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오랜만에 찾은 짬뽕집 ..

원래 짜장면을 즐기던 나는 ... 배다리 용화반점과 부평 상하이짬뽕 때문에 .. 즐기게 되었다. ㅋㅋㅋ

그랬더니 ... 드뎌 어른이 됐데나 머래나 ...

 

사람들에게 쉬어가라고 테이블을 내어놓았다.

배다리는 쉴만한 곳이 없으면 없고, 많으면 많은 곳이지만 ... 사람들이 거의 앉지 않는다.

남의 가게 앞에 편안하게 앉기란 .. 물건을 샀을 경우를 제외하면 없는 듯 ...

 

구름 낀 오후의 하늘이 고즈넉하다.

하늘이 넓어서 좋은 마을 ..........

 

이녀석들 이름이 뭐라 했는데 모르겠다. 다들 자신들 집에는 크게 자라는데 여기는 왜 그러냐 한다.

꽃길이 왈 ... 같은 꽃에서 작은 종이라고 했다.  

 마을 사진관 간판이 보기좋게 낡아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응시 ... 벌써 지난 전시가 되었지만 ^^

꽤 센세이션 한 전시였다.

 

누드 크로키와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브래이지어의 화사한 가면

그리고 .. 실제 가슴을 뜬 작품들 ...............

 

우리 옆에 띠 갤러리가 공사중이었다. 곧 오픈 예정 ...

 막바지 공사 .............. 우리 갤러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일을 하다가 늦었다.

갤러리 문도 안닫고 있다가 마침 삼각대에 카메라가 퍼포먼스처럼 올려져 있어서 .. 생각난 김에 오래간만에 셀카를 찍어봤다.

 

멀리 토지문화원 관장님과 직원들이 배다리에 들렀다.

아벨샘이 모시고 오셔서 ... 커피를 내려드렸다. 원주로 돌아가셔서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전시를 보고 마을 사진을 보는 동안 ..  즐거우셨다는 안부를 .. 전해오셨다.

 

그사이 오대산 터덜터덜 걷기도 다녀오고 ..............

사람들이 앉아있는 뒤로 붉은 단풍나무가 먼저 물들어 .. 마치 하나씩 불꽃을 이고 있는 초 ..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거기에 사람이 있어서 ... 사람인 나로서는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듯 ........

동생이 영화정보고 출신이다. 전에는 영화여자실업고등학교였고, 동생은 관광과였다.

15년 후 호텔리어로서 지배인이 된 동생이 3년만에 다시 후배들을 위한 강연을 한다고 배다리에 왔다고 해서 촬영을 갔다.

 왁자지껄 .. 여고생들의 모습이 즐겁다.

 매일 버스를 타는 정류장에서 바라본 풍경. 얼마 남지않은 문방구 풍경이 매일매일 재미있다.

 

 

 

 

 

 

 

 

 

 

 

 

 

 

 

 

 

 

 

 

 

 

 

 

 

 

 

 

 

 

 

 

 

 

 

 

 

 

 

 

 

 

 

 

 

 

 

 

 

 

 

 

 

오늘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노란 은행잎이 달려가는 바람에 후두둑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지난 밤에는 좀 더워서 잠못이루긴 했지만 어느 새벽녘에는 추워서 이불을 꺼내 덮기도 했다. 작업실 창으로 시원 바람이 달려든 것도 벌써 몇 주 전이다.

그냥 가을에 읽을 시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가을시, 가을에 읽으면 좋은 시, 가을에 어울리는 시 ... 이렇게 따라간 인터넷 검색창에는 김초혜, 류시화 .. 그리고 김남주 시인의 이름이 놓인다. 시인의 이름을 쫒아가니 <이 가을에 나는>이라는 시에 '눈물을 좀 흘렸다'는 백기완 선생의 시상으로 시작된 글을 퍼담아본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사슬에 손발이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광주옥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도시 거리의 인파를 빠져나와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에서
숫돌에 낫을 갈아 나락을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에서
빙둘러 서서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는 아이들의 제방에서
내려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내려서 손발에서 허리에서 이 오라 풀고 이 사슬 풀고
내달리고 싶다 아이와 같이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내달리고 싶다 발목이 시도록 논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슴에 바람 받으며 숨이 차도록
가다가 목이 마르면
손으로 표주박을 만들어 샘물로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땅으로 웃자란 하얀 무우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나 나를 태운 차는 멈춰주지 않고
들판을 가로질러 역사의 강을 건넌다
갑오농민들이 관군과 크게 싸웠다는 황룡강을
여기서 이기고 양반들과 부호들을 이기고
장성갈재를 넘어 전주성을 넘보았다는
옛 쌈터의 고개를 나도 넘는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 되어.

                                                                                        김남주 http://myhome.naver.com/vgnews/siindle.htm


나는 박정희의 반공교육과 전두환-노태우의 군부정치,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보고 자랐다. 백마장 근처에서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그때 나는 부평여자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참교육 어쩌고 하던 때인데도 .. 우리 학교에는 그런 말 한마디 건네는 교사가 없었다. 참나 ....
마땅히 신문과 TV가 아니면 세상을 만날 수 없었고, 가난한 마을에 민중들이 신문을 보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드러난 세상의 이면을 만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세상은 너무 완벽했서 열여덟 여고생의 꿈이 깊은 숲에 작은 집 짓고, 텃밭 갈아 먹고살고, 시 쓰며, 난 치며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과 거칠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긴긴밤 이야기를 나누는 삶이였다.
그러나 세상속에 발을 딪자마자 진실을 가린 벽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너무 많은 거짓은 진실을, 사실을 접할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다.
온갖 미디어가 대기업과 낡은 수구보수파의 손에서 진실을 가리고 있는 요즘, 그래도 인터넷이란게 있어서 진실이 손아귀 속에 물처럼 흘러 사람들 사이에 실개천을 이룬다. 지난 9월 초까지 O3훈을 가리는 표적수사 곽노현, 안철수에 강호동까지 ... 그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한가위 밝은 달아래 넘쳐 흐른다.

이 가을, 바람 좋은 창가에 앉으니 시詩 한 수 읽으며 호젓이 여유를 부려보려 했는데 후두둑 떨어지던 노란 은행잎 저편으로 푸른 옷의 수인이 된 시인이 역사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너무 많은 고통의 언어들 반복되어 그러면 안되지만 .. 기어이 무뎌져가는 가슴이 부끄러울 뿐 .. 그저 고통스러웠으려니 그저 아프고 슬펐으려니 할 뿐인 마흔의 어린 백성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 다시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강's __ 오늘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노란 은행잎이 달려가는 바람에 후두둑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지난 밤에는 좀 더워서 잠못이루긴 했지만 어느 새벽녘에는 추워서 이불을 꺼내 덮기도 했다. 작업실 창으로 시원 바람이 달려든 것도 벌써 몇주전이다. 그냥 가을에 읽을 시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가을시, 가을에 읽으면 좋은 시, 가을에 어울리는 시 ... 이렇게 따라간 인터넷 검색창에는 김초혜, 류시화 .. 그리고 김남주 시인의 이름이 놓인다. 시인의 이름을 쫒아가니 <이 가을에 나는>이라는 시에 '눈물을 좀 흘렸다'는 백기완 선생의 시상으로 시작된 글을 퍼담아본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사슬에 손발이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광주옥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도시 거리의 인파를 빠져나와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에서
숫돌에 낫을 갈아 나락을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에서
빙둘러 서서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는 아이들의 제방에서
내려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내려서 손발에서 허리에서 이 오라 풀고 이 사슬 풀고
내달리고 싶다 아이와 같이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내달리고 싶다 발목이 시도록 논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슴에 바람 받으며 숨이 차도록
가다가 목이 마르면
손으로 표주박을 만들어 샘물로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땅으로 웃자란 하얀 무우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나 나를 태운 차는 멈춰주지 않고
들판을 가로질러 역사의 강을 건넌다
갑오농민들이 관군과 크게 싸웠다는 황룡강을
여기서 이기고 양반들과 부호들을 이기고
장성갈재를 넘어 전주성을 넘보았다는
옛 쌈터의 고개를 나도 넘는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 되어.


김남주
http://myhome.naver.com/vgnews/siindle.htm
 
1946년 전남 해남 출생. 1968년 전남대 영문과 입학.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9년째 복역중 1988년 12월 가석방조치로 출소. 1984년 첫시집 [鎭魂歌] 간행. 1987년 제2시집 [나의칼 나의피] 간행. 1988년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간행. 1989년 시선집 [사랑의 무기] 간행. 1989년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간행. 1991년 제 9회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음.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췌장암으로 별세.

이 닷컴의 시대에 닷컴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김남주 시인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봄이 깊어 갈수록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김남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박치음의 <산유화>를 듣는다. 굵은 저음에서 나오는 박치음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울림을 자아내는 듯하다.

김남주 시인은 1980년대 문학의 불이었다. 최근 신경림 시인이 창작과비평사 시집 통권 200권 돌파를 기념해 펴낸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는 엔솔로지의 제목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정신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김남주 시인은 1970년대의 김지하 시인이 그러하듯이 1980년대 문학의 뜨거운 상징이었다.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갔던 전사(戰士) 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 문단을 일깨운 민족 시인이다. 그러나……김남주를 기억하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옛 불은 꺼지고, 불씨가 언제 되살아날까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으니…….


젊은 정치인들의 광주 항쟁 추문(醜聞)화

지난 해 5월 20일, 민족시인 김남주기념사업회와 광주·전남작가회의 주최로 광주 항쟁 20주년을 맞아 광주 비엔날레공원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비(詩碑)가 제막되었다. 그때 나 역시 시비 제막식에 참여했는데, 화가 홍성담이 제작 총괄을 맡아 건립된 시비에는 대표작 「노래」가 새겨져 있었다. 양옆으로 대나무가 음각되어 있는 가운데, 약간 비스듬히 포즈를 취한 김남주 시인이 뭔가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은 자못 문인의 시비(詩碑)다운 향취가 물씬 풍겨났다. 여느 시비와는 다른 김남주 시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듯해 보기에 썩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주 항쟁이 일어난 후 성인식을 치르는 해에 시비가 건립되는 터라 시비 제막식의 의미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해프닝을 과연 엉뚱한 사건이었다고 치부할 수가 있을까. 갓 치른 4·13총선에서 당선된 젊은 정치인들이 망월동 묘지를 찾아 참배한 이후 이른바 술자리 파동이라는 유쾌하지 못한 사건을 일어켰다.

시비를 가리자는 뜻은 아니다. 그 사건을 보며 몇 가지 상념들이 스쳐 지났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980년 광주 항쟁의 정신과 더불어 1980년 광주 체험에서 비롯된 것들의 가치가 그러한 방식으로 망각되는가 하는 자괴감 섞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이른바 386세대라는 저널리즘이 상징 조작한 이미지와 바꿔! 열풍에 힘입어 정치권에 입문했을 터 아닌가? 그때 든 생각이 허울 좋은 386세대라는 말 대신에, 광주(光州) 세대라는 개념이 훨씬 더 제대로 된 세대 규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또 의례 행사처럼 치러지는 기념 행사에 대해 어느 시인은 쓴소리를 뱉었다. 항쟁 정신은 실종되고, 항쟁의 문화산업화만 남는 것 아닌가?

저항의 한 극단을 보였던 김남주의 시는 충격적인 시적 진술이 적지 않다. 가령, 「진혼가」를 비롯해 「학살」 연작시 그리고 「옥좌」 등의 옥중시는 서정시에 익숙한 독자로 하여금 당혹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김남주 시인의 시에 서려 있는 지독한 독기(毒氣)는 가위 원색적인 면마저 없지 않았다. 시와 궁합이 잘 맞지 않을 듯한 육두문자와 비속어가 날 것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김지하의 『오적』은 풍자와 해학이 있지만, 김남주의 시에는 잘못된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적대감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물론 두 시인이 구사한 시적 전략이 달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써 김남주 시인은 만해 한용운 ─ 이육사 시인을 잇는 한국 근대 옥중시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 「鎭魂歌」

김남주 시인은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컨추리(Country)풍의 마음 좋은 아저씨였다. 조금은 어리숙한 표정으로 입가에 웃음을 짓고는 하던 시인의 모습은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시와 사람이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인간적 신뢰감이 갔다. 솔직히 말해 작품의 명성에 비해 사람의 격(格)이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적잖이 보아야 했던 나로서는 김남주 시인의 모습은 참으로 이채로웠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은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대하며, 자신의 말만을 앞세우지 않고 까마득한 후배들의 의견도 귀에 담을 줄 알았다.


길은 그대 앞에 있는가

지난 해 나온 김남주 시인 추모 산문집 『내가 만난 김남주』(이룸, 2000)는 생전의 김남주 시인에 대한 다양한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아닐까 한다. 1990년대 강남 신사동에서 김남주 시인의 <한국문학예술학교> 강사 시절을 회고한 소설가 김남일은 모 탤런트와의 부르스마저 전혀 불온하지 않던 부르스였다고 회고한다. 나 역시 그 무렵에야 비로소 김남주 시인을 잠깐씩 보았다. 그런데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시절, 당시 소련 및 동구권의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시인은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나중에 시집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 「사상의 거처」 제2연


아!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심리 상태를 엿보게 된 것은 자못 우울한 일이었다. 이미, 시인은 옥중에서 발표한 시를 통해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길2」, 『나의 칼 나의 피』, 1988)라고 당당히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시인의 심사는 오죽했으랴. 그런 탓이었을까? 석방 이후 각종 재야 집회에서 시낭송을 통해 만인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시인의 사자후와도 같은 목소리에 뭔가 힘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얼마후 췌장암 진단을 받은 시인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짧고 굵은 생을 마감했다. 2월 16일, 민족시인 고 김남주 선생 민주사회장이 치러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다. 그리고 얼마후 문익환 목사도 생을 마감함으로써 한 시대가 갔다는 말이 실감나게 됐다.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표제시, 1995)

하루키류의 문학에서 자신의 문학적 친화감을 느끼는 풍토에서 시인은 이렇게 힘주어 말할지도 모른다. 제기랄! 별도 꺼지고, 노래가 사라진 지금, 차라리 내가 먼저 눈을 감겠다. 시인이라면 능히 그렇게 말하고도 남으리라는 생각이 턱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 장산곶매 백기완

 

 

 

 


이 오래된 마을에 미디어아트Media Art라니 ... 생뚱맞겠지만 이것은 오상석 작가가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가 장소기반의 인터렉티브아트를 한다며 전시를 하고 싶다고 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한점갤러리 입장에서는 장소기반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쏙 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놓여진 장치, 그리고 그것이 보여지는 영상속의 사진은 강이 제공한 마을사진 뿐이라서 좀 놀랬다. 뭐지?
영상 테스트 중인 오상석 작가

빛이 많이 들어오는 갤러리 특성때문에 센서 작동에 어려움이 있어서 다시 손을 봤다.


설명이란다. 헐 ... 딱딱한 언어 ... 딱딱한 그림. 어쩌라고 .. 모르는 건 묻는 게 최고다. 
한때 다큐멘터리영상을 제작한 사람으로서도 이해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인터렉티브 아트가 뭔가요? - 상호작용, 강물과 돌이 있을때 돌이 던져져 만들어지는 강물의 변화와 돌이 물속으로 빠지는 서로의 간섭을 통한 새로운 현상 ... 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흠 .. TV라는 것을 통해 영상은 익숙하다. 컴퓨터라는 것을 통해 나름 모니터도 익숙하고 .. 거기에 센서를 통해 비춰지는 카메라나 나 개인의 모습도 나름 익숙한 사람에게는 익숙하다. 각각의 요소가 한 공간- 한점 갤러리-에서 만나지고, 작용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고 그것의 유발을 통해 이야기 한다고 나름 정리르 해보았다. 아 ....


힘들어 했더니 .. 작품 설명을 주셨다. 
헉, 더 어렵다...

왜 이런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
상호간섭이 주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움직임을 사람들이 읽어내기는 하는지 ...
.....
여러번의 질문과 여러번의 답 속에 조금 이해가 됬다. 정말 이해가 된걸까? ... 잘 모르겠다.
다만 여러가지 요소들이 현재 이곳에 있고, 그 각자의 개성과 성질들이 어우러져 있는 자체를 이해해라.
그려면 그것을 통해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 라는 질문이다.

자, 이제 내 차례다.

갤러리 2층에 사시는 할머니가 나와계시길래 모셔서 보시라 했다.

"재미나구만 .." 하셨다. 할머니가 보신 건 역시 영상속의 마을 풍경이었다. 그리고 마커를 카메라에 비추도록 했지만 할머니는 커다란 화면속 마을만 보셨다. "할머니, 여기-모니터-속에도 할머니가 나와요~" 했더니 그제야 .. "그렇구만 .. 작아서 이제야 봤네... 저것(빔이 비춘 커다란 영상)만 봤지."

"할머니 이게 ... (ㅡ..........ㅡ;) ... 아, 그러니까 ... 저기(스크린)에 이 동네 사진이 있잖아요. 여기 할머니가 있구 .. 할머니를 찍은 사진이 여기 모니터에도 있고, ... 사람들이 하나만 자꾸 보잖아. 같이 있는 것들을 못보고 자꾸 다투고 그러잖아요. 각자가 다 있는데 자기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생각들도 들으면서 생각해야 올바른 생각을 하지 않겠나 ...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래요. (휴~~ ^-^;)"

"재미나 ... 근데 사람들은 와?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할텐데 ..."
"아, ... 예.... 아직 ... "
"수고해요~~"
"예, 들어가세요..."



우리들은 익숙한 도구들이 다른 방식으로 쓰이는 데 낯설어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낯선 방식으로 말을 거는 도구들이 이해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낙타사막'처럼 .. 툭 튀어나온 것이 갑자기 거는 말을 이해하기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고 ... 문화예술이 말 거는 방식이 쉬울 수는 없다. 어떤 경험이 있을때 갑자기 쉬워지기도 하고, 쉬워지지 않더라도 이해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오래된 동네, 작은 갤러리에 어디서 들어보기는 했으나 낯설을 수 밖에 없는 예술이 날 긴장시킨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이해되기 어렵다. 이야기 하는 방식도 그래서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

삶을 긴장시키는 경험, 한 번 해보지 않으실래요?


초가을 햇살인지 늦여름 더위인지 창영학교며 영화학교 아이들이 서둘러 귀가하는 토요일 오후 ... 
햇살이 지루해질 무렵까지 한점갤러리에는 오상석 작가가 다음 전시 준비로 바쁜 와중에 
손님들의 발걸음이 적지 않았다.


뭐좀 사올까 묻는 지인에게 시원한 맥주와 치즈를 부탁했더니 한아름이다.
덕분에 지나가는 손님께 시원한 맥주와 치즈도 대접도 하고

 

얼마 간의 창영동 배다리 풍경이 담긴 영상이 작가의 손을 거쳐 뭉게뭉게 피어나고 사라진다. 전철소리와 골목길 소리, 갈매기와 파도소리에 우각로 거리의 이런저런 소리들이 마치 하나인양 퍼져나간다.
당연하고도 신기한 풍경이 잠시 펼쳐진다.


다인이 어디 가자고 했는데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배다리를 지나 경동사거리, 신포문화의 거리 ... 휘리릭 .. 아트플랫폼 언저리 ...

차를 두고 계단을 오르니 저만치 아는 얼굴들이 손을 흔든다.

3년전 어찌어찌 사게 된 집을 3년동안 돈을 모을 때마다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하면서  

이제야 완성해서 오픈한 곳이란다.

낙타사막 ...

공자상이 있는 계단 옆에 집이라 일상으로는 차와 음료를 팔고, 단체 등의 회의 장소나 모임장소로 예약제로 운영할꺼란다.

계단으로 이어진 2층집인데 계단에서 보기에는 둘다 일층이다. ^^

 

1층은 주방에 낯선 인쇄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1층은 멀리 항구가 보이는 창이 있고,

넓직한 공간에 스크린도 걸려있다.

 

카나페와 닭가슴살 구이, 몇 가지 부침과 연어, 허브를 곁들인 샐러드, 잡채 등등 .. 맛깔스런 음식들이 줄지어 나오고 

지인들도 끊임없이 들고 나며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한점갤러리 첫 전시를 가졌던 박선영님과 네번째 전시를 하셨던 김창기 님도 반갑게 만났다. 

 

지난 3년이 어떤 시간이었을지는 저는 모르는데 문득 ... g.o.d의 <어머니께>가 생각났다.

열심히 노력해 만든 작은 가게, 늦은 밤까지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가 오갔다는, 자정이 다 되서야 사람들이 돌아갔다는 ... 그 구절 ..

한 밤에는 잘 쉬셨는지 ... 어쩌면 하룻밤 꼬박새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트플랫폼에서 크리스탈큐브에서 전시중인 <들물, 인천의 포구를 말하다>-이마고 네번째 기획사진전을 보러갔다.

작업실을 청소하다가 보니

오래된 이야기들이 속속 튀어나온다.

대학시절 친구들 얼굴

영화공부하던 시절 모습

인권영화제 풍경

등등 ..

거기에 중간중간 나의 메모나 일기들, 미처 보내지 못한 편지도 있고, 나에게 전해진 편지들, 쪽지들도 반갑다.

잠깐 스쳐보았을 뿐인데 새롭게 읽혀져 몇칠 뇌리에 남았던 글귀 ...

 

누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옴은 당신과 친해지고 싶음입니다.

누가 당신을 보고 허둥댐은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음입니다.

누가 당신을 따갑게 바라봄은 당신에게 무언가 고백하고 싶음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장난치고 농담함은 당신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싫음입니다.

누가 당신의 뒷모습이 안보일때까지 바라봄은 당신이 곁에 있어주길 바람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유없이 '고맙다'라는 말을 자주함은 당신을 사랑함입니다.

누가 당신의 곁을 냉정하게 지나감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함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지난 시간을 들춘다면 당신을 보내기 위함입니다.

누가 당신의 옆모습을 지극히 바라봄은 사랑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원망함입니다.

누가 당신의 이마에 조용히 입맞춤함은 당신을 보내야 함을 인정함입니다.   

누가 당신을 보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당신을 잊기 싫으나 잊어야 함을 감추는것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시를 적어보냄은 당신의 모든것을 깊히 사랑함입니다.

 

그렇게 많이 지난날을 이야기 하고 이야기 하는 내가 바보같았는데 ..

그것은 내가 그것들을 떠나기 위함이라는 것을 .. 떠나는 방법중에 하나라고 .. 그러니까 .. 괜찮다고 해 주는 것 같다.

많이 했지만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 .. 하지만 하다가 내가 지치는 이야기 .. 

그래서 그만하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또 하게 되는 이야기 ...  

삶이란 게 이어져 있어 .. 뚝! 끊어내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을 뿐 ... 

난, 그저 '오늘'을 산다.

지치는데로, 낯설은데로, 익숙한데로, 지루한데로, 뻔한데로, 짜증나는데로, 즐거운데로, ... 

때때로 그게 싫고, 때때로 당연하다 싶기도 하고, 때때로 벗어나고 싶은 .. 다른 이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게 ...

오늘은 나에게서 낯설어지고 싶다.

 

 

 

 

 

 

창영동에 그림 그리는 여자 - 안미현

어린시절 그림 잘 그리는 소녀로 유명했다는 이웃집 할머니의 말씀.

그래서 결혼을 늦게 할 줄 알았는데 빨리하더라. 그러더니 이번에 이사왔다고 하셨다.

그런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와 집을 얻고, 그 집의 작은 벽에 그린 첫 그림

 

"이장희,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때 ..."

 

그녀의 여동생과 어린 아들.

그녀가 이장희 그림을 그리던 날 .. 가끔 친정에 놀러왔던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찍은 기억이 났다.

  

 

쌩쌩 ...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

귀염둥이 개구장이 아가 .. 녀석 이름을 까먹었군여 .. 미안해라 ...

 

내리막을 그렇게 거침없이 달리더니 .. 기어이 ㅡ.ㅡ;;  

 

 

금새 씽글생글!!

 

오랜만에 좁은 골목을 걸어보니 .. 그녀가 집 뒤에 그린 그림이 좁은 골목을 화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그림 ... ㅎㅎㅎ ...

 

 

이 그림이 그려진 골목 풍경입니다.

 

 

골목길은 그렇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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