서 과장하는 ‘세계를 놀라게 한 평화시위’ 프레임도 아니고 역시 언론에서 과장하는 ‘3포세대’, ‘헬조선’ 프레임도 아닌 저편에 우리가 만들고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2.

 

평화시위, 비폭력 시민불복종, 간디, 마틴 루서 킹, 오큐파이(occupy), 오트포르(otpor), 사빠띠스따(Zapatistas), 에보 모랄레스, 아르헨티나 민중봉기, 우산혁명, 오렌지혁명, 튤립혁명, 장미혁명 등등…… 나는 일종의 혁명 마니아로 친구들에게 늘 시위나 혁명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친구들은 무슨 시위대가 쓰레기를 줍고 있냐, 차벽에 붙은 스티커는 왜 떼냐, 감정이입을 시위대에게 안 하고 경찰에게 하다니! 청와대로 돌격!! 따위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촛불 헌팅을 당했다고 했다. 종로3가에서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같이 시위하실래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시위가 이래서 되겠어? 친구가 따지듯 물었다. 시위가 문제가 아니라 ‘한남’이 문제야. 다른 친구가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10월말부터 12월까지 광화문 일대를 어슬렁거렸다.

 

이 과정에서 이화여대 시위는 하나의 상징이 됐는데, 그건 그들이 소녀시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 아니다. 이화여대는 폭력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운동권을 배제했고 이화여대 내부 사안과 떨어진 정치·사회 현안을 발언하지 못하게 했다. 느린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지도부 없는 만민공동회를 만들어 이화이언 같은 웹 커뮤니티나 카톡 단체창에서 의견을 공유하고 논의하고 결정했다. 오마이뉴스나 한겨레에서는 이화여대 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이화여대의 시위 방식에 대한 비판 기사를 여러번 실었다. 논지는 정치성이 표백된 시위에는 한계가 있다, 소수의 운동권을 배제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등이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운동권이 배제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권의 언어와 방식은 묘하게도 이 정권과 닮아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가 가진 뉘앙스와 메커니즘이 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화여대에서 운동권을 배제한 것은 운동권이 정권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의 언어와 방식이 사실은 구체제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아닐까. 운동권의 언어와 정권의 언어는 같은 체제에 복속한다. 그에 반해 이화여대의 언어는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이 새로운 방식에 권력은 대응할 방법을 잃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수십만건 조회를 기록하며 퍼져나가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물리적 폭력 없이 본관에 앉아 회의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데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점거가 지속되는 동안 이만건이 넘는 제보가 쏟아졌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정권의 치부가 드러났다. 어쩌면 우리는 200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우리가 느끼고 체감하고 사용하는 언어와 매체로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는 방법을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쉬운 예로 경찰이 이화여대 시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동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주동자가 없다면? 위계가 없으며, 주요한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현실정치와 연계해서 주장하는 단체가 없다면? 이 시위가 정말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참여자들의 주장을 일일이 모은 것이라면 권력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천명, 만명, 십만명을 모두 잡아갈 것인가.

 

물론 지금의 시위 방식이나 시위를 호명하는 방식이 모두 옳다는 건 아니다. 언론이 호들갑스럽게 좋아하는 ‘평화시위’는 시위의 힘에 제약을 가하고 시위에 대해 그릇된 인상을 심어준다. 시위는 혼란과 무질서에 기반을 둔 행위다. 시위는 폭력을 쓰지 않을 때조차 폭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의 폭력과 다르다. 다시 말해 비폭력시위의 폭력은 정권의 폭력과 대비됨으로서 힘을 획득한다. 비폭력시위의 폭력은 혼란과 무질서를 만들어낸다. 반면 정권의 폭력은 억압적인 질서와 안정을 도모한다. 질서와 안정은 권력의 언어다. 흥미로운 건 질서와 안정을 주장하는 정권은 내부적으로 완전한 혼란 상태, 아노미 상태로 오직 권력에 의한 위계로만 지탱되는 데 반해 무질서와 혼란을 통해 의견을 관철하는 시위대는 내부에 조금의 권력이나 위계 없이도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다는 점이다. 단순히 평화시위를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문제를 넘어선 곳에 질서와 무질서의 교차가 놓여 있다.

 

비폭력시위는 내부의 질서를 통해 외부의 무질서를 만들어낸다(교통을 마비시키고 통행을 방해하고 노동을 중단한다). 외부로 표출된 무질서는 억압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권력을 지탱하는 정권을 무너뜨린다. 그렇게 무너진 정권 위에 시민들의 새로운 질서가 유입되는 것이 혁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계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폭력/비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촛불집회나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안정과 질서, 평화에 대한 말들이다. 문제는 비폭력을 질서와 안정으로 연결시키는 태도이며 이를 평화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비폭력시위는 평화를 위해 나아가는 행위지 평화로운 행위가 아니다. ‘정국이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정해진 절차를 따르라’ 같은 말은 거짓된 질서를 강요하는 말에 불과하다. 시위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지금까지 늘 절차를 따라왔다. 오직 정권과 권력자들만이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지금 여기 혼란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만든 것이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 촛불집회와 이화여대 시위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줬다. 위계 없이 작동하고 구시대의 언어 없이 작동하는 새로운 언어. 이 언어가 언제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는 바뀌었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건 우리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러니 정국 안정이나 평화시위 같은 말은 믿지 말자.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질서정연하고 안정되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무질서로 무너지는 것이다.

 

3.

 

나는 201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글을 쓰고 있다. 탄핵은 가결됐고 헌재의 판결을 앞두고 있다. 광화문에서는 9차 촛불시위가 한창이고(사람들은 무려 9주째 주말을 반납하고 있다. 정부는 나중에 이를 보상해야 할 것이다) 덕수궁에서는 맞불 시위를 한다고 한다. 청문회는 5차까지 열렸고 보는 내내 인간의 지적 수준과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무한히 거듭되는 두가지 아포리즘. 1.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수전 손택) 2.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고 분노하라.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익숙해지고 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칼 맑스)

 

오늘 시위를 가야 할까. 박근혜정권 뒤에는 어떤 정권이 올까.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별게 아니다. 무상교육이나 기본소득, 검찰개혁이나 재벌해체 같은 구체적인 사안이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냥 상식적인 절차를 밟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박근혜나 최순실 등이 처벌을 받아도 한국은 나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림살이가 피게 될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서울의 교통체증이 나아지거나 택시를 잡을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될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국민연금을 받는 노년이 올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남녀평등이 실현될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국회의원들이 똑똑해질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고 내 책이 많이 팔릴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지난주에 산 19만원짜리 바지를 입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세일해서 19만원인 바지다). 광화문에서 책을 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전시를 구경하고 싶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파주에 사는 선배는 가족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가했고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잤다고 했다. 밤에는 온수풀에서 아이와 함께 놀았는데 실수로 바지에 핸드폰을 넣고 들어가는 바람에 손해가 막심하다고 말했다(정부는 이것도 보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호명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도 모르게 헬조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고 엄마의 생일이기도 하다. 시위 가는 길에 선물을 사야겠다. 아니, 선물 사러 가는 김에 시위도 갈까. 어쨌든 내가 원하는 건 둘 모두다.

 

정지돈 / 소설가

2017.1.4. ⓒ 창비주간논평  *이 글의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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